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천만리(千萬里) 자는 원지(遠之)고, 호(號)는 사암(思菴) 이며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다.
중국 명(明)나라 사람으로 무과에 장원하여 태청전(太淸殿) 수위사(守衛使) 겸(兼) 총독(總督) 오군수(五軍帥)를 역임하고,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영양사(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으로 아들 천상, 천희 형제와 함께 우리나라에 왔다.
영양천씨(潁陽千氏)세보(世譜)에 보면 영양천씨(潁陽千氏)의 시조는 천암(千巖)으로 명(明)나라 홍무(洪武)년간(年間)에 도총장(都總將)에 오르고 판도(版圖)승상(丞相)을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영양(潁陽)에서 세거 하였으므로 관향이 되었다고 하였다.
천만리(千萬里)는 임직왜란 때 군량(軍糧)수송(輸送)을 담당하였고, 평양(平壤)과 직산(稷山) 동래(東萊) 등지에서 크게 이겼고, 정유재란 때에는 동래, 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운 뒤 귀화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공을 인정하며 화산군(花山君)에 봉(封)하였다. 그리하여 영양천씨(潁陽千氏)는 그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 또 우리나라 천씨(氏)는 모두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으로 관향(貫鄕)이 다른 것은 각기 세거지가 달랐던 데에 연유한다. 따라서 천씨(千氏)는 단일본이다.
주요 세거지(世居地)와 변천
영양천씨(潁陽千氏)의 역사는 4백여년에 불과한, 화산군(花山君)의 후손으로 각지에 관향(貫鄕)을 이루고 세거하는 수는 90여본이다. 그 까닭은 왜정 때의 호적(戶籍)착오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실은 모두가 영양본(潁陽本)이다.
그리하여 1980년대의 주요 세거지는 다음과 같다. 경남 고성(固城)의 장좌(壯佐), 진주(晋州)의 설매(雪梅)굛대곡(大谷)굛광석(廣石), 삼천포(三千浦)의 늑도(勒島)와 울산(蔚山)의 방어진(方魚津), 울산(蔚山)의 삼정(三亭), 부산의 석태(石苔), 김해(金海)의 생림(生林)과 사천(泗川) 지방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경북지방에서는 문경(聞慶)의 부암(富岩), 청도(淸道)의 갈지(葛旨), 안동(安東)의 마일(馬日), 회곡(檜谷), 영일(迎日)의 오천(烏川), 달성(達成)과 옥포(玉浦), 그리고 금능(金陵)의 조마(助馬) 선산(善山)의 장천(長川)에 세거 해 왔다.
전남지방에서는 해남(海南)읍(邑)과 함평(咸平)의 엄다(嚴多), 목포(木浦)의 암태도(岩泰島) 분향, 여천의 자내, 화순 등지에 모여살고 전북의 김제, 고창군, 죽림, 충남에서는 대덕(大德), 부여(夫餘) 가증(佳增)굛석성(石城), 논산(論山)의 죽본(竹本), 보령(保零)의 탄부(炭釜), 강원도의 홍천(洪川), 경기도에서는 시흥의 정왕, 평택의 당현(堂峴), 수원(水原)과 용인 등지에도 천씨(千氏)가 세거하고 있다.
민족사(民族史)의 개요
"가정을 잊고 나라일을 걱정함은 충이요, 적을 이겨 난리를 극복함은 장이며, 부모를 정성껏 모시는 것은 효이니라(우(憂) 국(國) 망(忘) 가(家) 왈(曰) 충(忠), 승(勝) 적(敵) 극(克) 지(至) 난(亂) 왈(曰) 장(壯) 위(爲) 친(親) 지(至) 성(誠) 왈(曰) 효(孝))"
4백년 전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파병했다가 우리나라에 천씨 가문을 연 천만리(千萬里) 장군 이래 대대로 내려오는 영양천씨(潁陽千氏)의 가헌(家憲)이다
자손들은 이를 단순한 명구(名句)로 받드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밴 생활철학으로 실천하여 "조선명륜록"(朝鮮明倫錄)에 5대 연속 효자가 기록되었는가 하면 양장(良將)현신(賢臣) 등 각계에 두드러진 인재를 배출했다.
천씨(千氏)의 중시조(中始祖) 천만리(千萬里)는 이조(李祖) 선조(宣祖) 25년(1592)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리나라로부터 청병(請兵)을 받아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더불어 조병(調兵) 영양사(領糧使)겸(兼) 총독장(總督將)으로 참전했다.
아들 상(祥), 희(禧)와 함께 부하 2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온 천(千)장군은 평양(平壤)과 직산(稷山), 동래(東萊) 등지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러 삼전삼첩(三戰三捷)의 전과를 거두었다.
전란이 평정된 후 모든 병사가 회군하였으나 장군은 휘하 장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대로 남아 두 아들과 함께 우리나라에 귀화 천(千)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조정에서는 그의 전공을 기려 정이품(正二品)인 자헌대부봉조하(資憲大夫奉朝賀)의 벼슬과 함께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였고, 숙종(肅宗)에는 왜란 평정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명(明)의 황제를 제사 지내기 위해 궁중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했는데 이때 천만리(千萬里) 장군도 여기에 종향(從享) 되었으며, 후일 순종(純宗)때는 가헌(家憲)의 뜻이 담긴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큰아들 천상(千祥)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겸(兼) 오위(五衛) 도총관(都摠管), 작은아들 천희(千禧)는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아들 형제에서 6남과 4남이 태어나 천(千)씨 10파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천(千)씨 가문은 조국 명(明)나라의 멸망과 함께 큰시련을 겪는다. 앞서의 임진(壬辰),정유(丁酉)의 왜란(倭亂)으로 조선과 명(明)나라의 국력이 약해짐을 틈을 타 만주(滿洲)에 후금(後金)이 일어났고 인조(仁祖) 14년(1536)에는 국호를 청(淸)이라 바꾼 뒤 스스로 황제라고 칭한 태종(太宗)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조정은 오랑캐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청(淸)은 조선에 압력을 넣어 명(明)에서 귀화한 사람들을 잡아들이게 되니 천(千)장군의 후손들은 심산유곡으로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식솔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지금의 충북(忠北) 제천(堤川), 경북(慶北) 안동(安東), 문경(間慶), 경남(慶南) 고성(固城) 전남(全南) 여수(麗水), 고흥(古興), 해남(海南), 부산(釜山) 등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일부는 함북(咸北) 명천(明川)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전국각지에서 숨어살던 천(千)씨들은 그후 관직에는 나가기 힘든 어려운 상태에서 대개는 농사와 고기잡이 등으로 은둔생활을 계속했다. 다행히 이조(李朝)말에 이르러 전국 유림(儒林)에서 천(千)씨 조상(祖上)의 빛나는 공헌을 그대로 묻혀둘 수 없으니 크게 포상하고 서원을 세워 향사를 모시도륵 임금에게 상주함으로써 면목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숙종(肅宗)때는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했고 순조(純祖)때는 고성군(固城郡) 동해면(東海面) 장좌동의 호암(虎巖)서원, 헌종(憲宗)때는 청도군(淸道郡) 금천면(錦川面) 갈지리(葛旨里)의 황강(皇岡)서원에서 향사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천(千)장군묘' 라고 불리는 중시조의 무덤은 전북 남원군(南原郡) 금지면(金池面)의 환봉산(環峰山) 고려봉에 계신다.
또 부산시(釜山市) 범일동(凡一洞) 자성대(子城臺)공원의 진남대(鎭南臺)바로 옆에는 임진왜란이 평정된 직후 관민이 합동으로 건립한 천만리(千萬里)장군 전첩비가 남아있다.
천(千)씨 문중은 병자호란 이후로 산야에 묻혀 시내 관직에 오른 이는 적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문과 급제자로는 철종(哲宗)때의 천일성(千馹成), 고종(高宗)때의 사헌부지평이던 천광록(千光祿)이 있으며, 이밖에 성리학자로 이름을 높인 천위영(千緯永)이 있다.
무과 급제자는 적지 않으며, 무신으로는 영조(英祖)때의 대호군(大護軍) 겸(兼) 오위장(五衛將)이던 천세필, 영조·정조 때의 석유일(연담대사)도 속성이 천(千)이다.
전남(全南)화순(和順)에서 태어나 대둔사(大芚寺) 12종사(宗師)의 한 분이었으며 만년에는 강석(講席)을 옮길 때마다 근 1백명의 제자들이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실학파의 이충상·정약용·김정선 등 당대의 명사들이 그를 위해 지은 비문과 제기들이 조선(朝鮮)불교(佛敎)통사(通史)에 나와 있다. 저서 20여 권을 남겼는데 사집(四集)수기(手記) 등 일부가 전한다.
또 한사람 천수경(千壽慶)이 두드러졌다. 그는 순조대(純祖代)의 시인으로 서울 인왕산 및 옥류천 근처에 초당을 짓고 송석(松石)도인(道人)으로 자청하며 송석원시사(혹은 서원시사)라는 동인모임을 만들었다. 당시 시인으로 이모임에 참여하지 못하면 격이 떨어진다고 한 만큼 유명했다. 그 무렵 여기에 모였던 시인들은 장혼(張混)·조수삼(趙秀三)·차사(車似) 등 쟁쟁한 명성을 떨치던 사람이었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試社)는 당시 서민문학에 모체가 되어 우리문학에 큰 자취를 남겼으며 그의 편저인 풍요속선(風謠續選)이 남아있다.
천수경은 시만 즐긴 것이 아니라 기인다운 데가 많았다. 그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이름을 일송(一松)·이석(二石)·삼족(三足)·사과(四過)·오하(五何)라고 지었다.
일송과 이석은 자신이 아호에서 땄거니와 삼족은 아들이 셋이니 족하다는 뜻이요, 사과는 너무 과하다는 말이고, 오하는 또 아들을 낳았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밖에 근세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한일독립전선에서 활약한 인물도 많다. 구한말 이강봉(李康奉)의 좌익장(左翼將)으로 문경(聞慶)방면에서 크게 활동한 천보락(千普洛)장군을 비롯 고종(高宗) 때 외부주사를 지내고 도미하여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고 상해임정에도 참여한 천세헌(千世憲), 1919년 블라디보스톡에서 강우규(姜宇奎) 등과 노인역단(老人域團)을 조직하여 그 창립(創立) 간부(幹部)로 활약한 천수접이 빛난다.
6·10 만세 운동과 일제말기 신사참배 거부 등으로 네 차례나 옥고를 치른 천세광(千世光) 목사는 해방 후 성결교회 재건총회 회장에 선임되어 서울 신학교(神學校)를 창설하고 복음전도관을 세우는 등 교회 발전에 이바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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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보고 감니다 서울에 사시는분은 4월7일 오전7시에 서초구민회관 앞에서 출발 한다고 합니다
참여을 하실분은 서초구민회 앞으로 7시까지 꼭 나오시기 바람니다...
제 생각은 뿌리 자료들을 한데 묶어
자손들한테 인지 시켜야 하는데~
지금 이 시대의 자손들은 뿌리를 모르고 지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