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삶은 곧 죽음을 의미하며 훌륭하게 산다는 것은 훌륭하게 죽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훌륭한 죽음은 유한한 인간에게 부여된 또 하나의 소명이 아닐까. 한 사람의 덕망은 단지 계급이나 부(副)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해왔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 아쉽게도 세상은 이와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돈과 계급 앞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대중의 길을 벗어나 '좁은 문'을 향해 가는 이의 뒷모습은 그래서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일흔 두 살의 정창근씨를 만나기 위해 안동의 한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빈 손으로 찾기가 무안해 인근 꽃가게에서 걸음을 멈췄다. 길을 찾아 헤매는 기자에게 꽃가게 주인이 길잡이를 자처했다. "안동 사람 중에 그 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병원에서 마주친 정창근씨는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쳤을 법한 평범한 할아버지 인상이다. 다른 점이라면 의사 가운을 걸치고 환자를 진료하고 있을 뿐. 가운을 벗고 정 씨가 손수 운전을 해서 기자를 안내한 곳은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회복지법인 안동시온재단.
서후면 이송천리 77-2번지. 그가 운영하는 이비인후과에서 자동차로 불과 10여분 거리에 있는 복지재단으로 가는 길 내내 정 씨는 자식 자랑하는 아비처럼 복지원생들 자랑을 늘어놓았다. "손재주가 얼마나 좋은지들 신체가 남보다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일 할 때는 다들 프로에요, 프로."
전 재산 한센환자 재활에 투척..노력봉사도 함께안동시온재단은 3개의 생활보호시설과 2개의 근로시설, 재단 운영자금 마련을 위한 복지사업장을 갖추고 있다. 특이한 점은 재가(在家) 장애인을 위한 근로시설(인교보호작업장)을 통해 노동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는 것. 장애인이라고 보호하는 데만 급급하면 1년,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으로 머물지만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게 된다면 희망을 말할 수 있다는 게 정 씨의 신념이다.
97년 안동시온재단(당시 안동재활원)은 지금의 이송천리로 이전하면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 직전으로 몰렸다. 결국 정 씨가 재단 관계자들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부채 22억원을 자비로 청산하고 재단을 인수했다. 정 씨는 이미 사회복지법인 안동 성좌원 원장직을 맡고 있던 상황이었다. 흔히 말하는 재벌도 아니고 정 씨가 2개의 비영리법인을 맡아 재산을 환원한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지만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성좌원은 소록도를 제외하고는 뭍에 있는 한센병력자촌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한센병 환자들과의 인연은 40여년 의사 생활과 함께 시작됐다. 대구 동산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로 근무하면서 동료 의사들과 함께 애락원을 찾아 무료 진료를 했다. 안동에서 이비인후과를 개원한 이후로는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는 성좌원 한센병 환자들을 꺼리는 일반 환자들이 많았다. 평생의 한(恨)인 한센병 자체도 고통스럽지만 정작 이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망가진 몸보다 상처받는 마음이었다. 정 씨는 병원으로 찾아오기 어려워하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금요일마다 직접 성좌원으로 방진을 가게 됐다. 15년간 방진으로 받은 급료는 성좌원 건물 증축에 내놓았다.
"성좌원 식구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특히 낙후된 거주 시설로 인한 불편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생활이었죠. 방문을 열면 1미터 앞에 돼지우리가 있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 얘기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 예컨데 따뜻한 물로 샤워한 번 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니까요."
2003년 성좌원에는 원생들을 위해 정 씨의 숙원이었던 저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현대화 작업의 일환이었다.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직접 만나 눈물로 설득한 결과였다. 성좌원 가족들의 평균 연령은 75세를 넘어선다. 이 중 56%가 1ㆍ2급 중증 장애를 갖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일찍 좋은 환경을 만들어 드렸어야 하는데..." 주거 환경은 개선됐지만 너무 긴 시간을 힘겹게 보내고 인생의 황혼을 맞은 분들을 생각하면 마냥 가슴이 아리다.
정 씨는 84년 성좌원 원장으로 취임한 후 급여 일체를 성좌원에 재투자하고 30년 째 무임금으로 봉사하고 있다. 불우이웃, 특히 복지시설 생활자들을 위한 무료 치료는 70년 이래 지금까지 37년간 지속하고 있다. 정 씨를 '외조'하기 위해 부인 조선자씨 역시 팔을 걷어 붙였다. 늦은 나이지만 사회복지전문대학을 야간으로 다니며 안동시온재단 운영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정 씨는 힘든 일을 자처하는 평범치 않은 남편을 이해해준 부인 조선자씨를 '마더 테레사'라고 추켜 세운다. 긴 시간 같은 곳을 보고 함께 해 준 고마움이 집약된 단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라"는 부모님 가르침 실천 "물질적으로 지금 제가 부자는 아니죠. 부동산이나 자산은 모두 재단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처분했고 그나마 예산 부족으로 넉넉치 못한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물질적 안일을 포기한 대신 얻은 행복이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값집니다. 좋은 일을 하면서 좋은 분들을 만났고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얻고 있어요. 사람은 태어날 때 빈 손으로 세상에 나오죠. 그 후로 긴 시간, 빈 손을 채우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채워진 손을 움켜쥔 채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죠. 채운 만큼 비우는 것, 어렵지만 종국에는 가야할 길이죠."
정 씨의 부모님은 60여년 전 대구에서 포목상을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웠지만 이웃 간에는 콩 한 쪽도 나눠먹던 시절이었다. 이렇다 할 복지재단도 없고 자선사업이 활성화되지도 않았지만 정 씨의 부모님은 절박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었다. 남몰래 이웃의 빚을 갚아주기도, 빚을 탕감해준 것도 여러번이었다.
"그 시절을 누가 좋게 기억하겠습니까? 하지만 물질적으로 힘들었어도 마음만은 지금보다 덜 각박했던 세상이었죠. 굳이 학교에서 정규교육을 통해 배우지 않았어도 체득적으로 정(情)과 나눔을 실천했으니까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자녀들이 혹여 서운해 하지는 않았을까. 수 많은 부자들이 자신이 일군 부를 자녀에게 대물림하기 위해 탈세와 절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게 현실이다.
"복지재단과 한센병력자촌을 맡으면서 느낀 행복 중 하나는 자녀들의 지지입니다. 어느 날 그러더군요. 아버지가 하는 일이 자랑스럽고 진심으로 존경한다고요.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자녀에게 들을 수 있는 가장 가슴 벅찬 말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가 하는 일을 믿고, 돕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저 예쁠 따름이죠."
부전자전=자녀들도 나눔에 적극..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정 씨가 인생이라는 농사에서 풍성한 가을겆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남2녀, 자식 농사 역시 만선(滿船)이다. 목사인 맏아들은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둘째 아들은 컴퓨터공학 박사 과정 중이다. 치과의사인 맏사위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재단 일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도와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자성한 자녀들이 종교인으로, 공부하는 학생으로, 정 씨처럼 의사로,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을 지켜보며 정 씨는 자식에게 남겨줄 수 있는 것이 물질적 부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질은 유한하지만 정신은 무한합니다. 제가 아무리 큰 부를 이뤄 자식에게 물려준 들 그게 언제까지 대물림될 수 있을까요. 돈, 명예를 떠나서 자녀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것은 본(本)이 되는 모습입니다. 자녀 교육이라는 게 따로 있나요. 내가 걷는 길을 내 자녀가 그대로 걸어도 후회가 없도록, 자녀에게 기대하는 삶을 스스로 실천해 보이면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삼십 분 후에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마지막 삼십분 동안 무엇을 할까. 100을 채우지 못한 99의 재산에 아쉬워할까, 지나간 삶과 앞으로 마주치게 될 미지의 세계를 궁구하게 될까. 이미 우리는 이 어리석은 질문의 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삼십분이 아닌 오십년, 칠십년이라는 현실 앞에서 어리석은 답을 택하고 있을 뿐.
죽은 사람이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통장 잔고, 재산세 내역으로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한다면 정창근씨는 마이너스 인생을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누가 그의 삶을 초라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직업이,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향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면 지갑의 두툼함에 상관없이 걸음마다 당당함이 베어날 것이다.
◇정창근 원장 약력1947~1953 대구 계성중ㆍ고등학교 졸업
1953~1959 경북대 의대 졸업, 동 대학원 의학박사(1971)
1959~1990 대구동산병원, 원주121후송병원, 안동성소병원근무(안ㆍ이비인후과 과장)
1970~현재 안동 정창근이비인후과 원장
1984~현재 사회복지법인 안동성좌원 원장
1998~1999 국제로타리 제3630지구 총재
2000~현재 사회복지법인 안동시온재단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