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오병이어.
성경에 있는 내용이다.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를 드렸더니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그걸로 모여있는 무리를 다 먹이셨더라. 수천의 무리가 다 먹을 만큼 보리떡과 물고기가 마구 마구 늘어났더라는 기적을 말한다.
그 내용을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난 조금 다른 면을 이야기 하고 싶다.
1.
어린 날 수학책(그때 초등학교 수학을 산수라고 했지.)을 보면 도량형 단위가 주로 센치미터이더라. 10센치미터에서 2센치미터를 더하면 또는 빼면 몇 센치미터인가? 뭐 이런 거. (때 늦게 미실의 말투를 흉내내어 본다. )
길이만이 아니라 금액을 두고서도 그러하더라. 120원이 있는데 세 명에게 나눠주면 얼마씩 가지나? 뭐 이런 거.
무게를 다룰 때도 120그램의 쌀이 있네, 뭐 이런 식이다.
그 시절 즐겨 보았던 TV 만화영화가 <은하철도 999>. 어느 나라의 문화가 어떻다는 이야기를 할만큼 내게 주제가 깊지 않다. 다만 내가 본 것은 그들의 스케일이다. 허영도, 그림도, 상상도 그 정도는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구식 기차 타고 여행하는 게 일본 열도도 아니고, 태평양도 아니고, 범지구도 아니다. 무슨 수천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까지 간단다.
하록선장 시리즈나 건담 시리즈나 걔들이 싸우는 무대가 시골 마을이면 내용이 달라질까. 결국 칼 휘두르고 권총 쏘아대는 게 서부극과 사무라이 문화를 접목 했을 뿐인데, 그 배경이 우주다. 더 큰 무대를 만들 수 없는, 그들이 상상하는 최대의 무대에서 작품을 그려내는 것이다.
왜 초등학교 때 배웠던 단위는 모두 센치고 그램이고 백원인가. 길이를 논할 것 같으면 기왕이면 2,000킬로미터에서 500킬로미터를 빼면 얼마냐고 하면 안되나.
일본 얘들은 아이가 엄마 찾아 나서는 것도 대륙간 이동을 그리지 않은가. 그게 <엄마 찾아 삼만리>,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까지 가서 그 나라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며 엄마를 찾아간단다. 상상을 하더라도 이정도 거리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그마한 꼬마애가 엄마 찾아서 이웃 마을까지 10리를 갔네가 아니라 삼만리를 갔단다.
시간도 그렇다. 시계를 보는 것까지는 좋은데, 무슨 분 단위 쪼개는 것을 연습 시키나. <은하철도 999>에 이어서 나온 <천년 여왕> 캬… 얘들은 무슨 역사를 천년 마다 오는 지구의 위기를 두고 준비하는 여왕을 그리고 있다. 천년을 준비해야 한단다.
어릴 때부터 그런 상상을 하면서 노니까, 그들은 세계를 집어삼키겠노라고 호언장담하며 전세계를 상대로 싸움을 걸지 않는가. 그게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그 스케일에 감탄해본다. 우리의 모습이라는 게 고작 조지훈이 그려낸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아닌가. 목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숨죽여 지낸 변경의 역사. 우리는 그렇게 놀았던가 보다.
굶는 아이들도 아닌 잘 먹는(사실 그래서 문제이지. 잘 먹으니) 아이들을 학교에서 밥을 먹이네 마네 그런 걸로 싸울 틈 있나. (굳이 해결하겠다면 상처감에 대해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입은 상처를 두고 치료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세계를 집어삼켜 천년 제국을 만들겠다는 만화를 그리는 그놈의 나라는 독도도 자기네 땅이라고 교과서에도 올렸다는데.
우리 교과서는 백원 단위로 쓰지 말고, 억 단위 조 단위로 만드는 것은 어떤가. 그래야 이미 과포화 상태인 구멍가게 주인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가 나오지 않겠는가. 교과서에 사과를 사고 팔면 어린 학생의 영혼을 보호하는 것이고, 차를 사고 파네 집을 사고 파네 기업을 사고 파네 그런 것을 그리면 황금만능주의 정신을 주입하는 것인가.
2.
오병이어, 예수의 기적 외에 난 다른 것을 본다.
왜 오병이어인줄 아는가?
당신이 건네주었던 것이 보리떡이니 보리떡을 받은 게다.
본래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작은 그림을 무시하자는 것도 아니다.
섬세한 터치의 가치를, 과부의 엽전 두 냥이 가지는 가치를 비웃는 것도 아니다.
다만, 큰 그림을 외면하여서는 안 될 노릇이기에, 나와 상관 없다고 여겨서는 안되겠기에.
무리해서 크게 일을 벌이는 떠버리가 되어도 곤란하겠지. 하지만 크게 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춰서도 안 되겠기에.
최근 카페에 꽤 규모가 되는 건에 대해 글을 올렸다. (감정가 60억, 낙찰가 12억)
그런데 그 글에 대한 반응은 사뭇 극단적이다. 현 시점 아무 것도 없지만 도전을 받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처지와 다르기에 마음 편하게 살펴보는 것 조차 못하는 사람도 있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을 두고 허영이라고 말하지는 마라. 꿈조차 꾸지 못하는 것, 사람에게는 당연 꿈꾸는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이 거세된 것… 슬픈 일 아닌가.
주식을 거래한다면 단타쟁이가 될 생각하지 말고 워렌 버펫을 꿈꿔보는 것은 어떤가. 그러면 처음부터 하루 40만원을 번다는 류는 눈도 가지 않을 텐데. 부동산을 한다면, 고수 찾느라 정신 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정도를 걸을 것이다. 불법과 탈세로 먼 길 잘도 가겠다, 그쟈. 사업을 하더라도 버크셔 헤셔웨이처럼 투자자들과 함께 주주총회장이 파티장이 되게끔 그려보는 것 어떤가. 혹여 어떤 주주가 올까 해서 저 먼 지방에서 아침 8시 반에 주총 개최하지 말고.(꼭 이런 회사가 위임장 보내달라고 전화 온다.)
지금 이순간 당신은 자신을 위해 무엇을 그리고 있나.
삶이 흥미로운 것은 내가 그리는 바로 그것으로 돌려받는다는 점이다.
보리떡을 그렸나. 그거라도 그렸으니 다행이다. 어쨌거나 보리떡은 받게 될 것이다. 차고 넘치도록.
말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더라니.
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를 상상하고자 한다.
죠수아 2010.3.29
건강/웃음/순수/여유
사랑과 인정과 칭찬과 격려와 배려의 문화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신의 한계를 설정한다.]
[내 안에 변하지 않는 한 가지로 세상의 만 가지 변화에 대처한다. – 호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