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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응노 화백부부에대한 이야기를 하기전에 한국최초의 여류화가라 할수있는 나혜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한시대를 폭풍처럼 살다 허망하게 스러진 한국여성운동의 선구자,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남자보다 우월한 여성의 정체성을 확인시키려했던 그러나 여자일수 밖에 없었던
나혜석(羅蕙錫) 1896∼1948
1896. 4. 28 수원 신풍동 출생
1910. 수원 삼일 여학교 졸업
1913. 진명여고 졸업,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입학
수원 ‘큰 대문 참판댁’에서 태어난 나혜석(羅蕙錫·1896∼1948)은 진명여고 최우등 졸업 사실이 「매일신보」에 사진과 함께 실릴 정도로 이미 하이틴 스타였다. 1913년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1914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 발표
1916 최승구 사망
첫사랑 최승구(崔承九)가 병사한 빈자리에 다가온 남자가 상처(喪妻)한 기혼남 김우영(金宇英)이었다. 교토제대생 김우영은 도쿄를 오가며 열심히 구애했지만 당시 그녀의 관심은 남성과의 결혼이 아니라 ‘여성’과 ‘민족’에 있었다.
1917 <여자계> 창간호에 소설 "부부" 발표 추정
1918 <여자계> 2호 "경희" 발표
1919 이화학당 만세사건으로 5개월간 투옥
1920. 4 김우영과 결혼
그녀는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前室) 딸과는 별거(別居)하게 해 줄 것,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등의 조건이 받아들여지자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조선을 떠들썩하게 한 결혼식을 올렸다.
1921. 개인 전람회, 만주 이주
3월 나혜석은 만삭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여성 개인전람회를 열었는데, ‘매일신보’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보도할만큼 큰 성공을 거뒀다.
이때 첫딸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김우영과 나혜석의 기쁨'이란 뜻의 김나열로 지었다.
같은 해 9월 나혜석은 일본 외무성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김우영을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이듬해 3월부터 안동현 태성의원(泰誠醫院) 내에 ‘안동현 여자야학’을 설립해 교육사업에 나서는 한편 부영사 부인의 직위를 이용해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박태원(朴泰遠)이 ‘약산(若山)과 의열단’에서 ‘의열단에 대하여 은근히 동정을 표하여 온 사람의 수가 결코 적지 않으며, 그 가운데 여류화가로 이름이 높던 나혜석이 있다’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나혜석은 의열단 외에도 1923년 8월에는 중국으로 망명하던 아나키스트 정화암(鄭華岩)의 월경을 도와주기도 했다.
1923.1 <동명>에 "母된 감상기" 발표
1927. 구미일주
6년 간의 부영사 생활을 마친 나혜석 부부는 1927년 6월 구미일주에 나서는데, 이 소식이 ‘조선일보’ 6월 21일자에 실릴 정도로 화제의 여행이었다. 경성역을 출발해 만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그녀는 한 달만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나혜석은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 연구를 하는데, 이 때문에 귀국 후 야수파와 입체파, 후기 인상파 경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파리에서 그녀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자 천도교 신파의 거두였던 최린(崔麟)을 만난다. 이 만남이 그녀의 삶을 풍랑으로 몰고 갔다. 최린과 친형제처럼 가까웠던 김우영은 법률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떠나면서 나혜석을 돌봐줄 것을 부탁하는데, 두 명사는 통역을 대동한 채 자유와 낭만의 도시 파리를 쏘다녀 파리 한인 사회에 화제를 뿌렸다.
1927. 11 최린과 셀렉트 호텔에 묵음
1년 반에 걸친 러시아·유럽·미국 여행은 화려했던 그녀 인생의 종지부를 의미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과 인터뷰에서 ‘(최린을)…나도 퍽 흠선(欽羨)했다’고 밝힌 것은 의혹을 증폭시키고 김우영과 관계를 악화시켰다.
1930. 이혼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1930년 6월 ‘삼천리’에 당시 유럽 일부에서 유행하던 시험결혼론을 주장(인터뷰, "우애결혼, 시험결혼", <삼천리>, 1930.6)하기도 했으나 조선은 유럽이 아니었다. 김우영은 이혼을 거부하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했고, 시댁 식구들이 가세하는 바람에 그녀는 1930년 11월 이혼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챙긴 것은 ‘2년 후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500원짜리 논뿐이었는데, 김우영은 이혼 4개월만인 1931년 3월 신정숙과 재혼함으로써 서약서를 비웃었다.
1931 제10회 조선미전 「정원」 특선
이 작품이 다시 일본의 제12회 제국미전에서 입선하는 등 당당히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으나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갔다. 1932년의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라는 글에서 사람과 돈과 세상의 세 가지가 무섭다고 쓸 정도였다. 1933년 2월에는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열어 생활타개책을 삼으려 했으나 이 역시 쉽지 않았다.
1934년 "이혼고백서" 발표
‘삼천리’ 8, 9월호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약혼과 결혼, 이혼에 이르는 과정과 최린과의 관계에 대한 솔직한 이 고백서에서 그녀는 조선의 불평등한 남녀관계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이혼고백서"는 격렬한 비난을 불러왔다. 전근대적인 남성중심사회에 길들여진 남녀 모두가 비난에 가세했다. 나혜석은 이런 비난에 개의치 않고 1934년 9월 변호사 소완규를 통해 최린을 고소했다. 최린이 파리에서 강제로 정조를 빼앗았으며 김우영과 이혼할 때 일체 생활을 돌보아주겠다는 약속을 이행치 않고 있다는 고소였다.
"이혼고백서"와 최린에 대한 고소는 그해 최린이 중추원 참의로서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는다는 점이나 김우영이 친일관료의 길을 착실히 걷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측면이 있어 보인다. 소취하의 조건으로 최린에게 수천 원을 받은 것도 당한 여자가 오히려 쉬쉬하던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례였다.
1935. 조선관 소품전 실패, 아들 선 사망
"이혼고백서"와 최린에 대한 고소는 엄청난 역폭풍을 불러와 이듬해 10월 서울 진고개(충무로) 조선관에서 개최한 소품전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설상가상으로 첫 아들 선이 폐렴으로 열 두 살 나이로 요절했는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승진한 김우영은 다른 자녀들을 만나려는 그녀를 경찰을 시켜 막았다. 이에 대한 분노와 심신의 고달픔이 겹친 그녀는 김우영이 믿던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녀는 마지막 남긴 글인 1938년 8월의 <삼천리>에 발표한 "해인사의 풍광"에서 승려생활을 부러워했으나 끝내 불가에 귀의하지는 않았고, 이듬해 예산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1944년 청운양로원
1948년 사망
수덕사를 떠나 서울로 온 나혜석은 오빠 나경석의 주선으로 서울 인왕산 청운양로원에 맡겨졌다가, 1948년 시립 자제원(慈濟院)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하게 사망하고 말았다. ‘자식들이 미치도록 보고싶다’던 그녀는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사망시 그녀의 나이는 58세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수덕사
수덕여관
수덕여관이 이리도 휑한 것은 전부인이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
지금 부인인 박인경이라는 분의 고향 대전에 미술관을 만들어 가지고 가버린 탓!!!
또 한 문화재를 아끼고 또 옛것을 보존하려는 한국의 문화재및 예술작품관리의 문제점..
서로 장사속으로만 유치 하려던 예산과 홍성이 모두 싸움에서 졌기에...'
세상에는 인연이 있나보다..
부부연도..
그리고 이별도..사랑도
전부인이 대문열어 놓고 수십년을 기다렸을지라도
돌아 오지 않은 이응노라는 화백의 마음이었기에
마지막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두번째 부인과 함께 했으니..
우리네 여인네였던 박귀희 여사는
쓸쓸히 돌아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 가슴아플텐데..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을 만나려 자주 수덕여관을
들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
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화가일 뿐 애정관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인 박귀희여사에게 운영을 맡기고, 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희 여사가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 박귀희여사는 변치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 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박귀희여사가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1968년 이화백이 대전 형무소에 수감된다. 박귀희여사는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 출옥 후 이화백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수리면서 그녀 곁에 잠시 동안 머무른다.
21세나 연하인 젊은 여자와 떠나 버린 남편을 병구완하는 박귀희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스려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그리고는 “이응로 그림,”이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
파리로 또 훌쩍 떠나버린다. 박귀희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남편을 기다려
온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 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날 같은 희망으로 살아왔지만, 고암은 1992년 귀국전시를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장례식에도 가볼 수 없는 박귀희여사는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 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한다. 그녀는 고암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봐 이혼수속을 허락해 준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이제 그녀는 고암에 대해 작품 한점 소유할 수없고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2001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희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이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응노 화백이 프랑스로 떠난 후에 본부인 박귀희씨가 시어머니를 모시며 여관을 운영했다. 2001년 박씨가 사망할 때까지 이 화백의 흔적과 정갈한 음식맛 등에 반해 수덕여관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예술인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수덕여관은 여관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한 충청남도에 의해 1989년 도(道) 지정 문화재기념물 103호로 지정됐다.
수덕여관 암각화에 새겨진 박귀희 여사의 恨 이응노 화백의 본부인 박귀희(朴貴嬉) 여사는 2001년 2월 24일 밤 10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장조카 집에서 한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수덕여관은 우여곡절끝에 수덕사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2001년 2월 23일 고암 이응노 화백의 본부인 박귀희여사가 92세를 일기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박 여사의 타계는 언론에 제법 긴 부음기사로 보도되면서 그녀의 한많은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했다.
한 남자의 본부인 별세가 기사로 처리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박 여사의 삶에는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희생과 기다림, 그리고 뼈에 사무친 한이 절절이 박혀 있다.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얻은 공허와 서글픔은 안타까움을 너머 형언하기 힘든 애절함을
자아낸다
(밑에글은 다른분이 작성한것을 발췌, 편집한것입니다)
이응로는 나혜석이 떠난 수덕여관을 사들여 마누라에게 운영을 맡긴다. 누나(나혜석)가 부럽다. 나도. 1950년 한국동란. 잘됐다. 아예 수덕여관에 칩거. 그림이나 그린다. 서울에 출강하다 이화여대 미대 졸업생 박인경과 스캔들. 21년 연하와의. 조강지처를 버린다. 이혼해 주라. 나도 사랑 좀 해 보자. 정 그러시다면. 눈물바다. 박귀옥 여사는 사랑하기에 놓아 준다.
죄 받겠군. 수덕여관을 위자료로 넘겨준 이응로는 드디어 1958년 박인경과 파리로 넘어간다. 누나 나혜석이 고맙다. 누님 고맙습니다. 그럴까? 어라 돈이 없네. 종이를 찢고 자르고 구겨서 붙인다. 재미있네. 가난을 즐긴다. 덧붙여진 종이위에 다시 먹을 덧칠하니 마티에르가 되고.
뜰만하니 동백림사건이 터진다. 영구집권을 꿈꾸던 박통은 국회 의석수 2/3 확보가 절체절명(絶體絶命 몸도 목숨도 다 되었다)의 과제다. 그래야 헌법을 바꿀 거 아니냐. 1967년 6월 8일 총선이 실시됐다. 투표용지 통을 통째로 바꾼다. 눈에 뵈는 게 없다. 그래도 부족해 지네들끼리 마구 표를 찍는다. 무법천지. 덤비면 다 잡아가고. 물고문에 구타는 기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박통을 영원한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된다. 그래야 아래 것들도 평생 호의호식할거고. 2/3 확보 성공. 잘났다.
난리가 났다.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난 거다. 박통은 물러가라 훌라 훌라. 야, 왜 이렇게 시끄럽냐. 학교 다 문 닫으라 그래라.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를 잘 살게 만들어 놨더니 나보고 물러나라고나. 배은망덕(背恩忘德 )한 놈들 같으니라구. 야. 뭐 좀 방법이 없겠냐. 있습니다. 각하. 뭐야. 요새 동베를린 친구들이 북한에서 월급 받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래! 뭐 좀 만들어 봐라. 야. 나두 죽것다.
북한공작원이 보잔다. 왜유. 6.25 때 납북된 외아들이 북한에 살아 있다는 거다. 그래! 편지를 교환하고 동베를린의 북한공관을 찾았다. 아들아 보고 싶구나. 어라 없네.
1967년 이응로 앞으로 초청장이 한 장 왔다. 멀리 이국에서 대한민국의 미술 혼을 펼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청와대 와서 식사나 하고 가시죠. 뻥이었지만 순진한 예술가 34명은 고국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고국이 보고 싶은 거다. 공항에서 바로 안기부로 끌려갔다. 이미 64세의 이응로는 돌아 버렸다. 너 김일성하고 친하지. 전 그림밖에 모르는디유. 그래! 물고문이 시작. 조강지처를 버린 죗값. 난 뜨더라도 이혼하지 말아야지.
64세의 백발노인은 눈물로 호소한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데 그럼 어쩌냐. 모른 척 하란 말이냐. 조영수 사형, 윤이상, 이응로 무기징역, 이응로는 대전교도소로 들어간다. 이를 간다. 두고 보자. 본처 박귀옥이 대전 교도소를 찾았다. 젊은 부인은 무서워서 파리 체류 중. 빨간 딱지가 붙었으니. 얘기 아빠 안녕하셨지라우. 미안허네. 매일 덕수여관에서 대전 교도소로 출근 도장. 순애보. 눈물은 이미 마른지 오래고.
여론이 안 좋다. 1969년 집행유예로 석방. 이응로는 11년 만에 수덕여관을 찾았다. 너무 미안하군. 매일 전복죽이 밥상에 올라온다. 본처는 말이 없고. 뭐 이럴 수 있습니까. 라든가. 너 죽고 나 죽자라든가. 이미 박귀옥여사는 도인. 미안한 이응로는 뒷마당 바위에 글을 새긴다. 여보, 미안하오가 아니라.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다 들어 있다.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11년간 여관운영하면서 독수공방한 대가가. 1년간 교도소 출근한 대가가. 삼라만상이 뭐라고나.
1959년 여권이 나왔다. 비행기를 탄다. 박귀옥 여사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안녕히 가세유. 몸건강하시고요. 이 그지 같은 나라. 다시는 오나 봐라. 이제 이응노는 60년대의 서예추상에서 문자추상으로 간다. 세상이 싫다. 더구나 조국이 그를 주워 팼으니. 이제 끝인가. 아니다.
1977년 백건우, 윤정희 납치미수사건이 터진다. 백건우와 윤정희 결혼식의 주례가 이응로다. 이응로의 부인 박인경이 이 부부를 공산국가로 유도 납치를 시도하지만 실패. 난리가 났다. 계속 말썽이군. 나 원 참. 이미 이응로 74세. 혹독한 대가. 나 좀 냅둬라. 80년대 들어 군상 연작으로 간다. 이제 대한민국 안간다. 1989년 꿈에 그리던 호암갤러리에서의 귀국 전 준비 중 급서. 파란만장.
박귀옥여사는 장례식 불참. 오라는 사람도 없고. 너무하는군. 갈 명분도 없고. 이혼녀니. 그냥 여관 마룻바닥 닦는다. 박박. 2001년 눈을 감는다. 사인. 가슴이 시커멓게 탔음. 묻어줄 사람도 없고. 뭐야 이거. 동네장. 수덕여관 문 닫는다. 폐허. 이제 다 간 거다. 나혜석도 낭군도 본인도.
2007년 대전시는 수십억 투자 이응로미술관 개관.
2007년 수덕사가 수덕여관 사들여. 리노베이션. 초가집. 회한. 이응로전. 개관기념식 끝나면 템플스테이 도장으로 활용 예정. 우리 시대 가장 여러분 조강지처 버리지 마서유. 보셨죠. 혼납니다.
박귀옥여사 묘지는 어딨나. 가봐야 것다. 소주 한 잔 올려야지. 할머니 고생하셨습니다. 할머니 편히 주무세유. 저 같은 놈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잖습니까. 전 이응로화백의 그림보다 할머니의 정절이 더 좋아유.
나혜석, 이응노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기구한 삶을 살다간 인물 들이다.
어쩌면 이리도 평범치 못한 삶을 살았을까 할정도로,,
그보다 더 기막히게 산사람들은 자기하고 싶은대로 모든걸 다해본 위의 두사람들이 아니라,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그리고 이응노 화백의 첫부인 박귀옥여사,,
사람의 인연은 질기고 모질어서
인력으로 안되는 부분도 있는것 같더라,
만약 이 두 부부가 조금만 더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마음에 사무친다.
서로에게 상처줄수는 있지만
그 상처 아물어 다시 웃는날이 올때 까지는
서로에게 의지하고 노력했으면 종았을텐데,,한사람만이 아니고 두사람다 똑같이.
아쉽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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