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 26일, 목요일, Buenos Aires, Milhouse Youth Hostel
(오늘의 경비 US $60: 숙박료 62, 아침 5, 점심 30, 식료품 56, 버스 5, 택시 20, 기타 3, 환율 US $1 = 2.85 peso)
남미 여행을 시작한지 5개월 10일 만에 Buenos Aires에 도착하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브라질의 Rio de Janeiro에 도착해서 삼바 페스티발 구경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 한 달이 늦어진 셈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쪽 지역에서 계획보다 시간을 더 많이 보내서 그렇게 되었다. 칠레의 Villa O'Higgins로 가려다 못 가게 되면서 약 2주가 늦어지고 아르헨티나의 Ushuaia에서 남극 가려다 못 가고 Bariloche로 비행기로 가려고 했다가 버스로 가게 되고 하면서 약 2주가 또 늦어졌다.
짐을 버스 터미널에 맡기고 한국타운이 있다는 Once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 전철을 탔다. 한 여름이라 날씨가 더웠다. 섭씨 30도 이상인 것 같았다. Once역에서 내려서 지도에서 Once 지역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Cordoba에서 얻어온 한국 신문에 나온 한국 상점들 주소 길 이름이 안 보였다. 할 수 없이 지나가는 경찰에게 물어보니 한국 상점들은 Once 지역엔 없고 Once 지역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데 내가 가진 지도에는 안 나오는 곳이란다. 공중전화를 찾아서 신문에 나온 한국 상점 한곳으로 전화를 걸어서 가는 방법을 물어보려 하는데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전화가 안 걸린다. 한참 고생을 하다가 간신히 통화가 되어서 한국타운 가는 방법을 알았다.
한국타운에 가기 전에 우선 숙소를 정했다. 처음에 찾아간 곳은 Once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Milhouse Youth Hostel인데 위치가 좋고 시설이 깨끗하고 배낭 여행객이 필요한 것이 다 있다. 방값은 62 peso로 (약 US $20) 지금까지 우리가 든 숙소 중에 제일 비싼 가격이었다. 다른 곳에 가 봐도 마찬가지일 것 같고 이곳이 마음에 들어서 방을 정해버렸다. 이곳은 Buenos Aires의 배낭 여행객들의 소굴인 듯 배낭 여행객들로 붐비었다.
배낭 여행객들에게는 숙소의 위치가 좋다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그 도시의 중앙광장에서 가깝다는 말이다. 중앙광장에 가까우면 볼거리, 먹거리가 대부분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있다. 서울로 말하면 시청, 광화문, 종로 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미의 대도시 중 단 한 군데 예외는 브라질의 Rio de Janeiro인데 중앙광장에서 멀리 떨어진 (Copacabana 해변보다) Ipanema 해변이 배낭 여행객들에게 제일 인기다. 해수욕장 때문인 것이다.
숙소 근처의 Av de Mayo에서 7번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남서쪽으로 가다가 Carabobo라는 길에서 내리니 여기저기 한국 상점들이 보인다. 한국타운에 온 것이다. 나중에 알았는데 Once 지역은 한국타운이 아니고 현지인들을 상대로 하는 한국 옷가게들이 많이 있는 곳이란다.
버스에서 내려서 제일 먼저 만난 한국 사람은 Remis 사업을 하는 50대의 정 선생인데 7년 전 IMF직후에 한국에서 이민을 왔다고 한다. Remis 사업은 다른 말로는 콜택시 사업인데 근래에 길거리에서 택시를 잡아타는 것이 위험해져서 인기를 끌고 있는 사업이란다. 정 선생이 사무실에 들어가 앉아서 얘기하는 동안 콜택시를 부르는 전화가 계속 오고 정 선생은 한국말로 전화를 받고 대기 중인 아르헨티나 운전기사 중 한 사람을 불러서 어디어디로 가라고 지시한다. 아마 정 선생 Remis 사업은 주로 한국교민들을 상대로 하는 것 같았다. 정 선생은 20명 정도 운전기사를 두고 Remis 사업을 하고 있는데 총 투자액이 2천만 원 정도란다. 운전기사들은 하루 일하고 30 peso 정도 벌고 한 달 수입은 800 peso (25만 원) 정도란다. 물가가 싸서 그 정도 수입으로 한 가족이 충분히 살 수 있다. 이곳에 사는 것은 모두 만족인데 한국 다녀오는 비용이 너무 비싸 것만이 문제란다. 항공료만 US $1,500인데 약 5,000 peso이니 정 선생이 고용하는 아르헨티나 운전기사의 반년 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밖에도 애들 교육도 문제라고 한다.
점심을 정 선생이 추천해 준 "왕서방"이란 음식점에서 잘 먹었다. 한 정식을 시켰는데 고기가 무척 많이 나왔다. 고기가 여러 종류 나왔는데 삼겹살이 일미였다. 된장찌개도 맛있었고 밑반찬도 하나같이 맛있었다. 냉면도 준다고 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잊어버렸는지 나오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집사람 혼자 근처 한국 수퍼에 가서 장을 보고 나는 음식점에 앉아서 한국 비디오를 한참 보았다. 남미에서는 어디가나 한국 교민이 사는 곳에는 항상 한국 비디오가 많다. 언어 문제도 있고 고향 생각도 나고 해서 한국 비디오가 많은 모양이다.
집사람은 3월 15일 미국으로 돌아가고 나 혼자 남미여행을 계속하기로 했는데 그 전에 집사람 혼자 브라질 단체 관광하는 것을 문의하기 위해서 근처 한국 사람이하는 여행사에 들렸는데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단체관광은 없고 브라질은 위험하다는 대답이었다. 단체관광이 없을 리 없는데 없다는 것을 보면 아르헨티나에 사는 교민들은 브라질 관광은 별로 안 가는 모양이다. 브라질 관광은 포기하고 그 대신 3월 15일까지 나와 함께 우루과이와 그 유명한 이구아수 폭포 구경을 같이 하기로 했다.
정 선생 사무실로 돌아가서 콜택시 하나를 얻어 타고 버스 터미널로 가서 짐을 찾은 후 시내 숙소를 돌아왔다. 굉장히 긴 거리였는데 20 peso 밖에 안 나온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는 동안 하루 30 peso 밖에 못 번다는 운전기사가 구걸을 하는 애들에게 동전을 나눠준다. 못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 광경을 본 것이다. 나는 여행하면서 애들에게 돈을 안 주는 주의인데 정말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저녁때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pedestrian mall을 걸었다. Pedestrian mall은 남미 웬만큼 큰 도시에는 항상 있는 차는 못 다니는 상가 거리다. 숙소 근처에는 Florida와 Lavalle 길이 pedestrian mall이다. 밤 8시인데 아직 저녁식사 시간이 아닌지 음식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남미는 밤 10시는 되어야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Remis 사업하는 정 선생의 얘기가 생각난다. 아르헨티나는 사회가 매우 부패해서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단다. 자기도 경찰에 매주 상납금을 바치는데 그래야 경찰과 문제가 안 생긴단다. 상납금은 일주일에 불과 15 peso이란다. 한국 돈으로 5천 원 정도이니 아르헨티나는 경찰 상납금까지 싼 나라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번화가 풍경
2004년 2월 27일, 금요일, Buenos Aires, Milhouse Youth Hostel
(오늘의 경비 US $36: 숙박료 62, 점심 10, 저녁 20, 식료품 2, 기타 5, 환율 US $1 = 2.85 peso)
이곳은 아침식사가 숙박료에 포함된다. 그럴 땐 기분이 좋다. 아침식사를 푸짐히 한 다음에 숙소를 나섰다. 숙소 건물은 4층인데 안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리지만 밖에서 보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게 생겼다. 대도시에 있는 배낭 여행객들이 즐겨 묵는 숙소들은 주로 중앙광장 근처 안전성이 좀 떨어지는 곳에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도록 건물 외부는 수수하게 해놓았다. 초인종이 달린 조그만 문 하나와 눈에 잘 안 띠는 조그만 간판하나가 전부다. 흡사 옛날 시카고의 비밀 술집이나 도박장 식이다.
우선 우체국에 가보기로 했다. 미국의 아들이 보낸 말라리아 약과 딸이 보낸 새 ATM 카드가 (지난번 칠레에서 잃어버린) 도착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외국에서 장기 여행하면서 소포를 받아 볼 수 있는 제일 쉬운 방법은 어느 도시의 중앙 우체국 주소로 부치는 것이다. 도착 날짜를 대강 맞추어서 그 도시 우체국에 가서 찾으면 된다. 우체국에서는 보통 30일 동안 보관하다가 찾아가는 사람이 없으면 법에 의해서 처분한다.
우체국까지 걸어가면서 시내 구경을 했다. 남미의 파리라는 명성답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다. 대통령 관저인 Casa Rosada (장미 빛 저택), 대성당,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건물들이 볼만했다. Casa Rosada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Peron의 부인 Evita가 발코니에서 열광하는 관중 앞에서 무슨 연설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우체국 건물 역시 웅장했다. 우체국에 들어가서 문의하니 아들이 보낸 말라리아 약은 도착했는데 ATM 카드는 아직 도착 안 했다. 말라리아 약만 찾아 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후에는 Recoleta 지역에 있는 Cementerio de la Recoleta 구경을 갔다. 아르헨티나의 상층계급 사람들만이 묻힌다는 공동묘지인데 높은 담으로 둘려 쌓여있어서 조그만 도시 같았다. 이 공동묘지에서 제일 유명한 묘는 Evita (정식 이름은 Eva Peron) 묘다. Evita는 남편 Peron 대통령과 함께 묻히지 않고 자기 생가의 묘에 묻혔다. Peron은 비록 대통령이었지만 좋은 가문의 출신이 아니라 이곳에 묻히지 못했다.
Evita의 아버지는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는데 외도를 많이 해서 애들을 많이 출산시켰는데 Evita도 그 중에 하나였다. Evita의 아버지는 Evita가 대통령 부인이 된 후에도 끝내 Evita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Evita가 죽고 Peron이 권좌에서 쫓겨난 후에도 Evita는 계속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인기였다. 이를 안 좋아한 아르헨티나 정부는 Evita의 묘를 비밀리에 이탈리아의 어느 공동묘지에 썼는데 20년 후 다시 대통령이 된 Peron이 Evita의 묘를 찾아서 Evita 가족의 동의를 얻고 지금의 Recoleta 공동묘지로 옮겼다.
이 공동묘지는 고양이 천국이었다. 집 없는 고양이들 수백 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누군가가 먹을 것을 충분히 주는 듯 살이 통통히 쪄있었다. 혹시나 이 공동묘지에 묻힌 사람들이 고양이로 환생하여 이곳에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묘지 구경을 끝내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두어 시간 보냈다. 이름난 카페인 이곳에는 커피, 맥주, 와인을 마시며 쉬고 있는 사람들로 꽉 찼는데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볼수록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건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로 보였다. 남자고 여자고 배불뚝이에 줄담배다.
돌아오는 길에 Teatro Colon 구경을 했다. 한국으로 말하면 국립극장이다. 좌석이 7층에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인데 오페라, 발레, 교향악을 연주하는 곳이다. Acoustics가 뛰어 나기로 세계의 5대 극장 중에 하나라고 한다 (다른 네 곳은 Paris, Milan, Vienna, New York). 옛날엔 부유한 사람들이나 올 수 있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입장료가 불과 20 peso이어서 (약 8,000원) 서민들도 충분히 올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물론 정부 보조로 가능한 것이다. IMF 전에는 1년에 30여 번 공연을 했는데 지금은 예산 관계로 10여 번으로 줄어들었다.
이곳에도 귀신이 나온다고 한다. 1970년경에 우루과이로 원정 공연을 가던 아르헨티나 발레단을 태운 비행기가 추락해서 발레단 전원이 사망했는데 그때 최고 인기를 누리던 발레리나 귀신이 이른 아침 시간에 이곳 리허설 룸에 (Rehearsal Room) 나타나서 연습을 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남미의 파리로 불리는 Buenos Aires의 웅장한 건물들
우체국 건물도 웅장하기 짝이 없다
대통령 관저 Casa Rosada, Evita가 연설한 곳으로 더 유명하다
광장에서 기념품 장사를 하고 있는 청년은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사열 준비를 하고 있다
Recoleta 공동묘지는 조그만 도시같이 보인다
항상 관광객들로 붐비는 Evita (Eva Peron) 가족묘
Evita의 가족묘에 있는 조각
3,000명의 관객이 들어간다는 Teatro Colon 국립극장
2004년 2월 28일, 토요일, Buenos Aires, Milhouse Youth Hostel
(오늘의 경비 US $26: 숙박료 62, Colonia 배표 46, 저녁 14, 인터넷 2, 환율 US $1 = 2.85 peso)
Buenos Aires 물가는 Patagonia의 도시들 (Ushuaia, El Calafate, Bariloche) 보다 훨씬 싼 것 같다. 예를 들면 인터넷 사용료가 한 시간에 1 peso로 반값밖에 안되고 음식점, 버스 요금도 싼 것 같다. 우리 방값은 비싸지만 방도 찾아보면 훨씬 싼 곳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어서 더 찾아보지 않고 정했을 뿐이다. 오늘 점심은 한국 식품점에서 사 온 짜파게티로 했다. 점심 식사 후에 두어 시간 낮잠을 달게 잤다. 오랜만에 즐긴 낮잠이었다.
오후에는 중앙공원에 (Plaza de Mayo) 걸어가서 대성당 안에 있는 San Martin의 묘를 구경했다. San Martin은 아르헨티나의 최고 독립영웅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아르헨티나의 George Washington인 것이다. 아르헨티나 뿐 아니라 군대를 이끌고 Andes 산맥을 넘어서 칠레까지 해방시킨 사람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국민의 버림을 받고 프랑스에서 혼자 쓸쓸히 죽었다. 지금은 독립영웅으로 추대를 받아서 아르헨티나 어느 도시에서나 제일 중요한 공원이나 길 이름은 대부분 San Martin 이름이 들어가 있다. 때로는 아르헨티나 밖에서도 San Martin의 이름을 볼 수 있다.
내일 우루과이의 도시 Colonia로 가기 위해서 배 회사 사무실에 걸어가서 배표를 샀다. Buenos Aires 앞에 있는 강 하구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한 Rio de Plata을 (은의 강) 2시간 45분 걸려서 건너가는 배다. 강 하구인지 바다인지 보통 넓은 것이 아니다.
우루과이는 별로 구경할 것이 없는 나라 같다. 간단히 구경하고 버스로 아르헨티나로 다시 들어와서 Rosario를 거쳐서 브라질 국경에 있는 이과아수 폭포를 (Iguazu Falls) 구경하고 Buenos Aires로 다시 돌아올 예정이다. Buenos Aires와 우루과이 사이에 있는 Rio de Plata 이름은 옛날에 얼마나 스페인 사람들이 금은에 정신이 나갔나 하는 것을 말해준다. 1500년대에 멕시코와 칠레에서 (당시에는 볼리비아도 칠레의 일부였다) 은광이 발견된 후 남미에는 어디에나 은이 넘쳐흐르는 것으로 생각했었는지 Buenos Aires 쪽으로 탐험을 온 스페인 사람들이 Buenos Aires 앞강을 발견하고 무조건 Rio de Plata로 (은의 강) 이름을 지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은광은 발견 안 되었지만 강 이름은 아직도 Rio de Plata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르헨티나 최고의 백화점이라는 Galerias Pacifico를 구경했다. 건물이 지금 까지 본 백화점 건물 중에 최고로 웅장하다. 백화점 물건은 구경 안 하고 건물만 구경하다 나왔다.
Galerias Pacifico 백화점 내부는 여유가 있어 보인다
천장 벽화가 인상적이다
2004년 2월 29일, 일요일, Buenos Aires, Milhouse Youth Hostel
(오늘의 경비 US $33: 숙박료 62, 버스 4, 점심 6, 축구경기 입장료 20, 기타 8, 환율 US $1 = 2.85 peso)
오늘은 아르헨티나의 최강 프로축구팀 Boca Junior의 경기가 있는 날이라 마침 잘 됐다 싶어서 구경을 갔는데 강도를 당할 번 한 사건이 벌어졌다.
경기가 오후 4시에 시작이라 오전은 경기장이 있는 La Boca에서 보내기로 하고 아침 식사를 하고 느지막하게 숙소를 나왔다. 숙소 사무실에는 항상 직원 4, 5명이 일을 보고 있는데 들어오는 손님, 나가는 손님, 관광 문의하는 손님들을 상대하고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고 항상 바쁘게 돌아간다. 모든 직원들은 영어가 유창하고 대부분 20대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20대라 손님들과 호흡이 잘 맞는다. 항상 친절하고 웃는 얼굴이고 모든 일을 척척 잘 처리한다. La Boca 가는 버스 번호와 타는 곳을 물어보니 금방 잘 가르쳐 준다.
La Boca는 조그만 항구인데 이탈리아 Genoa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정착해서 세워진 지역인데 지금은 이름난 관광지로 바뀌어서 주말마다 관광객들로 붐빈다. 언젠가부터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관광지역으로 바뀌었다.
제일 인기 있는 볼거리는 Caminito라 불리는 골목길인데 길 양쪽 건물들을 연극 무대같이 화려한 색깔로 꾸며놓고 건물 창문이나 지붕에는 화려한 색깔의 복장을 한 사람 크기의 인형들을 전시해놓았다. 꼭 연극 무대 같기도 하고 만화에 나오는 풍경 같기도 하다. 길에는 화가들이 파는 그림을 전시해 놓고 악사들과 탱고 댄서들이 음악과 춤을 선보인다. 음식점, 기념품 가게들도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Buenos Aires에서 제일의 빈민지역이고 우범지역이라 경찰들이 많이 보였다.
La Boca에서 구경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 다섯 블록 정도 떨어진 축구 경기장으로 걸어갔다. 아직 개장도 안 했는데 입장하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 표를 사려고 매표소 앞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떼를 지어서 다니면서 무슨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2 리터 코카콜라 병에 술을 채우고 마시고 있는 사람들, 정말 왁자지껄한 분위기다. 여기저기 기마경찰과 데모대 진압 무장을 한 경찰들이 보인다. 무슨 페스티발 분위기 같기도 하고 꼭 폭동이 일어날 분위기 같기도 하다. 운동 경기장 분위기가 이런 것은 처음이라 좀 얼떨떨해진다.
매표소에 가서 표를 사려다보니 값이 100 peso (35,000원), 60 peso, 35 peso, 10 peso (3,500원) 등이다. 처음에는 35 peso 표를 사려다 10 peso 표를 샀다. 남미 축구경기는 TV에서 자주 보니 경기장 분위기나 잠깐 느껴보고 나오는데 비싼 표를 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분위기를 느끼는 데는 비싼 좌석보다 싼 좌석이 더 좋을 것 같았다.
표를 사고 경기장으로 들어가려고 서있는 사람들의 줄이 한 10블록 길이는 되었다. 우리도 그 줄 맨 뒤에 서서 입장하는데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경찰 바리케이드 두 곳을 통과하는데 몸수색을 한다. 나는 두 군데 다 사람들 틈에 끼어서 몸수색을 당하지 않고 통과했다. 집사람은 여자 몸수색하는 줄에 섰다가 여자 경찰관에게 철저히 몸수색을 당해서 가지고 있던 마시는 물을 뺏겼다. 도대체 왜 물병을 뺐나하고 나중에 생각하니 술을 물로 가장해서 가지고 입장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경기장 내에서는 왜 맥주를 파는지 모르겠다. 결국 경기장 수입을 최대화하기 위한 장사 속 때문인가 아리송하다.
경기장 안팎이 쓰레기투성이고 오줌냄새가 진동한다. 어떤 곳은 소변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줄지어있고 그 주위는 오줌 바다여서 지나가기조차 힘들었다. 경기장에 입장해서 간신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경기가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보니 주위에는 벌써 술 취한 사람들이 아우성들을 친다. 어떤 사람들은 자리를 찾아가면서 술 때문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내 어깨와 머리를 누르면서 지나가면서 미안하다는 소리 하나 없다. 분위기가 너무 엉망이어서 벌써 나가고 싶어졌다.
오후 4시가 되어서 경기가 시작하니 분위기가 더욱 엉망이 된다. 한 15분 구경하다가 더 이상 있고 싶지가 않아서 일어나서 나가기 시작했다. 경기장 입구에서 좌석으로 올라가는 계단식 통로에는 중간에 쇠줄을 쳐 놓고 한쪽은 입장 다른 쪽은 퇴장이었다. 퇴장하는 쪽에는 우리밖에 없었고 입장하는 쪽에는 늦게 입장하는 관객들로 꽉 차있었다.
퇴장하는 쪽 계단 통로로 걸어 내려가는데 우리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건장한 젊은이 두 명이 우리 앞을 가로 마고 큰소리로 무어라고 지껄인다. 시간을 물어보나 생각하고 대답하려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입장하려고 줄에 서 있었을 때 누가 두어 번 시간을 물어봤다. 남미에는 시계를 안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간을 물어보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스페인어로 대답하는 것이 쉽지도 않기 때문에 때로는 귀찮다. 또 여행자들을 어떻게 해보려는 나쁜 사람들 중에 시간을 물으면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도시에서는 외출할 때는 시계를 아예 끌러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 좋을 것도 같다.) 한 놈은 내 가방을, 또 한 놈은 집사람 가방을 잡아챈다. 집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니 집사람 가방을 잡아채려 하던 놈이 찔끔 놀라서 손을 놓는다. 나는 내 가방을 잡아당기는 놈과 줄다리기를 하는데 가방 한 쪽이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집사람은 이제는 내 가방을 잡은 놈을 향해서 소리를 지른다. 그러는 동안 우리 주위에 입장하고 있던 수백 명의 손님들은 멀거니 쳐다보기만 한다. 집사람은 계속 소리를 지르고 나는 내 가방을 꽉 잡고 안 놓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는지 두 놈은 우리 가방을 놓고 달아나 버린다. 어쩌면 집사람 지르는 소리를 듣고 근처에 있는 경비원들이 올라 올까봐 달아났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여자가 우리에게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란다. 내려가다가 그 놈들을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 올라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얘기다. 경기장으로 다시 올라갔더니 어떤 남자가 다른 출구를 가리키며 그리로 내려가면 안전하다고 한다.
우리가 당하고 있을 땐 처다 보고만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도와주려고 한다. 어쨌든 고맙다. 그 쪽 출구로 나가니 경비원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경기장을 빠져나가서도 혹시 그놈들이나 다른 놈들에게 또 공격을 당할 것 같아서 경찰들이 보이는 길만 골라서 걸어서 큰길로 나가서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가방을 뺏기지 않아서 다행이었으나 (가방에는 돈은 없었지만 카메라가 있었다)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 자체가 큰 실수였다. 어찌 보면 호랑이 굴로 우리가 바보처럼 걸어 들어간 것이다. 배낭여행 처음 하는 사람이나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배낭여행 베테랑이라고 자부하는 우리가 저지른 것이다. 우선 남미에서는 축구 경기장이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모른 것이 실수다. 알고 보니 아주 위험한 곳인데 왜 몰랐을까. Lonely Planet에 경고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었다. 그것이 제일 큰 이유였다. 왜 경고가 없을까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다. 숙소에서 단체로 축구경기 간다는 광고가 있었다. 처음에는 거기에 끼어서 갈까하다가 비싸기도 하고 La Boca 구경도 겸하고 싶어서 우리만 따로 갔다. 제일 씬 표 대신 비싼 표를 사서 들어갔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 같다. 비싼 표를 샀더라면 출입구도 안전했을 것이고 지정좌석에다가 관객의 질도 많이 달랐을 것이다. 10 peso 표가 아니고 35 peso 표만 샀더라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 같다. 최악의 선택을 연거푸 해서 당한 것이다. 그러고도 그 정도로 끝난 것은 운이 참 좋았다 어찌 보면 돈 주고 살 수 없는 좋은 경험을 한 것이다. 그동안 아르헨티나를 살기 좋은 나라로 무척이나 부럽게 생각했는데 오늘 생각이 싹 달라졌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것을 수백 명이 보고 있었는데 도와주려고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니 한국 같으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La Boca의 볼거리 Caminito 골목길
다 쓸어져 가는 건물을 관광 볼거리로 만들다니 기발한 착상이다
실물 크기의 인형도 볼거리가 된다니 그 역시 기발한 착상이다
하루 종일 탱고 춤을 추며 구경꾼들이 놓고 가는 돈으로 돈을 번다
우리는 탱고 춤 사진이나 찍는 것으로 대신했다
선정적인 탱고 춤 사진이다
야외 parilla 음식점, 이 나라 사람들 고기 없으면 식사를 못하는 것 같다
공원에서 혼자 축구 연습을 하는 소년, La Boca는 아르헨티나 최강의 축구팀 Boca Junior의 홈그라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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