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영은 미국인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과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의 밑에서 영어를 배우며 통역을 맡게 된다.
호러스 알렌은 갑신정변 때 칼에 찔려 다 죽어 가던 민영익을 치료함으로써 고종의 신임을 얻어 왕실의사 및 정치고문을 맡게 되는 인물이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한 사람이다.
알렌이 왕실에 들어가게 되자 이하영은 자연스레 통역을 위해 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당시에는 영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전무하였으므로 고종의 통역을 맡게 된다.
집안이 양반 가문도 아니고 과거도 본 적이 없었지만 통역에 뛰어나 1886년(고종 23) 외아문주사(外衙門主事)가 되었다.
이듬해 사헌부감찰, 전환국위원(典圜局委員)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박정양(朴定陽) 공사의 일행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겸임주차미국공사관 서기관이 되고, 다시 주차미국서리전권대신으로 미국에 주재하였다. 1889년 귀국할 때는 우리나라 철도 건설에 관심을 보인 미국 정부로부터 철도의 모형을 얻어오기도 하였다.
이어 기기국사사(機器局司事), 웅천현감, 흥덕현감, 외아문참의 등을 거쳐 1895년 궁내부회계원장(宮內府會計院長)이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관찰사(오늘날 서울시장)가 되었다가 주차일본국특명전권공사, 1897년 주차일본국특명전권대사로 일본에 주재했다. 그 뒤 중추원부의장, 귀족원경(貴族院卿), 중추원의장 등을 역임하고, 1899년에는 의정부찬정, 주차일본국특명전권공사겸의정부찬정(駐箚日本國特命全權公使兼議政府贊政)이 되었다.
1904년에 외부대신(오늘날 외교부장관)이 되었는데 재임 기간 동안 일본에 충청도·황해도·평안도의 어로권을 넘겼으며, 한성의 치안권 외에 많은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법무대신과 형법교정총재로서 처음엔 불가하다고 주장했다가 찬성으로 의견을 바꾸었다.
1897년 일본 주재시 일본 정부로부터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1900년 훈이등태극장(勳二等太極章)을 받았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일본으로부터 종삼위훈일등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또 훈일등팔괘장(勳一等八卦章)을 받았다.
이하영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갔으며,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자작 작위를 습작한 아들 이규원과 함께 선정되었다.
이하영이 호러스 알렌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호러스 알렌 역시 의료 선교사로 또 외교관으로 업적을 많이 남겼지만 반면에 외교와 분쟁해결을 빌미로 고종의 환심을 사거나 협박하며 조선의 국책사업에 관계하였다.
철도부설권을 따내고, 1896년부터 40년 간 순금 80여 톤을 채굴한 세계적 광산으로서 노다지(No touch)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운산금광의 이익에 개입했으며 서울상수도사업 산림채벌 등등으로 천문학적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첫댓글 어느 시대나 도둑놈은 있게 마련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하영같은 도둑놈은 되지 말아야 겠습니다.
이하영 이름도 예뿌구만 속은 시커멋나 봅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