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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총랑함양박공(軍簿摠郞咸陽朴公)의 단비명(壇碑銘)
서문(序文)도 병기(幷記)함
함양군(咸陽郡) 서상면(西上面) 대남리(大南里) 산(山) 19번지(番地)에 분묘(墳墓)의 형태(形態)로 새로운 단(壇)이 있는 것은 즉 함양박씨 치암파(恥庵派)의 제종(諸宗)이 그의 선조(先祖)이신 군부총랑공(軍簿摠郞公) 및 그 분의 아드님 치암공(恥庵公)의 양세(兩世)의 제향(祭享)을 받들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다른 곳에 쌓지 않고 이곳을 택(擇)한 것은 군부총랑공(軍簿摠郞公) 의 묘소(墓所)가 안음(安陰)의 서촉 오십리 남짓한 노천(蘆川)에 있다고 하였으나 표석(表石)이 없어 실전(失傳)하였으며 이 지역의 구호(舊號)가 노천(蘆川)이엇으니 공(公)의 묘소(墓所)가 있던 곳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
공(公)의 十八世孫인 태형(泰亨)이 처음에 지방(紙榜)으로써 수십년간 양세(兩世)의 제향(祭享)을 받들며 일찌기 단(壇)을 설치하고자 하다가 뜻은 있었으나 성취(成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더니, 그의 아들인 사정(士楨)이 선친(先親)의 유지(遺志)를 이어 종익(鐘翼). 연석(年錫)과 더불어 지난 민국(民國)의 기미(己未:1979)년에 드디어 이곳에 조그마한 단(壇)을 쌓고는 진주(晋州)의 문회장(門會長)인 주화씨(周和氏)가 계승하여 해마다 한 번씩 제사(祭祀) 받듬을 주간(主幹)하다가, 지난해 구월 치암공파문중회의(恥庵公派門中會議)의 자리에서 제공(諸公)들이 서로 더불어 의논하며 말하기를 "치암부군(恥庵府君)의 양세(兩世)의 단소(壇所)가 협소(狹小)하여 여러 자손들이 제사(祭祀)를 받듬을 수용(收容)하기 어려우니 확장(擴張)함이 시급(時急)하고 또한 분묘(墳墓)의 형태로 새로이 쌓는다면 좋을 것 같은데 제종(諸宗)들의 의견(意見)은 어떻습니까?"라고 하였더니, 모두가 말하기를, "그렇게 합시다."라고 하였다.
그제서야 금년 가을에 드디어 길일(吉日)을 골라 단(壇)을 쌓고 공사(工事)를 마쳤다고 고(告)하자 제공(諸公)들이 말하기를 "단(壇)이 이미 완성되었고 제향(祭享)도 또 편안히 받들 수 있으니 마땅히 비석을 앞에 세워서 출입하는 여러 후손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며 사모(思慕)하고 본받을 곳이 있게 한다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옳습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문회장(門會長)인 우식(宇植) 선비님이 종식(琮植)을 방문하여 비명(碑銘)을 책임지우며 말씀하시기를 "나의 선조(先祖)이신 치암부군(恥庵府君)께서는 이익재선생(李益齋先生)과 더불어 안문성공(安文成公:諱 珦)의 문인(門人)이신 이재(彛齋) 백이정(白이正)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셨으니 양(兩) 가문(家門)이 선세(先世)에 세의(世誼)가 있었네. 안군(安君)은 그것을 도모(圖謀)하여 주시게."라고 하셨다. 내가 그 말을 듣고는 굳이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의 휘(諱)는 장(莊)이요 벼슬은 군부총랑(軍部摠郞)이신데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셨고 성(姓)은 박씨(朴氏)니 본래 신라(新羅)의 종성(宗姓)이었으며 휘(諱) 언신(彦信)에 이르러 속함대군(速咸大君)에 봉(封)하여졌으니 이 분이 관향(貫鄕)을 얻은 선조(先祖)이시다. 휘(휘) 선(善)에 이르러 예부상서(禮部尙書)이셨으니 이 분이 시조(始祖)이시고 공에게 육대조(六代祖)이시다. 이 분이 휘(諱) 인정(仁挺)을 낳았으니 예부상서(禮部尙書)이셨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신청(信淸)이니 예부상서(禮部尙書)와 검교신호위무덕장군(檢校神虎衛武德將軍)이셨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윤정(允禎)이니 판호부상서(判戶部尙書)와 대부경(大府卿)이셨으며 조(祖)의 휘(諱)는 신유(臣유)니 판이부상서(判吏部尙書)와 추밀원사(樞密院事)이셨는데 응천군(凝川君)에 봉(封)하여지셨고 시호(諡號)는 충질공(忠質公)이시고, 고(考)의 휘(諱)는 지빈(之彬)이니 위위윤(衛尉尹)이요 시호(諡號)는 문원공(文元公)이시다.
공의 생졸(生卒)의 연월(年月)과 자함(字啣)과 호함(號啣) 및 벼슬을 역임(歷任)하신 이력(履歷)과 사적(事蹟)과 행적(行跡)을 다른 곳에 가히 고찰(考察)할 곳이 없으니 후손들의 슬픔과 한탄스러움이 마땅히 어떠하겠느냐? 비록 그러나 치암공(恥庵公)의 태어남이 충렬왕 정해(丁亥:一二八九)년에 있었으니, 공의 태어남도 반드시 二十여년 전에 있었으리라.
공의 시(詩)에 말씀하셨기를 『높은 하늘 푸른 물결 옷깃을 적시며, 이슬 내리는 깊은 밤 새들이 잠자네. 연못 위 푸른 숲에 흰 갈매기 날고, 한낮에 부는 바람 안개비가 날구나. 흐르는 냇물 푸른 쪽빛은 대나무 밖으로 흐르고, 곱게 씻은 흰 실은 백연화(白蓮花)같네. 천성(天性)이 아름다운 자질로 태어남은 뜻없음이 나니니, 보통인 백성(百姓)의 집이라고 말하지 말게.』라고 하셨는데, 이 이절(二絶)을 보니 맑고 아름답고 고아(高雅)하며 한 점의 티끌이나 먼지에 오염(汚染)됨이 없었다. 한덩어리의 고기로도 가히 전체 솥의 맛을 알 수가 있는데 어찌 반드시 많아야만 할소냐! 공의 시문(詩文)이 또한 동문선(東文選)에 많이 실려 있다고 하더라.
배(配)는 군부인(郡夫人)이신 고성이씨(固城李氏)이시니, 중서우상시(中書右常侍)이신 존비(尊비)의 따님이다.
일남(一男)을 낳았으니 충좌(忠佐)인데 즉 치암공(恥庵公)으로 충선(忠宣). 충숙(忠肅).충혜(忠惠). 충목(忠穆)의 넷 왕조(王朝)를 섬겨 벼슬은 삼중대광(三重大匡)과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충좌(忠佐)는 오남이녀(五男二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소(소)요 정(珽)은 찬성(贊成)으로 함양군(咸陽君)에 봉하여졌으며, 경(瓊)은 판서(判書)였다가 찬성(贊成)에 추증되었고, 번(번)은 지평(持平)이며, 전(琠)은 지신사(知申事)와 함양군(咸陽君)이고, 딸은 중랑(中郞)인 최자경(崔自敬)과 좌찬성(左贊成)인 홍유룡(洪有龍)에게 시집갔다.
정(珽)의 아들은 기(杞)니 호군(護軍)이요, 경(瓊)은 이남(二男)이니 거실(居實)은 우윤(右尹)인데 영상(領相)에 추증(追贈)되었고 문영(文楹)은 좌윤(左尹)이며, 번(번)도 이남(二男)이니 정(靖)은 전서(典書)요 설(설)은 감찰(監察)이며, 전(琠)은 삼남(三男)이니 문명(文命)은 재신(宰臣)이고 문부(文茂)는 지중추(知中樞)며 문재(文재)는 지밀직부사(知密直府事)이다.
기(杞)의 아들은 연(衍)이니 군수(郡守)이고, 거실(居實)은 오남(五男)이니 희문(希文)은 좌상(左相)에 추증(追贈)되었고 희주(希周)와 희부(希傅)며 희석(希奭)은 현감(縣監)이고 희영(希榮)이며, 문영(文楹)의 아들은 이(이)니 감사(監司)요, 정(靖)은 이남(二男)이니 가연(可衍)은 판관(判官)이고 가문(可文)은 판서(判書)이며, 문명(文命)의 아들은 부(富)니 판사(判事)요, 문부(文茂)는 육남(六男)이니 거(거)와 연(連)과 손(孫)과 성온(成溫)과 성필(成弼)과 규(珪)이며, 문재(文재)는 삼남(三男)이니 원택(元擇)은 개성부윤(開城府尹)이고 안택(安擇)은 상장군(上將軍)이며 흥택(興擇)은 판도판서(版圖判書)이다.
또한 이하로 저명(著名)한 후손으로는 인숭(仁崇)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분(분)은 사헌부(司憲府)의 집의(執義)며, 숭탕(崇湯)은 도사(都事)요, 행(行)은 참의(參議)며, 눌(訥)은 통훈대부(通訓大夫)요, 춘흥(春興)은 현감(縣監)이며, 규(規)는 공조판서(工曹判書)요, 구(矩)는 예조참의(예조참의)로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효행으로써 정려(旌閭)를 받았다. 돈의(敦義)는 판사(判事)며 광민(光敏)은 학행(學行)이 있었고, 휘(輝)는 병판(兵判)이며, 진생(震生)은 첨정(僉正)이고, 간생(艮生)은 도승지(都承旨)요, 희손(憙孫)은 도사(都事)며, 이경(而敬)은 현령(縣令)이요, 충서(忠恕)는 사직(司直)이며, 충의(忠義)는 현감(縣監)이요, 충신(忠信)은 사직(司直)이며, 후생(厚生)은 군수(郡守)요, 영창(永昌)은 공조판서(工曹判書)에추증되고, 천령군(天嶺君)에 봉하여졌으며, 영문(永文)은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이요, 전화(全華)는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전선(全善)은 중직대부(中直大夫)요, 전경(全卿)은 군사(郡事)요, 인손(仁孫)은 주부(主簿)며, 사림(士林)은 첨정(僉正)이요, 연(淵)은 통훈대부(通訓大夫)며, 승요(承堯)는 사과(司果)요, 소조(紹祖)는 현감(縣監)이요, 소종(紹宗)은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소한(紹翰)은 감찰(監察)이요, 소영(紹榮)은 사직(司直)이며, 구수(九壽)는 현감(縣監)이요, 영(榮)은 학행(學行)이 있었고, 옥산(玉山)은 문과(文科)요 철산(鐵山)은 현감(縣監)이며, 종산(鐘山)은 사직(司直)이요, 숙동(叔仝)은 판관(判官)이며, 윤형(允衡)은 감찰(監察)이요, 유(瑜)는 예조참의(禮曹參議)며, 신(信)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영길(英吉)은 중추부사(中樞府事)며, 계천(繼天)은 주부(主簿)요, 귀손(貴孫)은 사과(司果)요, 눌(訥)은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고, 청암(淸巖)과 금곡(金谷)의 양 서원(書院)에 봉향(奉享)되었다. 효정(孝貞)은 감찰(監察)이요, 세걸(世杰)은 진사(進士)며, 경현(景賢)은 현감(縣監)이요, 경보(景輔)는 효행으로써 통정대부(通政大夫)이며, 신헌(臣獻)은 목사(牧使)요, 성헌(誠獻)은 부사(府使)며, 민헌(民獻)은 형조참판(刑曹參判)이요, 여헌(黎獻)은 찰방(察訪)이며, 승서(承緖)는 의금부사(義禁府事)요, 태고(太古)는 어모장군(御侮將軍)이며, 건원(乾元)은 부장(部將)이요, 곤원(坤元)은 진사(進士)인데 옥화서원(玉華書院)에 봉향(奉享)되었으며, 사신(士信)은 효행과 문장과 행실이 저명하였다.
수우(守愚)는 대경(大卿)이요, 거인(巨鱗)은 장령(掌令)이며, 형인(亨鱗)은 이조참의(吏曹參議)요, 홍인(洪鱗)은 대사헌(大司憲)이며, 붕인(鵬鱗)은 설서(說書)요, 종인(從鱗)은 이조정랑(吏曹正郞)인데 추원사(追遠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승인(昇鱗)은 호조참의(戶曹參議)요, 곤(崑)은 도사(都事)며, 흥주(興宙)는 진사(進士)요, 흥택은(興宅)은 직장(直長)이며 온종(溫宗)과 탕종(湯宗)은 모두 진사(進士)요. 은종(殷宗)은 현감(縣監)이며, 순년(順年)은 목사(牧使)요, 순년(舜年)은 별시위(別侍衛)며, 순수(舜壽)는 창신교위(彰信校尉)이다.
호(浩)는 첨추(僉樞)요 충생(忠生)은 호조참의(戶曹參議)며, 효생(孝生)은 장령(掌令)이요, 제생(悌生)은 군수(郡守)며, 예생(禮生)은 상호군(上護軍)이요, 봉(봉)은 이조참의(吏曹參議)며, 강(薑)은 종사랑(從仕郞)이요, 창(菖)은 장사랑(將仕郞)이며, 기(기)는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고, 지(芝)는 주부(主簿)며, 운(蕓)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퇴계(退溪)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였으며, 유계(儒계)에서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제향(祭享)을 올린다. 순(荀)은 좌랑(佐郞)에 추증되었고 수(洙)는, 참봉(參奉)이요, 활(活)은 도사(都事)며, 봉정(鳳程)은 진사(進士)요, 붕정(鵬程)은 습독(習讀)이며, 곤정(곤程)은 찰방(察訪)이요, 홍정(鴻程)은 선무랑(宣務郞)이며, 수서(守緖)는 승지(承旨)인데 도고서원(陶皐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성문(成文)은 중추부사(中樞府事)며, 성민(成敏)은 호(號)가 수묵재(守默齋)인데 청암서원(淸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정시(廷蓍)는 군수(郡守)요, 정설(廷薛)은 공조참판(工曹參判)이며, 진(瑨)은 현감(縣監)이요, 유(琉)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이며, 사립(斯立)은 첨추(僉樞)요, 난방(蘭芳)은 장여헌(張旅軒)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군자감(軍資監)의 첨정(僉正)이며, 윤무(胤武)는 호가 기은(岐隱)이니 문행(文行)이 있었고, 천우(天佑)는 경력(經歷)이며, 유철(有喆)은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여현(汝賢)은 스님인데 법명(法名)이 사흘(思흘)이다. 정직(廷稷)은 판관(判官)이요, 희문(希文)은 통사랑(通仕郞)이며, 문걸(文傑)과 희안(希顔)은 모두 봉사(奉事)요, 희민(希閔)은 판사(判事)며, 진(진)은 참봉(參奉)이요, 신지(身之)는 부사(府使)며, 동보(東寶)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동추(同樞)요, 성규(聖奎)는 진사(進士)며, 시태(時泰)는 찰방(察訪)이요, 희민(希閔)은 정언(正言)이며, 서귀(瑞龜)는 진사(進士)요, 손경(孫慶)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써 회산서원(晦山書院)과 금곡서원(金谷書院)의 양 서원(書院)에서 향사(享祠)하며, 중경(重慶)은 군수(郡守)요, 주종(周鐘)은 호(號)가 산천(山泉)인데 문행(文行)이 있었으며, 주운(周雲)은 교리(校理)요, 주대(周大)는 진사(進士)며, 열(烈)은 독립의사(獨立義士)인데 문경(聞慶)에 유적관(遺跡館)이 있다. 아! 성대(盛大)하구나. 공(公)은 가히 선(善)을 즐기고 의(義)를 좋아하는 덕(德)이 있는 군자인(君子人)이라고 하겠구나.
지금 이 역사(役事)에 후손(後孫)인 성술씨(成述氏)가 소요(所要)되는 부지(敷地)를 그의 방조(傍祖)이신 휘(諱) 지수(之秀)인 밀직부사공(密直府使公)의 종회장(宗會長)인 준갑(峻甲) 및 재식(在植) 선비님에게 간청(懇請)하였더니, 문내(門內)에서 숙의(熟議)한 나머지 기증(寄贈)을 허락하였다. 정성(精誠)을 바쳤음이 매우 감사한 일이었으며, 참으로 가히 일천 가지도 하나의 근본이요 일만 파(派)도 같은 근원(根源)이라는 정의(情誼)라고 말할 수 있겠구나. 함양(咸陽)의 박씨(朴氏)들은 천지(天地)와 더불어 영원히 전(傳)하면서 번창(繁昌)하고 또한 치열(熾烈)하리라. 잇따라 명(銘)을 지어 말하겠노나.
함양(咸陽)의 박씨(朴氏)는 그 근원이 깊고도 머네. 공(公)은 이러한 가문(家門)에서 태어나 재주와 지혜가 총명(聰明)하였네.
아들에 치암공(恥庵公)을 두셨으니 국가의 동량(棟梁)이었네.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자가 세세(世世)로 계속하여 유명한 벼슬이었네.
공(公)이 세대(世代)와의 거리가 여러 차례 창해(滄海)가 상전(桑田)으로 변하였네. 능선(陵線)과 계곡(溪谷)이 옛날과 달라져서 유택(幽宅)이 자상하지 않았네.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면 창자는 찢어지고 마음이 상하였네.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향사(享祠)를 받듦은 노천(蘆川)의 양지(陽地:남쪽)이네.
공(公)의 영령(英靈)이 올라가고 내려오며 의기양양하리라. 내가 비석(碑石)에 명(銘)을 지었으니 만고(萬古)토록 드러나고 선양(宣揚)되리라.
갑신(甲申:二ㅇㅇ四)년 九월 상순(上旬)에
순흥후인(順興后人) 안종식(安琮植)은 삼가 지음
二十四 대손 노국(魯國)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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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四 대손 노국(魯國)님은 내하형님으로 월산서실원장이셨으며 박부영,박용재의 부친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