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울산 부자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차용규(車溶珪)씨다. 차씨는 당시 대부분의 울산 부자들이 땅 부자였던데 반해 양조장과 목재상 그리고 인쇄소를 운영했던 기업형 부자였다는 것이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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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방 경영으로 부자가 되었던 이종하씨의 화신약방은 그 동안 주인이 여러번 바뀌면서 건물도 한옥에서 슬러브 건물로 교체되어 지금은 옛 흔적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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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재산이 기업형이다 보니 다른 지주들처럼 재산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그가 가진 회사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부자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그는 울산양조회사와 울산인쇄소, 울산상사주식회사, 울산산업조합을 갖고 있었다.
이 외에도 1932년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학성자동차를 인수해 한국인들이 운영토록 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들은 차씨가 사업 수완이 좋을 뿐 아니라 사업을 통해 정직하게 번 돈을 지역 발전을 위해 많이 내어 놓아 울산상공인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칭찬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1919년 북정동에 청년회관을 설립하는데 앞장섰고 학교 건립에도 적지 않은 돈을 내어 놓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처럼 지역민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울산 사람들은 차용규씨 하면 먼저 친일부터 생각하게 된다. 그가 친일파로 인식되는 것은 일제강점기 말 일본 정부에 경비행기를 헌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차씨는 이 때문에 해방 후 반민특위에 불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으나 친일행적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당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해방 후 1956년 있었던 제2대 울산 읍면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1960년 12월에 있었던 3대 읍면의원 선거에서는 당선과 함께 읍의장까지 지냈기 때문이다.
3대 읍면의원 선거는 4·19 학생의거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당 정권 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가 읍의장이 되는 것이 당연시 되었으나 이 때 그는 민주당이 아닌 무소속 후보로 나와 당선되었다.
이와 관련, 차씨의 손녀 사위로 최영근 의원의 보좌관을 지냈던 박인근(79)씨는 “어른이 일제 말엽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비록 비행기를 헌납하기는 했지만 울산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선거에 당선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 엄청난 부자지만 해방 후 선거에 나섰을 때는 그는 이미 재산이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그의 재산 중 울산양조회사는 해방 후 고기업씨에게 넘어갔다. 고씨는 차씨가 울산양조장을 운영하고 있을 때 박모씨와 함께 차씨 아래서 양조장 일을 보고 있었다.
차씨가 이 양조장을 운영할 때만 해도 이 공장이 나중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공장을 고씨에게 넘기게 되는데 해방 후 선거가 계속되다 보니 술이 어찌나 잘 팔리는지 고씨는 짧은 시간에 울산의 신흥부자가 되었다. 실제로 당시 선거는 ‘술 선거’라고 할 만큼 선거가 시작되면 후보는 유권자들에게 술을 돌렸고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술을 얻어 마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고씨와 함께 차씨 집에서 양조장 일을 함께 했던 박모씨 역시 차씨 집에서 나온 후 따로 양조장을 학성공원 인근에 차렸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차씨가 선거에 나설 때는 이미 경제적으로 어려워 선거 사무실을 내고 선거 운동원을 고용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혼자 지팡이를 짚고 태화다리를 건너다니면서 외롭게 선거 운동을 펼쳐야 했다.
그의 재산은 해방 후 급작스럽게 없어졌다. 해방 후 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자식들에게 넘겼다. 그런데 장남인 재훈(載勳)씨가 동생들과 함께 이 재산을 갖고 서울로 가 인쇄업을 했는데 처음에는 사업이 잘 되어 돈을 벌었으나 6·25가 터지는 바람에 형제들이 모두 손을 털고 울산으로 와야 했다.
휘문고교를 마친 재훈씨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해방 후 중앙 고위직 인사들 중 친분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3대 사회부 장관을 지냈던 박술음(朴術音)씨와 친해 서울 을지로 중부경찰서 앞에 인쇄소를 차려 놓고 관공서 일을 많이 했는데 박 장관이 일거리를 많이 주어 큰돈을 벌었다.
울산에 온 후 재훈씨는 잠시 울산농고 교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동생들 중 휘문고와 명치대를 졸업했던 재준(載俊)씨도 나중에 제일중학교 수학 교사로 일하게 되는데 그는 특히 미적분을 잘 가르쳐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세 번째 재수(載洙)씨는 동아약국 옆에서 목재상을 했다.
이에 반해 형을 따라 서울로 가지 않고 재산을 비교적 잘 지킨 네째 재우(載佑)씨는 복산동에서 목욕탕을 운영했다.
재훈씨는 울산에 온 후 정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되는데 특히 울산에서 5~6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최영근씨와 친했다. 따라서 7대 총선에서 낙선한 최 의원이 서울 제일생명보험회사 사장으로 가면서 지구당 위원장직을 당시 부위원장이었던 그에게 넘겨주었다. 이때 그가 국회의원이 될 뜻을 갖고 있었다면 8대 총선에 출마해 금배지를 달수도 있었지만 지구당 위원장 자리를 최형우씨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최씨가 8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최영근 의원의 비서였던 박인근씨가 차재훈씨의 사위다. 박씨는 장인 차씨에 대해 “장인이 부자집 아들로 돈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정치를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차용규씨 집은 복산초등학교 인근에 있었다. 그런데 60년대 초 차씨가 이 집에 살고 있을 때 박인근씨가 찾아 간 적이 있다. 박씨는 “제가 결혼할 무렵 장인이 어른에게 인사를 하러 가자고 해 어른 집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집에 도착해 보니 울산 최고의 부자였다는 어른 집이 예상외로 규모가 작아 실망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때 이미 어른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본채만 어른이 사용하고 사랑채는 모두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 집마저 나중에 축구왕 최성곤씨의 동생 최민곤씨에게 넘어가게 된다. 최영근 의원이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 부위원장직에 있었던 최민곤씨는 한 때 대한통운의 고위직에 있었는데 이 때 돈을 벌어 이 집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993년 울산교회가 교육관을 지으면서 이 집을 구입한 후 건물을 뜯은 후 주차장 부지로 활용하는 바람에 지금은 울산교회 주차장이 되어 있다. 당시 울산교회 장로로 이 땅을 구입했던 성보경 전 경남도의원은 “차씨가 살았을 때는 집터가 991.7㎡(약 300평)이 넘었다고 하는데 우리 교회가 이 땅을 구입을 할 때는 이미 집터가 많이 줄어 인근에 있는 다른 집터를 사 넣어 주차장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 주차장에는 차씨가 심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나무 두 그루가 있어 눈길을 끈다. 현재 주차장 남쪽에는 소나무와 만리향이 각각 한 그루씩 있는데 둘 모두 수령이 1960~70년은 훨씬 넘어 차씨가 이곳에 살았을 때부터 정원에 있었던 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성보경 장로는 “이 곳을 주차장으로 만들면서 당초 정원수로 있었던 나무들을 많이 베어 버렸는데 소나무와 만리향은 외형이 좋아 베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었다”고 말한다.
울산사람들 사이에 병영의 천석꾼으로 알려진 이종하(李鍾夏)씨 역시 울산을 대표하는 부자였다. 이씨가 돈을 번 것은 일제강점기 말 병영동사무소 큰 길 건너편에 화신(和信)약방을 차리면서다. 당시만 해도 울산에는 병원은 물론이고 약대를 정식으로 졸업한 약사가 운영하는 신약국이 없었다. 따라서 화신약방은 큰돈을 벌었고 이 돈으로 현재 일신에일린의 뜰 아파트가 들어서는 병영 일대의 농토를 사들여 땅 부자가 되었다.
이보다 이씨가 울산 사람들 사이에 부자로 알려지게 된 것은 13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잘 키웠기 때문이다. 이씨는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냈고 이들이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이 때문에 울산 사람들은 이씨 집을 애기할 때 ‘땅 부자’와 함께 ‘자식 부자’라면서 부러워했다.
첫째 딸 이정화(李貞和·84)씨는 당시 서울 이화여전을 나와 남해 출신의 양태식씨에게 시집을 갔다. 양씨는 박정희 정권 때 경북도지사를 거쳐 서울시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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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
남 춘우(春雨)씨는 동래고보 출신으로 60년대 초반 40대에 함양군수를 지냈다. 반면 운동을 좋아했던 둘째 장우(長雨)씨는 야구를 하다가 갑자기 돌아갔는데 70년대 채식 위주의 ‘뉴스타트 운동’을 벌여 우리들의 식생활을 바꾸어 놓았던 이상구 박사가 장우(長雨)씨의 장남이다.
이외에도 셋째가 방우(雨)씨가 박 정권 때 총리실 국장으로 관직에 있었고 넷째 진우(珍雨)씨와 다섯째 정우(正雨)씨는 모두 서울의대를 졸업한 후 현재 서울에서 개업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울산의 구시가지 발전을 위해 구성된 ‘울산중앙발전협의회’ 회장을 지냈던 천우(天雨·64)씨가 이 집 막내로 천씨는 현재 동광학교 교장으로 30년째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종하씨는 병영에서 약방을 60년대 중반까지 운영한 후 성남동으로 이사했다. 옛 약방 터는 병영교회에서 병영시장이 있는 쪽으로 200m 정도 내려가면 오른편으로 고복수 3길의 골목이 시작되는데 이 길 입구에 있다. 옛날에는 큰 한옥으로 종하씨 일가가 이곳에 살았지만 그 동안 주인이 많이 바뀌어 지금은 2층 슬러브 건물로 아래층에는 24시 슈퍼가 들어서 옛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