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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에 박순희 선배님을 만나 우연찬게 70년대 노가바를 듣게되었고 감명을 받아 흔적을 남기고 싶어 늦게 나마 스마트폰으로
녹화를 했네요
당시 노동운동에 노래는 어떤역활을 했는지 물었고
선배님이 이야기 하는 노동자 문화운동이란 무엇이었는지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럼 박순희 선배는 누굴까?
기사로 대체할께요
강곤 | 기자 2007.11.16 16:37
“그때는 다 어려웠지만… 몰라, 내가 욕심을 부려서 간다고 했으면 갔을지도. 학교에 안 보내주니까 꼬장을 막 부렸지. 나도 모태신앙이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신앙에서 아주 엄하셨거든. 성당 안 가면 밥 먹을 자격 없다고. 그런데 나는 성당도 안 가고, 기도도 안 하고, 그런데도 아버지가 야단을 못 쳤어요. (이 대목에서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아버님도 마음이 많이 안 좋으셨겠네요, 했을 뿐인데. 인터뷰 내내 그는 여러 차례 눈시울을 붉혔고 또 그만큼 목소리를 높였다.)
‘공순이’가 부끄러웠던 노동자
그렇게 익힌 기술로 그는 곧 학성모직보다 좀 낫다는 대한모방으로 옮길 수 있었다. 12시간 넘게 일을 하면서도 학원은 빼먹지 않았다. 기술을 배웠지만 그는 여전히 ‘공순이’였고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다가 친구의 권유로 다시 찾은 성당에서 그는 ‘노동자’라는 말을 처음 듣고 눈과 귀가 열렸다고 한다.
“내가 예전에 성당 다닌 걸 알고 송숙자라는 친구가 같이 가자고 졸랐는데, 세 번만 했으면 안 갔을 거야. 네 번째에 못 이기는 체하고 성당에 나갔어. 가니까 예전에 있던 신부님이 아니라 바뀌었더라고. 그때 JOC(가톨릭노동청년회)가 뭔가를 설명하는데, 노동자라 그러면서 노동법 이야기를 하더라고. 내가 귀가 확 열린 거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들 때 노동을 통해서 세상을 만들었다, 창조사업의 1인자가 노동자다, 노동을 통해 세상을 만들었고, 세상은 노동을 통해 유지된다, 우리가 앉아있는 책상, 걸상, 노동자가 만들었고, 전깃불 노동자가 보내준 거다.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구, 노동이 절대 부끄러운 게 아니고 천박한 것이 아니다, 생각을 하게 되었지.
동료로부터 상급자로부터 신임을 받은 그는 곧 조장이 된다. 노동운동 안 했으면 무서운 관리자가 되었을 거라고 말하는 박순희는 또한 JOC남부연합회 회장도 맡았다. 그때 그에게 전태일 열사의 소식이 들려왔다고 한다. 많은 지식인들에게 시대에 대한 부채감을 던져주었던 열사의 분신은 그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너무나 두려웠던 전태일 열사의 삶
“70년 11월 13일. 우리는 모임을 하니까 소식을 바로 접했죠. 추모미사도 하고 그랬는데, 그 이듬해 2월경인가 전태일 열사 어머님하고 바보회, 전태일 열사 친구들 몇 명이 연합회를 방문한 거야. 신부님이 그날 임원회의를 잡아놓구 그 이야기를 다 듣게 했어. 전태일 열사가 어떻게 준비하고 분신을 했는지. 이야기를 들으니까 두려움이 몰려들더라고. 나두 여기에 더 깊이 들어갔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구나. 너무 무서웠어. 스물세 살 때였는데 당시에는 올드미스 취급을 받았어. 결혼을 해야 하는지, 결혼해서두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건지…. 사람들에게 인기도 있고 변화되는 거 보면서 너무 좋았지만 이제는 너무 두려워진 거야. 신부님하구 상담을 했어. 전태일 열사 이야기하면서 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없다. 결국 내린 결론이 수녀원이었어.
결국 그는 수녀원 대신 돈 보스코 센터로 들어가 생활하며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산업선교회 등에서 교육을 받았고 곧 구로공단 전세 얻어서 공동체를 꾸렸다. 한편 그 당시 원풍모방의 전신인 한국모방에서 섬유업계로는 최초로 민주노조가 세워졌고 그는 한국모방 지부장의 권유로 입사를 하게 되고 이후 부지부장 자리까지 맡게 된다.
“구속된 지부장을 면회하는 자리에서 나를 지부장 권한대행인 부지부장으로 임명하는데 어떻게 못 한다고 해? 석방될 때까지만 하기로 하구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겁 대가리 없이 한 거지. 근로자의 날인 3월 10일, 보름달 빵에다가 수건 한 장 주고 쑈단 불러다 쑈 보여주고 그랬는데, 쑈 거부하고, 수건 안 받고 천 명이 넘게 회사가 있는 대림동부터 고척동에 있는 교도소까지 지부장 보러 행진을 해갔어. 노동자 생일날이니까 노동자 대표 집단면회 하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석방투쟁을 한 거지. 그래서 지부장이 한 달 만에 석방이 됐어요. 그때 내 인생의 행로를 어떻게 정해야 하느냐 고민을 또 하게 되지. 정신이 없었어. 여기저기서 원풍 민주노조를 그냥 못 봐주고 우리를 죽일라구 그러는데 또 어떻게 그만두겠어?
“섬유노조에서 조합원 자격을 없애 버리고 그걸 회사에 보내니까 회사에서 어쩔 수 없이 해고를 시켰지. 그때 해고장 보면 너무 웃겨. 동지라고 썼어. ‘박순희 동지 너무 안타깝지만 섬유노조 본부로부터 조합원 자격이 박탈되어 종업원 자격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원풍노조는 집행부가 몇 번 바뀌면서도 민주노조를 지켜냈어. 그러니까 이 새끼들이 82년 9월 27일 날, 노조를 쳐들어왔지. 완강하게 싸우며 3박 4일을 버텼어. 죽을 수는 있어도 니들에게 사표를 낼 수는 없다고. 800여명 남은 조합원들이 10월 1일까지 현장에 남았는데 물 뿌리고 하나씩 다 떼어내 가지고 난지도에다 갖다 버렸지. 우리는 그때 다 죽었더랬어.
그는 “권력, 금력에 이어 학력을 가진 놈들에게도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슬픔”을 안고 원풍 식구들과 논의한 끝에 전북 익산으로 내려가 가톨릭노동사목 일을 시작한다. 당시 익산 경찰서에서는 서울에서 왕빨갱이가 내려왔다고 총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못자리가 모판에서 자라서 논으로 모내기 되듯이 우리도 모내기를 해야 한다고 누누이 얘기하던 것을 실천한 거지.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노동자들 사는데 방 하나 얻어서 시작한 게 가톨릭노동사목이예요. 전국 24군데, 사북, 태백까지 상담소가 있었어. 전노협(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건설 전에 전국 노동자 교육을 노동사목 실무자들이 다 했어요. 87년 노동자 대투쟁 전후로 해서는 노동조합 설립신고 같은 거 교육하면서 밤샘도 많이 했지. 88년 노동자 대회, 그게 해방 직후에 있었던 전평 노동자대회 이후 처음이었잖아? 연세대에서 전국 노동자들이 모여서 대회를 하구 마포대교를 지나 국회까지 행진을 했는데, 마포대교 건너다 감회가 새로워서 중간쯤에 섰어. 그때 정말 우리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여기까지 살아왔던 것도 기적이다… 그 후 20년을 더 살았네.”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선한 싸움꾼
마포대교를 건너는 대목에서 그는 다시 눈시울을 붉히더니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후 20년. 전노협과 민주노총 지도위원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로, 그리고 매향리 투쟁과 평택 대추리 지킴이로 그의 활동반경도 노동에서 반전평화운동으로 보다 넓어졌지만 그의 싸움의 방식과 자세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노동은 다 똑같아, 똥을 푸든지 사무실에서 서류를 보든지. 노동은 사람의 존엄한 생명력에서 나오잖아요? 노동자들이 너무 피곤해서 일요일은 쉬어야 하고 일요일도 일해야 하는 사업장도 많은데. 교회가 하나님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고 7일째 아름답게 하나님을 찬미 찬양하기 위해 교회를 지은 거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지. 일요일은 찬미찬양 드리면서 쉴 수 있도록, 6일만 일해도 살 수 있는 비용이 나오고. 일요일은 미사 드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게 해야지. 근데 그걸 안 하거든요. 이웃사랑 금지법으로 사람 잡아들일 때도 교회는 안 움직였어. 천주교가 운영하는 병원, 학교 이런데서 노조를 인정하지 않잖아 다 파괴하고 천벌을 받을 일이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일이야.”
그의 이야기는 거침이 없다. 원풍모방노조 조합원들은 매년 9월 27일, 노조가 문을 닫은 날을 기념해서 모임을 갖는다. 아직도 노동자들의 싸움이, 그리고 박순희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환갑 나이의 그는 여전히 원풍모방 부지부장 박순희이고 선한 싸움꾼* 아녜스(그의 세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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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