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국군 장병들 중 태극·을지무공훈장 등 주요 훈장을 수훈한 영웅들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기획 연재물을 신설합니다. 이 기획물이 선배 장병들의 참전 경험을 생생히 전달하는 동시에 임무 수행의 중요성과 전투 교훈, 군인으로서의 사생관을 되새길 수 있는 읽을거리가 될 것입니다. 편집자
베트남에서 전투에 참가한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된 최초의 주인공은 제2해병여단의 고(故) 이인호 소령이다. 그는 해병여단이 1966년 7월25일부터 8월11일까지 베트남 뚜이호아 평야에서 수행한 해풍작전 당시 제3대대 정보장교였다.
작전 마지막 날이던 8월11일, 이대위는 전날 체포한 베트콩 첩자 7명을 신문해 그들이 미레마을 대나무 숲에 지하 동굴을 구축해 은거지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획득한 첩보를 대대장에게 보고한 이대위는 동굴 탐색을 자신이 직접 지휘하겠다고 건의, 승인을 얻은 후 베트콩 첩자 2명과 함께 헬기로 작전 현장에 도착했다.
제9중대 엄호 아래 첩자를 앞세워 대나무 숲에서 직경 70㎝ 정도의 동굴 입구를 발견한 이대위는 탐색조로 편성된 제9중대 김찬옥 하사에게 수류탄 3발을 동굴 내부로 연달아 투척게 했다. 이어서 김하사에게 대원 4명과 함께 동굴을 수색게 했다.
얼마간의 긴장된 시간이 지나자 약간의 수류탄과 실탄·탄약통 등을 노획한 탐색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대위가 볼 때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첩자로부터 확인한 내용과 차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대위는 자신이 직접 동굴을 수색기로 하고 대원 4명을 뒤따르게 했다.
그가 확인한 결과 동굴은 ㄱ자로 꺾여 있었다. 구조를 파악한 후 5m 정도 진입한 이대위가 커브를 돌아 계속 나가려 할 때 전방에서 갑자기 수류탄 1발이 날아왔다. 이대위는 대원들에게 “수류탄이다! 엎드려!”하고 외치며 날아온 수류탄을 재빨리 집어 전방으로 던졌다. 그 사이에 또 하나의 수류탄이 날아왔다.
다시 집어들 여유가 없었던 이대위는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장렬히 산화했다. 이대위의 희생으로 위기를 모면한 대원들은 분기탱천, 소총 사격과 수류탄을 투척하며 돌진한 결과 방금 사살한 베트콩 시체 5구를 확인하고 카빈 소총 2정과 실탄·수류탄 등을 추가로 노획했다.
이대위가 지휘한 동굴 탐색은 많은 교훈을 남겼다. 우선 최초의 탐색조가 손전등도 없이 동굴로 진입, 내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1~2명 정도가 적절한 동굴 탐색에 너무 많은 인원을 참가시켜 위험에 노출된 인원이 많았다는 등의 문제점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대위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더 많은 부하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경북 청도군에서 출생, 대구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해사 제11기로 임관, 제1해병사단 수색중대장을 역임한 후 파월됐던 이인호 대위는 슬하에 1남 1녀를 남긴 채 단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뒤따르던 부하들을 구했다. 그의 투철한 사명감과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은 전장에 임하는 국군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정부는 이대위의 애국 충정과 살신성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1계급 특진과 함께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해 고인의 뜻을 기렸으며 진해 교육사령부와 해군사관학교에는 그의 동상이 건립돼 있다. 또 해군사관학교는 매년 그의 동상(사진) 앞에서 사관생도들이 참가하는 ‘인호제’를 거행하는 등 그는 갔지만 그의 숭고한 얼은 후배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