肖古王 功績碑(초고왕 공적비)
正始武侵 宮 百殊固諫 慾鎩
정시(正始, A.D.240~A.D.248)의 전쟁 중에 궁(宮, 동천왕)은 백수(百殊, 백제왕)가 간곡히 간하였으나, (긴) 창으로 찔러 죽이려 하였다.
還亡命 存其固都 誠不耐城
망명(亡命)에서 돌아와 단단한 그 도읍(환도성)이 진실로 불내성(不耐城, 단단하지 못한 성)이 됨을 가엾이 여겼다.
≪견해≫ 존(存)은 있다, 안부를 묻다, 가엾이 여기다의 뜻
遣訖繼 創邑都 護殊百位麓酋
흘계(訖繼)를 보내어 읍도(邑都, 도시)를 새로 만들게 하고, (고려)수(殊, 왕)와 백위(百位, 백관)와 녹추(麓酋, 산기슭의 우두머리, 仙徒의 長)를 지키도록 하였다.
(委+台)七年十月 繼明王 封假寧東國吏 玄菟
위(魏) 정시(正始) 7년(A.D.246) 10월 명왕(明王, 유리명왕)의 뜻을 이어, (동천왕이) 가영동국리(假寧東國吏, 假는 임시의 뜻임)에 봉(封)하여
≪견해≫ (委+台)는 魏 正始의 오기(誤記)로 봄
沸流安泰 天歲禮樂
현토(玄菟)와 비류(沸流)를 편안하고 넉넉하게 하고, 천세(天歲, 오랜 세월)에 예악(禮樂)이 미치고
世百濟高麗殊 代天府祖鄒牟王 以城民之意
세세대로 백제(百濟)와 고(구)려 수(殊, 왕)는 성민(城民, 백성)의 뜻으로 천부(天府)의 조상 추모왕(鄒牟王)을 대신하여 왔다.
≪견해≫ 백제를 고구려보다 먼저 기록한 것은 비문의 기록자가 백제라는 정황적 근거다.
秋八月 步騎二千戰儉 䚂峴岭 攻數千里 降士數千
(동년 A.D.246) 가을 8월 보기(步騎, 보병과 기병) 2천으로 관구검(儉)과 혁현령(䚂峴岭)에서 싸워, 수천 리를 다스리고, 항복한 병사가 수천 명이었다.
≪견해≫ 삼국사기 백제본기 A.D.246년 8월의 기사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國宮前臣 高伏儉鎩 城北王旨記
나라(國, 백제는 천자국을 자칭하지 않는 듯, 고구려)의 궁(宮, 동천왕)의 옛 신하 고복검(高伏儉)이 성(城)의 북쪽에 왕의 뜻을 창으로 새기어 기록하였다.
天地之中 銘存永世 隨登愿
천지(天地)중의 금석에 새기어 영세도록 존재하게 하여 추종하여 따르고 (제사에) 올리기를 바란다.
此碑永立 以傳百世 紹示百殊城民
이 비문을 오래도록 세워 백세(百世)에 전(傳)하여, 계속하여 백수(百殊)의 성민(城民)에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