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렇게나 넘긴 짧은 갈색 머리, 두꺼운 뿔테 안경,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낡은 운동화...마치 소년같은 차림새를 한 위 사진 속 여성이 바로 현재 미국 미디어에서 오바마 대통령 다음으로 주목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만 35세의 레이첼 매도우(Rachel Maddow). 지난해 9월부터 MSNBC에서 진보 성향의 저녁 시사보도 프로그램 <The Rachel Maddow Show>를 진행하고 있는 앵커우먼입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방송인으로 꼽히지요.
매도우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최초의 뉴스쇼 여성 앵커입니다. 기존의 정형화된 앵커 이미지를 깬 신선함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지요.
미 대선을 앞두고 등장한 그녀는 금세 브라운관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앵커 자리에 앉은 지 1주일만에, 저녁 9시 뉴스쇼 시청율을 두 배로 올려 놓았을 정도입니다. 특히 25세~54세 사이 시청자들에게는 CNN의 장수 뉴스쇼 <래리 킹 라이브>보다 높은 시청율을 얻고 있습니다. 쇼 진행 4주 만에, 버락 오바마 대선 후보 캠프에서 "레이첼과 인터뷰를 하겠다"는 전화가 왔다지요.
아직 그녀가 진행하는 TV,라디오 쇼를 시청한 적이 없으시다면, 아래 영상들을 보시면 분위기가 대충 잡히실 겁니다.
레이첼 매도우 쇼: 부시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공식 연설 해설 - 부시 전 대통령의 연설을 중간중간 스톱하며 '그건 아니지!' 시원하게 참견하는 방송분.
레이첼 매도우 쇼: 매관매직,권력 남용 혐의를 받고 최근 탄핵된 로드 블라고예비치 일리노이 주지사의 연설을 팝콘을 먹으면서 관전하는 매도우. 그녀의 위트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시청자들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로 꾸밈없는 태도에서 오는 친숙함, 그리고 '유쾌하고 중용을 아는 비평'을 듭니다. 그녀는 'TV를 전혀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최근에야 TV를 하나 장만했는데, 그녀의 파트너가 매도우의 방송을 편하게 보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그녀 자신은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다른 TV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일까요. 매도우 쇼는 다른 정치 비평쇼에서처럼 자극적인 독설과 비아냥으로 시청자들에게 잠깐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데 주력하지 않습니다. 매도우는 스스로 밝히듯이 '시청자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싶어한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독설 대신 유쾌한 비평을, 날카롭지만 선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제공합니다.
앵커의 생명인 외모에 대해서도 매도우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깎아 놓은 듯한 외모에 화려한 화장과 의상으로 무장한 다른 여성 앵커들에 비해 그녀는 '튀어' 보일 수 밖에 없지요. TV쇼를 맡으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정장을 입고 콘텍트 렌즈를 끼지만, 시청자에게 보이지 않는 그녀의 발에는 여전히 운동화가 신겨져 있다고 합니다.
"For me, it is sneakers, which I can wear 80 percent of the time, secretly behind the desk. That reminds me who I am, even though I am dressed up like an assistant principal in order to meet the minimum dress code for being on television."
최근 미국 보그지와 인터뷰를 했는데, 스타일리스트가 사진 촬영에서 그녀에게 하이힐을 신기려고 애써봤지만, 매도우는 자신의 컨버스 부츠를 벗지 않았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선머슴같은 레즈비언(butch lesbian)'이라고 묘사하는데요. 쇼핑을 싫어하며, 보톡스 주사보다 자신의 7년 된 포드 픽업 트럭에 관심이 더 많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믿기지 않는 인기'에 대해 매도우는 “아마도 시청자들은 '어, 그녀는 전혀 예쁘지 않네. 그럼 (외모 대신) 말로 무언가를 전하려는 거겠군'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라고 해석했습니다. "MSNBC가 나를 채용할 줄은, 내가 TV 방송 진행자로 일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라디오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죠. 일단 전혀 TV에 나올만한 얼굴이 아니니까요."
 매도우는 "라디오 진행 시에는 평소의 차림을 유지할 수 있어 좋다"고 한다. 검정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구글의 CEO 에릭 슈미트 인터뷰 중. 매도우는 스탠포드를 졸업하고 로즈 장학생(Rhodes scholar)으로 옥스퍼드에서 유학한 수재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평범한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는데요. 로즈 장학생으로 뽑히고 난 뒤 '공부만 아는 바보들과 똑같아 보이기 싫어서' 머리를 파란색으로 염색했었다고 합니다.
옥스포드 시절, 사회와 고립되어 '고상하게' 공부만 하는 대학의 분위기가 싫어서 휴학을 하고 에이즈 환자를 돕는 봉사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박사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매사추세츠의 외진 시골에서 생활했다네요. 논문을 쓰는 동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웨이트리스, 택배일, 정원일 도우미, 잡역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비디오 가게 점원을 하고 싶었으나, 너무 본 영화가 없는지라 거절당했다네요.
그러던 중, 한 친구가 그녀에게 지역 라디오 모닝쇼의 오디션을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진짜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일을 의외의 곳에서 찾게 됐다"고 말합니다. 매사추세츠 지역 라디오 방송, 그리고 2004년부터는 에어 아메리카 라디오에서 자신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방송 경력을 쌓았습니다.
에어 아메리카 라디오 매도우 쇼의 인기 코너 <Ask Dr. Maddow> 진행 모습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깨닫게 된 것은 스탠포드 1학년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호모포비아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포스터를 만들어 자신의 방과 공동 욕실 앞에 붙였답니다.
대학신문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다뤘고, 누군가가 그녀 몰래 아직 딸이 동성애자인지 모르는 부모님에게 그 기사를 보냈습니다. 보수적인 변호사였던 아버지와 학교 교직원인 어머니는 당시 몹시 화를 냈으나, 지금은 그녀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며 매도우의 여자친구와 매일 통화를 할 정도로 친하다고 하네요.
10년 넘게 그녀와 함께 해온 파트너 수잔 미컬러(Susan Mikula)는 매도우보다 15살 연상인 전문 사진작가입니다. 두 사람은 여느 오래된 커플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수잔은 한 인터뷰에서 "가끔 우리는 스스로가 동성애자라는 것,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잊을 만큼 평범한 커플로 살아가고 있어요"라고 밝혔지요.
 매도우와 수잔 미컬러 커플. 요즘 매도우의 일이 많아져 두 사람은 나흘만 함께 지내고 사흘은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방송 이외에 매도우는 요즘 미국의 전쟁(America's relationship with war)에 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녀의 전공이 정치 관계학이기도 하지요.
자신에 대해 매도우가 말하듯- "나는 전혀 뉴스쇼 진행자 같지 않아요. 늘 그랬지요. 나는 전혀 로즈 장학생처럼 보이지 않았고, 스탠포드 대학생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이런 이질적인 모습이 사람들에게 무언가 다른 것을 전달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봐요."- 그녀의 등장이 반가운 이유는 매도우가 '주류'에서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인물이라는 점에 있을 겁니다.
그녀는 성적 소수자(동성애자)이며, 상업 방송이 내세우는 최고의 상품인 '미모와 젊음'과는 거리가 멉니다. 자극적이거나 오버하는 행동으로 시청율을 끌어올릴 의도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방송에서도 편안하게 자기 스타일 그대로를 유지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성공하기를 바라기보다 "타인에게 의미있는 행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뚜렷한 소신을 갖고 있으며 이를 대중의 구미에 맞게 포장하지 않는 당당함, 앞으로 그녀의 활약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레이첼 매도우의 멘트,과거사 등은 뉴욕타임즈, 영국 가디언지, NYMAG 등의 매도우 인터뷰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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