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망국의 설움 못지 않게 극심한 생활고에도 시달렸다. 김구선생은 그의
'백법일지'에서 경제난으로 인해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조차 막연했다"며 "아침 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19년 부터 32년 까지의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은 일제의 탄압과 강대국들의 비협조로 끝나고, 임정은 항저우를 비롯한 중국내 6개 도시를
유랑하다 일제 말기인 40년 충칭에 자리잡았다. 이곳에서도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임정 구성원과 가적들은 콩나물국에 소금을 타 하루 끼니를
띠우곤 했다. 영양실조로 폐병이 번져 80여명이나 사망했고, 그중에는 김구의 장남도 끼여 있었다.
임시정부의
수난이 그토록 꿈에 그리던 해방 후에도 계속된 것은 역사의 굴곡 탓이었다. 우선 임정 주석이던 김구는 한발 앞서 국재에 들어와 해방정국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들의 방해로 인해 주석 아닌 '선생'이라는 개인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48년
대한민국이 수립돌때 임정은 정통성확보차원에 활용됐다. 제헌헌법 전문이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임정)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그러나 5.16쿠데타 후 개정된 헌법 전문에서는 이 구절이 삭제됐다. 임정이 헌법에서 다시 부활한
것은 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에서다. 현재 헌법 전문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국제
학계에서도 임정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찬양받거나 폄하돼 온 면이 있다.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운 북한은 물론 임정의 정통성을 처음으로 외면하는
자세였다. 남한에서는 일제하 독립운동과정에서 우익세력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우익정통론'이 오래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임정의 활동이 그 중요한
근거로 다뤄졌다. 80년대 중반부터 남한에서는 '임정 정통론'을 비판적으로 보는 연구성과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이런 시각에 대해선 다시
"사실보다 연구자의 '입장'을 너무 앞세운 것 아니냐"는 재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