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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지구원목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일꾼
빛, 색깔, 공기
지은이 / 김동건
펴낸곳 / 대한기독교서회
초판 / 2002년 10월 25일
값 / 7,800원
책 뒤표지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와 단지 지켜 볼 수밖에 없는 아들이 나눈 삶과 사랑과 고통에 관한 대화’
대구 영남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강의하신 김치영 목사님과 작은 아드님인 같은 학교 교수 김동건 교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병상에서 나눈 대화를 정리한 책입니다. 책에 대한 소개는 김동건 교수가 쓴 서문으로 대신하겠습니다.
♣♣♣
나는 약 4개월 동안 죽음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죽음이 있었다. 아버지는 바로 죽음의 문턱에 서 계셨고, 나는 산 자로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상적인 대화 외에도 조직신학을 전공한 아버지와 나는 여러 신학적인 주제들을 두고 대화하는 기회를 가졌다.
우리는 고통에 대해, 죽음에 대해, 인간에 대해, 부활과 종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에 어떤 형식이 있지는 않았다. 때로는 병실에서 때로는 아버지가 심한 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시는 가운데 간간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어떤 대는 내가 궁금한 주제에 대해 의도적으로 질문을 하기도 했다.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대화가 아니어서 단편적인 부분도 있고, 끝을 맺지 못한 대화도 많았다.
그러나 죽음을 앞에 둔 아버지의 말씀에는 어려운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었다. 나는 우리의 대화를 아버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에 남겼다.
♣♣♣
저는 이 책에 실린 내용 중 신학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 고통에 관해 보여주신 김치영 목사님의 깊은 통찰력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렇지 않아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고통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얻을 수 있어 정말 감사했습니다. 본인은 매우 고통스러우셨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렇게 그 분의 깊은 통찰력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을 보면 그 고통까지도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오히려 그 분에게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계기가 되게 하셨으니 고통까지도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통의 의미에 대하여
아버지를 그렇게 괴롭히던 위출혈은 멈추었고 심각한 고비는 넘긴 듯 했다. 내일쯤 몇 가지 검사를 해보고 퇴원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아버지께서는 거의 일주일 간을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해 매우 지쳐 있었다. 게다가 병원에 게시는 동안 면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수척해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심한 통증이 있을 때가 아니면 대체로 말씀도 잘 하시고 유쾌하게 대화하려고 노력하셨다. 아버지가 장례절차와 산소 등에 관해 말씀하시다가 문득 ‘고통의 의미’에 대해 물으셨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고통에도 의미가 있을까? 이것은 요 며칠 내가 병원에 있으면서 혼자 생각해 본 주제이다. 사람은 누가나 살면서 고통을 겪는다.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걸려 아프면 육체의 고통을 피할 수 없지.
그런데 어떤 병으로 치료해 나갈 때, 그 치료가 회복을 행해 나아가면 그 고통은 소망과 희망을 가진 고통이다. 이런 경우에는 힘들더라도 곧 나을 것을 기대하며 인내로써 기다릴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치유의 가능성이 없는 병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이는 그 자체가 참으로 힘든 의미 없는 고통이자 절망이다. 치유가 불가능한 병으로 죽을 날만 기다릴 때, 그마저 심한 육체의 고통에 시달릴 때 절망감 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니?“
우리가 심한 고통 속에서 곧 다가올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우리는 남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더구나 아버지의 현재 상태를 생각하니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경우에는 절망감 밖에 없을 것 같아요. 남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쉽지 않지. 그러나 기독교인은 모든 것을 절망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약 죽음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부활을 믿는다. 지금 받는 고통이 인간적으로 봐서 희망 없는 고통이지만, 이를 부활로 나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진통과 산고로 봐야한다.”
“아! 부활로 나아가는 과정으로요!”
“나는 요즘 인간의 삶을 여행에 비유해 생각해 보곤 한다. 인간은 두 가지의 여행을 한다. 한 여행은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여행은 부활체로서 영생을 사는 것이다. 나는 지금 70여 년간 살아온 하나의 여행을 마치고 다른 하나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을 이 세상에서의 여행을 정리하고, 주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여행을 향한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이 말씀은 시한부 삶을 살며, 그 마저도 극심한 고통에 임한 사람들에게 고통의 의미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좋은 신앙의 의미가 되겠다. 우리 가족들도 우리의 병간호를 아버지의 마지막 여행을 정리하고,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는 것을 돕는 것으로 의미를 새롭게 했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나에게 중요한 해석의 실마리를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끊임없이 고통의 현실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려 애쓰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가족들의 마음이 힘들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에 대하여
아버지는 어제 밀알 제자들이 돌아간 후 지금까지 아무 말씀도 못하셨다. 완전히 지쳐 눈도 뜨지를 못하셨다. 간간이 통증을 참느라 미간을 찌푸리는 것만 느껴졌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드시지 못했고 물만 조금 마셨다.
저녁에 내가 아버지 곁에 있을 때 어머니가 다가와 앉으셨다. 나는 어머니와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어머니와 자녀들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주위의 여러분과 의논을 했다. 어머니는 민간요법에 관심을 두고 여러 종류의 버섯을 구해 아버지께 달여 드렸다. 특히 L목사의 부인과 L장로 부부가 많이 수고해 주었다. 아버지는 버섯물을 드시기는 해도 큰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버섯이 아버지에게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우리는 아버지에게 버섯을 구해준 분들의 성의에 깊이 감사한다.
자녀들이 버섯물 그 자체 때문에 어머니와 갈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이런 노력들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가족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들을 기울이지 않겠는가? 단, 자녀들은 아버지가 편찮으신 것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반면 어머니는 그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실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실 수가 없었다. 물론 어머니도 아버지가 위중하시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직 그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아버지와 헤어질 준비가 안 되셨던 것이다. 누가 어머니를 탓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을 당할 때 누가 어머니와 비슷한 심정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자식들은 이런 어머니에 대해 염려를 많이 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어머니마저 건강을 잃지 않을까 우려했다. 우리는 어머니가 민간요법에 관심을 가지더라도 동시에 신앙적으로 죽음을 바라보도록 자주 권면의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오늘 저녁 어머니의 모습이 아주 편안해 보였다. 주무시는 아버지 옆에서 나직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를 데리고 가려고 작정을 하셨다. 그러면 도리가 없지. 나는 그동안 왜 아버지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많이 생각해 보았다. 왜 이렇게 고통 받고 고생하는지 생각해 보았어. 왜 평생을 목사로 산 아버지가 이렇게 돌아가셔야 되는지 모르겠더라. 그런데 갑자기 탁 죽으면 편안할지 몰라도 사실은 허무한 죽음이야. 아버지가 고생은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버지에게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한 평생을 정리할 시간을 주신 것 같다. 아픈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하나님을 증거하였으니, 평소 전한 것을 아픈 동안 몸소 보여준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너희 아버지가 암 걸린 것도 감사하다. 다 주님의 뜻이 있었던 것 같아. 이젠 그저 고생 덜하고 지금 자는 모습 그대로 주님이 데려가시면 좋겠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에 감동을 받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다. 가족들 사이에는 아버지가 암에 걸린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걸리는 시간과 방법이 서로 달랐다. 아마 아버지가 가장 빨리 이 사실을 받아들인 것 같다. 그 다음은 누나였다. 부모님은 누나를 가장 많이 걱정했는데, 누나는 신앙으로 이 사실을 훌륭히 받아들였다.
누나가 아버지께서 암에 걸린 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적 태도를 보면 누나는 자신의 죽음도 훌륭히 받아들일 것처럼 보인다. 그 다음은 형과 나였던 것 같다. 한편 어머니는 지금까지 이 사실을 수용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도 이런 어머니를 걱정하셨다. 그런데 오늘 어머니가 다가올 아버지의 죽음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며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셨다. 나는 어머니의 이런 말씀이 기뻤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가 떠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장례에 대하여
아버지는 그동안 조금씩 말씀하시던 장례와 관계되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격식을 가지고 유언을 하듯이 하신 것은 아니다. 그냥 일상적인 대화를 하듯이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나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고 물론 형에게도 하셨다. 편의상 내가 정리한 것이다.)
“입관 후에는 장의사가 관을 덮는데, 관보로 관을 덮는다. 이 보에는 보통 죽은 사람의 이름을 쓰지. 그래서 '000지구(之柩)'라 고 쓴 보를 관 위에 덮는다. 내 관에는 그렇게 하지말고, 흰 무명에 붉은 색으로 '십자가지도(十字架之道)'라 쓴 천을 덮어다오. 장지에 가서 하관을 한 후에는 그 천을 벗겨서 내 몸에 덮어라. 그 위에 흙을 채우면 된다.
내가 '十字架之道'를 쓰려고 했는데...
관 안에는 아무 것도 넣지 마라. 시신을 관에 넣고, '십자가지도'로 시신을 덮은 뒤, 고운 흙으로 관을 꽉 채워라. 흙 외에는 아무 것도 넣지 마라.
묘비에는 목사라는 칭호를 쓰지 마라. 그냥 '김치영'이라고 이름만 써라. 묘비에는 성서 구절을 하나 새겨다오. 마태복음 6장 10 절 'Thy Kingdom Come(나라가 임하옵시며)'이 좋겠다. 내 평생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며 살았으니...
너희들은 일절 상복을 입지 마라. 그냥 평상복을 입도록 해라. 깨끗한 정장 차림이면 된다. 유족의 표시를 위해 꼭 필요하다면 넥타이 정도는 공동으로 준비해도 괜찮겠지. 그러나 검은 색으로 하지는 마라.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삶 속에서 그냥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것이야. 인간적으로 슬프겠지만 터져 나오듯이 울거나 곡을 하지는 마라. 믿음도 소망도 없이 모든 것이 끝난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부조는 받지 않도록 해라. 가족들에게 다소 경제적 부담을 주는 것인지는 모르겠구나. 나는 목사로서 평생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사람들이 번거롭게 장례에 참석하는 것만도 미안한 데, 부조까지 받아 부담을 주고 싶지 않구나.
마지막으로 장례예배에 대해 말하니 잘 기억해두어라. 장례예배의 모든 절차는 하은규 목사에게 맡긴다. 이 사람, 저 사람 와서 형식적으로 순서를 하나씩 맡는 것이 뭐가 좋겠니? 한국교회가 총회장을 지역 안배로 매년 돌아가면서 뽑더니, 요즘은 매사에 구색 맞추기에만 신경을 쓰는구나. 무슨 행사나 예배를 드리면, 거기에 필요한 분을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직책에 따라 순서를 맡기지. 설교나 기도도 노회장, 부노회장, 서기, 이런 식으로 맡아서 한다. 내가 경북노회의 노회장을 지냈으니, 내 장례도 노회에서 주관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노회에서 내 장례를 형식적으로 맡아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목사가 사회와 기도 등 모든 순서를 맡도록 해라. 설교는 내가 준비한 것을 읽으면 되겠지. 하 목사에게 연락해서, 미리 준비해 설교 좀 힘 있게 하라고 해라. 처음 보는 원고 읽듯이 더듬더듬하지 않도록 말이다. (웃음)
장례예배 때 죽은 자를 위한 일체의 조사나 약력 소개를 하지 마라. 매우 단순하고, 은혜 넘치는 예배 외에는 어떠한 것도 추가하지 않도록 해라.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부족하고 부끄러운 삶을 살았어. 철저하게 죄인으로 살다가 간다. 하나님 앞이나 사람들 앞에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언제 태어나서, 무슨 공부를 했고, 어떤 직함을 가졌고, 이런 것들을 너절하게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이 싫어서 묘비에 '목사' 칭호도 뺐다. 내가 무슨 내세울 것이 있느냐? 내 시신을 앞에 두고 추모사를 읽고, 약력을 나열하며,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말한다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신유의 은사에 대하여
저녁 무렵 어머니가 아버지 곁으로 오셨다. 부모님께서는 사소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셨다. 대화가 끝날 즈음 아버지가 기도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아버지 말씀은 쉽게 부담 없이 시작되었지만, 사실은 상당히 심각한 내용이었다.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말씀하시는 태도도 편안해서 듣는 사람에게 무리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 우리 가족 모두에게, 최소한 나에게는, 매우 긴장되는 내용이었다. 왜냐 하면 아버지는 기도에 대한 일반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중병에 걸린 당신을 두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목사의 가정이다. 가족 구성원 각자는 나름의 기도생활을 해왔다. 나는 종종 기도회를 인도하거나, 신학교에서 기도에 관해 가르치기도 했다. 나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매우 잘 아는 사람으로 공인(?)받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막산 아버지가 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나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당황했다.
아버지의 중환이라는 ‘사실’을 두고 기도해야 했기 때문에 기도를 모호하게 할 수 없었다. 이제 기도가 추상적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분명한 기도의 방향이 있어야 했다. 기도의 응답은 구체적인 능력으로 나타나야 했다. 아버지의 중환을 통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 것 하나 명확히 답변할 수 없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엇었고, 기도의 방향도 정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기도는 그때그때의 답답함을 외치는 것이었을 뿐이고, 당연히 나의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했다. 나는 확신 속에서 기도하지 못했고, 기도 중 주님의 힘찬 음성을 듣지도 못했다. 이런 사실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런데 오늘 아버지가 기도에 대해 말씀을 꺼낸 것이다. 아버지는 언젠가 누나가 아버지께 자신의 기도 제목을 말하면서 ‘신유의 은사를 바라며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총을 기다린다.’고 한 말을 상기시켰다.
“그 때 내가 윤경에게 그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했지. 생각해 봐라. 많은 사람들이 암으로 고통을 겪으며 죽어 가는데, 나만 거기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게 옳은 기도겠니? 나는 그런 은총이 오더라도 사양하겠다. 고통과 신음 속에 있는 많은 환자들과 영적인 연대를 가지면 죽음을 맞겠다.”
“신유의 은사를 바라면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기도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야 한다. 때로는 신유의 은사를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아니다. 나의 나이를 생각해 봐라. 살만큼 살았고 자녀들을 키우면서 해야 할 책임도 다 하였다. 또 목사로서도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없다. 주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정당한 의미에서 이웃을 위한 봉사도, 헌신도, 복음의 선포도 힘들다. 그런데 억지로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되겠니?”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잠자코 있었다. 나는 잠시 내가 이런 경우가 되면 어떻게 기도할지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라! 병이 낫는 것도 하나님의 기적이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그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기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꼭 낫도록 기도해야 하는 줄 안다. 그런데 주님의 마지막 부름을 순종하며 잘 받아들이는 것도 역시 은혜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과거에 내가 마음대로 죽음을 택할 수 있다면 고통 중에 죽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의미로 암으로 죽는 것도 좋겠다고 이야기한 적은 있다. 그런데 막상 지금 당하고 보니 좀 후회가 된다. (웃음) (여전히 웃으시며 어머니를 향해) 당신은 암 안 걸리도록 기도하시오.
나는 평생 부활과 영생을 전했다. 그러니 무엇이 두렵겠나. 단 한 가지 걱정이 있다. 목사로 평생 살다가 마지막 몰골이 너무 흉하면 그것도 보기에 좋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런 상태로까지 가지 않을 수 있다면 너무 감사하겠다. 내 이야기를 통해 너희들도 모두 어떻게 기도할지 생각해 봐라.“
오늘과 같은 이야기는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편찮으신 이후 비교적 초기에 기도의 방향을 잡으셨다. 물론 가족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잘 이해했다. 기러나 가족들로서 ‘치유를 포기’하는 듯한(?) 기도를 하기는 어려웠다.
대체로 오늘을 지음하여 가족들 사이에 아버지와 기도의 방향을 함께하자는 의견이 조금씩 커졌다. 누나도 아버지의 말씀을 훌륭하게 이해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이런 생각을 작은아버지에게도 전했다.
우리는 점차 기도의 방향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가족들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도는 대략 이런 공통점을 가졌다. 첫 세 개는 아버지를 위한 기도였고, 나머지 하나는 우리를 위한 기도였다.
(1) 아버지의 남은 삶에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간구함
(2) 아버지께 육체적 고통이 너무 지나치지 않기를 간구함
(3) 아버지의 평소 모습이 유지될 수 있기를 간구함 (구체적으로 황달이 오거나 복수가 생기지 않기를 간구)
(4) 우리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기를 간구함
죽음을 본인에게 알리는 일에 대하여
형이 오전에 계명대학교 병원에서 찍은 아버지의 CT 사진을 찾아왔다. 아버지는 경북대학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계셨지만, 의약분업으로 대부분의 병원이 휴진을 했기 때문에 계명대 병원에서 근무하는 박우현 박사가 수고해 주셔서 CT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 형과 함께 오후 4시에 주치의 정 박사를 만나러 경북대 병원으로 갔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내내 우리들은 긴장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병명이 간암으로 밝혀진 후, 주치의의 권유로 색전(embolization)이라는 항암치료를 얼마 전에 받았다. 아버지께는 항암치료 자체가 상당히 힘들었고, 약 일 주일간은 식사를 거의 하시지 못했다. 그 후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웃곤 하셨다.
“언젠가 의학이 좀 더 발전하면 지금과 같은 독한 약물을 주입해 사람을 반쯤 잡는 항암치료를 회상하면서, 옛날에는 저렇게 치료했다고 의학사를 되돌아 볼 날이 올 것이다.”
오늘의 CT는 전번에 한 항암치료가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에 따라 앞으로의 치료방법이 달라지게 되어 있었다. 나는 정 박사를 기다리는 동안 여러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혹시 경과가 나빠지지는 않았을까? 경과가 좋아서 한 번 더 항암치료를 하지고 하면 아버지가 순순히 하려고 하실까? 병이 진행되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러나 이런 생각들 외에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도 의사가 ‘오진이었습니다!’라고 말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CT 사진을 유심히 살펴 본 정 박사는 한 달쯤 뒤에 다시 경과를 보자고 말했다. 그는 이번 검사를 통해 아버지의 병세가 처음 진단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음을 확인해 주었다. 처음 검사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병세가 상당히 치명적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정 박사도 아버지의 병세에 대해 ‘몇 개월’ 정도라고 말했다.
나는 정 박사의 방을 나올 때 구체적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이제 아버지의 병세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병원 주차장으로 걸어 나올 때 내리쬐던 햇빛에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여러 생각들이 조각처럼 부서지며 두서없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이제부터 힘든 길을 가셔야 한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머니는 잘 견디실까? 목사로서 평생을 깨끗하게 사신 아버지의 모습이 꼭 이래야 하는가? 하나님은 아버지와 우리 가족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가? 나는 무어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나는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나는 완전히 당황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 순간의 어지러움, 그 느낌, 가슴이 울렁이며 구토가 일어날 것 같은 메스꺼움을 기억한다. 그러면서 마흔이 넘은 나이에 목사로서, 신학교수로서 많은 말을 하고 다녔지만, 아무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주차장에서 늦은 오후의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왜소한 자신을 마주쳤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조금 마음의 안정을 취했다. 먼저 병세에 대해 아버지께 무엇이라고 말씀드릴지를 형과 의논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정확하게’ 말씀드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머니와 형은 주치의와 서정규 박사의 권유대로 조금씩 말씀드리기를 원했다. 서 박사는 병원에서의 오랜 경험으로 볼 때, 어떤 사람도 그런 심각한 병세를 들었을 때 결코 좋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목사도 이런 경우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보통 사람과는 다를 뿐 아니라, 목사로서 자신의 삶을 정리해야 할 시간과 준비를 위해 모두 말씀드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우리들은 ‘몇 개월’이라는 용어는 빼고, 표현은 완곡하지만 아버지가 병세에 대해 짐작하실 수 있을 만큼은 말씀드리기로 하였다. 아버지께 병세를 말씀드린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당신의 남은 삶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동시에 나도 이것을 나의 현실로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했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우리에게만 특별히 힘든 일이 아니라, 그동안 주위에서 무심코 보아온 모든 암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우리 가족 모두에게 힘든 과정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죽음을 맞는 일에 대하여
한국에 있던 가족들이 아버지의 병명을 알게 될 때 누나는 두 아들과 함께 미국에 있었다. 누나는 채호(큰 아이)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을 돕기 위해 1년 전 미국으로 갔는데, 채호의 대학 진학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채호는 미국에 남고 채인(둘째)이를 데리고 한국에 나올 계획이었다. 누나는 한국으로 오기 전에 두 아들과 함께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행은 2주 정도로 계획되었고, 가족들이 함께하는 미국에서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아버지의 병명을 안 후, 누나에게 전화를 해보니 여행을 3일 남겨두고 있었으며 비행기 예약 등은 모두 끝나 있었다. 우리들은 누나에게 아버지에 대해 지금 말할 것인지, 아니면 몇 주 후에 이왕 귀국할 것이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를 두고 잠시 토의를 하였다. 토의는 금방 합일점에 도달했으므로 길게 끌지는 않았다. 어머니, 형, 나, 모두는 누나에게 즉시 연락해 한국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평상시에도 신문에서 운동경기에 나간 선수들의 부모가 돌아가셨는데도 가족들이 그 선수에게 경기가 끝날 때까지 부모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기사를 볼 때마다 의아하게 생각했다. 혹은 어떤 선수는 부모의 임종을 알았는데도 경기가 끝난 뒤에 귀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일부 신문은 기사를 쓰면서 이런 선수와 그 가족들의 행동을 은근히 미화하는 느낌을 주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성서는 부모와의 관계를 인간이 가지는 원관계라고 말한다. 우리 자녀들은 아버지로부터, 성서가 가르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동양의 유교 문화권에서 강조한 부자지간보다 더 중요시된다고 배웠다. 게다가 부모님께서는 딸과 아들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키우셨고, 누나는 우리 집의 엄연한 장녀였다. 만약 누나가 아무 것도 모르고 여행을 한다면, 그 후 누나가 돌아와 아버지가 편찮으신 것을 알았을 때 그 느낌이 어떠할까? 언제 귀국하느냐에 대한 결정은 누나가 하겠지만, 우리는 아버지에 대해 연락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누나를 놀라게 하기 않기 위해 아버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빨리 귀국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표시는 분명히 했다. 누나에게 전화해 대화를 기술적으로 하는 것은 자형이 잘 해 주었다. 누나는 두 아들과 함께 이틀 후 대구로 왔다.
우리 모두는 (특히 아버지께서) 누나에 대해 염려했다. 누나는 감수성이 풍부한데다가 아버지와 워낙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병환이 너무 큰 충격이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걱정은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아버지가 편찮으신 동안 누나가 보여준 인간성과 신앙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 후 나는 ‘김윤경 집사’의 신앙을 통해 여러 번 나의 신앙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가족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원칙이 없으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혼란이 온다. 우리 가족들도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누나의 귀국과 유사한 경우가 형, 김동선 목사에게도 있었다.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 형은 학교에서 안식년을 얻어 두었고 6월말에 남아공화국으 모 대학으로 떠나도록 조치가 되어 있었다. 그런 기회란 자주 오는 것이 아니었고, 또 이미 진행된 일들을 모두 취소하는 것이 쉽지도 않았다. 당시 가까운 의사 중에는 형에게 예정대로 떠나기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금방 돌아가시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임종이 가까울 때 귀국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물론 이 충고는 사랑에서 나온 것이고 감사한 것이었다.
우리 가족들은 그 결정을 형에게 맡겼다. 형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아버지 곁에 남았다. 누나는 두 아들과 미국에서의 멋진 여행을 포기했고, 형은 오랫동안 계획한 남아공화국에서의 안식년을 포기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누나와 형의 판단과 결정은 훌륭한 것이었다. 나는 그 후 이 주제에 대해 대화해 본 적은 없지만, 당시 그들이 내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나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두 자녀가 보여준 동일한 판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들이 내린 결정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지만, 그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가치관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가치관의 형성은 아버지의 교육에서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사랑으로 키우셨지만, 상당히 엄격하셨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자식들 위주’로 키우지 않았다. 아버지는 결코 ‘너만 잘되면 부모는 희생되어도 좋다.’라는 식의 말씀은 은유적으로라도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식이 행해야 할 마땅한 위치’를 성서에 근거해 가르치셨다. 특히 십계명, 창세기 5장 21-24절, 에베소서 6장 1-3절에 대해 해석하며 가르치신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이 주제에 관해 몇 차례 설교를 하시기도 하였다. 그 중 두 편의 설교는 아버지의 출판된 설교집 ‘한 알의 밀이’에 실려있다. (기독교문사, 1995) 설교 제목은 ‘부모와 자녀(Ⅰ, Ⅱ)’이다. ‘부모와 자녀(Ⅰ)’은 부모에 대한 것이고, ‘부모와 자녀(Ⅱ)’는 자녀에 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