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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건강한가정!행복한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태종 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이라고 한다.
국내에는 인촌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 류꼬꾸대학 소장본이 있다.
아래 지도를 보면 제주도와 대마도가 한반도를 받쳐주고 있다
독도박물관 이승진 관장은 2008년 10월 18일
"일본이 만든 조선국지리도 가운데 팔도총도는
울릉도와 우산도(독도), 그리고 대마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해주고 있다"고 밝힌다.
울릉도와 독도는 물론이고 대마도가 조선 땅임을 일본 스스로 확인하는 일본지도가 독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위 지도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만든 지도로,
대마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시한 현존하는 최초의 지도이기도 하다.
고 이종학 초대박물관장이 기증한 이 지도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돼 있는 것을 이 관장이 몰래 촬영한 것이다
18세기의 독일지도이다
동해를 한국해(Merde Coree MEER VON KOREA)라고 독일어와 불어로 표기되어 있으며 독도는 물론 대마도가 조선(대한민국)땅으로 표시되어 있다(지도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다)
위 지도는 대동여지전도(1860: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오른쪽 아래의 섬이 조선의 섬 대마도(쓰시마)이다.
잘 알다시피 대마도와 부산 간 거리는49km인 반면 대마도와 일본 규슈(九州)는 147km나 떨어져 있다
일본어의 시마(島)는 한국어의'섬'에서 유래된 말로서 한국말의 두 섬이 두시마, 쓰시마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3세기 이전부터 대마도가 바로 구야한국(가야)에 속했다는 것이 삼국사기 실성왕 7년편과 가락국기 6대 좌지왕 2년의 기록 및 대동세보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 제3, 실성왕 7년조."편년 가락국기 실성왕 7년편과 같은
역사적 고증을 통해 볼 때 5세기 이전에 대마도는 오랫동안 바로 가야의 영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제공:http://ulsanin.com.ne.kr/)
일본에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93)는 1832년, 삼국접양지도를 만든다.하야시 시헤이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과 그 주위 3국인
조선, 류쿠국(오끼나와), 하이국(북해도)과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小笠原, 일본 남부 태평양 1000km지점의 8대마도 반환을 공식 요구한다.
이 대통령은 당시 우리 지식인 중 일제 식민지 역사교육을 거치지 않고 서양에서 서양역사를 통해,
구한말 우리 역사와 일본의 한국 영토침탈 과정을 공부한 지식인이었다.
이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서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며,
“한국과 일본 사이에 오래된 해상 경계가 있다”고 한 발언 중 ‘오래된 해상경계“는 어디일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11일 열린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주최 제3회이승만 포럼에서
“이 오래된 해상경계는 대마도와 일본 본 섬 사이의 현해탄”이라고 밝혔다.
즉 대마도는 엄연한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주장이다.
0여개 군도)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해놓았다.
사진의 지도는 독일인 클라프로토(Klaproth)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프랑스어판.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가 1832년 제작한 지도를 Klaproth가 번역 제작한 것ⓒ자료사진 "
위 지도는 대마도와 독도가 명백한 한국 영토임을, 색으로 구분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 프랑스어 판 지도의 국제적 가치는 호사카 유지 교수(세종대 독도연구센터 소장)의
일본어 논문(三國通覽與地路程全圖』と‘伊能島’の 中の 獨島. 독도 창간호, 영남대 독도연구소. 2008)과 조선총독부 문서에 잘 기술되어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당시 일본 정부가 이 지도를 국제공인지도로 활용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 개국.개항을 요구한 미국의 페리는,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할 목적으로 이미 미국인을 군도에 살게 하였고,
이 사실을 들어 막부에 오가사와라를 미국령으로 인정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막부 측은, 임자평의 ‘삼국통람도설’과 그 삽입지도인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삼국접양지도)’를 제시하였는데, 이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자,
이 프랑스어판 지도를 제시하여 겨우 미국의 영유권 주장을 물리친 것이다.”
즉 일본은 1861년 2월과 1862년 4월 미국의 해리스(Harris)대사, 영국의 알코크(Alcock) 대사 등
당시 열강 대사들에게 대마도와 독도가 한국령임이 표기된 이 지도를 제시하면서,
국제적인 영토 분쟁의 공식 자료로 활용한 것이다.
김 대령은 “이 같은 미일간의 오가사와라 영토분쟁을 해결한 하야시 시헤이에 대해 해설서에는
'모든 일본인은 하야시 헤이시 선생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함.
광격천황께 바쳐져서 원본을 친히 열람하셨음.'이라는 표현이 있어
이 지도를 일본이 공식으로 인정한 것이 증명됐다“고 강조했다.
김 대령은 “대마도가 조선령으로 기록된 삼국접양도를 이토오 히로부미도 알고 있었다”면서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고자 증거자료를 없애고
사실과 다른 자료를 19세기부터 지금까지 다량 배포함으로서 우리를 기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대령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거나 박물관에 소장된 일본어판 <삼국접양지도>(구글에도 있음)는 물론, 심지어는 일본 극우단체가 제시한 프랑스어판 <삼국접양지도> 조차도 모조품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김 대령은 또 미국 국가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는 미국 페리제독의 1865년 일본 지도를 함께 제시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미 의회 지시로 미-일 조약체결(1858년)에 따라 페리제독의 정찰결과를 토대로 일본의 지도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미 국가기록문서소(NARA ; The U.S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당시 기록과, 1862년 미-일 영토협상 후 미국에서 작성된 1864~68년 일본 지도 역시 대마도를 우리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당시 영국 지도에도 대마도를 우리의 영토로 표기하고
‘대마도는 일본 영토에서 제외된다’고 지도에 직접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김 대령은 “한-. 일간의 해상 국경선은 일본지명사전에도
‘고래로부터 일본과 한국,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로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현해탄(玄海灘), 일본은 겐카이나다(玄界灘 )으로 부르고 있는 곳,
즉, 대마도 남단 한참 아래인 이끼섬과 일본 본토 사이”라며
“일본이 현재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의도는
대마도의 진실을 숨기기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려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대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대마도 반환 요구는 아직도 유효하다”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주; (윤정우 씀)
포럼후에 대마도반환추진국민운동을 하자는 제안이 있었고, 박수가 나왔습니다.
또한, 일본교과서에 1930년경부터 1945년까지 사용한 지도에,
대마도가 조선땅임을 색칠한 지도가 있다는것을 보여 주는 노신사의 발언도 있었다.
김대령은 6.25전쟁이 터지자, 이승만대통령은 우선 소련 공산당을 무찌를 때까지
일본에 대한 반환요구를 잠시 참자는 발언도 했다고 한다.
아마, 상세한 포럼내용이 추가 보도 될것으로 여겨진다.
최종편집 2011.05.11 18:48:52......
온종림 기자
조선초 태종 등 영유권 강력 주장 이승만 대통령도 "반환하라" 요구
"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1949년 1월 7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첫 연두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이날 이승만은 한일 국교 재개를 언급하면서 대마도 문제를 꺼냈다.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라는 미국 요구에 맞서기 위한 지렛대로 대마도 카드를 뽑아든 것이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연두 기자 회견 직후인 1949년 1월 18일
제헌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얼마 후 있게 될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국내의 한 언론이 2005년 입수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 27일 한국 정부는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j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고 밝혔다.
아쉽게도 같은 해 7월 9일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가
국무부에서 존 덜레스 미국대사를 만나 대마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전하자
덜레스는 "대마도는 일본이 오랫동안 통제하고 있고
이번 평화조약은 대마도의 현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우리 정부도 더 이상 대마도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조선 초에도 강력하게 제기됐었다.
그것은 고려 때 대마도에 대한 인식이 여진족과 탐라(제주도) 중간쯤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와 접경한 여진족은 고려 관직을 받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고
이 전통은 청나라가 성립되던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탐라도 상대적 독립을 누리다 고려에 복속됐다.
반면 대마도는 상대적 독립을 유지했지만
고려나 조선의 관직을 얻고 생필품을 얻기 위한 교역을 꾸준히 요청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대마도를 다루는 고려와 조선의 원칙이었던 것이다.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년) 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그때 밝힌 교유문(敎諭文)의 서두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마도는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들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했다."
태종의 교유문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그리고 정벌이 끝난 후 대마도 도주에게 교유문에서 그는 다시 한번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대마도가 섬으로 경상도의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물론 대마도가 제주도나 거제도 같은 우리 땅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대마도가 우리에 조공을 바치던 땅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종 때 대마도가 일본 땅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15세기 초 태종 이방원의 대마도 인식과 20세기 중반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인식은 일맥상통한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저 왜구의 근거지 역할만 해주지 않으면 좋다는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대마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양다리를 걸쳤던 대마도주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화를 지향했고
임란 직후인 17세기 초 일본의 막번체제에 편입됐다.
조선 전기 때만 해도 조선의 신하임을 당당히 밝혔던 대마도 도주가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근거가 약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고 근거도 있다.
일본이 우리 영토인 독도를 억지를 부려가며 자기네 땅이라고 허튼 소리를 하고 있는데
더더욱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역사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옛 선조들이 남겨주신 대마도가 우리나라 영토인 것으로
대마도라는 섬은 신라의 별칭으로 경상도를 가리키는 말로
본시 계림에 속한 우리나라 땅으로 문서에도 기록된 명백한 사실로 조선 세종실록 에도 실려 있다.
또한 1860년대 삼국통람도설 (삼국 접양지도) 미.일 간의 오가사와라 제도 영토 협상과 관련되어
어떻게 활용되었는가를 설명한 미국과 일본의 기록이 추가로 있고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2월31일 연말 기자 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 을 주장하고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 요구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육사 군사 훈련 처장인 김상훈 대령이 일본 정부가 스스로 인정하는 지도를 발견 했다고 발표하였다.
이렇듯 역사적 근거가 명백한 만큼 노래를 통해 온국민 에게 전파하고자 한다.
행사명 : 나라 사랑 동요 발표회
일시 : 2011년 6. 17 (금) 13:00
장소 : 음성 대소 초등학교 대강당
주최 : 음성군. 음성동요 학교
발표내용 : 대마도는 한국땅 (유정작사/송결작곡/김민국과 맴맴 합창단)
고운말 쓰자 (유정작사/노영준작곡/맴맴 합창단)
이승만 대마도 반환,일본 대마도 지도 우리땅,한국땅_이승만 대마도 영유권
1860년대 국제공인 고지도를 통해서
일본이 대마도(對馬島 : 쓰시마)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이승만 포럼"이 열렸는데
이 포럼에서 김상훈 대령이 일본에서 대마도를 조선의 땅이라고 국제 공인한 지도를 발견했다고 한다
김상훈 대령이 공개한 문건은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가 1785년에 작성한
"삼국통람도설" 이라는 책인데
이 책에는 일본, 주변 3국(조선, 오키나와, 훗카이도), 무인도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에 대한
지도 및 해설을 담은 "삼국접양지도" 등 5개의 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일본은 1860년대에 오가사와라 제도를 놓고
미국과 분쟁을 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 동양학자 클라프로스가 번역한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을
증거로 제시하여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권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도에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일본 영토라고 규정했을 뿐
울릉도, 독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라고 표기되어 있다
삼국접양지도는 예전부터 독도가 우리나라의 땅임을 증명하는
자료로 많이 인용되어 왔다고 한다
그동안은 원본이 아닌 흑백 필사본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마도 영토 구분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접양지도)
하지만 원본에서는 대마도를 조선 땅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이 김 대령의 주장이다
김 대령의 말로는 원본은 한상복 박사(독도연구 전문가)가 호주에서 구입한 것으로 추청된다고 하며 해당 지도는 국회도서관 독도 특별 전시관에서 찾았다고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8-49년도에 기자회견을 열어
(1948년 8월 18일 / 1949년 1월 7일)
일본에게 대마도 반환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김 대령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요구가 아직까지 타당하다며
독도뿐만 아니라 대마도까지 확대한 시각으로 영토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을 통해서 일본에 대마도 반환 요구를 말할때
"한국과 일본 사이에 오래된 해상 경계가 있다"
라고 언급했다고 하는데
김상훈 대령의 말에 의하면 이 오래된 해상 경계가 바로 "현해탄" 이라고 한다
(현해탄 - 대마도와 일본 본섬 사이)
( 중국 고지도)
만약 오래된 해상 경계가 정말 현해탄이라고 하면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땅이 된다
일본이 독도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가운데 대마도가 우리 땅이며 반환 하라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첫 연두 기자회견 자료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1949년 1월 7일 이 대통령은 한일국교 재개를 언급하면서 대마도 문제를 꺼냈다.
이날 이 대통령은 “대마도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대마도 발언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1948년 8월 18일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는 성명을 냈고
이에 일본이 항의하자 외무부를 시켜 같은 해 9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위해
1949년 1월 18일 이 대통령은 제헌의원 31명의 ‘대마도 반환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대마도와 관련 마산문화원의 임영주 원장은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를 하고 있지만
그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근거가 약하다”면서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를 반환하라고 두 차례 기자회견을 했지만
미국의 압력에 눌려 말을 못했었다”면서
“이 일을 일부 사람들은 해프닝으로 생각 했지만
대마도의 날이 제정되면서 다시 이 대통령의 발언이 힘을 얻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임 원장은 “작년 부산외국어대학의 김문길 교수가 공개한 자료에 가 있는데
이는 1756년 일본의 막부시대에 모리고완이라는 지리학자가 그린 지도로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고 덧 붙였다.
대마도의 날 기념 사업추진위원회의 박중철 부위원장은
“역사적으로 볼 때 독도보다 연원적으로 우리땅이었다는 자료가 많은 대마도가
어느날 부터 우리의 영토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주권국가로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문제”라면서
“마치 독도문제를 놓고 그들이 1백년간 자기땅이라고 교육시켜왔듯이
우리도 영토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이어 “1906년만 하더라도 대마도는 우리 땅이었으나 일본이 빼앗아 갔다라고 교육시켜 왔고 당시의 조상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면서
“일제병합을 거치면서 그러한 역사의식은 사라지고 대마도는 일본땅으로 1백년이 넘게 지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2005년 3월 18일 마산시의회는
대마도의 날 조례제정을 통해 대마도에 대한 고토의식을 선언하고 나선바 있다.
박 부위원장은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라면 대마도 역시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며
“그것이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길이며
단재 신채호가 주장한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희망의 역사관이다.
지금부터라도 대마도는 ‘우리땅이었으나 일본이 빼앗아 갔다’라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오는 19일 대마도의 날을 맞아 마산시와 대마도의 날 기념 사업추진위원회는
8일 마신시청에서 기념식을 갖을 예정이다.
아름다운교육신문=김용민 기자
▲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에 나오는 대마도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이 끝내 가결됨에 따라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영토분쟁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작금의 상황에서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한다면 대마도는 한국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억지일까?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 시마네현의 조례안 가결로 촉발된 한·일간의 영유권 논쟁은
새삼 우리의 지난 역사속에 가려져 있던 대마도에 대한 귀속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의 주장으로 더욱 이슈화되고 있는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의 문제는
독도에 대응한 단순한 감정논리만은 아니라는 면에서 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접근과 주장을 필요로 하고 있다.
대마도는 거리상으로 우리나라와 훨씬 가까운 한국과 일본의 중간지점에서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때문에 임진왜란을 비롯해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로 대마도를 이용 해왔음을 지난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최근 등장하고 있는 대마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이미 많은 기록을 통해 알려진 바 있으나
지금까지는 상대적으로 이에 대한 관심이 적어 묻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단순 대응논리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으나
역사 속에 등장하는 대마도에 대한 기록은 그것이 단순한 억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료의 근거 중에서도 우리나라 고지도에 등장하는 대마도는 그 실체를 더욱 명확하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나라 고지도에 나타나는 대마도의 모습을 통해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의 실체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아울러 역사적 근거를 만들어 이 문제를 좀더 현실화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이 끝내 가결됨에 따라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영토분쟁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해동필도봉화산악' 지도
우리나라의 고지도를 보면 조선초에 발행된 고지도에서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빠지지 않고
대마도가 우리나라의 지도에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고지도에 등장하는 대마도는 대마도에 대한 우리의 영토의식을 충분히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상황에서 고지도에 대마도가 나오니까 무조건 우리나라 영토라고 주장한다는 것도 올바른 해석의 태도는 아니지만
그동안 대마도는 당연히 일본땅이라는 우리의 의식에서 벗어나 대마도에 대한 새로운 영토관념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독도가 한국땅임을 증명하는 여러 고지도가 나와 있다.
이에 비해 대마도가 우리나라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고지도는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같은 고지도 속의 예를 찾아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1530년에 제작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은
우리나라 전도 인본(印本)으로 간행된 조선전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첫머리 '팔도총도(八道總圖)'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기록되어 있어 당시 독도에 대한 인식이 확실했음을 보여주는 지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고지도의 맨 오른편 끝에는 대마도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우리나라 지도에 일본의 한 섬을 굳이 표시할 리가 없듯이 당시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역으로 인식하고 지도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 17세기 김수홍이 간행한 '조선팔도고금총람도'
또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정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집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여지도(與地圖)'로 불리는 지도집이다.
이 지도집의 '아국총도'는 1789년(정조13)에서 1793년(정조 17)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제1첩에 세계지도인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를 비롯하여 '아국총도'와 동아시아지도, 연행로도, 일본, 유구, 관방지도가 실려 있다.
'아국총도'는 400여 개에 달하는 섬들이 그려져 있어서 당시 바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도서해안의 섬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이기도 하다.
이 지도에도 강원도 지역에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그려져 있으며, 대마도 또한 중요한 비중으로 그려져 있다.
이 외에도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지도에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가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작자미상의'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海東八道烽火山岳地圖)'는
산맥과 하천, 섬들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이다.
이 지도의 바다쪽은 바다의 물결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독특한 느낌을 갖게 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바다에 대한 느낌이 더욱 실감이 나게 그려져 있으며 이 지도에도 대마도가 크게 그려져 있다.
이와 함께 현재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동국여지도'도 또한 당시 대마도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해준다.
공재 윤두서(1688~1715)는 '자화상(국보 240호)'을 그린 화가로 '동국여지도'는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였던 공재 윤두서가 숙종 36년(1710)에 그린 조선의 지도이다.
공재는 '일본여도'도 그려 그의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현재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동국여지도'도 또한 당시 대마도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해준다.
공재 윤두서(1688~1715)는 '자화상(국보 240호)'을 그린 화가로 '동국여지도'는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였던 공재 윤두서가 숙종 36년(1710)에 그린 조선의 지도이다.
공재는 '일본여도'도 그려 그의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곳 '동국여지도'에는 대마도가 실제보다도 아주 크게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지도에 등장하는 대마도의 크기가 실제보다 크게 그려지고 있으나
'동국여지도'에도 과장되리 만큼 크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도'를 보면 강줄기와 산맥의 표시를 정확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주변도서를 자세히 그렸으며 섬과 육지의 연결수로까지 표시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약 150년 정도 앞서 제작된 것으로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인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1750년대 영조의 명에 의해 '해동지도(海東地圖)'로 불리는 방대한 지도첩이 제작되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는 8첩으로 되어 있는 해동지도가 소장되어 있는데 330여 장의 전국 8도의 군현지도집이라고 할 수 있다.
' 해동지도'는 각 군현의 연혁, 산천, 고적, 인구, 토산 등의 이름이 적혀 있어 지리지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도서해안의 섬들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제주도와 대마도를 좌우에 나란히 그리고 있어 대마도에 대한 인식과 비중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같은 고지도 속의 대마도는 이외에도 1557년(명종12)경에 제작된 '조선방역지도'(국보제248호),
영조36년(1765)에 제작된 '여지도서(與地圖書)', 순조 22년(1822)에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근세로 이어지는 한말에 와서도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제작한 '조선전도'에는 한반도의 영토 범위를 간도 뿐만 아니라 대마도, 독도까지로 표시하고 있다.
대마도 정벌과 대마도의 독립성
▲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조선전도'
우리 역사에서 대마도가 가장 크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 세종대의 대마도 정벌이다.
1389년(공양왕 1) 2월에 박위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00여 명을 찾아왔으며,
또한 1396년(태조 5) 12월 문하우정승 김사형이 오도병마처치사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후 1419년(세종 1) 6월에 다시 대대적인 대마도 정벌이 시행되었다.
조선 초기 우리나라의 대일정책은 남쪽 변경의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할 수 있어
왜구를 평화적 통교자로 전환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를 위해 조선 정부는 외교적 교섭, 군사적 대응과 회유책을 병행했으나
그럼에도 왜구의 침략이 근절되지 않자 세종 원년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 것이다.
<세종실록> 원년 7월17일 기록에는 대마도 정벌 후 도주에게 보낸 교유문에서
“대마도는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바다 가운데 있어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다”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대마도가 옛날 우리나라 땅이었다는 대마고토의식(對馬故土意識)을 엿볼 수 있으며, 대마도가 일본 본주(本州)와는 다르다고 하는 의식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대마도에 대한 여러 역사적 근거자료나 상황을 놓고 볼 때
대마도는 일본과 우리나라로부터 아주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종우 교수가 쓴 <중세 대일교섭사>에서는 대마도는 고려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진봉선 무역을 하였고 무로마치 막부시대에도 일본으로부터 독립적 위치에 있었으며, 막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과의 무역도 독자적이었으며, 막부의 사신 호행(護行)도 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세종 26년(1444) 일기도 초무관 강권선은 대마도에 대해 '일본 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고 하여 일본 본주와 다른 지역으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흐름 속에서 대마도는 임진왜란과 한말의 국력쇠잔, 일제의 병탐에 의해 1869년 판적봉환을 이즈하라(嚴原藩)로 하고, 에이지 정부는 1877년 중앙집권의 폐번치현(廢藩置縣)에 의거,
일본의 나가사키현(長崎縣)에 강제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마도에 대한 문제는 1949년 1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직후인 1948년 8월에 대마도 반환 요구를 한 후 일본측에서 물의가 일자 9월에 다시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후에도 거듭 대마도 반환 요구를 하였으나 일본측의 항의와 당시 미국의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거부되고 만다.
또한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서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학자들에게 '대마도 연구' 집대성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여 대마도는 일본땅이라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했다.
우리의 지난 역사 속에서 대마도는 일본땅이라는 단순개념화가 성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단순개념을 여러 근거와 연구를 통해 좀더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 볼 때라 여겨진다.
참고자료
- 김화홍, 「대마도도 한국땅」, <知와 사랑>
- 한영우, 안휘준, 배우성,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 <효형출판>
- 이병선, 「임나국과 대마도」, <아세아문화사>
출처: 오마이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