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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교육에 관한 경험 나누기 13
다윗처럼
지난주에 게재된 ‘자녀를 위해 좋은 학원 찾기’를 읽고 어느 분이 전화를 했다. 그 분의 이야기는 정말 그렇게 좋은 학원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혹시 전도대상자를 위해 일부러 쓴 글이 아니냐는 질문까지 했다. 그 독자의 전화를 받고 마음 한 쪽에 통증을 느꼈다. 만약 내가 그런 글을 읽었다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정말 좋은 학원이 있구나. 내가 사는 동네에도 그런 학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분의 이야기를 한 시간 정도 듣는 동안 나를 당황스럽게 했던 질문이 사실은 우리의 현실임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잘 찾아보면, 우리 주위에는 얼마든지 좋은 학원이 있다. 또한 학교에도 좋은 선생님들이 참 많이 있다. 다만 우리의 이기심 때문에 좋은 학원,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욕심을 부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불신한다면 절대로 좋은 학원, 좋은 선생님들은 만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내가 아는 몇 분의 선생님들, 그분들은 아이들만 봐도 가슴이 뛴다는 사람들이다. 가르치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너무나 귀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장 쉽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바로 부모들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 부모들이 자녀에게 얼마나 좋은 성적 받기를 원하며, 또 명문대학에 가기를 바라고 있는가? 오죽하면 강남 엄마들이 드라마의 소재가 되고 있겠는가?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쫓기듯이 하는 공부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닥달을 당하며 공부하는 아이들 치고 행복해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부라는 것은 하고 싶은 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진짜로 훌륭한 아이는 어린 다윗과 같은 사람이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움에 나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골리앗 앞에 섰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다윗 앞에서 거대한 골리앗도 무너졌다. 다윗은 단순히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최대의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다. 다윗은 왕이 입혀 주었던 갑옷을 벗었다. 자신에게 맞지 않은 갑옷을 벗을 만큼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훈련된 사람이다. 다윗은 무거운 칼도 내려놓았다. 다윗은 자신을 필요이상으로 크게 보이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다윗은 양들을 돌볼 때 사용하던 물맷돌만 가지고 골리앗을 이겼다. 만약 내 아이가 다윗처럼 골리앗 앞에 나아간다면 어찌 하겠는가? 물론 대부분의 부모들이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서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아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무거워서 도저히 입을 수 없다고 해도 갑옷을 입힐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큰 칼도 반드시 손에 들게 할 것이다. 부모가 입힌 갑옷이, 부모가 들게 한 큰 칼이 아이로 하여금 거대한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골리앗 앞에서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모들은 너무나 자주 잊어버린다. 음악학원을 운영하면서 아이에게 갑옷을 입히고, 투구를 씌우고, 칼을 들게 하고, 발에는 무거운 군화까지 신겨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들로 만드는 부모들을 목격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요즈음 아이들은 또 그렇게 길들여져서 갑옷을 벗고는, 칼을 놓거나 군화를 벗고는 불안해서 한발자국도 걷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라. 이리떼에게서 양떼를 지키기 위해 초장을 달리며 물맷돌을 날리는 다윗의 자유로운 모습을. 다윗은 그렇게 자랐고, 또한 왕이 되었다. 우리 아이들 모두 행복한 왕이 될 수 있는 아이들이다. 비록 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이 된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행복한 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욕심이 앞선 부모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되지 않은 교사들이, 또 이 사회가 우리 아이들을 질식시키고 있다. 시험을 앞두고 벌어지는 일들은 정말 끔찍한 생각까지 든다. 아이들은 전 과목 만점을 받기 위해 일요일에도 학원에 가고, 밤늦도록 공부에 몰두한다. 잠시 내 아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원에 간 적이 없다. 물론 사람들은 말한다. 만약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더라면 서울대학에 갔을 거라고. 하지만 서울대학에는 신학과가 없지 않은가? 우리 아이는 연세대학에 갔다. 그런데 대학에 간 아들은 더 행복해 보인다. 아들은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와의 대화에서 카운셀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 아들에게 아빠는 진정한 상담은 신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들은 아빠의 권유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물론 대학원에 가서는 심리학을 공부할 예정이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많이 틀린 시험지를 가지고 왔기에 왜 그렇게 못했느냐고 꾸중한 적이 있다.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보다 못한 아이들이 더 많아요.” 공부를 잘해도 내 아이가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공부를 1등 한다고 내 아이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나는 오늘 ‘교육경험 나누기’ 글 연재를 마치면서 내 어린 아이들에게 무거운 갑옷 같은 학원으로 질식시키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싶다. 내 아이 1등하라고 무거운 칼 같은 과외로 아이의 어깨를 무겁게 하지 말라는 당부도 하고 싶다. 공부보다는 독서를 하는 것으로, 공부보다는 자연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것으로, 공부보다는 세상의 지혜를 얻는 것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슬기롭게 키워갔으면 좋겠다. 286컴퓨터에 어떤 것을 담겠는가? 만약 우리 아이의 그릇이 286컴퓨터의 용량이라면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386, 486, 팬티엄의 용량으로 키워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간혹 286 혹은 386 용량에 팬티엄에 담을 것을 자꾸 쑤셔 넣는 부모들을 보면 안타깝다. 그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 과부하가 일어난다. 컴퓨터는 고장이 난다. 컴퓨터가 고장났을 때는 단순히 컴퓨터만 바꾸면 해결이 된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상처를 받고 질식해서 고장이 나면 고치기가 어렵다. 사람을 고치는 것에는 무한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거대한 골리앗 앞에 나서면서도 용감할 수 있었던 다윗처럼 우리의 아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여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 또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그릇이 큰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 (크리스챤신문, 2007. 7.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