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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너먼 원문보기 글쓴이: 시너먼
에이브러햄 링컨 연설문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 때 결정적인 전투(1863. 7. 1~3)가 벌어졌던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에서 국립묘지 개관식 때(1863. 11. 19) 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설.
-1863. 11. 19 펜실베니아, 게티스버그
지금부터 87년 전, 우리 조상들은,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대륙으로 건너와 새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이 나라를 계속 지키기 위해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을 영원히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지금 우리들은 여기에 모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용사들의 죽음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살아 남은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그것은 이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이 지키고자 한 이상을 지켜 나갈 것, 그리고 이 나라를 다시 한 번 자유와 평등의 나라로 되살아나게 하는 것, 나아가서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결코 이 땅 위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어 원문>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 our fathers brought forth, up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here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it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have, thus far, so nobly carried on.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here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that this nation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and that this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1809. 2. 12 미국 켄터키 호젠빌~1865. 4. 15 워싱턴 D. C..
남북전쟁에서 승리해 연방(聯邦)을 보존하고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은 미국의 여러 영웅들 가운데 미국인에게나 다른 외국인에게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매력은 그가 누추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극적인 죽음을 맞은 남다른 인생경력을 가지고 있고
매우 인간적이고 따뜻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연방의 구원자, 노예 해방자로서의 역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 있다.
특히 링컨은 민주주의를 대변한 웅변가로서 끊임없는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연방이 그 자체로도 구할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전세계 국민들에게 중요한 자치(自治) 이념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구할 가치가 있다는 견해를 폄으로써 전세계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1809년 2월 12일 켄터키의 호젠빌에서 남쪽으로 4.8km 떨어진 외딴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2세때 그의 가족은 이웃마을인 노브크리크에 있는 한 농장으로 이사했다.
어렸을 적 기억은 주로 그 집과 연관되어 있다.
토머스는 선조들보다 훨씬 가난한 편이었으나 억센 개척민이었다.
그는 1806년 6월 12일에 낸시 행크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굽은 어깨와 야윈 가슴에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서 새러·에이브러햄·토머스가 태어났는데, 토머스는 어릴 때 죽었다.
1816년 12월 링컨 가족의 켄터키 농장이 소송에 걸리게 되자 토머스는 가족들을 이끌고 인디애나 주의 남서부로 이사를 갔다.
링컨 가족은 엉성한 통나무 구조물에서 출발해 하나씩 살림을 펴나갔으며 집 주위의 땅도 사들였다.
그의 나이 9세 때인 1818년 가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나
다행히 2년이 채 안되어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재혼했다.
그의 2번째 아내 새러 부시 존스턴 링컨은 딸 둘과 아들 하나가 딸린 과부로 원기와 애정을 가지고 가정을 꾸려나갔고,
토머스 링컨의 아이들을 모두 친자식처럼 대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에이브러햄을 귀여워해 그는 후일 그녀를 '천사 엄마'라 불렀다.
새어머니가 링컨에게 책 읽는 습관을 붙여주었는데,
그가 어떻게 해서 배움을 열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부모는 거의 문맹(文盲)이었고,
링컨 자신도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후에 이웃들의 말로는 링컨이 책 한 권을 빌리기 위해 수km를 걸어가곤 했다고 하지만
그 자신은 "어린시절에 배움을 자극하는 것이 전무했다"고 말했다.
아마 링컨은 어릴 때 많은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책을 여러번 통독했던 것 같다.
이 가운데 집에 있는 유일한 책이었을 성서에는 처음부터 꽤 친숙했던 것 같다.
1830년 3월 링컨 가족은 일리노이 주로 2번째 이사를 했다.
일리노이에 도착한 뒤 농부가 될 마음이 없던 링컨은 여러 가지 일에 손을 댔다.
그는 아버지의 새로운 농장을 경작하는 한편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항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법률 쪽을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미 문법·수학을 독학한 상태였던 그는 법률책을 파고들어
1836년 법률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다음해 링컨은 뉴셀럼보다 변호사 일이 더 많은 일리노이 주의 주도(州都) 스프링필드로 이사했다.
처음에 그는 존 T. 스튜어트와, 다음에는 스티븐 T. 로건과 동업했고,
거의 10세 연하인 헌던은 링컨보다 책도 많이 읽었고 법정에서 능숙했으며,
대체로 견해가 극단적이었으나 이 동업은 더할 수 없이 완벽한 것이었다.
스프링필드로 옮겨온 지 몇 년 안에 링컨은 열심히 일해 매년 주지사나 순회판사의 연봉보다 많은 1,200~1,500달러의 돈을 벌었다.
그는 스프링필드에서 변호사 일을 했을 뿐 아니라 순회법정이 열리는 곳을 따라다녔다.
매년 봄과 가을에 그는 말이나 마차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인구가 적은 대평원을 수백km 여행했으나
대부분 재판의 규모는 작았고 보수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1850년부터 서부에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하면서 여행은 쉬워졌고 변호사 일도 수입이 좋아졌다.
링컨은 여러 철도회사를 위해서 일했으며 은행·보험회사·금융회사의 소송을 비롯해 특허신청이나 형사소송도 담당했다.
법조계에 들어온지 20년쯤 되어서는 정치에 관련된 사건의 변론에도 두각을 나타내
일리노이 주에서 가장 저명하고 성공적인 변호사 대열에 올랐다.
그는 치밀함과 현실적인 상식을 갖추어 항상 소송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을 뿐만 아니라
매우 정직하고 어떤 경우든 공정성을 잃지 않는 것으로 정평을 얻었다.
명랑한 성격에 재치있고 교육도 많이 받은 메리는 켄터키 주 상류층 출신으로,
스프링필드에 있는 그녀의 친척들은 그 도시에서 귀족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메리가 링컨과 교제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링컨은 때때로 과연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결국 1842년 11월 4일 이 두 사람은 결혼했다.
링컨은 아들만 4형제를 두었으나
장남인 로버트 외에 3형제(베이커, 윌리엄 월러스, 토머스)는 어른이 되기 전에 죽었다.
링컨은 자녀 교육을 주로 메리에게 맡겼으며,
그녀는 엄격하면서도 관대한 태도로 아이들을 길렀다.
링컨은 일과 아이들 문제에 모두 관심과 애정을 가졌다.
링컨 부인은 때때로 두통으로 고생했으며 남편이 순회재판 일로 오랫동안 집을 비울 때는 강한 불안감과 외로움을 느꼈다.
그녀는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
아들 월러스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맛보았고,
남북전쟁으로 켄터키 주의 친구와 친척이 적으로 취급받는 아이러니를 겪었으며,
백악관의 안주인으로서는 부당한 언론의 비판에 시달렸다.
결국 남편이 자신의 곁에서 저격당한 10년 뒤인 1875년 그녀는 정신이상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결혼 초기에 남편을 격려하고 그의 야망을 북돋았으며,
그후에는 남편의 관용과 인내의 자질을 단련시키는 역할을 했다.
링컨은 아내와 함께 스프링필드와 워싱턴에 있는 장로 교회에 다녔으나 어떤 교파에 속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젊은시절에는 종교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특히 대통령이 되어 남북전쟁이라는 고통스러운 짐을 떠맡게 되자 종교관념이 깊어졌으며,
점차 필연을 신(神)으로 인격화시켰다.
또한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라고 겸손하게 표현했고 모든 역사를 하느님의 사업으로 보았다.
링컨은 잭슨주의자들이 '보통사람(common man)을 위한 정치'를 내세운 데는 공감했으나
경제사업에서 연방정부가 손을 떼야 한다는 견해에는 반대했다.
그는 후일 "정부의 합법적인 목적은 국민이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개개인의 능력으로는 전혀 해낼 수 없거나 잘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두 사람은 연방정부가 국가은행 설립, 보호관세 제정, 운송시설 개발을 비롯한 국내 개량사업 추진 등을 통해 기업을 장려하고
국가자원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링컨이 보기에는 일리노이 주와 서부 전체가 경제개발에 연방정부의 원조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고
링컨은 1834~40년 일리노이 주에서 휘그당 의원으로 4번 당선되었다.
주의회 의원으로 있는 동안 철도·고속도로·운하 등 대규모 건설계획에 노력했으나
1837년의 공황과 그로 인한 경기침체 때문에 계획은 대부분 무산되었다.
의원으로 있는 동안 그는 노예제에 반대했지만 노예제 폐지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1837년 올턴의 노예제반대 신문편집인인 엘리자 러브조이가 군중들에게 살해된 사건에 대해
일리노이 의원들이 주 폐지론자들을 비난하고 노예제를 지지하는 결의를 상정했을 때 링컨은 기권을 했다.
대신 그는 동료들과 함께 노예제가 "부정과 악정에 기초한 것"이지만
"노예제 폐지를 법으로 공포한다면 노예제가 가지고 있는 악폐가 줄어들기보다는 늘어날 것"이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했다.
1847년 링컨은 연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테일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음에도 그는 아무런 관직을 얻지 못했다.
연방의원에서 물러난 뒤 5년 동안 그는 정치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 지역적 위기가 일어나자 다시 정치가로 두각을 드러낼 기회가 생겼다.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준주(準州)에 '주민주권' 원칙에 따라 노예제 도입 여부를 그 지역 주민에게 맡기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했다.
공화당이 등장하고 휘그당이 급속히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수천 명의 휘그당원과 함께 링컨도 공화당에 들어갔다(1856).
더글러스는 노예경제가 준주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노예제가 준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회가 법안을 제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링컨은 더글러스와는 달리
의회가 준주에 노예제가 도입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링컨은 국가가 어떤 형태로든 결국 통합될 것이지만 준주는 자유주가 되어야 하며
가난한 사람이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을 통해 그는 전국적 인정을 받았으며 곧 1860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1860년 5월 18일 링컨은 시카고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3차에 걸친 투표 끝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공화당이 단결한 데 반해 민주당은 분열되었고,
총 4명의 후보자가 나선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이 승리를 거두었다(1860. 11. 6).
그는 최남부에서 거의 득표하지 못했고 일반투표에서도 40%가 못 되는 표를 얻었지만 표가 분산되었기 때문에 선거인단 투표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막기 위해 의회에서는 여러 가지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것은 이미 노예제가 실시되고 있는 주에 대해서는 노예제를 허용하되
새로 연방에 들어올 준주는 노예제를 허용하는 노예주와 노예제를 금지하는 자유주로 나누도록 하자는 안이었다.
링컨은 이 타협안의 첫번째 부분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두번째 부분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노예제 확대 원칙의 허용은 지역적 분열을 일으킬 것이며,
대농장주들로 하여금 미국 남부 경계를 넘어서까지 새로운 노예주를 얻는 데 박차를 가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연방의 분열을 막으려는 링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를 따라 6개 주가 연방을 탈퇴했고,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에 이미 연방 분열의 위기가 보이고 있었다.
남부연합은 요새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항구의 다른 요새들로부터 그곳을 위협했다.
링컨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섬터 요새의 식량이 곧 바닥날 것이므로 지원을 하지 않으면 군대를 철수시켜야 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반대되는 2가지 조언을 받았다.
많은 공화당원들은 약함을 보이는 것은 당과 연방에 매우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링컨은 섬터 요새와 플로리다 주의 피컨스 요새에 보낼 2개의 원조부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링컨이 보낸 파견대가 섬터 요새에 도착하기 전에 남부연합 정부는 앤더슨 소령에게 요새에서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앤더슨 소령이 이를 거부하자 마침내 1861년 4월 12일 동틀 무렵 찰스턴 항구에 있는 남부연합의 포대는 발포를 개시했다.
7월 4일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링컨은 "당시 남부연합 정부의 공격으로 교전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부연합은 링컨이 자신들에게 전범(戰犯)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기 위해
교묘하게 조정하여 첫 발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고 말했다.
링컨에게 전쟁 원인의 책임을 돌리는 역사가도 있지만 이러한 비난은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인 듯하다.
연방을 지켜야겠다는 입장이 확고했던 링컨은 이를 위해 남부연합에 강경히 맞서기로 했으며
섬터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링컨의 원래 목적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평화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연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으며,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단기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링컨은 육해군 총사령관으로서 첫번째 중요 결정을 내려
섬터 요새에 군대를 파견하고 자원병 모집을 요청하며 항구봉쇄를 명령하는 등의 조치들을 취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전략안과 명령체계가 필요했다.
스콧 장군은 링컨에게 버지니아에서의 접전을 피하고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여 남부를 거대하고 튼튼한 포위망으로 좁혀 들어가는 전략을 제시했다.
그러나 링컨은 다소 소극적이고 가능한 한 피를 흘리지 않으려는 스콧의 '애너콘다'(구렁이) 작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전쟁에서 이기려면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스콧의 의견을 무시하고 버지니아 전선으로 바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그뒤 연일 불면의 밤을 보낸 끝에 링컨은 군사정책에 대한 일련의 각서를 내놓았다.
그의 기본 생각은 몇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고,
미주리, 켄터키, 버지니아 서부, 테네시 동부로 군대를 이동시켜 그곳에 있는 연방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은 해상봉쇄와 함께 링컨 전략의 핵심을 이루었다.
1861~64년 링컨은 자신의 생각을 장군들에게 명령하기를 잠시 망설이면서 지휘요원과 지휘조직에 대한 실험을 했다.
그러나 몇 달 뒤 매클렐런의 지휘권을 포토맥군에만 한정시켰다.
링컨은 매클렐런이 내놓은 '반도회전'(半島會戰) 계획의 타당성에 의문을 던지면서 계획을 바꿀 것을 계속 요청했으며,
리치먼드 주변에서 벌어진 '7일전투'(1862. 6~7) 뒤에는 계획 포기를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버지니아 사령관으로 존 포프, 매클렐런, 앰브로스 E. 번사이드, 조지프 후커, 고든 미드를 차례로 임명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만족하지 못했다.
거의 2년 동안 북군은 효과적인 단일 명령체계를 가지지 못했다.
결국 링컨은 서부전선에서 총사령관감을 물색했다.
북군이 빅스버그를 함락시킨 지(1863. 7. 4) 9일 뒤 그는 그랜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당신의 활약에 고마움을 표합니다"라고 썼다.
1864년 3월 링컨은 그랜트를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북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내 링컨은 대규모 합동공격이라는 자신의 구상을 실현에 옮길 적임자를 찾았다.
대통령에 대한 자문 및 장군들과 대통령 사이의 연결은 참모총장 핼럭이 각각 맡았으며,
모든 군대는 총사령관 그랜트의 지휘하에 있고 그 가운데 포토맥군은 미드가 맡았다.
이와 같이 링컨은 전면전의 방대한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데 있어 모든 물자와 병력의 동원을 담당하는 최고사령부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군대를 총지휘하는 데 있어 해가 갈수록 수완과 효율성을 발휘했다.
전쟁을 치른 경험이나 전쟁에 대한 훈련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해낸 일들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 부족은 불리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한 듯하다.
인간의 자유라는 대의에 대한 링컨의 깊고 진지한 헌신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그는 종종 노예제를 주제로 유창하게 연설했다.
예를 들어 1854년 준주로까지 노예제가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 대해 더글러스가 무관심하다고 비난하면서
"나는 노예제가 그 자체로 가공할 만한 불의이기 때문에 그것을 증오한다.
나는 노예제가 우리의 공화적 규범이 전세계에 정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막고,
자유로운 제도의 적들에게 우리들을 위선자라고 비웃을 여지를 주기 때문에 그것을 증오한다"라고 공언했다.
처음에 링컨은 노예제 폐지정책을 채택하는 데 주저했다.
그는 400만에 이르는 흑인들이 해방되어 국가의 정치·사회 생활에 들어올 경우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을 염두에 두었으며,
무엇보다 폐지론을 내세울 경우 경계주(境界洲:남부 노예주 중 연방탈퇴보다는 타협으로 기운 주)들이
남부연합에 합류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의 제안에 따르면 각 주는 노예소유주에게 보상을 하고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으며,
연방정부는 노예해방에 드는 재정적 부담을 주와 나누어 가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해방은 점진적으로 행해지며 해방된 노예는 해외로 집단 이주시킬 것이라는 점도 덧붙여졌다.
연방의회는 링컨의 안을 실행에 옮기는 데 드는 비용을 표결에 붙이고자 했으나 경계주들은 모두 이 안을 거부했으며,
흑인 지도자들도 자신의 동료들이 해외로 보내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점진안이 결국에는 통과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링컨은 별개의 조처에 착수해
예비선언(1862. 9. 22)을 거쳐 1863년 1월 1일 최종적인 노예해방령을 발표했다.
그가 전시의 대통령 권한 행사로 정당화시킨 이 유명한 선언은 남부연합이 실제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만 대상으로 한 것이며,
연방에 충성한 노예주나 연방정부가 점령하고 있던 남부연합의 영토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전쟁기간 동안 노예해방령에 의해 직접적·간접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노예는 20만 명이 채 못 되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상징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노예해방령은 링컨 행정부가 연방의 회복 외에도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웠음을 의미했고
이 때문에 연방정부의 대의는 영국과 유럽 대륙의 자유주의 언론으로부터 차츰 확고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링컨 자신은 그가 취한 조치가 일시적인 전쟁수단 외에 어떤 합헌성을 가지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 노예의 자유를 보장하는 추가조치가 없었더라면
노예해방령으로 자유를 얻었던 노예는 옛날 신분으로 돌아갈 위험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졌으며 링컨은 이렇게 연방헌법을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뒤 수정헌법 제13조는 각주에서 잇따라 승인을 받았다.
링컨 대통령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 했으므로 남북의 재통합에 앞서
무엇보다 북부가 어느 정도 의견일치를 보아야 했다.
그러나 북부는 나름대로 이해를 갖는 다양한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링컨은 이해가 다른 집단과 개인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지지를 자신의 행정부로 끌어모아야 했다.
연방을 위해서 다행히도 그에게는 대통령으로서 남다른 정치적 기술이 있었다.
그는 동료 정치가에게 호소하고 그들의 입장에 서서 이야기하는 데 훌륭한 솜씨가 있었으며,
개인적 차이점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적대자들로부터 충성을 얻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야당은 여전히 활기차고 강력했다.
이들은 때로 남부와 연합하기도 했다.
링컨은 수정헌법 제13조가 의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평화파 민주당원의 지원을 얻기 위해 애썼으며,
가능한 한 그들을 무마시키려 했다.
링컨은 민주당의 활동에 대처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공화당은 경제원칙에서는 상당히 일치하여 링컨이 이전 휘그 당원 시절부터 지지해온 핵심 안건들인 보호관세,
전국적 은행체계,
국내 개량사업,
특히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철도 건설에 대한 연방정부의 원조 등을 법으로 제정했다.
그러나 전쟁수행과 목적에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급진파'와 '보수파'로 나누어졌다.
링컨 자신은 보수파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으나 급진파 의원들 가운데도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양쪽에 지도력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그는 1860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같이 경쟁했던 사람들도 각료로 임명하고 모든 중요 정당세력에서 각료를 선택했다.
대립관계에 있던 두 사람을 공식적 조언자로 삼았다.
의회 안에도 파벌간의 반발이 있었으며 그것은 훨씬 더 심각했다.
루이지애나 주, 아칸소 주, 테네시 주 같은 연방탈퇴주에서는 주로 연방군에 의해 재건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링컨은 1863년말 이러한 남부주에 대해 소위 '10%안(案)'을 제시했다.
이 안은 유권자의 10%가 연방정부에 충성을 서약하는 주에 대해서는 새로운 주정부의 설립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급진파는 링컨의 안이 너무 관대하다고 여겨 거부하고
링컨이 이 안을 거부하자 안의 발의자인 웨이드와 데이비스는 링컨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미 링컨은 '통일당'(공화당의 새로운 이름)의 대통령 후보로 대통령 재선을 노리고 있었는데
웨이드와 데이비스의 성명서는 링컨의 후보지명을 취소시키려는 공화당 내의 움직임을 분명히 드러내준 셈이었다.
그는 조용하고 끈기있게 이러한 움직임이 사라지기를 기다렸지만 당의 분열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결국 프리몬트는 물러났고 블레어도 사임했다.
이로써 공화당은 다시 단결하여 1864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1860년 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1864년에도 링컨은 자신의 선거운동에서 직접 선거전략을 맡았다.
국민 대다수가 공화당에 표를 던졌고, 링컨은 일반투표에서 과반수인 55%를 차지해 민주당 후보 매클렐런 장군을 누르고 재선되었다.
처음부터 링컨은 전쟁의 주목적이
'이른바 탈퇴한 주'를 가능한 한 빨리 이전처럼 연방과 '적절하고 실제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는 데 있다는 믿음을 간직해왔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도 그는 패배한 남부에 대해 구체적이고 통일된 정책을 세우지 못했다.
루이지애나나 테네시 같은 주에 대해서는 전쟁중에 자신이 제시한 10%안에 따라 새로운 주 정부를 세우도록 촉구했으나,
버지니아나 노스캐롤라이나 같은 주에 대해서는 전쟁을 일으킨 주 정부를 일시 유지시켜 평화상태를 회복시키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전후 남부로 간 북부 출신의 '이방인'(카핏배거)에게 남부 통치를 맡기는 것에 반대했다.
링컨은 남부인 스스로가 새로운 주 정부를 세우기를 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백인과 흑인이 서로 옛날의 관계에서 점차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맺기를 바랐다.
그는 해방노예에 대한 교육안이 흑인이 새로 얻은 신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핵심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어떤 흑인들 "예를 들면 지식수준이 매우 높고
특히 우리와 함께 용감하게 싸웠던 흑인들"에게는 즉시 선거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65년초에 와서는 재건문제를 놓고 일어난 링컨과 공화당 내 극단주의자의 견해차가 그 전해보다 더욱 커졌다.
일부 급진파는 남부에 대해 잠정적으로 군정(軍政)을 실시하고,
남부 대농장주의 영지를 몰수해 그들을 해방된 흑인에게서 분리시킬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남부의 정치 권력을 대농장주로부터 지난날의 노예에게 넘겨주도록 요구했다.
1865년 4월 링컨은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바꿈으로써 급진파와의 견해차를 좁혔다.
그는 버지니아 주의 전시의회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남아 있도록 허용한 것을 철회하고 스탠턴의 남부 군정안을 원칙적으로 승인했다. 4월 14일 각료회의가 열렸을 때
"그가 어느 때보다 우리 견해에 가까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따라서 링컨이 재임 임기를 마저 채웠더라면 그의 재건정책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은 추측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링컨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스탠턴은 "이제 그의 이름은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링컨을 순교자라고 생각했다.
암살은 성 금요일에 일어났고, '암흑의 부활절'이었던 그 주 일요일에는 수백 명의 연사가 링컨의 죽음에 대해 연설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암살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님을 보이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죽었듯이 에이브러햄 링컨은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링컨이 죽은 시기와 상황은 그의 명성을 더욱 높이고 그를 성인의 지위로까지 올리는 역할을 했다.
링컨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신화가 되었다.
그의 전설은 상상력이 풍부한 문학작품이나 민간전승·시·연극·소설·일화 등에서 보여지며
전기나 역사책 같은 사실성에 입각한 글들에서도 발견된다.
전설에서의 링컨은 변화무상한 신(神)과 같아서 거의 모든 숭배자들을 만족시키는 데가 있다.
그는 꾸밈없는 신사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민첩함과 교묘한 솜씨를 갖춘 존재였으며,
권위를 휘두르고 약한 자를 옹호한 동시에 평범한 이웃이며 친구였다.
인간으로서의 링컨은 신화로서의 링컨과는 평가가 다르다.
살아 있을 때부터 그의 명성은 커지기 시작해 죽기 직전에는 그 위대한 자질이 이미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버펄로 익스프레스 Buffalo Express〉지는 링컨이 뛰어난 중용과 격정에 사로잡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워싱턴이라도 권력을 위한 권력의 행사에 그렇게 무관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링컨의 사상과 그가 한 말의 정수는 세심하게 쓰여진 여러 책에서 검토되고 재차 언급되었는데,
그 중심 주제는 자치문제와 약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특히 남북전쟁이 일어난 뒤로 이상적 자치에 대해 거듭 언급했으며 자신의 말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섬터 요새가 함락된 뒤 의회에 보낸 최초의 교서에서 그는 북부와 남부 사이의 문제가 미국의 장래문제를 넘어서
"입헌공화국 또는 민주주의,
다시 말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가 그 자신의 내부 적으로부터 영토를 보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고 단언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 남겨진 위대한 과제, 즉 명예롭게 죽어간 용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헌신했던 대의를 위해 우리도 더욱 헌신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의 결의를 굳건히 다지리라는 것,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가 자유롭게 다시 탄생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세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R.N. Current 글 | 河尙潤 참조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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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sburg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남부 애덤스 군의 자치시.
메릴랜드 주와의 경계 바로 북쪽에 있으며 해리스버그에서 남서쪽으로 61㎞ 떨어진 곳에 있다.
1780년대에 제임스 게티즈에 의해 건설되어 게티즈 읍으로 불리다가,
1800년 애덤스 군의 군청소재지가 되면서 게티즈버그로 개칭되었다.
1806년에 자치시가 되었다.
루터교신학교가 1826년에,
펜실베이니아대학(지금의 게티즈버그대학)이 1892년에 설립되었다.
두 학교 모두 남북전쟁 당시(1863. 7. 1~3) 큰 타격을 입었다.
이곳은 게티즈버그 전쟁터를 성역화한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1만 4,160㎡에 달함)을 중심으로
주변지역이 모두 사실상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게티즈버그 국립묘지에 있는 병사기념탑은
링컨 대통령이 게티즈버그 연설(1863. 11. 19)을 했던 바로 그 지점에 서 있다.
약 1,200개 이상의 남북전쟁 기념물·묘표·명판 등이 있고,
이중에는 최초로 발사되었던 대포, 리 장군의 사령부, 국립 게티즈버그 전투지 조망탑,
국립 남북전쟁 모형박물관, 도빈관(당시 병원이었고 현재는 박물관임)과
윌스관(링컨 대통령이 연설원고를 끝낸 곳) 등이 있다.
최근에 생긴 명소로는 아이젠하워 농장(게티즈버그 전투지에 인접한 이곳도 현재 국립사적지),
게티즈버그 축소모형 말농장,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 기념관(실물 크기의 밀랍인형이 전시) 등이 있다.
경제적으로는 교육, 관광산업, 경공업(가구·신발·섬유류), 혼합농업(과수재배·낙농업·축산업)에 의존한다.
인구 7,376(1998).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링컨과 케네디 대통령의 공통점은 미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과 존 F. 케네디에 관련된 것 중 일치한 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호사가들이 두 대통령의 공통점만 간추려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많다. 사실 두 대통령 사이에는 차이가 나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이 아닌 내용도 많다. 예컨대 링컨 대통령의 비서 중 케네디는 없었고, 존 윌크스 부스의 생년은 1838년이다. * 존 윌크스 부스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 1838년 5월 10일 - 1865년 4월 26일)는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한 것으로 악명높은 미국의 배우이다. 그는 에이브러햄 링컨을 총을 쏘아 죽인 뒤 그를 잡으려고 하는 라스본 시장을 칼로 찌르고 귀빈석에서 무대 위로 뛰어 내린 뒤 "폭군은 언제나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뒤 말을 타고 10일간 도망가서 4월 24일에 리차드 갸렛이라는 사람의 농가에서 갔지만 그의 가족에 의해 체포되어 29명의 기병대에게 포위당했다. 기병대가 투항의 여부를 물었지만 부스는 투항을 거부하였다. 데이빗 해롤드가 투항하였지만 에버튼 콩거 대좌의 지시에 의해 농가의 주변에서 불을 질렀다. 그 후, 화재장소에서 기병대의 일원 보스턴 코벳 중사에게 총살당하였던 부스는 치명상을 입고 4월 26일 아침에 사망하였다. 사람들은 남부가 그를 영웅으로 받들 거라고 추측했지만 남부에서조차도 그를 미치광이라고 저주했다. 그의 배후에 모(某) 결사단체가 사주했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는 분명치 않다.
* 휘그당 미국 역사에서 1834~54년에 활동한 주요정당.
국가 발전 계획을 지지했지만, 점점 높아지는 지역 감정의 물결 속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휘그당이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1834년이었다. 국민공화파는 1828, 18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파의 잭슨에게 참패를 당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이 두 파는 공화파의 분열로 생겼음). 그러나 잭슨이 제2미국은행과 싸우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연방법거부에 정면으로 대항하자 반대파들이 결집할 기회가 생겼다. 헨리 클레이는 재정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및 남부 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모아 여전히 보호관세나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국내 개량사업의 추진 같은 국민 공화파의 정책이 타당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제휴시켰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휘그당에는 1830년대 중엽에 사라진 반(反)프리메이슨당 출신의 반프리메이슨 운동가들도 합류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을 '앤드루 왕'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독재적인 행정에 반대하여 느슨한 제휴관계를 맺고 있던 집단들이 휘그당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휘그당이라는 이름은 왕의 특권에 반대하는 영국 정당에서 따온 것이었다.
오로지 잭슨과 그의 정책에 대한 공통된 혐오(그리고 나중에는 공직에 대한 갈망)만으로 뭉친 휘그당은 결정적인 선거 공약을 하나도 개발하지 못했다. 1836년에 휘그당은 각각 동부와 남부 및 서부를 대표하는 3명(대니얼 웹스터, 휴 L. 화이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대통령 후보를 내세워 각 지역에 호소하는 한편, 표를 분산시켜 하원에서 결선 투표를 하려는 전략을 세웠지만 실패했다. 1840년에는 지역적인 접근 방식을 버리고 전쟁 영웅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어서 벌어진 선거운동에는 뚜렷한 쟁점이 없었다. 해리슨은 '통나무집' 유세에서 지지자들의 지속적인 선거 운동을 바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1840년에 휘그당은 백악관과 의회를 장악한 뒤 미국의 가장 유력한 정당이 될 준비를 갖추고 헨리 클레이의 국가주의적 계획안을 법제화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해리슨은 취임한 지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죽었고, 그의 후임자인 존 타일러는 미국은행 재설립을 비롯한 휘그당의 주요입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844년에 휘그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클레이는 국민들에게 퍼져 있던 팽창주의의 인기를 과소평가하고 텍사스 병합에 반대했기 때문에 선거에서 패배했다. 1840년대말에 이르자 '양심적인'(노예제에 반대하는) 휘그당원과 '면화'(노예제에 찬성하는) 휘그당원이라는 파벌이 나타나면서 휘그당의 결속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면화 휘그당원). 1848년에 휘그당은 다시 전쟁영웅인 재커리 테일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헨리 클레이가 제안하고 밀러드 필모어(1850년에 테일러가 죽자 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승계)가 서명하여 입법화된 '1850년의 타협'은 양심적인 휘그당원들을 당에서 완전히 소외시켰다.
휘그당은 다시 전직 장군에게 관심을 돌려 1852년에 윈필드 스콧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북부와 남부가 노예문제를 둘러싸고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에 '미국 헌법과 연방에 대한 변함없는 애착'이라는 휘그당의 슬로건은 더이상 전국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남부의 많은 휘그당원들은 주권(州權)을 주장하는 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으며, 스콧이 얻은 선거인은 고작 42명뿐이었다. 1854년까지 대다수의 북부 휘그당원들은 새로 결성된 공화당에 합류했다. 당이 존속하는 동안 휘그당을 계속 지지한 지역은 남부의 주 가운데 연방 탈퇴보다는 타협을 택한 경계주들뿐이었고, 휘그당을 계속 지지한 계층은 지역 갈등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기를 거부한 보수주의자들뿐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휘그당원들은 대부분 1850년대 후반에 국수주의적인 부지당(不知黨)에 들어갔고, 1860년에 나라가 분열한 뒤에는 입헌연방당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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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너먼 원문보기 글쓴이: 시너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