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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회복을 꿈꾸는 영혼들에게 띄우는 편지(통권 72호)
예 수 사 랑 • 가 족 사 랑
11권 8호 2010. 8. 1. Daum Cafe: 가족치유상담센터
지역도서관에서 꿈꾸는 사람들!
방학을 맞이해서 가까이에 있는 진건(사릉)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최근에 즐기는 자전거로 가기에 적당한 거리라서 시간이 허락되면 도서관을 찾습니다. 미국의 뉴저지와 뉴욕주에서 생활할 때에 가까운 곳에 있는 지역도서관을 종종 이용했습니다. 그곳에서 나이든 노인들이 책을 쌓아놓고 독서삼매경에 빠진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미국의 저력이구나 하면서 감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인생의 후반기에 문화적인 일을 하면서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낼 수 있는 모습은 보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내가 사는 남양주시에서 발견하게 되어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남양주로 이사 오기 전에 진해에서 살 때에도 그곳에 새로 세워진 도서관이 너무나 좋아서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도서관도 너무나 좋습니다. 1층에는 어린이코너가 있는데 그곳에서 필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이름을 알고 싶어서 방문했는데 어린이들이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책을 읽고 독서를 즐기는 모습이 흐뭇했습니다. 여름피서를 다른 곳에 굳이 갈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자전거를 타고서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도서관을 가서 그곳의 시원한 열람실 안에서 책을 읽는 재미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 동안 꼭 읽고 싶었던 박경리의 토지를 읽을 수 있는 행복을 맞보고 있습니다.
지역도서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활용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 중고등학생들, 가정주부들, 어린이를 데리고 온 어머니들이 열심히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삼십대나 사십대의 젊은 남편들이 가족과 함께 오기도 했고요. 오십대나 육십 대의 분들도 열심히 책을 읽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나라가 건강하게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오락의 문화나 저질 인터넷문화만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게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면서 꿈을 꾸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우리의 모습입니다.
도서관의 귀한 고객이 되면서 이제부터 도서관에서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해야 하겠다는 결심도 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목표를 중보기도로 정해놓고서도 늘 열심히 기도하지를 못했던 게으름을 반성하면서 다시 한 번 이 도서관에서 중보기도에 힘을 모을 생각입니다.
중학교시절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청주시립도서관을 다닌 적이 있었어요. 한 번은 시험기간에 아침 일찍 그곳에서 가서 줄을 서면서 자리를 잡았는데 그 때에 교복을 입지 않고 사복을 입고 갔다고 도서관 사서한테 뺨도 맞고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요즘에는 학교폭력에 대해서 논란을 많이 하고 있는데 그 때는 학교 선생님이 아니라 시립도서관 사서한테도 억울하게 맞으면서도 한 마디 말을 못했어요. 지금하고는 격세지감이고 그 때에는 어른이라면 순종하는 사회적인 풍토가 있었지요. 지금도 추억 속에 힘들게 자리를 잡았는데 쫓겨났던 아쉬움이 남아있습니다.
필자가 다녔던 신일고등학교는 도서관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신일학교의 캠퍼스가 아주 넓었는데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멀리 보이는 북한산의 인수봉과 백운대와 도봉산의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면서 짧은 시간이지만 믿음으로 일하는 자유인으로서 미래를 꿈꾸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는 주로 고대 중앙도서관에 좌석을 정해놓기는 했지만 열심히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는 학교 영자신문사 활동과 신앙생활로 분주하게 지내면서 독서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리산자락인 경남 함양에서 목회하다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을 갔는데 그곳에서 열심히 도서관을 이용했습니다. 그 도서관에는 한경직 목사님의 사진으로 된 초상화가 걸려있었습니다. 프린스턴신학교 출신 중에서 세계교회를 위해서 헌신했던 몇몇 분들의 사진을 걸어놓았는데 그 중의 한 분이 한경직 목사님이셨습니다. 그곳에서 한 목사님을 본받는 인격과 삶의 소망하면서도 공부했습니다.
최근에는 책을 한권 집필하기 위해서 열심히 도서관에서 책을 찾으면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집에 오면서 차량이 많은 곳을 피해서 한적한 곳을 이용해서 집에 왔는데 비도 많이 오고 어두워서 힘들었지만 집에 와서 땀에 젖은 몸을 사워하고 나니까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꿈꾸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꿈들은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꿈꾸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 요셉처럼 다니엘처럼 꿈을 꾸면서 한국과 지구촌의 미래를 열어갑시다.
*** 김영근목사<예수사랑, 가족사랑 발행인>1) ***
2010년 8월 가족치유회복중보기도
지난 7월부터 무더운 찜통더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8월에 여러분들의 가족들과 지역사회가 더욱 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마다 여름행사로 분주한 8월입니다. 제가 새벽제단을 쌓은 남양주 금곡교회는 교회의 많은 리더십들이 지방으로 봉사활동을 떠났습니다. 이 봉사활동은 어떤 특정한 지역을 정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섬김을 감당합니다. 교회 청년들은 인도네시아선교출발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여름의 섬김이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짜증나기 쉬운 계절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 여름은 영적성숙의 시간이고 섬김의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우리들의 중보기도도 더욱 풍성 할 것입니다.
1. 기도시간
매일 오전 6시, 낮 12시, 저녁 9시에 개인이나 혹은 그룹별로 1회 10분 이상씩 하면 좋습니다. 시간 여건상 하루 세 번이 불편하면 편리한 시간에 한두 번을 선택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은 10분 이상씩 하기를 권면합니다.
2. 중보기도참여자
기도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기를 원하는 누구나(개인, 교회, 기관별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가정의 치유와 회복을 기도하기를 원하는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3. 기도의 대상
기도참여자가 살고 있는 <시, 군, 구>에 있는 가정들을 대상으로 기도합니다. 저는 경기도 남양주 금곡동에 살고 있어서 저의 기도대상은 <남양주시>의 가정들입니다.
4. 기도의 제목
1) 일반기도제목
첫째, 가족구성원들의 상한 마음을 건강한 마음으로 변화시켜주옵소서!
둘째, 거절의 아픔을 겪는 지체들이 나를 수용하시는 주님을 경험케 하소서!
셋째, 주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가족 안에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넷째, 세상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과 주변을 보게 하옵소서!
다섯째, 가족들의 생각이 성경적인 생각으로 바꿔지게 하소서!
여섯째, 가족들의 언어가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축복의 언어로 바뀌게 하소서!
일곱째, 가정의 신맛(미움, 정죄)이 단맛(사랑, 격려)으로 바뀌게 하소서!
여덟째, 이웃을 향한 적대감이 환대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하소서!
아홉째, 성도들의 바리새인의 마음(교만)이 세리의 마음(겸손)으로 변하게 하소서!
열 번째, 가족식구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떠나가고 주님의 평강이 임하게 하옵소서!
열한 번째, 식구들이 사탄과 과거와 세상과 탐욕의 묶임에서 해방되게 하소서!
열두 번째, 식구들이 예수님을 닮은 상처를 경험한 진정한 치유자로 살게 하소서!
2) 특별기도제목
첫째, 여름휴가기간 동안 자연과 벗됨을 통한 영적인 안식과 충만함을 주소서!
둘째, 계속해서 논란이 되는 4대강 개발문제를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여주소서!
셋째, 이상기온으로 인한 산불, 폭우, 강의 범람 등의 재해가 없게 하옵소서!
넷째, 북한 땅의 동포들이 독재와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신앙의 자유를 주소서!
김영근의 요즘생각1
행복한 자전거 타기
요즘에 자전거 타는 행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자전거로 내가 사는 금곡동에서 사능(진건읍)도서관에 가기도 합니다. 가는 길에 냇가에 흐르는 물과 싱싱하게 자라는 냇가의 풀과 헤엄치는 오리들을 보는 행복도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것은 건강에도 너무나 좋습니다. 자전거를 타고나서 흐르는 땀을 씻어내는 샤워시간도 행복한 시간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기도시간을 가진 후에 자전거를 타고 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일상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행복입니다.
최근에 정부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에 관하여 말하면서 대기업은 엄청난 이익을 창출하지만 중소기업은 고통 가운데 신음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부의 분배를 강조했습니다. 건강한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중소기업에 들어가서 최선을 다하면 행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중소기업경영자들과 종업원들은 착취와 열등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아픔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같은 입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나 살고 너 죽자는 원칙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많이 먹고 너는 적게 먹는다는 논리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나는 많이 먹고 너는 죽지 않을 만큼만 먹어라 하는 잘못된 주장도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기업의 문화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상생하는 윈윈(win-win) 게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균형은 오늘날 교회세계에서도 심각합니다. 교회도 교인들이 큰 교회나 대형교회로 작은 개척교회나 중소형 교회에서 수평이동을 합니다. 부정적인 면에서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 차량과 좋은 시설이나 주차장들을 활용해서 교인들을 싹쓸이해 간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물론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 중에는 자기 나름대로의 전문성을 개발하여 틈새시장을 노리면서 자신들의 독창적인 목회를 이끌어가는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형교회나 큰 교회가 좋은 시설, 좋은 설교, 좋은 교육노하우 등을 내 세우면서 교인들을 모읍니다. 교회도 상생을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대형교회는 몰려드는 교인들을 위해서 새로운 큰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중형교회들을 새로 개척하고 연약한 교회들의 목회를 돕는 방법을 개발해서 교회들끼리 함께 상생하는 방법을 도모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운송수단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승용차를 타는 일, 버스를 타는 일, 전철을 타는 일, 걸어 다니는 일 등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운행수단 중에 자신들에게 필요한 운송수단을 선택합니다. 오늘날 도로는 주로 차량위주여서 보행자들이나 자전거를 타는 일은 때로 위험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나 보행자들을 위해서 도로환경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있어서 환경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것은 차를 타고 가는 일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일은 자연친화적이고 몸의 건강에도 좋습니다.
현대사회는 대형화나 속도화를 지향하지만 이런 속에서도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길과 예수님의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큰 자보다는 작은 자를 향해서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빠른 말보다는 주로 걸어 다녔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에는 나귀도 타셨고 갈릴리호수를 건널 때에는 배도 타기도 했지만 주된 교통수단은 걷기였습니다. 현대사회는 치열한 경쟁사회이기에 대형화나 속도화에 뒤쳐지면 사람들은 실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작고 연약한 자와 늦은 속도의 사람에게 친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였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걸어 다니면서 세리들과 창녀들과 환자들의 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그들을 구원과 치유와 회복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와 삭개오 같이 죄인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나 나병환자나 혈루병 환자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을 통해서 삶이 변화되었고 예수님의 좋은 친구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활동은 이 땅에 천국을 확장시켰고 예수님의 승천 후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름답게 확장되었습니다.
큰 자도 작은 자도, 빠른 자도 늦은 자도 함께 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들을 필요합니다. 장미의 아름다움도 필요합니다. 산골짜기에 피어있는 소박한 패랭이꽃도 필요합니다. 너와 내가 함께 사는 아름다운 사회를 꿈을 꾸는 것이 소박한 보통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주님, 이 땅, 이 민족, 저 북녘을 이 지구촌을 축복하소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 중에는 물질이 넉넉한 사람도 물질이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소욕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부와 권력이 주어지면 이것을 가지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면서 살아갑니다. 부와 권력이 없을지라도 자신들의 가진 부와 권리에 만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평범한 일상도에 만족하면서 살아갑니다.
자전거를 타면서 가면 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정거장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만납니다. 학교를 가는 학생들도 만납니다. 장바구니를 들고서 시장을 오고가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어린이를 유치원이나 유아원에 보내려고 기다리는 젊은 어머니들이나 할머니들도 만납니다. 모든 만남은 소중합니다. 만나는 사람을 축복해주는 것도 자전거를 타면서 경험하는 작은 행복입니다.
김영근의 요즘생각 2
과거를 벗어나 현재에 집중하는 마음
과거를 생각할 때가 많다. 특히 노인이 되면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은 후회를 할 때가 많다. 과거에 실패했던 경험들, 과거에 좋지 않았던 경험들에 집중을 하게 된다. 물론 과거를 반성해서 현재를 풍요롭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일종의 강박신경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혀있을 때도 있다. 추억의 박물관에 좋은 기억을 두고서 그 기억을 돌이켜보면 현재의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현실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현실에서 그것이 비록 작고 보잘 것이 없을지라도 그곳에서 의미를 찾게 되면 현실이 재미있고 가치가 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허드렛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청소한다든지 설겆이를 한다든지 물건을 정리하는 것, 그리고 종종 이곳저곳을 산보하면 그런 것이 별로 필요 없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
정신과의사 전현수에 의하면 과거에 시간을 집중하는 것의 문제점을 세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전현수, 정신과의사가 붓다에게 배운 마음치료 이야기, 불광출판사, 2010, 70-1) 첫째, 우리는 시간을 쓰다가 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둘째, 좋은 추억과 같은 과거를 계속 떠올리면 결국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마음이 과거로만 향하면 과거 쪽으로만 길이 길게 날 수 있다.
쓴뿌리를 만드는 사람들 중에 희생자가 있다. 희생자들은 주로 희생당했던 과거에 묶여있는 사람이다. 억울하게 살아온 과거에만 매달려 있다. 억울한 과거가 현재의 사람을 꼭 묶어서 꼼짝을 못하게 만든다. 과거에 묶여있으면 현재의 어려움도 과거의 잘못 때문이라고 후회하면서 살아갈 때에 현재에 행해지는 모든 일에도 의미가 없어진다. 현재의 생활이 정말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숨 쉬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다. 함께 사는 가족이 식사하는 모습도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나는 아침 식사를 우유에 미숫가루를 타서 시리얼을 넣어서 먹는다. 그 미숫가루는 시골에 사는 어머님이 손수 만들어주신 것이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식사시간에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에 그 간단한 아침식사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모른다. 저녁에 잠자리는 어떠한가?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함께 잠자리를 해주는 그 사람이 있기에 잠자는 시간이 행복하다. 혼자 잠드는 경우에 하루를 정리하면서 누군가를 위해서 짧은 시간을 중보기도 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은 참으로 가치 있는 시간이다.
김영근의 요즘생각 3
도봉산을 오르면서
오랜만에 도봉산에 올랐습니다. 늘 한 번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한 산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늘 학교에 오갈 때면 바라보이는 곳이 삼각산과 도봉산이었습니다. 백운대와 인수봉이 있는 삼각산은 몇 번 등산을 한 적이 있었는데 도봉산은 한 번도 올라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혼자 호젓하게 산을 향해 올랐습니다. 토요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부끼리, 가까운 친구들끼리, 동호회원들끼리 산을 오르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종종 어린이들도 어른과 함께 등산하는 모습도 보기에 좋았습니다.
조금 오르다 보니 이상한 바위를 하나 보았습니다. 꼭 작은 조개껍질을 붙여놓은 것 같은 바위였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바위도 있다는 생각을 가졌지요. 어쨌든 자연을 만드신 조물주의 창조의 기술은 신비합니다. 제목이 재미있는 바위였습니다. 참 정말 재미있는 바위입니다.
도봉산은 오르기에 편안한 산입니다. 실록이 우거진 자연 속에 걷는 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요.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가까운 도시에 이런 산이 있어 등산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바위가 아름답게 어울린 모습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바위 속에 자라는 나무의 생존력은 엄청납니다. 우리 인간들도 저 나무의 본을 받으면 좋습니다. 어떤 위기와 시련이 와도 저 나무처럼 끝까지 인내하며 열심히 뿌리 내리며 살아야 합니다. 자연이 주는 행복은 늘 싱그럽습니다.
도봉산 정상인 선선대에 올랐습니다. 사실 도봉산의 정상은 아니고 정상에 올라가려면 암벽을 타야 하는데 아직은 필자는 그 암벽을 탈 형편은 못되었습니다. 신선대에서 바라보니 앞에 보이는 도봉산의 정상을 향해 몇몇 분들이 암벽을 타고 도봉산의 장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고 정상에서 그들이 로프를 활용해서 내려오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곳 신선대에서 기암절벽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북한산과 도봉산의 여러 정상들을 바라보니 모두가 아름답고 싱그러웠습니다.
이곳 신선대에서 삼각산의 모습이 보입니다. 신선대 정상에 있는 안내 그림을 통해 주변 산봉우리들을 가까운데서 부터 먼데까지 소개해놓았습니다. 멀리 보이는 삼각산의 인수봉과 백운대의 모습을 설명해놓았습니다. 도봉산 정상에 있는 사진설명을 통해서 위치를 확인한 다음에 바라보니까 등산객들은 도봉산과 북한산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있어서 카메라에 담아보았습니다. 등산 중에 휴식을 취하면서 성경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은 필자의 특별한 행복입니다. 말씀을 읽은 뒤에 보이는 산의 모습은 더욱 정겹고 포근했습니다.
오랜만에 한 도봉산의 산행으로 즐겁고 행복한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하산하면서 도봉산의 호젓한 모습에 다시 한 번 정겨움을 느꼈습니다. 산은 언제나 사람들을 포근하게 안아주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람들도 산이 우리를 환대하는 것처럼 늘 다른 사람들을 적대감이 아니라 환대하는 마음으로 대하면 좋습니다. 이 번 산행에서 두 명의 영국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비즈니즈로 한국에 왔는데 5일 정도 머물었는데 이틀 후면 영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어요. 한국에 대한 인상을 물었는데 아주 좋다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지요. 산을 찾는 마음은 행복합니다.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그렇습니다. 나의 도움은 진정 당신에게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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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마주하는 법
김스텔라 서울모현 가정호스피스 수녀
어린 손자들은 할머니 손과 발을 어른들은 얼굴과 몸을 닦았다. 할머니와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이 같은 사랑의 행위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게 또 있을까. 우리는 죽음과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단지 시간이 달라서 아직 먼 것처럼 느끼지만…
그 할머니를 만난 것은, 통증이 너무 심하자 할머니의 아들이 다급한 마음에 가정호스피스를 찾아 연락했기 때문이다. 통상 서너 달 진단을 받은 말기암 환자들에게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간호를 하는 게 가정호스피스 역할이다. 할머니는 머리가 아프다며 하얀 천으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발가락 사이사이에도 동여매고 있었다.
“할머니, 머리는 왜 그러고 계셔요?”
“머리를 꽁꽁 묶어 놓으면 머리가 안 아프거든.”
할머니는 암 말기로 더 이상 병원에서 해 줄 게 없다고 해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중환자실에 가서 치렁치렁 고무호스와 줄을 매달고 있느니 집에서 조용히 임종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통증 때문에 너무 고통을 겪어 아프지 않고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할머니께 진통제를 드리자 통증은 조절되기 시작했고, 구역질과 구토 문제도 해결돼 식사도 제대로 하게 됐다. 그렇다고 죽음의 두려움이 해결된 건 아니었다. 집안에 혼자 계셔야 할 때가 많아 오히려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하루는 밤늦게 통증이 심하다고 해 집으로 방문하자, 할머니는 “당신은 사람도 아녀”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할머니는 갑자기 목소리가 살아나더니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와 같다”고 했다.
할머니의 이런 말씀을 듣는 순간, ‘아! 이게 바로 우리 삶이구나’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할머니는 아프고 힘들 때 누군가가 늘 함께 있어 주기를 원했다. 신체적인 통증만 아니라 정신적 통증을 더 두려워했다. 그러기에 늦은 시간에도 집으로 급하게 달려오는 우리를 보고 할머니는 편안해했다. 환자를 돌보는 것은 우리의 시간에 맞춰야 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시간에 맞추어야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다.
그렇게 4개월여를 보낸 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녀들뿐만 아니라 손자들도 모여 있었다. “지금 할머니는 여행을 떠나실 준비를 하고 계시니 손자들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의 권유에 아이들이 한명씩 할머니에게 다가가 “이젠 아프지 마세요.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사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말할 힘조차 없는 할머니는 눈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얼굴은 금세 평안해졌고 가족들도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할머니에게 새 옷을 입히기 위해선 목욕을 시켜드리시죠”고 하자, 어린 손자들은 할머니의 손과 발을 씻겼고, 어른들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여윈 몸을 닦았다. 할머니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세상을 떠나려는 사람과 이 같은 사랑의 행위처럼 숭고하고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할머니는 비록 한마디도 못하고 숨 쉴 힘조차 없는 상황이 됐지만 얼굴 표정으로, 눈 한번 맞추는 것으로 가족들의 사랑을 확인하였다. 온 가족이 모여서 할머니와 지낸 옛날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할머니의 장례식과 유언에 대해 말했다. 자기의 유언대로 가족들이 해 줄지 염려하는 환자들이 많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그런 얘기를 하면 환자들은 되레 차분해지면서 위로를 받는다. 할머니는 그날 자신의 소원대로 온 가족이 둘러앉은 가운데 어둠을 잘 헤치시고 빛을 향해 웃으며 가시지 않았을까.
나는 이 가정을 보면서 우리는 죽음과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집에서 돌아가시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병원에서 임종해 죽음을 접할 기회가 적다. 아이들에게 부모의 임종을 지키게 할 것이냐를 놓고 물어보면 대부분 가정들은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녀들이 받게 될 상실감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방암 말기인 38살 엄마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친척들은 “아이들에게 아픈 엄마의 나쁜 기억을 보여주는 게 좋지 않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은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 만큼 엄마가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설득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마지막 인사를 하도록 했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큰 녀석이 엄마에게 “이젠 아프지 말라”고 말하면서 엄마 품에 한참 동안 안겼고, 자기 한 몸 가누기조차 힘든 엄마도 그렇게 아이를 안았다. 둘째도 엄마에게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를 했고 6살짜리 막내가 “엄마 잘 가”라며 아픈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소리 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어린 자녀 셋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엄마는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아이들을 보며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였다. 그렇게 가족과 인사를 엄마는 그날 밤 숨을 거뒀다.
장례를 치른 뒤 아이들의 아빠가 나를 찾아왔다. “아이들이 엄마의 죽음을 못 봤다면 아마 엄마 이야기는 우리 집에선 말도 꺼내지 못했을 거예요. 온 가족들이 모두 그런 어려움을 함께 겪었기 때문에 지금은 서로 엄마의 빈 공간을 채우려고 노력해요. 아이들이 나보고도 오히려 힘내라고 하니….”
어른들의 염려와 다르게 어린 아이들은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통해 죽음이 아주 캄캄하고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에겐 죽음을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생각한다면,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로 남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단지 시간이 달라서 마치 나에게는 아직도 먼 것처럼 느끼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태아가 열 달 동안 엄마 뱃속에서 엄마와 함께 살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죽어서 가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기에 마치 태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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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을 팔테니 아들 살려주세요."
성희직 정선진폐상담소장 (광부• 시인)
'진환이를 아시죠. 10년 전 사고로 아버지 없이 내가 선탄장 다니며
대학 졸업시켰는데 신부전증 걸렸으니' '눈이라도 빼서 팔 수 있게 해 달라'…
한참 동안 아주머니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나도 신장 기증한 지 17년. 진환 어머니가 나의 나침반이 됐으니…
세상의 무수한 생명을 탄생시킨 위대한 이름 ‘어머니,’ 어머니는 인류에겐 ‘사랑’이란 말과 함께 영원불멸의 감동을 안겨주는 단어가 아닐까. ‘동물의 왕국’ 같은 TV프로그램에서 제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동물의 모습을 보노라면 곧잘 가슴이 뭉클해진다. 짐승들도 그러한데 사람의 어머니는 오죽하겠는가.
젊은 나이에 중장비사업에 실패한 내가 탄광촌을 찾은 것은 1986년 봄이었다. 코흘리개 두 딸을 업고 걸리고 하여 산꼭대기 사글셋방에 이삿짐을 푼 아내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시커먼 석탄먼지가 풀풀 날리는 탄광촌에서 살아갈 날이 아득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광부 아내들처럼 탄광촌 생활에 차츰 적응해 갔다. 뜨개질, 조화 만드는 일로 한 달에 겨우 몇 만원씩 버는 부업에 매달려 남편의 밥상에 삼겹살을 구워 올리곤 했다.
그렇게 광부 일을 한 지 5년쯤 되었을 때 나는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다. 노동운동을 하다 해직된 동료들을 위한 모금운동에 앞장서다 회사에 미움을 산 것이다. 이후 복직 투쟁에 열심인 나를 ‘민중당’에서 공천해 1991년 강원도의원에 ‘덜컥’ 당선이 되어버렸다. 피붙이 하나 없는 객지에서 돈 한 푼 쓰지 않고 순전히 광부들의 힘으로 도의원 배지를 달게 됐다. 광부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고 빚을 진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든 보답하고 싶었다.
1993년 봄 어느 날 도의회 임시회가 끝나 지역에 내려와 있을 때였다. “성 의원님, 언제 시간 좀 내주면 드릴 말씀이 있는데….” 길거리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러세요. 요즘은 집에 내려와 있으니까 미리 연락하시고 오세요.”
다음날 아주머니는 음료수 한 박스를 들고서 집으로 찾아왔다. 아내가 가져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사정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의원님도 우리 진환이 아시죠? 10여 년 전에 광산사고로 아버지를 잃고서 내가 광업소 선탄장에 다니면서 대학까지 졸업시켜 놨잖아요. 그런데 그놈이 글쎄, 신부전증에 걸렸다지 뭡니까. 아이고,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아주머니는 병원에서 조직검사를 해보니까 자기와 아들의 신장이 잘 맞는다며 수술비만 있으면 신장 이식을 해 살릴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도의원이니까 어디서라도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내 한쪽 눈이라도 빼서 팔 테니 우리 아들 좀 살려주소! 나야 이제 살 만큼 살았는데 눈 하나 없으면 어때요. 더 늦기 전에 빨리 수술하는 게 좋다니 의원님이 꼭 좀 도와주세요. 내가 그 은공은 잊지 않을 테니 우리 아들놈 좀 살려만 주소….”
한참 동안 그런 이야길 하시는 아주머니를 나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보이기도 뭐해 고개를 돌려 손등으로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쳐냈다. “자식을 살리려고 눈이라도 빼서 팔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는데….”
그날 밤 나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떻게 도움을 줄지 방법을 고민하느라 밤새 뒤척였다. 며칠 후 나는 ‘신부전증을 앓는 광부의 아들을 살려 주세요’라는 홍보물을 만들었다. 지역 주민들에게 돌리고 언론사에도 ‘보도자료’를 배포하였다.
뜻이 있는 곳엔 길이 있다고 했던가! 보름 정도 지나자 1000만원이 넘는 성금이 들어왔다. 수술비에 쓰고도 남을 돈이 모금된 것이다. 그로부터 한 달여쯤 지나 아주머니로부터 “의원님 덕분에 진환이 수술이 잘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눈과 신장뿐 아니라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는 위대한 모정(母情)이 아들을 살려낸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신부전증’이 어떤 병인지를 알게 되었다. 신부전 환자들이 투석치료 받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소변을 시원하게 잘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사람은 두 개의 신장(콩팥) 중 하나만 있어도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신장 기증’을 신청했다. 광부와 폐광지역 주민들에게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이런 방법으로라도 세상에 보답하고 싶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즈’라고, 도의원인 내가 모범을 보이는 것도 보람 있었다.
서너 달 후 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은행 여직원에게 이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조직검사 결과 서로 맞지 않았다. 한 달쯤 후에 다시 연락을 받고 서울 마포구청 청원경찰에게 내 콩팥 하나를 떼 주었다.
그렇게 신장기증을 한 지도 벌써 17년이 되었다. 지금껏 나는 한 번도 크게 아픈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다. 나는 긍정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그동안 마음먹은 일은 대부분 내 뜻대로 이루어졌다. 맨몸으로 출마한 도의원 선거에 연거푸 세 번이나 당선된 것도 그렇고, 지금 ‘진폐증환자’들을 돕는 일도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고 있다. 좋은 일 했다고 복을 받는 것인지….
나는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진환이 어머니를 도운 게 아니라 진환이 어머니가 내 인생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남을 돕는 일을 하면 행운도 함께 따라다니는 모양이다.
좋은 글 나누기 3
불길 헤집고 처연히 사라져 간 나의 동료들
전세중 서울소방재난본부 시민안전체험관장
어떤 말로 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을까 부인의 상냥스러운 대답 앞에 순직했단 사실을 차마 알릴 수 없었다. 출근한 남편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올 줄 상상이나 했으랴. 남들이 대피한 죽음의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게 소방관의 사명이다.
'먼 길 떠난 당신은 늘 푸른 나무/ 순수의 열정으로 빛나던 투혼/ 절망 속에 온몸 던진 희생과 사랑/ 아낌없이 다 내준 거룩한 사명/ 가슴마다 강물 되어 길이 흐르리./ 먼 길 떠난 당신은 늘 푸른 나무.'
서울소방학교 추모탑에 새겨진 순직 소방관을 위한 추모시다. '소방혼(消防魂)'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추모탑은 황금빛 불길이 하늘로 타오르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 화재 현장을 떠오르게 한다. 화마(火魔)와 싸우다 현장에서 숨져간 소방공무원 79명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탑에 서면 언제나 회환에 젖는다.
2004년 을지연습으로 우리 소방대원들은 서울 강남의 한 고층건물에서 인명구조 훈련을 하던 중이었다. 강남소방서 구조진압과장이던 나는 본부석에서 훈련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건물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가 사람을 구하는 훈련이었다. 그런데 뭔가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꼈다.
진압팀장이 울먹이며 내게 다가왔다. 대원 중 한 사람이 하강하다 추락해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원은 벌써 현장에서 순직한 상태였다. 눈앞이 캄캄했다. 안전요원을 배치하고, 전날 예행연습까지 잘 끝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믿기지 않았다.
순직한 대원은 언제나 수첩에 두 아이 사진을 끼워 놓고 자랑스러워하던 특전사 출신이었다. 가족들에게 사고소식을 알려야 하지만 정녕 어떤 말로 가족들을 위로해야 한단 말인가.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남소방서 과장입니다." "아, 네 과장님, 안녕하세요." 부인의 상냥스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훈련을 하다가 순직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소방서장과 대원의 이름으로 부인에게 엄숙히 경의를 표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편이 훈련 중에 부상을 입어 병원 응급실에 와 있습니다." 나는 그저 병원으로 급히 와달라고 하였다.
병원에 도착한 부인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잘 근무하고 오겠다며 나갔던 남편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올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소방관은 재난이나 사고가 났을 때,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간다. 뜨거운 불 속에 뛰어들 용기가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며 누군가를 구해내야 하는 게 소방관의 사명이다. 하지만 평상시 소방차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하는 게 그 가족들이 아닌가.
얼마 전 한 대원이 화재 현장에서 숨졌을 때도 기억이 난다. 그날 현장에 도착해 보니 시꺼먼 연기가 건물을 휘감아 덮고 있었다. 우리는 신속히 불길을 헤집고 들어가 불길을 잡았다. 그러나 혹시 건물 안에 사람이 있을지 몰라 대원들을 다시 들여보내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대원이 어둠과 매캐한 연기 속에서 엘리베이터 통로를 보지 못하고 발을 헛디뎠다. "앗"이란 짧은 비명과 함께였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기 위해 만든 4층 통로였다. 나도 모르게 대원들을 사지로 보냈다는 죄책감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남들이 불을 피해 대피 하는 순간, 거꾸로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게 소방관들이다. 미국 9·11테러 때도 소방관들은 묵묵히 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들어갔다. 그래서 소방관을 세상에서 가장 바보라고 말한다.
며칠 후 인명구조훈련을 하다 숨진 대원의 장례식이 강남소방서장으로 치러졌다. 365일 비상사태로 명절 한 번 제대로 쉬어보지 못하고, 친구들의 경조사마저 제대로 찾아볼 시간이 없어 사회와 멀어지는 게 소방관들의 삶이기에 그들은 외롭다.
난 불현듯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미국의 한 소방관이 썼다는 '어느 소방관의 기도'였다. '신이시여, 제가 부름을 받을 때는/ 아무리 강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저는 언제나 안전을 기할 수 있게 하시어 가냘픈 외침까지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목숨을 잃게 되면/ 신의 은총으로 저의 아내와 가족을 돌봐주소서.'
순직한 대원은 노모와 다섯 살, 세 살배기 두 아이가 있었다. 30대 부인이 아이들을 보살피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부인의 어깨에 너무나 큰 짐이 얹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부인은 의연했다. 나는 부인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순직자 조의금은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보다 남의 보증을 서지 말고, 돈을 빌려주지도 말고 아끼고 살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수소문해 그녀의 직장도 마련해 주었다.
내가 다시 그녀를 만난 것은 순직 소방공무원 추모비 '소방혼' 건립 행사장에서였다.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녀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추모탑에는 그녀의 남편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간만에 본 그녀는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다. 나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요즘 직장은 잘 다니세요?"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나요?"
"네, 잘 크고 있어요."
아직도 새댁인 그녀의 젊음이 내 가슴을 찡하게 하였다.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 쓸쓸하게 느껴졌다. 사고 당시 전화를 했을 때, 그녀의 반가운 웃음과 상냥한 목소리와는 너무도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누가 그녀의 웃음을 앗아 갔나 소방관들은 그게 숙명이라고 오늘도 묵묵히 불앞에 뛰어든다. 자기 목숨을 담보하고서.
오늘도 나는 추모비를 바라보며 그들의 거룩한 희생정신에 머리를 숙인다. 비석에 쓰인 이름들이 햇살을 받아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국토순례여행(30) - 1월 19일2)
강진에서 만난 시인 영랑 김윤식
완도에서 간단하게 김밥으로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완도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강진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길을 따라 신지도로 가는 다리가 보였습니다. 조금 더 가니까 청해진이 있는 장도 근처를 지나갑니다. 길옆에는 해신을 표시하는 작은 프랭카드가 전봇대마다 붙어 있었습니다. 완도는 건강한 섬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있었습니다. 건강한 바다, 싱싱한 해산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이 땅에서 국가의 번영을 위해 희생했던 해신의 발자취 등 모든 것이 건강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가는 길에 일박을 했던 달도교회가 보였습니다. 환대해주었던 한승호전도사님의 귀한 섬김이 감사했습니다. 이 가정의 네 자녀들 위에 주님의 은총을 빌었습니다. 강진으로 가는 길에 아름다운 남도의 자연이 한층 멋있게 나그네의 마음에 흐뭇함을 주었습니다. 강진에 도착했습니다. 이 날은 강진 장날이었습니다. 시장 이곳저곳을 다녀보는 행운을 맛보았습니다. 장날은 시골에 사는 분들에게 작은 축제입니다. 굳이 살 것이 없지만 남이 장에 가면 나도 간다는 말이 생겼지요. 이 장날에 친구들을 만나서 막걸리 한 잔을 나누고 국밥을 한 그릇을 함께 먹고 이제 자녀들에게 줄 사탕과 찐빵을 사갖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오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강진시장은 다양한 해산물도 많았습니다. 어떤 할머니들은 야채 몇 가지들을 들고 나와서 시장 한쪽에서 팔고 있었습니다. 몇 가지 팔아서 돈도 되겠지만 이곳에서 많은 분들을 만나고 싶은 열정이 더 많아 보였습니다. 강진읍의 이곳저곳을 다녀보았습니다. 강진읍교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교회는 기독교장로회 소속교회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 교회를 섬겼던 목사님의 순교비가 있었습니다. 6.25 한국동란 때에 이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한 목사님의 순교비입니다. 복음에 생명을 걸고 지키다가 결국 자신의 목숨을 주님의 순교의 제단에 바친 가신 님의 주님향한 일편단심을 마음속에 새겨보았습니다. 본당에서 기도하려고 했지만 열린 곳이 없어서 아쉽게 교회를 나왔습니다.
이곳 강진은 시인 영랑 김윤식의 생가가 있었습니다. 강진군청 옆에 있었는데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영랑은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1919년 기미 삼일운동 당시에 이곳 강진에 내려와서 시장터에서 독립운동을 주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모란이 피기까지"라는 시로 잘 알려진 애국시인입니다. 생가는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생가의 여러 곳에는 영랑의 시가 돌비에 새겨져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마치 내가 영랑이 된 것처럼 영랑의 시를 읊었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 시를 배울 때인 고등학교 국어시간이 생각이 납니다. 영랑의 다른 시들도 이곳에서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시는 짧지만 담백하고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집안에 남아있는 두레박을 사용하는 우물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에는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쏴하고 쏟아지지만 과거에는 두레박을 깊은 우물에 내리고 물을 퍼 올렸습니다. 한 바가지의 물도 사람들의 정성이 담겨야만 마실 수 있는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물이 너무나 귀해서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물을 가지고 밥을 짓고 그 물을 가지고 그릇을 씻고 그 다음에 그 물이 꾸중물이 되면 짐승들이 먹었습니다. 세제도 사용하지 않았기에 그 물은 짐승들이 먹어도 안전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두레박의 문화는 요즘처럼 빠른 문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느린 것을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빨리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시집간 누이를 생각하면서 영랑이 지은 시를 감상하면서 시집 간 누이가 얼마나 고향집과 형제들과 부모님을 생각했을까요. 힘들고 어려운 때를 지나면서 살다보니까 어느 새 그 집에 안주인이 되어버렸지요. 우리 선조들은 세월을 원망하지 않고 살다 보니까 며느리가 시어머니 되고 엄마가 할머니가 되는 삶 속에서 원망과 한숨이 서려있지만 그것을 감사함으로 보냈습니다.
길을 나오니까 이곳은 영암에서 강진에 이르는 걷기코스의 노정 가운데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걸을 수 있는 길을 개발해놓았습니다. 다음 갈 길이 정해진 나그네라서 그 길을 모두 갈 수는 없었지만 짧은 길을 걸어보았습니다. 조금 걷다보니까 작은 절도 있었고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곳도 있었습니다. 강진군청에 들려서 민원실에서 카페에 글을 적었습니다. 점심식사시간이어서 모든 분들이 식사하러 나갔는데 다리가 불편한 직원은 이곳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길손에게 식사를 하면서 냄새를 피워 죄송하다고 하면서 녹차를 한 잔 대접해주었습니다. 길손을 위한 섬김인 녹차 한 잔의 정성에 감사했습니다.
영랑의 시를 마음속에 다시 새겨보면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강진시외버스터미널로 걸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장흥으로 가는 차를 탔습니다. 강진에서 장흥으로 가는 길은 먼 길은 아니지만 버스를 타고 가면서 호젓한 남도의 멋갈스러운 자연을 즐길 수가 있었습니다. 늘 비슷한 풍경이지만 옛 사람, 그 사람들의 후손들, 오고 오는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야 할 자연을 보면서 장흥읍에 도착했습니다. 장흥읍도 강진읍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장흥읍은 대학시절에 친구의 고향이 여기에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관산읍이라는 곳인데 그곳을 가느라고 거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경제학을 공부하러 미국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침례교 계통의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처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꿈 많던 시절에 믿음을 가지고 사회에 기독교인의 사명을 다하자고 뜻을 모았던 겨자씨 형제단의 멤버였습니다.
장흥읍 내를 이곳저곳을 걸었습니다. 몇몇 교회 앞을 지나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출출한 기분이 들어서 만두집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그 만두집은 이곳에서 꽤나 유명한 집이었습니다. 야채만두 1인분에 2,500원이었습니다. 만두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먹는 중에서도 배달주문이 바쁘게 와서 직원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읍 단위의 만두집이지만 장사가 잘 되는 집도 있는 것을 보면서 불경기에도 장사를 잘하는 나름대로의 비결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만두를 먹는데 만두의 맛이 좋았습니다. 이곳 만두가게에 손님이 들끓는 비결은 역시 맛이었습니다. 만두집을 나와 잡화가게에서 모자와 바늘과 손톱깎이를 사면서 오랜만에 쇼핑을 즐겼습니다.
이곳에서 보성읍까지는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목적지를 어느 곳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은 보성읍을 지나 벌교읍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알아보니 보성읍에는 찜질방이 없고 벌교읍에는 있다는 것입니다. 보성읍까지는 좀 걷다가 버스를 타서 가고 보성읍에서 벌교읍까지는 버스로 가서 벌교읍에서 1박 하기로 했습니다. 보성읍의 녹차밭은 다음에 와서 보기로 했습니다. 보성읍까지 걷는 길도 유쾌하고 즐거웠습니다. 옆에는 자동차전용도로가 있고 나는 종전의 길을 걸어서 가기로 했습니다. 걷는 길은 지방도였지만 목포-순천까지 고속도로 공사차량들이 많이 다녀서 조금은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큰 차들이 위협적으로 다녔습니다. 큰 차가 지날 때는 옆으로 비켜서면서 손을 흔들어 배웅했습니다. 열심히 운전하는 운전기사들이 길손의 배웅에 반가운 응답을 하니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지방도로에서 걷는 사람과 차를 타는 사람의 우연한 만남이지만 작은 만남 가운데도 손을 흔드는 관심기울이기는 참 좋았습니다. 걷는 길에 피곤해서 간이 버스정류장에서 찬양을 했습니다. 혼자지만 힘을 모아 열심히 찬양했습니다. 찬양의 기쁨이 넘쳐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찬양은 곡조 붙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찬양할 때는 기도하는 마음이 되고 주님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근접합니다. 찬양할 때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밤중에 찬양해서 옥문이 열렸던 바울사도의 간증이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찬양은 절망을 이기고 닫혀있던 옥문도 열어 제칩니다.
보성 가는 길에 벌써 오후 5시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직 갈 길은 멀고 보성읍까지 가는 시내버스가 없을 것 같아서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다가 출발했던 장흥읍으로 돌아가서 장흥읍에서 보성읍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돌아가다 보니까 장흥읍에서 보성읍 쪽으로 가는 시내버스가 보였습니다. 마음속으로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행 중에 날이 어두워지면 힘들어지니까 여유 있게 미리 준비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보성읍에서 도착했는데 소문과 달리 이곳에도 찜질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획을 수정해서 이곳 찜질방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보성 녹차밭을 둘러보고 경남 함양으로 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찜질방은 이곳 읍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고 밤이어서 걷지는 못하고 택시를 타고 갔습니다. 여행 중에 길에 줄지어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를 볼 때마다 열심히 택시를 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분들에게는 열심히 택시를 타주는 것이 봉사하는 지름길입니다. 저렇게 마냥 손님을 기다리면 서 있는 택시기사들이 살기가 팍팍할 것 같았습니다. 택시 운전사에게 거스름돈이 천 원 이상 나왔지만 그냥 드렸습니다. 내가 베푼 작은 선행이었습니다. 택시기사는 내일도 나오는 길에 연락하면 오겠다고 했습니다.
찜질방은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진토리교회에서 내가 속한 소대(가정)에서 전화로 심방을 하자고 합니다. 남성탈의실에서 혼자서 전화로 소대식구들에게 근황을 이야기하고 전화구역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이 있어서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전화구역예배를 드리면서 왜 이 작은 찜질방으로 나를 왜 인도했는가를 조금은 깨달았습니다. 찜질방에는 땀을 빼려는 사람들이 여러 분이 계셨습니다. 찜질방 주인은 필자와 같은 교단인 통합측 교회의 안수집사인데 인상이 참 좋아보였습니다. 주인이 섬기는 교회 성도들이 이곳에 와서 찜질방을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권사님이라는 칭호를 들으니까 가까운 사람들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주님, 이 찜질방에 좋은 교제와 건강을 위한 장소가 되게 하소서!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임하게 하소서!
이곳 사람들이 육체의 노폐물과 함께 영혼의 노폐물도 제거하게 하소서!
믿음의 주인이 이곳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국토순례여행(31) - 1월 20일
엄천교회에서 만난 반가운 얼굴들
찜질방에서 나와서 보성읍에서 율포가는 버스를 타고서 보성녹차밭을 보기로 했습니다. 율포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 녹차밭에 들렸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서 옷이 흠뻑 젖었습니다. 비는 피하기로 마음먹으면 귀찮지만 비를 그냥 맞기로 하면 괜찮습니다. 비를 맞으면서 보성의 녹차밭을 감상하는 멋이 괜찮았습니다. 넓게 펼쳐진 푸른 녹차밭은 건강 자체이고 싱그러움 자체였습니다. 녹차밭에는 녹색이 주는 싱그러움이 있었습니다. 이곳저곳 보성녹차축제를 알리는 광고문구도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대한녹차원이라는 것을 걸어갔다가 오면서 비로 흠뻑 젖었는데 여행을 온 대학생들 몇 명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산에서 온 대학생들인데 약 1주일 정도 여행을 한다고 합니다. 진주를 거쳐서 합천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보성에서 진주까지 기차로 갔습니다. 경전선열차는 3량 정도밖에 안 되는 무궁화열차였습니다. 기차를 타는 여행도 멋이 있었습니다. 기차 안에는 술이 취했고 정신도 약간 나간 듯이 보이는 사람이 열심히 무엇인가를 지껄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광주사태에 참석했는데 너희들은 그 때에 어디에 있었느냐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지껄여대었습니다. 한도 많고 아픔도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에게 주님의 긍휼이 임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진주역에서 진주지역에서 외국인노동자 사역을 하는 김해석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낡은 차량 한대를 갖고 마중 나오셨습니다. 늘 자신의 삶을 선교에 바치면서 살아온 김목사님! 나에게는 영감을 주시는 귀한 분입니다. 이분은 내가 신대원을 다니면서 신학춘추기자로 지리산지역선교활동을 취재했을 때 처음 만났던 분입니다. 장신대 신대원을 다니면서 복음의 불모지였던 지리산 지역에서 선교활동에 열정을 쏟았던 주님의 신실한 종입니다.
내가 함양군 엄천교회를 섬기게 되었을 때에 가까운 산청군의 화계교회를 섬기고 있었기에 종종 만났습니다. 복음을 위해 이곳저곳에 개척교회를 섬기면서 교회를 섬기는 분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늘 선사했던 김목사님, 이제는 가는 세월로 인해 몸도 많이 약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하고 있는 외국인 선교사역을 위해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명태찌게를 맛있게 하는 집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숙소 겸 사무실에서 맛있는 커피 한잔을 대접받았습니다. 내가 오히려 식사를 대접해야 하는데 내가 나그네 신분이었기에 대접을 받았습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아름다운 만남이었습니다. 김목사님의 남은 사역에 주님의 은총을 빌었습니다. 사역자의 길은 때로는 외롭고 힘든 시간도 있겠지만 당신의 사랑하는 종에게 주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진주에서 함양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엄천교회의 김재철목사님이 함양읍까지 마중 나오셨습니다. 강형구형제의 모친인 문권사님을 만났습니다. 엄천교회에서 처음 사역했을 때 문권사님댁에서 식사를 사서 먹었습니다. 그 때에 교회나오도록 권면하면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어려울 것 같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벌써 그 남편은 12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아들 가정과 함께 함양읍에 살면서 엄천교회를 나오는데 명예권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거의 20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지요. 그 때 이곳에서 어린 아이였던 아들 민섭이가 ROTC장교로 군복무를 하고 있으니 많은 세월이 흘렀지요.
엄천교회의 김목사님은 열정적으로 시골교회의 목양사역을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다부진 체구에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특히 교회는 활기가 넘치고 많이 부흥을 했습니다. 수요일 저녁예배에 교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필자를 보고자 그 당시 면장을 했던 김태석 노인회 회장도 나왔습니다. 필자가 이 교회를 섬길 때에 면장님의 막내딸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서 아내가 피아노를 가르친 적이 있는데 그 딸도 이제 결혼에서 거창에서 산다고 합니다. 30대 중반의 필자가 이제는 50대 중반이 되어 이 교회를 다시 찾았으니 지나간 세월이 꿈만 같습니다.
인생의 만남을 회자정리라고 하지요. 사람들이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이치를 말합니다. 필자가 이곳에서 목회할 때에 예배당과 사택을 짓고 그 다음해인 1989년에 다섯 명을 세례를 주었는데 그 세례 받은 분 중에서 세 분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머지 한 분은 현재 권사님으로 여전도회 회장 일을 맡고 있고 청년 한 명은 결혼해서 진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교인 중에 한 분은 식당을 하고 있었는데 식사를 하면서 그 주인은 함양문학회에 소속 회원으로 있는데 회원들의 글을 모아 출판했다면서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분이 쓴 글을 읽어보았는데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목사님의 장모님도 함께 오셔서 저녁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필지가 이곳에서 교회를 섬길 때는 교통이 참으로 좋지 않았는데 이제는 교통이 참 좋아졌습니다. 감사한 것은 교회 앞으로 함양읍에서 휴천면소재를 거쳐서 이곳까지 오는 2차선 도로가 새로 생겨서 교회 앞으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필자가 교회를 섬겼을 때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수요예배 시간에 예배시간이 지루했든지 네 살 된 큰 아들 민섭이가 바지를 내리면서 "고추바라"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그만 설교도 중단하고 예배도 일찍 마친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니까 교인들이 함께 웃으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밀감을 한 박스를 샀는데 그것으로 친교를 나누면서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인들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하면서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했습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20여 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던 일도 생각났습니다. 입당예배를 드리면서 지리산 똥돼지를 잡았는데 참석했던 분들이 돼지고기가 너무 많이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지막까지 건축자금이 부족했는데 기적적으로 이름을 밝히기를 거절한 서울에서 사는 어떤 교우가 삼백만원 정도를 보내어서 깨끗하게 건축비를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힘든 목양사역이었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셨고 주님은 종의 목회에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주님, 이 엄천교회를 축복해주세요.
이 주변의 마을들과 주민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세요.
김재철목사님과 사모님과 두 자녀들 위해 은총을 베풀어주옵소서!"
국토순례여행(32) - 1월 21일
영주노회에서 만난 목회자들
이번 순례여행 중에 영주노회에서 총회훈련원에서 주관하는 세미나에 특강을 해야 했습니다. 국토순례여행을 출발한 뒤에 생겨난 일정이지만 이 특강을 해야 했기에 중간에 잠깐 쉬고 특강을 하러 함양에서 영주로 올라왔습니다. 오전 8시 20분에 함양에서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타야했기에 일찍 조반을 먹었습니다. 사모님이 일찍이 조반을 준비해서 식사를 나눴습니다. 아침식사를 할 때에 종종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을 합니다. 손님을 한 명을 치른다는 것은 가정주부의 입장에서 쉬운 것은 아닙니다.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성의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여선교회 회장되는 정차순 권사님도 찌개를 하나 준비해 와서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정차순 권사님은 엄천교회의 첫 열매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목회자의 사역을 위해서 가장 헌신적으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목회할 때에 처음으로 신자가 된 정차순 성도님을 위해서 생일을 맞이해서 케이크를 사다가 생일파티를 열었습니다. 새로 나온 교인을 섬기려는 작은 배려였습니다. 생일 케이크를 받은 정차순성도님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어려움도 많이 있었습니다. 시집간 딸이 힘들게 사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시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권사님은 딸을 험하게 키우면 나중에 결혼해서 힘들게 산다는 풍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험한 시집살이를 하면서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딸이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너무 험하게 커서 삶이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시어머니에게 미움의 돌을 들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고민하면서 사택에 찾아온 정차순 성도님을 향해서 이제는 지나간 일인데 시어머님을 용서하며 사랑하며 살아야하지 않겠느냐고 권면했습니다. 그 시어머니는 천국에 갔고 그 후에 이 성도님은 믿음이 더욱 자라 엄천교회의 기둥처럼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목사님은 함양읍까지 배웅해주셨습니다. 버스를 타고 거창을 거쳐 대구까지 88고속도로를 타고 갔습니다. 이 고속도로는 말이 고속도로이지 2차선 국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웬만한 지방도로도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로 되어있는 형편인데 이 도로는 고속도로라고 하기에 초라한 도로입니다. 이 도로에 추억도 있습니다. 부산에서 교회용 중고봉고차를 샀습니다. 필자가 운전에 익숙하지 않기에 그 당시 마천교회 문수근목사님이 차를 운전하고 왔는데 갑자기 나에게 운전을 하라고 해서 88고속도로 한 가운데서 차를 운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 고속도로에 거의 차들이 다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도 겁에 질린 체 운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당시 함께 섬겼던 주변의 여러 목회자들이 마음속에 그리운 추억을 남기고 있습니다. 순수하게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지금도 만나면 여전히 반갑고 좋습니다.
대구에 도착해서 영주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동대구터미널로 전철을 타고서 갔습니다. 그곳에서 영주가는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영주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신영주교회 담임목사님으로 섬기는 손의석목사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새로 이 교회에 담임목사님으로 부임해서 목양사역에 분주한데 부족한 길손을 위해 시간을 배려해주셨습니다. 손목사님은 장신대 목회전문대학원 박사과정에서 교수와 학생으로 함께 수업을 진행하면서 교제했던 아주 신실한 목사님입니다. 여행을 하느라고 강의를 위한 양복이 준비되지 않았기에 손목사님에게 양복을 빌려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한 뒤에 강의를 위해서 때도 빼고 맵시도 단정하게 하도록 목욕도 함께 했습니다. 자신이 목양하는 교회의 성도님이 운영하는 목욕탕인데 교역자들에게 비용을 받지 않고 섬긴다고 합니다. 목욕을 하면서 목자를 향한 집사님의 섬김에 감사했습니다.
영주노회에서 전인치유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했습니다. 1월 초에 목양사역이 분주한 가운데서도 많은 목회자들이 참석했습니다. 필자가 연구한 전인치유를 내적치유, 인격치유, 관계치유, 영적치유의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서 시간이 짧아서 개략적인 것만을 강의했습니다. 진지하게 참여한 목회자들에게 감사했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자 다음 순례여행지인 전남 고흥으로 가지 않고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본가로 갔습니다. 이곳에서 하루 휴식을 취하고 둘째 아들 은섭이와 함께 고흥으로 가서 국토순례여행을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동서울터미널에 내렸는데 서울은 추웠습니다. 12월 21일에 출발해서 1월 21일에 서울에 도착했으니 한 달 만에 귀경입니다. 한 달 동안에 경기도에서 서울로 다시 경기도로 그리고 인천으로, 경기도로 충남으로 전북으로 전남으로 광주로 다시 전남으로 다녔습니다. 국토의 이곳저곳을 걷고 때로는 버스도 타고 때로는 배도 타면서 지나왔습니다. 눈이 엄청나게 내리는 때에 힘들게 걸었던 적도 있었고 눈이 녹으면서 지나가는 차량들이 튀기는 눈녹은 시커먼 물로 세례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이곳에서 매서운 서울 날씨를 겪어보니까 그 동안 나는 행복하게도 따뜻한 남쪽 지방에 가 있었습니다. 내 몸은 여러 날 있었던 남쪽 지방의 따뜻한 날씨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지난 한달 동안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함께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의 돌보심을 감사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지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마다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 동안 나의 가정과 일터를 지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전남 담양군 죽녹원 앞의 전경>
*** 지난 추운 겨울에 여행 중에 담양 죽녹원에서 찍은 광경인데
더욱 여름철에 사진을 보니까 감회가 새롭다 ***
【가족치유상담센터이야기】
<전남 강진읍에 있는 영랑 김윤식의 생가 소개의 길>
무더운 8월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도 종종 소나기가 내려서 더운 열기를 식혀줍니다. 사람들은 휴가철로 무척이나 분주합니다. 요즘에는 쓴뿌리 치유라는 제목으로 책을 한 권 집필하느라고 분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여름철에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여름철은 짜증나기도 쉽지만 또 한편으로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신앙훈련의 기간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도서관을 가는 재미로 푹 빠져있습니다.
월간쪽지 예수사랑,가족사랑 2010년 8월호를 발행했습니다. 이번에 조선일보에 게재되었던 감동을 주는 <호스피스사역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장기기증 이야기>, <소망관의 헌신 이야기> 등 세 편을 실었습니다. 주님과 길가는 여러분의 8월의 여행길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좋은 길 벗 김영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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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치유상담센터/대표: 김영근(010-3290-1007) 070-7648-3007
경기 남양주 금곡동776 신도브래뉴@102-1304호/ daum cafe: 가족치유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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