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석 시인-정훈문학상 작품상
1985 천안 문협 회원으로 작품활동 시작/ 1992 《문예사조》 신인상/ 시집『끈에 관한 명상』『묘원일기』/ 충남문협, 충남시협,서안시문학회, 천안문학, 천안시인회, 대전ㆍ충남 가톨릭문학회 회원/ cord21@hanmail.net
수상소감
ʻ도비도(道非道)ʼ, 도(道)는 도(道)가 아니다. 그 게 도(道)다. 끊임없이 생성되는 진리(眞理), 그 길을 찾아 깜냥껏 걸어왔다.
생각잖게 상을 받게 되어 얼떨떨하다. 상 받을 만한 일을 한 일도 없는데, 앞으로 더 분발하라고 채근하는 뜻으로 주시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ʻ상ʼ은 ʻ밥상ʼ이 최고라고 여겨왔다. 밥상보다 더 좋은 상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일념으로 내 삶의 대부분을 처자식 밥상 차려 주는 일에 쏟아 부었다.
감회가 새롭다. 십여년 전 ʻ충남문학 작품상ʼ을 받은 후로 글쓰는 일로 상 받기는 이번이 유일하다. 그것도 명칭이 똑같은 작품상이다. 글판에서 ʻ밥상ʼ을 차려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자선 대표작(시)
* 새들의 반란
최첨단 산업개발 이후
새들이 하늘을 떠나고 있다.
비둘기가 다가구 주택 유리처마에 똥을 쌌다. 퍼질러 쌌다. 고향마을에서는 까치가 잘 익은 과일만 골라 쪼아 먹었다. 사과도 배도 남아나지 않았다. 남해 어느 섬에서는 꿩들이 창궐하여 애써 가꾼 콩이며 팥이며 닥치는대로 갉아먹었다. 꿩섬이 되었다. 또 어느 동네에서는 백로떼가 마을을 덮쳐 온 마을을 똥천지로 만들었다.
창문을 못 열고 사람들은
똥냄새 틈서리로 하늘을 보았다.
* 가위질 論
종이를 자르다가 가위에 베었다.
상처에서 쓰다 만 편지들이 뚝뚝 떨어진다.
아버님 전상서, 어머님 전상서
사랑하는 아내여 사랑하는 내 아들아
못 다한 사연들이 상처를 비집고 나온다.
전지가위에 살을 베었다.
자라다 만 가지들이 상처를 비집고
새순을 내밀고 있다.
하다 만 공부, 짓다 만 집
부러진 가지들이 옹이 되고 있다.
옷을 마르다가 손을 베었다.
재단하다 만 옷가지들이 우우 몰려들어
농성을 한다. 맞지 않는 치수
누더기 된 입성에 대하여, 지천명에 대하여
제대로 마름질하기를!
* 기도 2009
제 몸에 문이 많습니다.
기쁨이 들어오는 문 슬픔이 들어오는 문
행복도 들어오고 불행도 들어옵니다.
원하옵건대 제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제 몸 밖으로 나갈 때 청정하게 하소서
기쁨이 슬픔이 되지 않게 하시고
슬픔이 슬픔으로 되돌려지지 않게 하시고
행복이 불행이 되거나 불행이
불행으로 굳지 않게 하소서
바라옵건대 제 안에 머물던 모든 것들이
몸 밖으로 나갈 때 순결한 희망이게 하소서
기쁨은 더 큰 기쁨으로 복을 낳고
슬픔은 더 없는 보약으로 만복의 거름이 되고
저의 복은 세상 모두의 복이 되게 하시고
불행은 제게서 영원히 멈추게 하소서
간청하옵건대 제 몸의 문으로 들고나는
모든 것들이 순하게 하소서 평화롭게 하소서
* 촛불은 기도였습니다
바람 앞에 촛불이 있었습니다.
바람과 촛불 사이에 제가 있었습니다.
바람 잠잠할 때 촛불은 조용히 빛을 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폭풍우 몰아치고
거센 바람이 덮쳐왔습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심하게 흔들리는 촛불 앞에서
심장이 멎을 듯 제 몸도 오그라들었습니다.
갈수록 바람은 요동치고 숨넘어갈 듯
촛불은 심지 끝에서 숨을 헐떡였습니다.
옴짝달싹 못하고 숨죽이고 있는 동안
산채만한 바람이 덮쳐왔습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바람과 촛불 사이의 제가 보였습니다.
움츠렸던 몸을 한껏 떨치고 섰습니다.
촛불과 바람 사이에 똑바로 섰습니다.
폭죽 터지듯 촛불이 힘차게 타올랐습니다.
제 가슴도 뜨겁게 벅차올랐습니다.
촛불은 제 삶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 기도, 2010
어머니, 저를 이제에서 하제로
부르시려거든 여기,
물 한 사발 남기고 가게 해주십시오
오르내림이 분명하고
처음부터 마침까지 제 물길로 흐르는
냇물 한 바가지 남기게 해주십시오
곧은 품성으로 늘 준엄하셨던
아버지, 저를 하제로 거두시려거든
여기, 불 한 섶 남기고 가게 해주십시오
이치 분별이 확실하고
불씨에서 재까지 진퇴가 분명한
관솔불로 떠나게 해주십시오
허락하신다면 아버지,
아랫목에서 윗목까지 고루 덥혀줄
군불 한 아궁이 남기게 해주십시오
떠날 때는 물불 제대로 가리게
해주십시오 어머니, 아버지!
* 목련(木蓮)이 피고 있다
(봄이다. 봄은 겨울의 노후다)
기상관측 이래 유례없는 폭설, 혹한을 비집고
두 발로 꽃피우는 나무가 있다.
바다 깊숙이 물구나무서서 천년 생명력을 길어 올리는
저, 싱크로나이즈의 찬란한 발춤!
새하얀 맨발, 채 녹지 않은 자줏빛 맨발!
잔설 녹이며 맨발로 꽃피우는 나무가 있다.
참을 수 없는 부존재의 존재로 살아온
전쟁의 상흔이 평생 문신이 된 나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 처자식
위로의 의무와 아래로의 책무를 숙명으로 살아온
제대로 먹도 입도 배우지도 못하고 생존의 바다
질곡의 갯고랑 진흙펄에서 억척으로 살아온 나무
자빠져 코가 깨져도 발딱 일어서 뛰고
거꾸로 매달아도 억쿨지게 목숨 움켜쥐고
허허벌판에 맨몸으로 내놔도 지악스레 살림 일궈온
암 수술 후에도 하루도 못 쉬고 출근하는 나무
다 퍼주고 껍질만으로도 더 퍼줄 게 남은
알칼리로 남기 위해 핏줄이 산성이 된 나무
바다 깊숙이 얼굴을 묻고 하늘 향해 발 뻗고 있다.
칠흑 갯고랑으로부터 연꽃이 피고 있다.
(봄이다. 봄은 겨울의 찬란한 노후다)
* 산밑에 와서
도처에 산이 있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에는
산이 먼저 와 기다린다.
가끔씩 안 보일 때도 있지만
감기 몸살 열병을 앓고 나서부터
산은 사람 발길 닿는 데마다
건재함을 알았다.
철들면서부터 산은
뛰어서 도달할 수 없음을 알았다.
뛰면 뛸수록 더 멀어지는
다가갈수록 멀찍이 물러앉는 산 앞에서
나는 제대로 걷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걸어서 산에 다가설 때
세상눈이 뜨이고 귀가 밝아옴을
산밑에 와서 깨닫는다.
* 허총(虛塚)
반백을 훌쩍 넘기고도 집 한 채 못 지었다.
서른 평 스무 평은 힘들 것 같고
평 반이라도 집 한 채 지어야겠다.
지는 게 이기는 거고 손해보는 게 남는 거다
천심으로 사는 게 복이지 그런 믿음을
내 집 토대로 삼아야겠다.
땅에서 하늘까지 두드리면 열리고 구하면 얻을
하늘이 주신 가장 큰 선물 희망을 기둥으로 삼고
조상님 음덕 모든 스승과 은인들의 가르침을 대들보로
사랑하는 가족 친지 이웃을 서까래로
오만과 불손을 버리고 가장 겸손한 마음을
세속적 권위보다 참명예를 지붕으로 삼아
꾸밈없이 뼈대를 마무리해야겠다.
추녀에 저간의 그리움 고마움 간절함을 풍경으로 달아놓고
아쉬움 못다함은 보자기 깊숙이 싸맨 다음
가장 아름다운 순간 잊을 수 없는 감사의 순간들이
넓게 푸르게 펼쳐진 초원 쪽으로 창문을 내야겠다.
그리고 대문짝에 이 아무개 모년 모월 모시
* 웃으면 눈이 작아지는 이유
웃으면 눈이 작아지는 이유는
보면 탐욕에 빠질
온갖 유혹의 손짓
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웃으면 눈이 작아지는 이유는
볼수록 상처받을
내 가족 이웃의 허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웃으면 눈이 작아지는 이유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는 문
천국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 언덕
내겐 항상 언덕이 있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오십 중반을 넘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댈 언덕이 있었다.
맨 처음 가족을 떠나 군(軍)생활 할 때에도
먼 이국 땅에 있을 때에도
어김없이 언덕은 있었다.
혈연 지연 학연이 아닐지라도
생면부지, 스치다 우연히 만난 사람도
든든한 언덕일 때가 있었다.
가끔 기댈 사람이 없으면
달도 별도 내게 언덕이 되어주었다.
산도 강도 바다도 내겐
더없이 고마운 언덕이었다.
하늘이 있어 나는 외롭지 않았다.
땅이 있어 나는 슬프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언덕은
내가 바라는 만큼 필요한 만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