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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이지명
제 25 문: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입니다. 왜 당신은 그를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세 분으로 부릅니까?
답: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시되, 서로 구별되는 이 세 분의 인격들이 참되고 유일하며 영원하신 하나님이 되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Cum una sit tantum essentia divina: cur tres istos nominas, Patrem, Filium et Spiritum sanctum?
-Quia Deus ita se in suo verbo patefecit, quod tres hae distinctae persone, sint unus ille verus et aeternus Deus.
(해설)
제 25문은 제 24문의 내용을 총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사도신경은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I. 세 분의 인격이 한 분의 하나님 본체
1.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요리문답서도 이런 용어를 사용하기를 꺼렸다. 그런데 이 용어는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요약적으로 표현하는데 가장 어울리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이단에 대항한 1세기의 첫 신학논쟁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이 논쟁의 결과를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이런 신조들은 성경의 발언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정리하되 철학적인 용어를 빌러 정리한 것이다.
“우리가 세 인격 속에 유일한 한 하나님 그리고 유일한 한 하나님 속의 세 분의 인격을 경배한다는 것은 바른 기독교 믿음이다.”
“세 인격들은 서로 융합되어 있지 않고 신적인 본체는 서로 나눌 수 없다”
“한 분의 인격은 성부이고, 다른 한 분의 인격은 성자이며 또 다른 한 분의 이름은 성령이시다”
“그러나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영광에 있어서나 영원한 위엄에 있어서 동등하신 유일한 하나님이다”
“성부는 성부이고, 성자는 성자이다. 그리고 성령은 성령이다”
“성부는 창조되지 않았다, 성자는 창조되지 않았다. 성령은 창조되지 않았다.”
“성부는 무한하시다. 성자는 무한하시다. 성령은 무한하시다”
“성부는 영원하시다. 성자는 영원하시다. 성령은 영원하시다”
“그리고 이들은 세 분의 영원한 자가 아니고 한 분의 영원한 자이다”
“세 분의 피조되지 않는 분이 아니고 세 분의 무한한 분이 아니고 한 분의 피조되지 않은 분이고 한 분의 무한한 분이다”
“말하자면, 성부는 전능하시다. 성자는 전능하시다. 성령은 전능하시다.”
“그리고 이들은 세 분의 전능자가 아니라 한 분의 전능자이다”
“즉 성부는 하나님이다. 성자는 하나님이다. 성령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들은 세 분의 神들이 아니고 한 분의 하나님이다”
“즉 성부는 主이시다. 성자는 主이시다. 성령은 主이시다”
“그런데 이들은 세 분의 主들이 아니고 한 분의 主시다”
“ 그와 동시에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에 따라 각 인격을 하나님과 主로서 고백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세 神들 또는 세 主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성부는 어느 누구에 의해 만들어 지지 않았고 창조되지 않았으며 태어나지 않았다”
“성자는 만들어 지거나 창조되지 않았고 성부에 의해 나셨다”
“성령은 만들어지거나 창조되거나 나시지 않으셨고 별현되고 있다”
“이와 같이 한 성부, 세 성부들이 나이고, 한 성자, 세 아들들이 아니고, 한 성령, 세 성령들이 아니다”
“그리고 이 세 분의 인격들 가운데는 첫째가 없고, 마지막도 없으며 가장 큰 자도 없고 가장 작은 자도 없다”
“세 분의 인격 모두는 서로 간에 동일하게 영원하며 동일하게 크시다”
“따라서 이미 말한대로 세 분의 인격은 한 신성 안에 있고 세 분의 인격 가운데 있는 한 하나님은 경배를 받으신다”
라틴어 Person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 1:3)이라는 말의 표현이다. 인격(person)이란 원래 자아의식적이며 자립적인 본질로서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런 인간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본체를 표현하는 것은 미흡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의 사고능력의 한계를 초월하시기 때문에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한계를 정하고 이해할 수 잇도록 열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은 더러는 하나님이 어두움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하고(왕상 8:12) 더러는 빛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본체를 파악할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계시하셔야 인간은 그 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된다. 문제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나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제시한 하나님 인식방법에 대한 질문이 된다.
2. 우리는 불가시적인 하나님을 그의 계시로 인식할 수 있다. 성경은 세 가지 계시방법을 말한다.
ㄱ) 창조 또는 자연을 통한 방법: “(롬1:19) 이는 하나님을 ( )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 )과 ( )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히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 )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ㄴ) 양심을 통한 방법: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자연인)도 자연적으로 율법의 행위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율법이 이들의 마음속에도 새겨져 있음을 증거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소위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이른 말이다.
ㄷ) 자연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 전능하다는 것, 전지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또 양심으로부터는 악을 비워하시고 벌주시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로는 이 이상은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가운데 나타난 계시만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볼 때까지는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성경의 계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김의 대상을 인식하게 하며 인간으로서 바른 길이 무엇인지 계시한다. “(고전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3. 하나님은 자기의 본체를 자기의 말씀 가운데 계시하셨다:
① 그의 이름을 통해
② 성령의 증거를 통해.
ㄱ) 구약성경이 세 가지 주된 명칭은 מהילא(엘로힘, 하나님) הוהי(여호와) לא(엘)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자에 오른 구절에 의해 증명된다.
“(수22:22)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께 패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는 오늘날 우리를 구원치 마시옵소서” 하나님 또는 엘로힘은 ‘모든 완전함의 충만’ ‘경외함의 총체’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계시하셨다. 여호와는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본체, 하나님의 자아,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내시는 분을 계시하신다. 엘은 능력있는 자의 뜻을 나타내신다. 그외 다른 명은 여기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체바오트는 그의 능력의 충만을 나타내며 主는 가장 높으시고 무한한 능력, 그의 주권을 나타낸다. 엘샤다이는 이슬비가 촉촉히 내려 만물을 풍성하게 만드시듯이 영육간에 아울러 우리를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다. “(약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는 구절은 엘샤다이라는 하나님의 명칭을 해석해 놓은 것이다.
ㄴ) 성령의 증거
①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다.
그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 외에는 다른 神이 없다.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 )인 여호와시니”
“(사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 ) 구원자가 없느니라”
“(호13:4)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 )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42: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내 찬송을 ( )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고전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 ) 밖에 없는줄 아노라 (고전8: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 )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고전8:6) 그러나 우리에게는 (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宗敎多元主義 시대에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성도들은 이런 신관이 요청된다. 그러면 우리는 불신자들 내지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우리의 하나님이 유일하심을 증명할 수 있을까? 그 중에 한 가지 대답이 역사를 보라는 것이다. 역사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민족들이 모든 면에 풍성함을 누리며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은 사람의 머리를 깨우지 못한다. 이런 곳에는 문명의 발전이나 합리적인 삶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런데서는 제한된 먹거리를 서로 빼앗기 위해 시기 질투하고 모함하며 중상모략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② 하나님은 靈이시다.
그가 靈이시라는 것은 그는 완전한 속성을 지니시며 무한하시고 모든 것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을 한 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관사가 없다.
③ 하나님은 빛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지혜의 근원임을 말한다.
“(요일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 어둡게 되어 진리와 거짓을 구별할 수 없음에 대립되는 말이다.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모든 일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빛이 없으면 우리는 구원이라는 목표지점까지 도달할 수 없다.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 )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43: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 )과 ( )에 이르게 하소서”
“(시56: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 )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 )을 얻게 하소서”
“(시89:15) 즐거운 소리를 아는 백성은 유복한 자라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얼굴 빛에 다니며”.
말하자면 빛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성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다는 것이다.
④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영역 속에 스스로를 폐쇄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기의 은사들을 인간에게 전달하신다는 의미를 지닌다. 오직 그 분으로부터 참된 사랑이 흘러 나오는 것이다. 사랑이란 자신의 영역으로부터 나와서 다른 영역속으로 흘러 들어가 자신을 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성육신 사건이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가 거기서 나와 죄인이 거하는 상태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것이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 )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2:7) 오히려 자기를 ( )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 ) 죽으심이라”.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 )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에릭 프롬의 ‘사랑의 예술’에도 사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부부관계를 이용하여 사랑을 설명한다.
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유일한 생명체이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다.
“(렘10: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요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인간이 생명을 누리려면 가지가 원둥치에 붙어있는 것처럼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롬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이 연결이 끊어지면 사망의 상태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이 연결을 범신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관계적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늘 하나님을 찾고 그리워하며 사모하는 자세로 사는 것이 생명의 삶이다.
4.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시되 세 분의 다양한 인격들이 유일하시고 참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셨다.
ㄱ)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암시되어 있고 그것에 대한 지식은 아직 가리워져 있었다.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 )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1:3) ( )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요1:1) 태초에 ( )이 계시니라 이 ( )이 ( )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시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영) 이루었도다”
“(민6:24) ( )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6:25) ( )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민6:26) ( )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사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 ) 거룩하다 ( )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48: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 )을 보내셨느니라”
ㄴ) 신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마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 )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 )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 )와 하나님의 ( )과 성령의 ( )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벧전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 )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5. 하나님의 인격성.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이 각기 서로 다른 인격이며 서로 다른 자아의식과 자립성을 지닌다. 이 세 분은 각각 개인적인 속성과 이해 그리고 의지를 나아가 각자 고유의 사역과 고유의 명칭을 지닌다.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성부 성자 성령 순서로 언급하는 것은 삼위일체가 계시하실 때 가장 부각된 시간순서에 따른 것이다. (창조→ 구원, 화해→ 성화)
ㄱ) 성부 하나님: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이다.
“(엡4: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 )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마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 )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요14:16) 내가 ( )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는 우리 눈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분명히 계신 분으로 묘사된다.
ㄴ) 성자 하나님:
그는 계시자시다. 이것은 ‘구약속의 그리스도’에 대한 문제이다. 이 분은 우리 인간에게 나타나신 분으로 인간과 특히 언약의 백성과대면하신 경우 이 분이 등장하셨다. -여호와의 사자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창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 -얼굴의 천사: “(출23: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언약의 천사(말 3:1이하),
-구름기둥 불기둥. 신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시는 분임을 명백하게 말한다.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 )이 나타내셨느니라”
“(마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 )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요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 )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 )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ㄷ) 성령 하나님:
중재자, 보혜사(요 14:26; 행 5:3,5; 10:19,20; 13:2; 고전 12:11. 그는 보내심을 받았다, 말씀하셨다,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 6. 하나님 본체 속의 세 인격은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나 사역에 있어서는 다양하다. 이 세 분은 구별되시나 나누어지지 않으신다. 삼위일체는 인간의 이성에 충돌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다.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간이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는 인간의 인식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경배의 대상이다. 여기에는 믿음과 더불은 인식으로 그를 알 수 있는 것이다(히브리 사고방식). 성경은 이 삼위일체를 정의하지 않는다. 오직 그의 사역을 보고 우리가 세 분의 관계를 알 뿐이다.
II. 하나님의 속성
우리는 왜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야 하는가? 물론 속성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인식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이 속성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警告가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게 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의 본질은 그의 속성을 통해 분해되는 것이 아니라--마치 분자가 원자로 분해되듯이-- 그 본질의 다양한 관계를 통하여 발산되고 표출된 그 무엇이다. 마치 태양빛이 무지개 속에서 그 본질을 나타내듯이 하나님의 본질도 그러하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① 세상과 관계하여,
② 인간과 관계하여,
③ 자신과 관계하여.
A. 피조물 전체와 관련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1. 전능하심(Allmacht):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자기가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시거나 창조하실 수 있는 속성(창 17:1; 사 40:26; 시 33:9; 115:3; 눅 1:37).
-a) 경고: 그 분 앞에 겸손할 것(창 18:27; 마 10:28)
-b) 우리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움을 의뢰할 수 있다(삼상 14:6).
2. 무소부재(Allgegenwart):
그의 능력의 役事 범위에 제한이 없음(시 139:7-10; 렘 23:23-24; 왕상 8:27)
-a) 경고: 하나님 모르게 범죄할 수 없다. 요셉의 경우는 이것을 잘 반영해 준다(창 39:11).
-b) 위로: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마 28:20; 사 43:1-3).
3. 全知(Allwissenheit):
하나님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일을은 물론 마음의 생각도 다 아신다(행 15:18; 시 139:16).
-a) 경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보심을 알아야 한다(시 14:2; 수 7:13).
-b) 위로: 우리 내외에 있는 모든 긴급사항을 하나님이 잘 아심을 확신함(왕상 17:8-16; 계 2:9).
4. 지혜로우심(Weisheit):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또 자기 자녀들을의 삶을 인도하실 때,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하시되 그 수단 방법이과 계획이 최선이라는 것(시 104:24; 사 28:29; 55:9; 롬 16:27).
-a) 경고: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 자신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의 인도하심으로부터 실족하지 않을 것이다.(사 57:10; 행 10:9-17; 11:12).
-b) 위로: 우리는 적은 일이나 큰일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뢰할 수 있다(시 37:5; 33:24; 창 50:20).
B. 인간과 관련하여
5. 거룩하심(Heiligkeit):
하나님 자신에게는 지극히 작은 얼룩점도 없다. 그는 善을 사랑하시고 惡을 미워하신다(신 32:4; 벧전 1:16; 시 5:5).
-a) 경고: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되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야 한다. 인간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이름은 그 거룩성에 침해를 받았다(마 6:9; 벧전 3:15; 출 19:10).
-b) 위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거룩함에서 분리되어 있던 우리를 거룩게 하셨다(겔 36:25,29; 요 17:19; 요일 1:7; 눅 7:36-50).
6. 義로우심(Gerechtigkeit):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실 때에도 바르게 하신다. 그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ㄴ고 악인을 벌하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고, 그의 마음에 합한자를 축복하신다(시 145:17; 롬 2:6,11; 시 5:13; 마 10:41; 눅 6:23).
-a) 경고: 우리는 우리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자극시키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반면에 그의 義에 따라 노력해야 한다(히 12: 29; 마 6:33; 민 14:35).
-b) 위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義에 이를 수 있도록 공로를 세웠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효력을 발생시키는 이 義를 믿음을 통해 소유하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 안에 머문다(롬 4:5; 3:26; 대상 18:27; 벧전 3:9; 창 22:16-18).
7. 선하심(Guete; Gnade und Barmherzigkeit; Geduld und Langmut):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심, 자비로우심, 오래참으심을 의미하는데, 우리의좋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흘러 나온 것임을 표현한다(출 34:6; 시 145:9; 마 5:45; 롬 9:15; 벧전 3:20; 3:9)
-a) 경고: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 오래참으심을 멸시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에 대해 빨리 심판을 내리지 않는다고 해서 계속 범죄에 머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오용해서 의식적으로 계속 범죄에 머무는 경우 마침내 성령 훼방죄까지도 범할 수 있음을 알자.(창 6:3,17; 17:23; 히 10:26; 유 4).
-b) 위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지은 죄를 그 앞에 내어놓으며 용서해 줄 것을 미고 위로를 얻는다.(시 32:10; 고후 12:9; 벧후 3:15; 눅 15)
8. 신실하심(Wahrhaftigkeit und Treue):
모든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그 분은 자기의 말을 꺽 지키신다(시 33:4; 민 23:19; 살전 5:24).
-a) 경고: 우리는 하나님만이 의로우심을 알아야 한다. 반면에 그의 진리 밖에 사는 모든 인간은 거짓됨을 알아야 한다.(시 116:11). 따라서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데 부지런해야 한다(요 17:17; 요삼 4; 행 5).
-b) 위로: 비록 우리가 죄의 유혹 가운데 살고 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거기서 보호하시며 그 은혜의 언약을 영원토록 지키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셨다.(사 54:10; 눅 18:7; 살후 3:3; 고전 10:13; 눅 15) C. 하나님 자신과 관련하여
9. 영원성, 불변성(Ewigkeit und Unveraenderlichkeit):
이 영원은 시간적으로 무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원은 인간의 사고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힘든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고의식에 의한 처음과 끝이 있는 분이 아니다. 그는 자기의 본질, 경윤, 사역에 있어서 항상 그대로 남으신다(시 90:2-4; 약 1:17).
-a) 경고: 우리는 시간적으로 유한하고 可視적인 것만 보고 얄팍하게 함부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유물론에 빠진다. 무엇을 판단할 때 영원하시고 불가시적인 하나님이 우주를 운행하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b) 위로: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의지하는 터가 든든함을 나타낸다. 성도가 함부로 요동치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히 12:28; 계 22:5).
10. 완전성, 충족성(Allgenugsamkeit und Seligkeit):
하나님은 완전하시다(행 17:24,25; 딤전 6:15)
-a) 경고: 우리는 그에게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사 45:22). -b) 위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모든 충분한 것들을 얻어 지닐 수 있다(시 73:25,26).
11. 영광스러움, 위엄스러움(Herrlichkeit und Majestaet):
하나님의 본체와 능력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고, 다 이해할 수 없다. 단지 그의 사역과 방법을 통해 감지할 뿐이다(시 104:1; 렘 10:6; 민 14:21; 출 33; 사 6; 계 1; 유 24,25).
제 26 문: 만일 당신이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자를 믿는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답: 나는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버지,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無로부터 창조하셨으며, 그것을 항상 자기의 영원하신 경윤과 섭리를 통해 보존하시며 다스리시는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습니다. 나는 그를 신뢰하고 그 분 안에서 죽으며 그가 나의 영혼과 육체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 공급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피곤한 인생 가운데 보내어진 불행은 나의 구원을 이루는데 유익하게 됩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그것을 할 수 있고 또 자지하신 아버지로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Quid credis cum dicis,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oeli et terrae?
-Credo aeternum Patrem domini nostri Iesu Christi, qui coelum et ter- ram, cum omnibus quae in ijs sunt, ex nihilo creavit, quique eadem aeterno suo consilo et providentia sustentat ac gubernat: propter Christum, Deum meum et patrem meum esse: Itaque sic ei confido, sic in eo acquisco, ut non dubitem, quin provisurus sit omnibus, tum animo tum corpori meo necessarijs: Quinetiam, quae mihi mala in hac aerumnosa vita immittit: ea in mea salutem sit conversurus, cum et facere id possit, ut omnipotens Deus, et facere id velit, ut benignus pater.(고전 8:6; 롬 11:36; 엡 4:6; 히 11:3; 시 144:3; 롬 8:28.)
(내용분석)
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대답으로 정리될 수 있다.
① 누가 하나님 아버지로 이해됩니까?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
② 왜 그는 전능하신자 천지의 창조자로 불리어집니까? 그 이유는 그는 하늘과 땅과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③ 그는 어떻게 당신의 하나님과 아버지가 되었읍니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④ 당신은 어떻게 그 분을 신뢰하십니까? 그가 나에게 선한게 대할 것을 의심하지 않음을 통해.
⑤ 당신은 무엇에 근거하여 이런 신뢰를 가집니까? 그는 항상 신실하게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해설)
I. 하나님이 “아버지” “전능하신 자” “창조주”라 불리어진다는 것은 무 엇을 의미합니까? 기독교가 다른 일반 자연종교와 다른 점은 하나님의 이런 명칭이 지금 나에게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있다. 이런 하나님의 명칭이 나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이는 참된 신앙에 가장 필수적인 것은 “참된 신인식”이기 때문이다.
A. 하나님 아버지
1. 하나님이 아버지라 불리우는 것은 그는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분만이 참 아버지시다. “(엡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 )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사실 하나님이 아버지심을 계시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다른 어떤 종교에도 자기들의 神을 아버지로 표시하는 예는 없다. 이것은 神의 인격성을 전제할 때 이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시기부터 그의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그의 아버지시다. 성자는 성부와 영원전부터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 )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요17:5) 아버지여 ( )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 문제는 삼위일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B. 전능하신 자
1. 전능이란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역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데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구원사역을 이루신 것은 이런 능력 때문이다. “(렘32:17)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 )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 )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2. Ursinus 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① 자기가 원하시는 모든 것은 물론 자기의 속성에 충돌되지 않으면 행하시는 분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 내어주신 것은 비록 원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셨다.
② 모든 것을 어려움이 없이 한 순간에 하실 수 있는 분.
③ 만물에 역사하여 작용시키시는 능력을 가진 분, 모든 피조물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능력의 장본인. 우렁찬 파도와 태풍 가운데서 발견되는는 힘.
④ 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 Olevianus 왈 “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신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그는 뮤효한 능력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힘있고 실제적이며 행동이 있는 전능을 지닌다. 그는 자기의 능력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듯이 자기의 능력으로, 자기의 손으로 이 만물을 보존하시며 만물을 자기의 섭리로 질서있게 운행하신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그의 명령이 없이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믿음 안에서 이렇게 능력이 많고 보살피시는 아버지께 전적으로 굴복한다. 만물은 그의 손과 능력 안에 있으며 아무도 그의 능력에 대항할 수 없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또 영원한 화해를 했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해할 수 없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요 10:28-30)”. 만일 만물 이러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달여 있음을 볼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 중심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하나님을 알고 바라보아야 어려움을 당할 때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C. 하늘과 땅의 창조자
1. 하나님이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판이하게 구별시키는 요소이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만물을 구분시키 뿐 아니라 구별시킨다. 이런 사실은 피조물에게 어떤 신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피조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 창조주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나머지 피조물 속에 신적인 요소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숭배한다. 돌을 깎아 부처를 만들어 세우고 절하고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나 몸에 부적을 붙이고 다니면 災厄을 피할 수 있는 것 등은 이들의 사고방식이 범신론적으로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에는 이런 색채가 농후하다.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대대로 내려오는 신화나 전설들은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無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창조하다와 만들다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창조하다는 어떤 자료로부터, 도구를 사용하여 무엇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기의 뜻을 통해 창조하셨다. 만들다는 것은 어떤 자료를 사용하여, 도구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창조하다’가 인간에 의해 사용될 경우에는 정신적인 영역 또는 위대한 작품과 관계한다. 또 ‘만들다’가 하나님에 의해 사용될 경우 창조하다의 의미를 지닌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 )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롬4: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 )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2.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은 可視的 그리고 不可視的인 모든 세상을 가리킨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표현이다. 히브리인들은 宇宙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3. 여기 하늘은
① 구름이 떠다니는 공간 뿐 아니라
② 별들이 움직이는 우주 공간 그리고
③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피조된 영물들이 있는 곳을 의미한다.
가시적인 하늘을 창조하시기 전에 불가시적인 히늘을 먼저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그들 가운데 일 부분이 타락했다.
⑴ 선하고 거룩한 천사들:
이들은 하나님께 수종을 든다. “(마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시104:4)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천사들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한다.
① 족장들과 사사들 그리고 선지자들의 삶속에 그리고 율법을 주실 때 개입했다. “(행7:53) 너희가 ( )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② 천사의 사역은 예수의 생애와 사도들의 사역 가운데도 나타난다. “(눅1:26) 여섯째 달에 ( )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눅2:9) 주의 ( )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마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 )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눅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마28: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 )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위에 앉았는데” “(행5: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행8:26) 주의 ( )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 )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행12:7) 홀연히 주의 ( )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행27:23)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 )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③ 이 천사는 주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봉사한다. “(히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 )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시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 )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91: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④ 이 천사는 그리스도의 재림때 이 세상을 마무리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 )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13:41) 인자가 그 ( )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⑵ 악한 타락한 천사:
그들의 우두머리는 διαβολος인데 그리스語에서 파생되어 나왔고 그 의미는 ‘참람하는 자’이다. 그의 명칭은 다양한다.
① 사단(욥 2:7; 마 4:10)
② 원수, 거역자, 시험자(마 4:3)
③ 세상의 임금(요 14:30)
④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 살인자(요 8:44)
⑤ 벨리알, 부패케하는 자(고후 6:15)
⑥ 참소자(계 12:10)
⑦ 옛뱀(계 20:2) 사단의 능력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역사할 때 묶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항하여 역사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락시키고 악을 범하도록 자극한다. “(눅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엡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엡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딤후2: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고후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 사단의 무리들은 최후의 심판 때 영원히 정죄를 받는다. “(벧후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인 전투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영적인 전투는 성화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을 지닌자들은 외부로부터 신적인 능력을 몸속으로 받아 넣으면 자동적으로 사단을 이기는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영적인 전투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 속에 신적인 능력이 있다고 여기면 의지로 싸울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인들로 하여금 영적인 싸움을 등한히 하게 만든 것은 샤마니즘적 또는 범신론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나중에 상론하겠지만 성화는 중생한 사람이 결단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위하는 쪽으로 결단을 내리고 의지의 방향을 그쪽을 나아가게 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1권에서 이 의지문제를 상세하게 다루었다.
4. 하늘과 땅 또는 거시적 세계의 창조:
이 세상이 스스로의 힘으로 無에서 생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성경은 말씀이 이 세상을 무에서 창조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뜻을 통해 그리고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요 1:1; 2:14). 창세기 1장과 2장은 자연세계의 창조에 대해 매우 합리적인 설명을 한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누가 세상을 창조하셨나’에 촛점을 맞추어야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조명하지 않는다. 성경을 주신 목적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해져 버린 인간에게 참된 하나님을 인식시키는 것에 있기 때문에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보여주는데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①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 태초는 하나님이 존재하기 시작한 싯점을 말하지 않고 이 세상이 시작한 싯점을 의미한다. 창조와 더불어 시간이 시작되었고 제한된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②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은 먼저 우주의 자료(Materie)를 존재하게 만드시고 그것으로 엿새동안 이 우주의 몸체를 만드셨다. 그리고 특별히 지구와 그 속에 있는 것을 가장 작은 것까지도 구체적으로 만드셨다. 성경은 우주의 여러 천체들보다 지구의 창조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위해 성경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無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2절에 나오는 ‘혼돈과 공허’를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창세기 1장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석을 참조할 수 있다. 혼돈의 상태에서 인간이 창조되기까지 그 과정이 매우 이치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만물과 인간이 창조된 과정을 통해 재창조(구원)의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③ 첫 세 날들과 후 세 날들은 서로 일치한다.
① 빛 창조 ⓐ 빛을 지닌 물체인 태양과 달창조,
② 구름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눔 ⓑ 고기와 새, 물짐승과 공중의 짐승,
③ 땅과 식물세계 창조 ⓒ 육지동물과 인간 창조.
④ 만물이 창조된 순서는 마치 피라밋을 연상시킨다. 광물은 → 식물을 위해, 식물은 → 동물을 위해, 동물은 → 인간을 위해. 이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졌다는 점에서 짐승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에게는 짐승에게는 없는 영혼이 있고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었다. 이 인간은 성령의 추진과 충만을 받아야 인간으로서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5.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창조에 국한되지 않고 피조물을 보존하고 섭리하는데까지 이른다.
이 ‘보존’과 ‘섭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만물이 자기가 경륜하신대로 존재할 수 있도록, 즉 만물이 자기 존재의의를 실현할 수 있도록 통치하신다. 이 세상의 정치인들은 하나님의 이런 왕적인 통치로부터 정치원리를 배워야 한다. 정치인은 모름지기 모든 백성들이 자기 존재의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보살펴주는 일에 봉사해야 한다. 정치꾼이란 백성의 행복은 아랑곳없고 자기의 이익만 챙기는 자들이다. 회사등 여러가지 기관의 최고의 대표자나 목회자의 기능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통치원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ㄱ) 하나님은 세상을 보존하신다. 이것은 창조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동안 존재케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전능하신 능력을 통해 이 세상이 건재하도록 만드신다. “(시148:6) 저가 또 그것들을 영영히 세우시고 폐치 못할 ( )을 정하셨도다(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 )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ㄴ)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신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과 변화들을 조종하사 모든 것이 마침내 자기의 신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조처하신다. 즉 하나님은 자기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만물이 자기의 뜻대로 건재하도록 만드신다. “(시146: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사46: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사46:11)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ㄷ) 하나님이 피조물의 요소로서 그 속에 힘들을 넣어 주셨지만 피조물은 스스로 자기 힘으로 역사하는 것은 아니다. 만물이 운행하는 법칙인 자연법칙도 스스로 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법칙을 주신 자로서 모든 법칙 위에 임하신다. 하나님이 자연법칙에 개입하면 이 법칙은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적이다. “(시147:5) 우리 주는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그가 어떻게 다스리는지 파악할 수 없도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성의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II.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시다
둘째 단락은 창조주 하나님이 나(我) 개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간섭하심을 말한다. 나의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을 초월해 계시면서 나를 섭리 보존 간섭하시며 또한 내재하시는 분이다. 사실 아무리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全知하신다 해도, 그 분이 나와 인격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는 이 하나님이 지금 나의 도움이 되실 수 있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앙이 자립되었다는 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라고 개인적으로 관계를 수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해야 될 일을 알아서 하는 자들이다. 중요한 것은 성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데 있어서는 우리와 아버지 사이에 성자 하나님이 중보하셔야 한다는 것과 우리가 아버지를 믿고 고백하는 그 일 배후에 하나님 지식 곧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신지식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그 분에 대한 바른 지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또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지녀야 한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여 성도들의 생활을 통해 또 말로 이 큰 사실을 선포할 것을 요구한다. 이 첫 창조주는 결국 제 2의 창조 곧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제 27 문: 하나님의 섭리란 어떤 것입니까?
답: 하나님의 능력 곧 그가 그것으로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전능하시고, 지금 임하고 있는 그 분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나뭇잎, 풀잎, 비와 이슬, 풍년과 흉년, 먹고 마시는 것, 건강과 질병, 부요와 가난 등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나님의 父情的인 손길로부터 우리에게 온다는 말입니다.
-Quid est Providentia Dei?
-Omnipotens et ubique presens Dei vis, qua coelum ac terram, cum omnibus creaturis, tanquam manu sustinet ac gubernat: ut omnia quae terra nascuntur, pluvia item et siccitas, fertilitas et sterilitas, cibus et potus, bona et adversa valentudo, divitiae et paupertas, omnia denique non temere, aut fortuito, sed paterno eius consilio et voluntate contingant.
(해설)
위의 대답은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이며 또 이 능력이 적용되는 범위가 무엇이며, 어떻게 다스리는가 등에 대한 내용으로 나누어진다. I.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은 창 22:14에 처음으로 나온다.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은 이삭을 죽게 만드시지 않고 양 한 마리를 준비하셨다하여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이 미리 보시고 준비하셨다는 말이다. 섭리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전능하심’과 ‘무소부재’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시 89:14; 사 40:26; 사 46:10; 행 17: 27-28).
2. 섭리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면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보살핌을 뜻한다. 이신론자(Deismus)들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고 시계 태엽을 감듯이 시간의 흐름을 감아 놓고 자기는 저 하늘 높은데서 간섭하시지 않고 가만히 계신다고 한다. 이런 오해는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모른는데 기인하는 것으로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 “(욥12:10)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 )에 있느니라” 성경에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귀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처럼 그렇게 생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능과 무소부재의 속성으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심을 표현한 것이다.
II. 하나님의 섭리가 미치는 영역
1. 섭리의 범위는 모든 피조물에 이른다. “(시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 )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139: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 )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시139: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암3:6)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 )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사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 )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즉 그 범위는 하늘 땅 심지어 음부까지 이른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크게는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일반 (자연) 은총적,
② 버금 특별 은총적, ③ 특별은총적. ①' 일반 은총적 범위: 하늘, 구름, 바람, 바다, 산들, 샘물, 풀과 씨앗, 포도주와 빵, 행와 달, 낮과 밤 그리고 이슬비 등 대자연에 관한 것(시 104; 렘 5:24; 호 2:21-22). 우리는 이런 섭리를 믿기 때문에 자연의 어떤 물체를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다. 사실 이 내용은 주기도에서 ‘일용할 양식’과 관계한다. ②' 버금 특별은총적: 인간의 육체적 범위의 섭리, 먹고마심, 건강과 질병, 가난과 부요 그리고 한 족속의 생사화복 등과 관계한다(시 145:15-16; 행 14:17; 욥 5;18; 출 15:26; 렙 14:12; 삼상 2:7; 잠 22:2; 단 2:37-45).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③' 특별섭리: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들과 관계하는 것이다.
-ㄱ)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섭리하심: 단 2:44; 눅 2:1; 행 17:6. 교회의 내적인 발전(종교개혁 또는 대각성 운동을 인도하심)이나 교회를 원수로부터 보호하심 등은 이 섭리에 속한다.
-ㄴ) 하나님의 백성들을 개별적으로 인도하심(시 115:15; 눅 21:18; 롬 10:12; 마 6:32; 시 34:8; 눅 18:7; 욥 5:19). “(눅12:7)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눅21: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그러면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나님의 섭리를 운명론적으로 이해하는 경우 우리는 결정론에 빠져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팔자타령만 하고 운명에 자신을 맡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를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에 어울리도록 기도하도록 만들어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만드시는 것이다. 성령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사고방식이 하나님 중심적으로 바꾸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이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것은 지역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소원도 주시고 그 소원이 실현되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이 소원이 실현되는 전제조건은 성령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소원이 이루어지면 자기의 비전이 이루어지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ㄷ)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악과 죄의 문제: 하나님은 죄나 악을 지으신이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악인을 지배하신다: 바로의 강팍성 조정. “(출7:3)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삼하16:10)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막3: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요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악인들의 생각이 자기의 정욕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생각을 허락만 하셔도 저들은 멸망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저들의 생각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자극을 받아 더욱 악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ㄹ) 우리는 외적으로 잘되고 못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 열매와 결과를 보아야 한다. 악인은 불신앙의 상태에서 견고하게 번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 결말은 영원한 멸망이다. 경건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수 있다. 그 고난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이 고난을 통해 이들은 영생에 들어가는 복을 받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시 73편이다. “(시73: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시73:2) 나는 거의 ( )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시73: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 하였음이로다 (시73:4) 저희는 죽는 때에도 ( )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시73: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시73: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시73: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시73: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시73: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시73: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시73: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시73: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시73: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73: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73: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시73: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시73: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73: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시73: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시73: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시73: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시73: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시73: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시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시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시73: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73:27)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시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말3: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말3: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말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3: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말3: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말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4: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섭리론은 운명론과 메우 비교된다.
후자는 이방에서 온 것으로 거기에는 인격적인 神이 지배하지 않고 범신론이 지배한다. 섭리론은 모든 만사에 하나님의 손길이 미침을 전제한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유는 그분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특징은 군림함에 있지 않고 만물을 섬세하게 보살피시는 사랑에 있다. 정치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잘 배워야 백성들에게 유익한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백석대학교 권호덕교수 원문보기▶ 글쓴이 : 권호덕 Her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