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군님,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증 언 자 : 김인원(남)
생년월일 : 1951. 1. 9(당시 나이 30세)
직 업 : 대학생(현재 사업)
조사일시 : 1989. 6
개 요
조선대학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김대중 씨를 만났다는 사실로 구속되었다. 구형 2년,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나 현재 고 이철규 살인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위원활동을 하고 있다.
구두닦이 생활
빈한한 집에서 태어난 내가 조선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진학한 것은 1971년의 일이다. 대학을 진학하기 전부터 나는 시골에서 생활하면서 농업, 농민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마침 4-H 서클모임이 있어 그곳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4-H 활동을 하던 중, 4-H 호남지구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그 과정에 이우재 교수가 이끄는 크리스찬아카데미 계에서 실시하는 교육에 2회 정도 참여하여 연수를 받았다.
그런데 그러한 모임들이 소위 좌경으로 몰려 경찰의 추적대상이 되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는 그곳을 나왔다.
가정형편도 매우 어려워 결국 학교를 휴학하고 군에 입대하였다.
1977년 제대 후 수박농사를 하여 그 수익금으로 공부를 하기 위하여 다시 광주로 나왔다. 광주에서 내가 들어간 곳이 직업소년원이었다.
처음 그곳을 들어가서는 도서실을 이용하여 공부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소년원 원장은 소년원의 구두닦이 아이들을 공부 좀 시켜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원장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어 구두닦이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소년원에는 이미 전남대학교의 한 서클단체가 와서 어린 아이들을 지도해 주고 있었다.
나는 그곳의 생활을 하게 되면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좀더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들이 힘들게 일하는 어려움을 함께 일로 극복해 내며 부대끼는 방법이 좋을 것 같았다. 나 역시 경제적으로 조금은 더 편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고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구두닦이 장소는 주로 YMCA 앞 도로와 조흥은행 앞, 무등극장 주변, 제일극장 부근 등을 돌아다니며 구두닦이 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그러자 아이들과의 어려움도 쉽게 극복이 되었고 경제적인 생활도 조금은 나아졌다. 구두닦이 생활을 계속하면서 다시 복학하여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
그러던 중 조선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몇몇 사람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들과는 특별한 이야기들을 나누지는 않았지만 길에서 지나칠 때면 생활 속의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1980년 봄 조선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서클연합회 주최로 총학생회 부활에 관한 공청회를 하게 되었다. 나는 잠시 그곳에 서서 구경을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갑작스레 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하고 있던 이우정 씨 등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내게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활동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권유하였다. 처음에는 정중하게 그들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러나 몇 차례 거듭하여 나를 찾아와 부탁을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백범 김구 선생의 말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대한독립을 위해서라면 임시정부의 문지기로 있어도 좋다." 는 말을 되새기며, "학원자율화를 위해서 구두닦이라도 필요하다면 함께 해보겠노라." 고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결국 나는 조선대학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조선대학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의 활동은 주로 복학생 위주로 운영되었고, 부위원장으로는 송찬식 씨 그리고 위원으로는 이우정, 이경, 유재도, 양희승, 구교성, 한국재, 김대홍 등이 함께 활동하였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조선대학교보다 먼저 결성된 전남대학교에서는 학내 민주화 싸움을 하면서 어용교수 문제가 두드러지게 확산되는 것을 보았다. 특히 전남대학교 복적생을 중심으로 '어용교수 백서'가 나왔을 때에는 조선대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에서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전남대의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이끌어가는 내용을 보게 되었을 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도 무척 고민되었다. 왜냐하면 전남대학교에서는 어용교수 퇴진문제에 대한 싸움을 하기 전 사전에 과학적인 근거들을 파악하여 철저하게 준비를 한 후 싸움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선대에서는 그냥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만 어용교수에 대한 언급보다는 현재 조선대학교의 중요문제로 무능교수와 폭력교수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5.3 사건
때마침 조선대 체육학과 박금자(무용교수) 교수가 부당하게 해직되었다는 문제가 생기면서 본격적인 학원자율화투쟁이 추진되었다.
조선대학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는 첫째, 박철웅의 비리를 집중적으로 폭로하면서 박철웅 퇴진투쟁을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 둘째는 폭력교수와 무능교수의 고발과 퇴진을 요구하면서 전개해 나간다는 것 두 가지였다.
전남대학교의 경우는 어용교수에 대한 규정이 명확하게 설정되었고 자료 준비를 철저히 해놓은 상태여서 학생들의 많은 호응을 받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특별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일단 폭력교수 척결을 먼저 해나가기로 했다. 각 단과대학에서 계속적으로 제보가 들어와 충분한 자료를 갖게 되기도 했다.
어용교수는 일단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발언을 했다거나 박철웅을 보위 보좌한 행위를 한 교수, 학생들을 사찰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교수들로 규정하면서 경계성의 대자보를 부착시켰다.
또한 조선대학교에서는 그때까지도 총학생회 체제가 부활되지 못하였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에서는 총학생회의 부활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총학생회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처음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난 후 학도호국단 간부들과 학생식당에서 회동하여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의 활동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문맥 작업을 하던 도중 타협이 되지 않아 우리는 대자보를 통하여 요구사항을 전했다.
또한 대자보를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학내민주화 투쟁의 힘을 발휘시키도록 지도하였다. 차차 각 단과대학별로 선전활동(유인물, 대자보)을 하면서 실질적인 조선대의 중심세력이 되어 이중 싸움을 지도하게 되었다.
매일 집회가 준비되었고 그 대표적인 사건이 5·3사건이었다.
5월 3일 종합운동장에서 집회를 갖고 집회장에 나와 있던 박철웅 총장을 모시고 도서관 6층에서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다.
그 무렵 도서관 건물은 5월 3일 이전부터 폭력교수, 어용교수 물러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단식농성을 하던 농성장이기도 했다.
종합운동장에서 총장을 모시고 도서관 6층으로 올라갔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활발한 대화를 하려고 할 찰나였다. 체육대학 폭력학생들과 박철웅을 보위 보좌하는 일부 무능, 폭력교수들이 시내 깡패들을 동원하여 소위 '총장 구출작전'이라는 명목 아래 도서관 6층을 습격했다. 그들은 우리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총장 감금이라고 날조한 것이었다.
이때 시내 깡패들의 대표적 인물이 신00이었다. 그는 구두닦이를 같이 하면서 알고 지냈던 사람이었는데 시내 깡패들을 동원시키고 깡패들의 우두머리로 활동을 하였다.
그날은 심한 몸싸움이 있었고 깡패들이 휘두른 각목 등에 의해 많은 학우들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체육학과 폭력학생들과 신00을 비롯한 시내 깡패들의 총장 구출작전은 성공을 거두고 우리 학우들은 많은 부상을 당하게 되자 나의 무능력이 한스럽게 느껴졌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 사퇴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학원민주화 투쟁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점점 더 자신감을 잃어갔고 능력의 부족을 느끼게 되었다.
더군다나 조선대학교는 체계가 조직적으로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고 민주화 물결에 발맞춰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였지만 통제도 제대로 되지 않은 실정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유소영이라는 여학생이 찾아와 내게 어용이 아니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무척이나 당황하면서도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모든 문제해결을 순리적으로만 하자고 했는데 그러한 말들이 다른 학우들에게는 그런 식의 오해를 낳은 것 같았다. 또 일부 학생들은 지금의 학내민주화투쟁을 사회민주화 투쟁으로 방향이 바꿔져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학생들의 요구사항에 철저하게 응해 나갈 만큼 나의 능력이 뛰어나지는 못했다. 유소영의 질문과 함께 나는 심한 자책감과 직책의 부족함을 느끼고 사퇴할 것을 생각했다.
내가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 위원장직을 사퇴한 것은 총장실 점거농성이 있던 날이었다.
조선대학교 본관 앞에서 박철웅 화형식을 하고 총장실을 점거하여 집기류를 밖으로 내던졌다. 그러는 과정에서 태극기와 교기가 함께 불에 탔다.
태극기를 위에서 아래를 보고 받으라고 고함을 치면서 던졌는데 밑에서 받지 못하여 불위에 그냥 떨어져버린 것이었다.
태우려는 의도가 없었는데 태극기가 그렇게 되자 눈물이 나왔다. 그 과정을 보면서 그것 역시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나의 무능력을 통감하면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사표는 수리되지 않았고 그동안의 공백기간은 부위원장 송찬식 씨가 계속해서 일을 맡아 했다.
김대중 씨를 만나고
5월 14일 이전 김대중 씨를 만나러 갈 기회가 생겼다. 자세한 날짜는 기억에 없고 다만 김대중 씨측에서 학생들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함께 간 것이었다. 관광버스 한 대를 구하여 약 38명이 함께 올라가게 되었다. 그중에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구교성 씨도 있었고 김대중 씨 비서관들도 몇 명 끼여 있었다.
나는 서울로 출발하기 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러자 박관현은 바빠서 못 올라간다는 말과 김대중 씨만 만나지 말고 김영삼, 김종필도 함께 만나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우리는 1인당 5천원씩 거출하여 광주은행 뒤편 세종다방 앞에서 삼익관광버스 편으로 출발하였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던 중 나는 차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우리가 그래도 김대중 씨를 만나러 가는데 아무런 대안 없이 가는 것보다는 뭔가 목적의식을 갖고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내가 나누어주는 이 백지에 김대중 씨에게 질문할 내용을 써서 저에게 주십시오."
모두들 그게 좋겠다며 백지 위에 자기의 생각들을 열심히 적었다.
그들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보니 대강 이러했다.
1. 10·26사태가 우리에게 준 역사적 교훈은 무엇인가?
2. 군부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3. 박정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4. 농민과 근로자 자녀들의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5. 우리 민족의 뿌리가 설 수 있는 민족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6. 통일을 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겠는가?
7. 여성문제에 대해서 한말씀 해주십시오.
8. 현재 만연된 정부에 대한 불신풍조는 어디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하며 그 극복대안은 무엇이겠는가?
그날 밤 늦게 도착하여 보니 김대중 씨는 계시지 않았다. 그들의 배려로 마포 근처에 있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다음날, 김대중 씨를 만나게 되었다. 김대중 씨 옆에는 이필선 씨가 앉아 있기도 했다. 우연히도 내가 학생대표로 의자에 혼자 앉고 나머지 학생들은 김대중 씨 앞 쇼파에 앉거나 그 뒤로 서 있었다.
먼저 내가 김대중 씨에게 인사말을 하였다.
"옛말에 가정이 어려우면 현명한 처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현명한 재상이 생각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김대중 씨를 재상으로 생각하고 이곳까지 올라와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인사말이 끝나고 일문일답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통일문제에 대해 우리측 학생이 묻는 말에 김대중 씨는 대답했다.
"평양에서 개성으로 달리는 기차와 서울에서 부산으로 달리고 있는 기차의 앞머리를 내가 서울에서 개성으로 돌려놓을 테니 여기 있는 여러분들은 밀고 가십시오."
박정희에 대한 생각은 어떠냐고 묻는 질문에,
"다 싫어하지만 딱 한 가지 우리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신념을 심어준 것은 좋았다."
고 답변했다.
군부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서 있던 수행비서가 말을 가로막아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회담이 끝난 후 밖으로 나와서 김대중 씨 자택에서 기념으로 사진촬영을 했다. 사진 촬영이 끝나고 다시 관광버스를 타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온 뒤에 해산하였다. 나는 이필선 씨의 승용차를 타고 국회의사당까지 왔다. 내가 승용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찰나 "김동지는 앞으로 행동을 조심히 하라"고 이필선 씨가 당부했다.
시체 2구를 보려고
그 이후 나는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와 구두닦이를 하며 학교생활을 하였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도 사직한 뒤였지만 학내의 분위기와 시내의 분위기는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5월 14일부터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지켜보았다. 엄청나게 많은 시민과 학생들은 15일 오후에도 도청 앞 분수대 주변을 가득 메웠다.
그날은 조선대학교 서클연합회 회장이었던 이곤섭 씨가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5월 18일 아침 YMCA 앞으로 구두를 닦기 위해 나갔다. 오전 10시경으로 기억되는데, 전일빌딩 앞에서 공수부대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수부대들은 지나가는 시민들과 학생들을 잡아 무자비하게 곤봉으로 내리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스리쿼터 종류의 차를 타고 다녔는데 15-16명이 1개 분대가 되어 3-5명씩 조를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5월 19일 오후 대한극장 안에서 시체 2구가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갔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은 이미 시민들, 학생들과 공수부대원들간에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헬기 1대가 저공으로 선회하고 있었고 소방서 앞에는 공수부대원 50여 명이 시민, 학생들을 진압하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은 대부분 착검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돌을 몇 개 던지고 있는 순간 옆 골목에서 공수부대들이 갑자기 쏟아져나오면서 시민들을 쫓았다. 시민, 학생들은 순식간에 밀린 상황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나는 가드레일이 처진 곳에 밀려 있다가 가드레일이 넘어지면서 나도 넘어져 부상을 당했다. 부상을 당한 줄도 모르고 사정없이 뛰어 어느 집 옥상에서 숨어 있다가 한참 후 밖이 조용해지자 집으로 들어왔다.
빨갱이가 아닙니다
21일은 화정동 잿등 부근 처가에서 하룻밤을 잤다. 결혼은 아직 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밖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장인 되시는 분과 함께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일찍 송정리에 있는 집을 가기 위해 처가에서 나왔다. 잿등 부근에는 20여 대의 군용트럭과 지프차 1대가 서 있었다.
권총을 찬 육군 대령이 부하 2명에게 전방을 정찰하라고 명령했다. 주위에 모여 있던 많은 주민들이 만류하고 있었고 보다 못해 내가 나서서 육군 대령에게 이야기했다.
"장군님,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장군님께서도 지금 보시듯이 광주는 난리가 아닙니다. 이런 상황하에 장군님의 병력이 광주시내로 들어간다면 피차간에 많은 사상자가 생길 것입니다.
정찰을 하시는 것도 좋은데 다만 정찰을 하려거든 탄띠를 풀고 총도 맡겨두고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장교는 부하들에게 탄띠를 풀어 총과 함께 부하에게 넘겨주고 정찰을 했다.
내가 다시 처가댁에 들어가 아침밥을 먹고 나오자 그제야 정찰 나갔던 2명이 돌아와 대령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 방향을 바꾸어 송정리 쪽으로 걸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주변에 모여 지켜보고 있던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아무런 충돌 없이 그들이 물러나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간 것을 보고 난 후 나는 장인어른과 함께 송정리 쪽으로 걸어갔다. 신학대학 부근을 지나올 때는 탱크 2대가 양쪽 길에 세워져 있었고 도로가 패어 있었다.
송정리 평동 집을 가기 위해 나섰지만 극락강 둑을 타고 우산리에 있는 외가를 들렀다. 외가 부근에는 도림목장이 있었는데 나는 집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목장에서 일하기로 했다. 그 후로도 계속 목장에서 쇠죽 주는 일을 했다.
마지막 수업
5월 27일 광주가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나왔다.
5월 30일경 계엄사령부에서 발표한 광주사태의 전모를 보고 내 이름이 포함되어 중요인물로 표시되어 있었다.
더욱 놀랐던 것은 내가 김대중 씨를 만나 이야기했던 부분을 조선대 학생과 전 남대 학생들을 포섭하여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발표되어 있던 사실이었다.
6월 16일 정광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가게 되어 오전, 둘째 시간에 사회를 가르치고 있었다.
갑자기 교감선생님이 찾아왔다. 예감이 이상했다. 유리창 밖을 내다보니까 교문 앞문과 뒷문에 건장한 젊은이가 한 명씩 서 있었다. 직감적으로 붙들려간다는 것을 느끼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솝 우화 한토막을 들려드리고 가겠습니다."
"유아무와 인생한(有我無蛙人生恨), 이 말은 꾀꼬리와 까마귀가 노래자랑을 하는데 까마귀가 심사위원을 개구리로 매수하여 꾀꼬리를 이겼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꾀꼬리는 인생에 한을 느꼈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비교하여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교감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갔다. 2명의 젊은이가 나를 뒤따라왔고 1층으로 내려가는 복도에 역시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교무실로 들어가자 한 명의 젊은이가 내 책상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의 형사가 내게 말했다.
"조선대학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바로 그자리에서 16절지 한 장을 내밀어 10·26 이후의 내 행적을 쓰라는 것이었다.
교무실에서 간단하게 조서를 쓰고 나자 잠깐 경찰서까지 동행하자고 하였다. 교문 앞을 나서니 지프차 2대가 기다리고 있어 지프차를 타고 광산경찰서로 갔다.
광산경찰서를 들어간 순간 형사 한 명은 광산경찰서 서장에게 검거라는 사인을 하라고 했다. 그러고 난 뒤 밥 한 그릇을 사주어 먹고 보안대로 끌려갔다.
보안대 지하실로 들어가게 했다. 지하실 입구를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핏자국이었다. 지하실 사면의 벽과 장00 도경국장이 기증한 거울에는 핏자국이 손자국 그대로 남아 응고되어 있었다. 섬뜩함이 느껴지는 순간 "너 이 새끼, 잘 잡혔어" 하는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와 함께 구타가 시작되었다.
어느새 나는 의자에 앉혀져 눈이 가려졌다. 눈을 가린 채 두들겨패는 행위는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5시간 정도를 두들겨맞고 나자 그 고통스러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다음날 보안대 지하실에서 상무대 헌병대로 옮겨졌다. 헌병대에서 나를 조사한 사람은 장기호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야 본격적으로 나를 때리려는 듯 웃옷을 모두 벗기고 허리띠를 풀게 했다.
그는 나에게 10·26 이후의 행적을 쓰라고 지시하고는 부분부분에 대한 집중 취조를 시작했다. 자백을 강요 받았던 부분은 김대중 씨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일방적으로 그들이 짜놓은 죄목에 맞추어져 시인만 하게 했을 뿐이었다. 처음은 계속해서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그들의 강요에 못 이겨 시키는 대로 했다.
지식과 지성의 깨우침
상무대 영창은 부채꼴 모양으로 7개 정도가 있었다. 각 방마다 80여 명이 수용되었고, 전체는 700여 명이 넘는 숫자가 수용되었다.
광주항쟁에 관련되어 잡혀온 사람들은 영창 안에서 매일 밤 8,9시까지 '정훈조' 시간을 마련하였다. 나는 한 달 동안 정훈조 시간에 사회를 맡아 진행하였다.
정훈조 시간은 주로 오락을 곁들이면서 교수들에게 특강을 받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때 내가 교수들에게서 들은 이야기 중 윤영규 선생님이 하신 말씀과 특히 이상식 선생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나는 역사가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역사다운 역사를 가르치지 못한 점을 반성하면서 이곳에서나마 여러분에게 단군신화 한 편을 얘기하겠어요.
호랑이와 곰이 신당수 아래 굴을 파고 들어갔는데 호랑이는 못 견디고 뛰쳐나와 인간이 되지 못하고, 곰은 인간으로 변하여 나왔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 이야기는 바로 이곳 감옥과 비유하여 볼 수 있지요. 나는 감옥을 '아름다울 가'에 '구슬 옥'을 써서 가옥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여러분, 모두 이곳에서 아름다운 것을 배워 나가고, 배워서 나갈 때에는 반드시 겸손 하나를 가지고 나가도록 하세요."
나는 특강과 오락 등의 유용한 시간들로 영창생활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한 영창생활 속에서 터득한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배고픔 속에서 느낀 새로운 것이었다.
밥 시간이 되면 각 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4열 종대로 앉아 2명씩 마주 보고 앉았다. 2인분의 짬밥이 들어오면 마주 보고 앉은 두 명은 서로 자기 밥을 먹으며 배를 채우기에 바빴다. 또한 대부분 배고픔 속에서 자기 앞으로 짬밥이 전달되어 왔을 때 밥량의 크기를 재어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밥량의 많고 적음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나와 마주 보고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재소자가 나보다 배움이 덜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에게 밥을 더 먹게 내 밥을 나누어주는 아량이 바로 지성이라고 생각했다. 아는 것을 행동하지 않은 것은 지성이 아니었다. 그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자 나는 참으로 기뻤다.
최후 진술
그러는 도중 나는 갑자기 졸도하여 쓰러지는 바람에 한 달 동안을 통합병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최후진술을 하는 과정에서는 제각기 한마디씩 나누어 했다.
송선태 씨는 이렇게 최후진술을 했다.
"어찌 내가 대학을 다니면서 내 고장 광주에 불을 지르겠소. 당신들이 말하는 불의 의미는 방화일지 모르나 우리가 생각하는 불은 어두운 곳과 그늘진 곳을 밝히고, 추운 곳을 따뜻하게 해주는 횃불일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오히려 더욱더 어둡게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양강섭 씨는,
"당신들은 우리를 보고 학생들은 공부나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군인들은 조용히 국방만을 위하라고……."
유소영 씨는,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을 온 천하에 외치면서 이 생명 다할 때까지 살아가겠다."
고 외쳤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결국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계엄사령부에서 발표한 공소장으로 졸업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할 때 사각모를 쓴 사진을 집에 걸어놓는데 나는 이 공소장을 걸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형을 살고 나가 장가를 들고 자식들을 낳아 기를 것인데 자식들이 '아버지는 어째서 공소장을 걸어놨어요? 아버지! 그것이 어째서 죄가 되나요?' 하고 물으면 '네 아비 어미는 그런 더러운 세상에서 산 죄밖에 없단다'가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들은 법무관 마크에 새겨진 천칭 저울처럼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형을 집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나는 말을 하고 최후진술을 마쳤다.
나는 구형 2년, 선고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1980년 10월 25일 석방되었다.
광주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교도소를 나온 지 얼마 되자 않아 아버님은 홧병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1981년에 5·18 제적당했던 동지들과 함께 복학운동을 벌여 1984년 복학하여 1985년도에 졸업을 했다.
그 후,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고 1982년부터 건설업에 뛰어들어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점점 확장되어 현재까지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다.
지금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생각을 해보면 많은 면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된다.
다만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앞으로의 올바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시킨 뒤 그 정신을 제2의 민족정기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주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