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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스크랩 김영애 권사 - 한동대 김영길 총장 부인 2007/12/21 00:18
회복 추천 0 조회 382 11.11.10 11: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영애 권사 - 한동대 김영길 총장 부인 2007/12/21 00:18

 

출처 =  http://blog.naver.com/karamos/80046139920 

 

김영애 온누리 교회 권사  한동대 김영길 총장 부인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2004-04-21

 

 

1.‘한동대’는 남편에 주어진 소명

 

그동안 내가 걸어온 길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매우 험난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길목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수없이 지켜보면서 그분의 손에 이끌려 길을 떠난 사람은 그 길이 아무리 캄캄하더라도 가장 안전하게 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2005.11.17 15:26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역시 '갈대상자'속에 담긴 모세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듯이 한동대를 고난속에서 인도하고 건져내신 그 분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 고난 중에 역사하신 그분의 섭리를 깨달았을 때의 감격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1994년 1월20일 대덕연구단지내의 한국과학기술아파트. 매서운 겨울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있었지만 저녁식사 후 남편과 오랜만에 마주 앉아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의 오랜 친구 손진곤 변호사였다.

 
"김 박사님, 한동대라는 종합대학교가 포항에 새로 세워지는데 내년에 개교한답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지는 그 대학에서 크리스천 과학자인 김 박사님을 초대총장으로 모시고 싶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는 큰 숙제를 받은 부담감으로 기도해야 했다.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사람의 초청인지 분별하게 하소서."

이후 목사님의 설교, 성경묵상, 기도 등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채널을 모두 열어놓고 귀를 기울였다. 전화를 받은 다음 주일날의 설교 본문은 사도행전 9장이었다.

 

 "어느날 경건한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당시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악명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바울은 아나니아의 즉각적인 순종으로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음성에 예민하게 귀기울이며 순종하는 사람을 지금도 찾고 계십시나. 이 땅에 기독교대학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가 대학과 학문의 주인인 것을 선포하는 학문과 신앙이 하나가 된 대학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대학이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아나니아의 순종과 기독교대학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목사님은 이미 우리 사정을 다 아시고 설교를 하시는 듯했다. 그때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염려가 앞섰다. 변화를 싫어하며 현재 생활에 만족했던 나였기에 남편이 지금까지 해온 연구를 중단하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을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94년 1월말 남편이 두번째로 한동대를 방문할 때 동행했다. 이사장님은 환경폐기물 처리사업으로 자수성가한 분이었다. 사업이 번창하자 사회에 기여할 뜻있는 일을 찾다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종합대학교를 설립하기로 했다는 말에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이 그에게 물었다.  


"이사장님, 정말 순수한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대학을 세우실 결심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김박사님, 기독교 정신의 명문대학을 세우는데 힘을 다하겠습니다. 총장직을 수락해주십시오."

이사장의 이야기를 듣던 남편은 어느덧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도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귀한 일에 저를 불러주시니 영광입니다."

정리=이지현기자

 

◇약력

△이화여대 동대학원, 뉴욕주립대대학원 졸업 △고려대 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 △이화여대 강사 역임 

 

 

2. 유학 청년 사진만 보고 편지 교제


확고한 믿음을 갖고 한동대 초대 총장직을 수락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내심 놀랐지만 그의 뜻을 따랐다. 이때부터 우리는 끊임없는 근심과 걱정에 시달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 하나로 버텨갔다. 만약 우리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건너오기 힘든 강이었을 것이다. 


사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는 성경말씀은 우리 부부를 두고 한 말씀이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을 가진 나는 결혼할 때 꼭 크리스천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지만 사실 종교적인 습관만 몸에 밴 크리스천이었다. 오히려 남편을 통해 거듭난 신앙을 소유할 수 있었다. 지금도 친구들은 신랑 형님에게 선보이고 결혼한 내 결혼이야기를 하며 짓궂게 놀린다.  


1969년 이화여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대 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을 때였다. 김종길(고려대 영문과) 교수님이 연구실로 찾아오셨다.  


“내 친척 동생인데 서울공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지금 미국 뉴욕의 렌설리어 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 중에 있어요.”

사진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그의 셋째형인 김호길(당시 미국 메릴랜드대 교수) 박사가 마침 소련핵물리학회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하기 전 서울에 1주일간 머무른다며 그때 한번 만나자는 것이었다. 김종길 교수와 함께 했지만 여간 거북한 자리가 아니었다. 신랑 될 사람에 대해 한 마디도 묻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선을 보인 것이었다.  


그해 6월,김영길이라는 이름이 적힌 항공우편 한 통을 받았다. 글자 하나하나가 단정했다. 세번째 편지가 도착하자 그의 집안을 잘알고 계셨던 부모님은 결혼에 적극 찬성하시며 답장을 쓰라고 재촉했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첫번째 편지를 썼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혹시 기독교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같은 신앙을 가진 분과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늘 해왔습니다.”

편지를 보낸 후 1주일에 한번씩 오던 그의 편지가 한동안 끊기더니 한달쯤 후에 답장이 왔다.  


“저는 지금까지 신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자라면서 한번도 교회에 가본 적도 없고 누구도 나에게 전도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받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신이 정말 존재하는지 저도 앞으로 연구해 보겠습니다.”

그의 편지는 과학도답게 단순하고 담백했지만 행간에서 그의 깊은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편지는 이틀이나 사흘에 한번,때로는 하루에 2통씩 한꺼번에 도착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한번도 본 일이 없는 청년에게 청혼을 받았다. 친구들은 “요즘 세상에 사진만 보고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건 대단한 모험이야. 신랑 형님에게 선을 보이고 결혼하다니 너 정신있니?”’라며 핀잔 섞인 충고를 했다.  


1970년 6월8일. 그가 귀국하기 전날 밤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초여름에 겨울양복을 입고 까만 뿔테 안경에 비쩍 마른 체격,덥수룩한 장발…. 공항에서 처음 본 그는 영락없는 촌사람이었다. 결혼식을 엿새 앞두고 박사학위 자격 시험을 보자마자 귀국하느라 이발할 시간조차 없었다고 했다.  


지난 겨울 약혼기념으로 보낸 겨울양복을 입고 귀국한 것이다. 그리고 6월15일 편지와 전화만으로 마음을 주고받은지 1년만에 우리는 그렇게 결혼했다.

 


3 과학자 남편 뒤흔든 ‘성경속 기적’

 

남편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결혼 후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한 남편은 내게 시도때도 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물이 포도주로 어떻게 변한단 말이오? 물을 배달하는 동안 알코올로 화학방정식이 바뀌고 말았으니…지금까지 상온에서 핵융합반응이 일어난 적이 없어요. 더구나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이고도 남았다니 이번에는 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양적 팽창이 일어났으나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보다 더 기막힌 기적이군…이것은 과학의 기본법칙인 질량 보존의 법칙에 어긋나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남편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답할 성경지식이 없던 나는 대답이 궁해질 때마다 협박하듯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과학법칙을 가지고 그렇게 자꾸 따지면 하나님 기분이 썩 좋지 않으실걸요. 성경은 무조건 믿어야 돼요,무조건.”

“그렇지만 납득할 수 없는 사실 외에 성경에서 받아들일 것도 많아요. 기독교의 도덕률은 어느 종교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것 같소.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은 유교에서 들어보지 못했소. 이왕이면 도덕적으로 한 차원 높은 기독교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게 좋으니 교회는 계속 나가겠소.”

 

박사학위를 마친 남편이 미국항공우주국 루이스연구소에 근무할 때였다. 그즈음 우리 부부가 출석하던 클리블랜드 한인교회 교우들 사이에 김영길 박사에게 거듭남의 믿음을 달라는 중보기도가 이어졌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내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할 린지의 ‘유성지구의 대해방’을 읽고 있던 그는 환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야 알았소. 예수님은 내 죄에 대한 보석금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소.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비과학적이라기보다 초과학적 사건이기 때문에 과학으로 증명할 대상이 아니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오.”

그의 말을 들으며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조각난 성경지식이 퍼즐이 맞춰지듯 확 연결되고 있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건만 진리에 무지했던 나는 그날 밤 비로소 거듭났다.  


“주님,어찌하여 오늘 이 진리를 우리 부부에게 동시에 깨닫게 해주십니까! 저희들의 삶과 가정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소서.”

이후 나사에서 연구생활을 하던 남편은 세계 최대의 니켈회사인 인코중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가 살던 동네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지만 한국 사람은 거의 볼 수 없는 매우 적적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영구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연로하신 시부모님과 친정아버지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1979년 남편은 유치 과학자로 영구 귀국,한국과학원 재료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느끼는 감회는 새로웠다. 12년전 해외여행 지정액 150달러를 가지고 떠난 유학길,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헤아려 보았다. 박사학위도 받고 나사와 인코에서 7년동안 연구경험을 쌓고 아들과 딸 (당시 호민 9세,종민 7세)를 거느리고 돌아오게 되었다.  


새로운 만남이 홍릉과학단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릉과학단지의 크리스천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았던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었다. 상당수의 유치 과학자들이 유학시절 크리스천이 되어 귀국했던 것이다. 그때의 만남이 한국창조과학회의 태동을 예비하고 있었다.

 


4 교회밖 첫 창조론 세미나 대성황

 

1980년 민족복음화 행사 중에 창조과학세미나를 계획하고 있던 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는 한국측 창조론 강사를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학자 장로님들을 찾아가 부탁했으나 한결같이 진화론을 반박하는 강사로 나서기 난감하다고 사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청을 받은 남편은 “저는 그 주제에 적합한 전공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 한다면 저라도 하나님의 명령인줄 알고 순종하겠습니다”라며 승낙했다.  


1980년 8월 사흘에 걸쳐 ‘창조냐 진화냐’란 주제로 창조과학세미나가 열렸다. 남편의 준비과정을 지켜보면서 내 마음도 설레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사흘 동안 4000여명의 인파가 참석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만 가르치던 창조론을 교회 밖에서 과학적으로 고찰한 우리나라 최초의 세미나였던 탓이다.  


진화론이 인류 기원에 대한 가설에 불과한 것을 밝히고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복음으로 연결한 사흘 동안의 세미나는 교계와 학계에 커다란 파문과 도전을 주고 성황리에 끝났다. 그후 5개월 뒤인 1981년 전경련회관에서 300여명의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한국창조과학회를 창립했고 남편은 창조과학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한국창조과학회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했으며 복음 증거의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그무렵 남편이 미국 나사(NASA)에서 발명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곧 미국산업발명연구상도 수상했다. 참으로 절묘한 시점이었다. 김영길이라는 과학자가 과학과 종교를 혼동하는 실력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하나님께 주신 상급이며 방패였다.

 
결혼전 내 꿈은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무렵 내게 하나님께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주셨다. 귀국한지 1년 지났을 때 스승인 추국희 교수님(이대 특수교육학과)이 봄학기부터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맡으라고 하셨다. 무척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 내가 맡은 첫번째 과목인 ‘특수교육교재개발’을 잘 가르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나는 미국에 거주할 당시 뉴욕 주립대 특수교육학과 대학원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저를 부르신다면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치며 종강시간에는 꼭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로부터 14년 동안 한번도 결강이나 지각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내 건강과 환경을 지켜주셨다. 첫 종강시간이었다. 나는 마치 이 시간을 위해 한 학기가 존재했건 것처럼 학생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한 학기 동안 배운 학문과 지식으로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은 무기가 아니고 사람입니다. 어떤 훌륭한 교재나 지식보다 교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을 인식하며 더욱 성실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교사가 무능해서 잘못 가르쳐도 아무도 교사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고 그 아동의 장애 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영생을 얻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게 되면 우리의 생은 놀랍게 변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쑥스러워하지 말고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십시오.”

 


5 뜻밖 사고로 학교설립 한때 위기

 

한동대가 개교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문적 탁월성과 학생들을 섬길 사명을 가진 교수들을 찾는 일이었다. 남편과 함께 활동했던 창조과학회 동역자들이 속속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모두 새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 초청받았다는 자부심으로 정든 곳을 훌쩍 떠나왔다. 
그러나 꿈이 클수록 그 꿈이 실현되기까지는 숱한 장애가 있는가 보다. 순수한 하나님의 대학인 한동대의 출범에 아무런 장애 없는 탄탄대로가 펼쳐지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첫번째 장애는 너무나도 빨리 나타났다.

 
남편이 한동대 교수 모집을 위해 미국 출장중이던 94년 6월말 신문 사회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설립자가 경영하는 회사에서 큰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러나 설립자 송 이사장은 걱정하지 말라며 오히려 우리를 안심시켰다.  


7월말 폭염이 계속됐다. 남편은 개교 준비에 눈코뜰새가 없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대로 송 이사장은 개교 계획을 백지화해야겠다고 침통하게 말했다. 그러나 한동대가 기독교 정신의 대학이니만큼 한국 기독교계의 도움을 얻든지 학교를 맡아줄 기독실업인을 찾아보라고 말했다. 생애를 건 선택 앞에서 우리는 엄청난 고민의 늪속으로 빠져들었다. 어쩌면 이사장은 학교를 포기했는데 총장 내정자가 더 이상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지도 몰랐다.

 
94년 여름,포항의 온 산과 들은 유례 없는 폭염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한동대행을 결정한 김영섭(미국 헌츠빌 인터그래프 연구개발부장) 박사가 잠시 귀국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가 과연 14년 동안의 미국생활을 포기할까? 우리 집을 방문한 그에게 물었다.

 
“학교 상황이 이런데 그래도 귀국하실 건가요?”

“사모님,하나님의 일이 어찌 기도없이 순탄하게 이루어지겠습니까. 모든 게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이지요. 저는 옵니다.”

그의 말은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국내에서 합류하기로 한 교수들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개교를 위해 그해 8월부터 학교 홍보를 시작해야 했지만 학교측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뜻하지 않은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남편이 나사(NASA)에서 이룩한 업적으로 미국 과학학술원이 선정하는 94년 미국 과학인명사전에 수록된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매스컴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한동이란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속에 점차 사라지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있었던 내 바람과 달리 주요 일간지에서는 그를 한동대 총장 내정자라고 소개했다. 이 기사를 보고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에게 족쇄를 채워버린 느낌이었다. 이후 월간지와 주간지에서 인터뷰 요청이 잇따랐다. 고맙게도 기자들은 과학자 김영길 박사가 총장으로 내정된 지방 신설대학에 특별한 관심과 호의를 갖고 취재해 주었다. 그 보도 덕택으로 한동대가 내년에 개교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됐다. 해외의 신임교수들도 귀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이제는 포기할 수 없었다.  


개교 인가에 필요한 교육부 예치금 30억원이 시급히 필요했다. 그 돈이 마련된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첫발을 떼지 못하고 주저앉을 수 없었다. 온누리교회가 9억원을 후원해주는 등 우여곡절 끝에 예치금을 마련,94년 12월 4일 드디어 교육부로부터 최종 개교 인가를 받았다.

 


6 “20억 마련 못하면 부도 납니다”

 

지난 95년 3월7일은 개교식과 입학식,또 초대총장 취임식이라는 세가지 경사가 겹친 날이었다. 한동대 역사의 첫 페이지를 여는 날 전국에서 몰려온 학생들이 싱싱한 젊음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난 거의 사색이 돼 앉아 있었다. 3월의 쌀쌀한 날씨 탓이 아니었다.  


한동대에 미래를 내맡긴 저들의 눈빛 때문이었다. 늠름하고 총명한 신입생,기대에 찬 학부모와 교직원,수많은 축하객들의 저 눈빛,남편이 꿈꾸는 새로운 교육에 대한 멋진 청사진들이 재정적 뒷받침 없이 어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모든 일의 책임자가 남편이라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이 떨렸다. 
그날의 입학식은 학생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총장과 교수와 그 가족들,학부형들이 함께 입학식을 치른 것이었다. 그 학교의 이름은 ‘광야대학’이자 ‘하나님의 대학’,‘고난대학’이자 ‘기도대학’ ‘성령대학’이었다.  


개교 후 남편은 그동안 계획했던 꿈들을 하나씩 펼쳐갔다. 유능하고 정직한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비전으로 학생들에게 무감독 양심 시험을 실시하기로 했다. 양심시험제도는 눈에 보이는 사람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그무렵 한 일간지는 한동대를 이렇게 평했다.

 
“과학자 출신의 총장이 1년여에 걸쳐 한동대 실험을 하고 있다. 영어와 컴퓨터에 능통한 평균연령 37세의 교수진,무전공 무학과 입학,담임교수제,양심시험제,한자교육 강조로 개교 1년여만에 명문대 대열에 들어섰을 정도이다. 재교육이 필요없는,철저하게 실용적인 산업체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한동대를 이끄는 김영길 총장의 꿈과 포부는 세계로 ‘열린 대학’을 지향하는 것이다.”

 

어느날 퇴근한 남편은 학교에 카페를 만들어야겠다고 밝혔다. 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이 “총장님 저희는 생활관하고 도서관밖에 갈 곳이 없어요. 차도 마시고 음악도 듣고 친구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카페를 만들어주세요.”라고 말해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고심하는 남편에게 빚진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당신의 아들이 학생들에게 식언하면 되겠습니까. 카페를 만들 수 있도록 돈을 좀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낟알을 셀 수 없는 곡식자루를 우리 앞에 쏟아주셨다. 몇주후 예전에 함께 성경공부를 했던 기독실업인회의 성인숙(강호규 사장의 부인) 집사 부부가 찾아왔다. 그녀의 부친은 고 성운량 성미전자 회장이었다.  


“아버님이 주신 유산으로 더 넓은 아파트에서 더 좋은 자동차를 타고 좀더 편하게 살 수 있겠지만 저희는 재산보다 더 값진 아버님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기로 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20억원을 후원해주었다. 성운량 회장의 호를 딴 효암채플과 학생들을 위한 카페를 건축하기로 했다. 그해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 네 분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시숙과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병약하던 시누이와 시아버님마저 차례로 돌아가셨다.

시아버님을 잃고 상중에 있는 우리에게 날아든 소식은 절망적인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슬퍼할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았다.

 
“총장님,10월말에 20억원짜리 어음이 돌아옵니다. 갚지 못하면 학교가 부도납니다.”

 

 

7 채플기금 담보로 융자받아

 

어음변제시간이 흐를수록 96년 신입생들을 위해 하루빨리 새 생활관을 지어야 한다는 초초감이 남편의 마음을 짓눌러 갔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은 결단을 한듯 ‘금과 은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며 건축을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건축비를 갚지 못하면 남편에게 큰 어려움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20억원짜리 어음 만기일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지친 모습으로 퇴근한 남편이 말했다.  


“오늘 효암채플 기금 20억원을 담보로 18억원을 대출받아 가까스로 어음을 막았소.”

나는 절망감에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우리는 성집사 가족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말았군요. 지금 한동대를 시립화하겠다고 야단들인데 채플기금이 없어져버리면 이제 그들을 어떻게 보겠어요.”

그러나 엉뚱하게 쓰인 20억원 이야기를 전해들은 성집사 부부는 오히려 남편을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학교를 위해 드린 것입니다. 아마 바로 이때를 위함인 것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채플기부금과 어음 액수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도 묘했다. 20억원은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던 여호와 이레의 증거였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지역신문에 ‘김영길 총장 20억원 기부금 유용으로 공금횡령’이라는 기사가 등장했다. 고발전쟁의 신호탄이었다.

그 기사와 함께 학교와 총장을 정면으로 비방하는 성명이 몇몇 지역신문 사회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선린병원을 통째로 한동대에 기증하고도 터무니없는 공격을 받고 있던 김종원 원장이 말했다.  


“총장님,요즘 저는 하루에도 수없이 하나님께 기도만 드립니다.”?

그후 이사장 선임 절차를 위한 이사회를 이틀 앞둔 저녁,선린병원측에서 남편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저희 원장님께서 심려가 너무 크셔서 식사도 못하시고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원장님께 이사장직을 사퇴하시도록 권유했습니다.”

누가 한동대 이사장이 되든지 김원장님과 같은 수모와 공격을 당할 게 뻔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법인이사 가운데 우리가 부탁할 분은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뿐이었다. 전화로 간곡히 모레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결정돼야 한다고 부탁을 드렸다. 다음날 밤 9시가 넘었을 때 기다리던 하목사님께 전화가 왔다.  


“장로님 내외분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나 봅니다. 마침 어느 분이 학교를 돕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한동대는 가라앉지 않겠구나. 그렇게 해서 하 목사님은 졸지에 한동대 제2대 이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였다. 하 목사님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학교를 돕기로 했던 그 기업가에게 발신인 불명의 우편물이 수차례 전달되자 뜻밖의 상황에 곤혹감을 느껴 모든 계획을 백지화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는 환난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도 잊은 채 하 목사님마저 곤란한 처지로 몰아간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정작 목사님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총장님,제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있습니다. 제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했던 것 같습니다. 저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제가 의지하던 안전 발판을 빼버리셨습니다. 이제부터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이지요.”

한동호는 또다시 앞이 보이지 않는 광풍 속에서 표류 위기에 처했다.

 


8 백방노력 부도막은 남편 형사고발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어음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남편은 휴대전화기를 들고 살다시피했다. P사의 어음 16억원에 대해 1개월 지불 연기를 겨우 얻어내고 한숨 돌리려는데 은행 마감시간 직전 P사의 자금 담당자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총장님,저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결정이 번복됐습니다. 어음을 돌리라는 윗분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저로선 어쩔 수 없군요.”

우린 망연자실했다. 2시간내에 16억원을 마련하지 못하면 1차 부도처리가 된다고 했다. 그 다음에는 학교에 관선이사가 파견되고…. 그러나 이 화급한 상황에서 우리는 개교 당시 교육부 예치금 10억원이 은행에 예금돼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16억원짜리 어음을 막아야 할 은행과 같은 은행이라는 사실도 또 하나의 우연이었다. 그 돈을 쓰려면 이사회와 교육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지만 다급한 나머지 사후 승인을 받기로 했고 이튿날 어음 16억원을 모두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내에는 한동대가 부도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게다가 하용조 이사장과 남편은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고 예치금을 썼다는 이유로 형사고발을 당했다. 남편과 하 이사장을 비방하는 투서들이 관계기관과 지역유지,전국의 목회자와 장로들에게 우송되고 있었다. 우리의 심정은 사막 한가운데 서있는 듯했다. 급기야 하 이사장도 검찰에 소환됐다.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갖은 방법을 동원해 공격했지만 하 이사장과 남편은 침묵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핍박을 받자 영적부흥이 일어났듯이 이 일로 인해 온누리교회에는 새벽기도의 불길이 더욱 뜨겁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동대를 공격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한동대가 지나치게 기독교적이어서 선교사 양성 대학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또 지역 학생들이 마음놓고 입학할 수 있도록 입학정원 1만명 이상을 수용하는 대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생 수는 교육부의 허락없이 학교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남편은 앞으로 몇년 후면 우리나라 대학 정원 수와 학생의 비율이 크게 낮아져 지방대학은 미달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질적으로 내실있고 특성화된 지방 명문대학들이 많이 생겨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몇몇 인사들의 위압적 공세는 모든 시민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김영길 총장과 하용조 이사장은 특정 종교에 치우쳐서 한동대 설립 이념을 변질시킨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게다가 몇몇 지역 언론들은 일방적인 정보로 왜곡된 보도를 하고 있었다. 한동대는 철저하게 지역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학교 안에도 심상찮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학교 본관 로비는 농성장이 되었고 평화롭던 학교는 전쟁터처럼 살벌해져 갔다. 두번째 입학식을 치른 후 봄은 아직도 먼 곳에 있는 듯 바닷바람이 쌀쌀한 이른 아침에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총장님,큰일났습니다. 어젯밤부터 학교에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전기도 끊겼습니다. 800명이 넘은 학생들의 아침을 준비해야 하는데 겨우 150명분밖에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설마 했던 일이 기어코 일어났다. 창가에 서 있는 남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개교를 하느냐 마느냐 했던 갈림길에서도,자신을 향한 무자비한 인신공격에도 그는 이처럼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랑하는 학생들까지 겪어야 하는 고통 때문에 그는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고 있었다. 

 


9 단수 사태’계기 학부모 기도회 결성

 

학교에 가보니 학교의 모든 급수와 난방,전기배선이 집결되어 있는 동력실의 기계시설이 모두 멎어 있었다. 생활관의 방마다 생수를 넣어주었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화장실에서부터 강의실과 복도까지 배어나오는 고약한 냄새는 앞으로의 어려움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세수도 하지 못한 채 경황없는 아침을 맞게 된 학생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강의실로 향했고 교수들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수업을 진행했다. 기계과 교수들은 급수를 재개하기 위해 하루종일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정신없는 참담한 하루가 지나고 있을 때 남편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정수시설을 시공한 회사를 찾아야겠는데 그 회사를 찾아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그때 갑자기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얼마 전 포항 북부교회의 찬양대 수련회 강사로 초청받았던 나는 좀 일찍 교회에 도착했었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넸었다.  


“한동대 총장님 사모님이시죠?저는 네덜란드 수도정수시설 회사의 지사장입니다. 2년전 저희 회사에서 한동대의 정수시설 공사를 맡았어요. 각별한 정성으로 지하에 물탱크 시설을 했기 때문에 웬만한 가뭄으로는 물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의 얼굴을 떠올랐지만 어떻게 그를 찾아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 교회 찬양대원인 총장 비서실의 박남주양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내 가까스로 연락이 닿았다. 그는 정희정 사장이었다.

그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학교에 달려와 기계를 점검했다. 그는 며칠전부터 탱크에 물이 들어가지 않은 것 같다며 탱크에 물을 채우고 정수를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튿날 새벽 정 사장은 대구에서 기술자를 데리고 왔다. 그날 오후 드디여 동력실의 엔진이 돌아가고 배수관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메말라 있던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교수들과 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단수된 지 36시간만이었다.  


단수사건을 계기로 학교에는 응급조치가 취해졌다. 학생들의 면학을 방해하는 어떤 집회나 활동도 학교내에서 할 수 없도록 하는 법적 제재였다. 살벌하던 학교 캠퍼스에 오랜만에 평온이 찾아왔다. 학생들은 빗자루와 젖은 걸레를 들고 벽과 창문에 어지럽게 붙어 있던 벽보를 말끔히 떼어냈다.  


기계제어 공학부 학생들은 언제 또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면서 조를 짜서 교대로 동력실을 지키기 시작했다. 교수들도 수시로 동력실에 들러 학생들에게 기계작동 원리를 가르쳐주었다. 학생들은 공부하랴,학교 시설 관리하랴 무척 바빴다. 단수 소식이 알려진 후 어느날 전국 학부모들이 학교로 속속 모여들었다. 한 학부모가 말했다.  


“총장님,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학생들을 두고 떠나시진 않겠지요?”

“하나님의 허락 없이 어찌 제 마음대로 떠날 수 있겠습니까?”

학부형들은 뜨거운 기립박수를 보냈다. 남편은 어린아이처럼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학교 단수사건으로 전국에 90여개의 한동대 학부모기도회가 탄생됐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듯이 소중한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어려움을 서로 나누며 기도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학교를 위해,또 총장이 지쳐서 주저앉지 않도록 중보기도하는 기도회가 있는 대학이 또 어디 있을까?

 


10 재정난 고통…학교 후원운동 벌여

 

엄청난 해산의 고통과 상상을 초월하는 무서운 핍박,끊임없는 재정 위기 속에서 학교의 가난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던 우리는 후원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몇몇 교수들이 이 후원운동을 ‘갈대상자’라고 이름 지었다. 갈대 한 올은 연약하지만 수많은 갈대가 모여 모세를 구한 바구니가 되었듯이 후원자들이 기도로 엮은 갈대상자는 한동대의 세속화를 막을 나무진과 역청이었다.


1998년 미주한동국제재단이 최초로 탄생했고 미주동부지역 한동후원재단,서북미지역 한동대후원회가 잇따라 조직됐다. 당시 외환위기로 나라의 외화가 바닥나고 학교 사정도 목이 타들어가는 듯했지만 한동의 젖줄인 국내외 ‘갈대상자’ 후원자는 줄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 재정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외국인 교수를 제외한 일부 교직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못했다는 남편의 말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나는 사탄이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인 줄 알면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너무 고지식하게 믿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빨간 카네이션꽃 한 바구니가 집으로 배달됐다. 꽃속에 예쁜 카드가 꽂혀 있었다. “학교 재정이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총장님께서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오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저희도 함께 걸어가고 있으니 힘내세요.” 몇몇 교수들이 보낸 것이었다. 교수들은 각자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학교운영비로 융통하도록 도움을 주기도했고 몇몇 교수는 게스트 하우스로 이사해서 자신들의 전세금을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얼마 후 남편은 교수들의 전세금을 불법 차용했다고 업무상 배임죄와 사기횡령죄로 고발당했다. 교수들도 차례로 소환돼 총장에게 은밀한 강요와 압력을 받았는지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교수들은 “학교의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으면 더 보탰을 것입니다. 학교와 상관없는 분들도 우리 학교를 후원하고 있는데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라고 말했다고 했다. 교수와 직원,학생들은 한마음으로 학교를 지키려고 했다. 학부모들은 ‘등록금 미리 내기 운동’을 벌이며 학교 재정을 걱정해주었다.  


1999년 4월16일. 3년전에 시작된 민사소송 1심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교수들의 연속 금식기도,학생들과 학부모들,그리고 국내 한동대 후원자들의 기도는 뜨겁고 간절했다. 마음을 졸이며 재판 결과를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렸다.  


“사모님,우리가 이겼어요!”

당시 최한우(국제어문학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연구실을 나서는데 어디서 개구리울음 같은 소리가 들렸어요. 저는 감전된 듯 그 자리에 서고 말았습니다. 그 소리는 강의실 구석구석에서 흘러나오는 학생들의 기도소리였어요. 또 학생 수십명이 총장실 앞 차가운 복도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더군요.”

 

1995년 개교한 한동대는 입학 정원 600명에 불과한 지방의 한 작은 대학이지만 졸업생들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무더기로 입사해 어느새 한국에서 가장 취업이 잘되는 학교라는 소문이 나고 있었다. 또 군대에 간 학생들은 휴가를 오면 집보다 먼저 학교에 찾아와 생활관에 며칠씩 묵고 갔다. 학생들은 부모님과 집보다 학교가 더 그리웠다고 했다.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애틋했다.

 


11 남편 구속에 학생들 “사랑해요!”

 

2001년 5월11일,남편의 1심 선고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한동대 총장으로서 학교재정문제로 형사고발을 당해 오성연 행정부총장과 함께 법정에 서는 날이었다. 선고재판은 오전 9시30분. 그런데 오전 11시가 넘어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어머니 결과가 좋지 않아요. 아버지는 징역 2년,부총장님은 1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셨답니다.”

아들의 전화 목소리는 떨렸다. 학교측에선 차마 내게 직접 전할 수 없어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 먼저 알렸던 것이다.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재판 결과는 정오부터 방송매체를 통해 전국에 전해졌다. 한동대 개교 이후 남편은 검찰 법원 경찰서 노동청 등에 80여 차례 출두하며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다. 어떤 날에는 검찰 소환으로 아침에 집을 나간 남편이 14시간 동안이나 조사를 받은 후 자정 무렵에야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 서재에서 탈진한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학교의 긴박한 재정 업무를 맡은 오 부총장도 가시밭길을 걷기는 마찬가지였다. 화가 난 채무자가 그의 멱살을 잡고 당장 돈을 내놓으라며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학교 식당 바닥에 꿇여앉힌 적도 있었다. 위로하는 우리에게 그는 웃으며 “학교에 돈만 생긴다면 무릎 꿇는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지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1년 4월,두 사람은 학교 재정과 관련된 문제들로 인해 또다시 기소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시 69:1∼2)

 

큰 충격에 휩싸인 한동대 교수와 학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발적으로 채플실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구속된지 나흘째 되던 날이 스승의 날이었다. 그날 아침 9시,한손에 카네이션을 든 학생들이 학교 채플실로 모여들었다. ‘총장님 사랑합니다’ ‘부총장님 사랑합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두른 1호차와 2호차를 선두로 학생들을 가득 태운 29대의 버스가 그 뒤를 따랐다. 1500여명의 학생과 교수,학부형 300여명이 ‘스승의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노래는 눈물이 되어 흐르고 끝내 흐느낌이 되었다. 이어서 허밍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 불렀다. 그들의 총장님이 가장 사랑하는 찬송이었다. 학생대표들이 두 분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일제히 두 팔을 벌리고 ‘축복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면회를 다녀온 총학생회장 최유강군이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의 총장님,부총장님은 건강하십니다. 총장님이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학생들을 결코 동요하지 말고 공부에 전념할 것과 이번 결정을 내린 사법부에 노여움을 가지거나 상대방의 처사에 분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모든 것이 협력해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잔뜩 긴장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던 경찰들도 학생들의 성숙한 태도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날의 모든 행사를 마치고 역대 총학생회장들인 민준호 이충실군은 학생들이 떠나간 자리를 돌아보며 교도관들과 경찰관들에게 일일이 인사했다.“저희 행사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제서야 모든 긴장과 서러움을 토해내듯 주차장 뒤쪽 땅바닥에 주저앉아 서로 붙들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12‘감옥행’환난후 ‘한동대 가족’더 신실(12·끝)

2001년 6월4일. 총장과 부총장이 구속된지 23일째 되던 날 전국의 한동대 학부모와 졸업생,그리고 재학생 1200여명은 포항 시민회관 앞에서 ‘한동대학교 바로 알리기 궐기대회’를 가졌다. 한동 가족들은 총장과 부총장 구속의 부당함과 석방을 요구했다.

하루 해가 저물어갈 무렵 1.5㎞ 가두행진을 조용하게 마친 학부모들은 학교 뜰을 밟고 기도하고 가겠다며 효암채플에 또다시 모였다. 나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나갔다.

  

 

     한동대 살린 갈대상자 이야기로 인터뷰 중인 총장 부부 

                2004-07-09 10:14 [크리스천투데이]

 

"여러분,참으로 감사합니다. 시련이 그칠 날 없는 한동대에 귀한 자녀들을 믿음으로 보내주신 학부모님들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총장의 아내인 저는 감히 총장님과 부총장님이 감옥에 잘 가셨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겪어온 환난과 모든 서러운 사건들이 이제야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일석이조가 아닌 일석십조를 하실 것입니다.”

 

학부형대표가 큰 대바구니를 내게 건네주었다. 총장에게 드리는 학부모와 학생들의 격려편지들이었다. 석양에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캠퍼스에 학부형의 기도소리가 간절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각계각층의 탄원서들이 관계기관에 전달되었다.  


그해 7월4일. 옥문이 열리던 날이었다. 수감된지 54일만에 남편과 오부총장님은 보석으로 풀려났다. 대구 화원교도소 앞은 모처럼 기쁜 얼굴

 

들로 가득했다.

두 사람이 나타나자 학생과 학부모,교직원들은 환호와 뜨거운 박수로 환영했다. 두 분이 보석으로 석방된다는 통보를 받고 남편의 양복을 챙기는 나의 손은 한없이 떨렸다.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이라던 하나님의 음성을 가슴에 새기고 다시 새기곤 했다. 이후 2001년 12월28일 대구 고등법원에서 항소심이 열렸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주차장과 법원 마당을 서성이며 하늘의 아버지께 숨죽여 기도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재판장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에 기쁨이 가득했다.  


사건 번호가 거명된 뒤 재판장은 5가지 죄명에 대해 대부분 무죄 판결했고 사건 일부에 대해서는 김영길 총장,오성연 부총장에게 벌금형을 부과했다. 이후 2003년 10월16일 총장과 부총장에 대한 형사고발 소송 또한 대법원에서 종결됐다. 긴 시간 광야와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믿는다.  


올해로 여섯번째 졸업식을 맞았다. 매년 졸업식을 치를 때마다 10년전 개교하던 해,광야대학의 첫 입학식 때 느꼈던 두려움을 떠올리곤 한다. 10년이 지난 지금 하나님께선 한동대를 이제 어떤 광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큰 나무로 뿌리내리게 하셨다. 
그리고 두려움의 광야대학을 믿음과 축복의 자리로 바꿔주셨다. 그래서 한동의 졸업식은 이 세상 어느 대학에서도 볼 수 없는 눈물과 감동,감사,서로를 향한 축복이 넘쳐흐른다. 그래서 우린 한동대를 서슴없이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부른다. 때로 아픔도 컸지만 큰 선물도 안겨주셨다.

 
그 기쁜 선물은 바로 다름 아닌 사각모를 쓴 우리 한동의 학생들이다. 앞으로 이들이 사회에 나가 어떻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지,지도자로 보여줄 본이 되는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하루빨리 듣고 싶어 가슴이 설렌다. 그들의 가능성이 바로 우리가 이 광야대학에서 누리는 보람이며 기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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