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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말은 없다 외
김선태
세상에 반대말은 없다.
생성의 반대말은 소멸이 아니다. 생성이 있어 소멸이 있고 소멸이 있어 생성이 있으니 그들은 견고한 시간의 끈으로 이어진 혈연이다. 어린이와 늙은이는 얼마나 무구한 동무인가. 일출과 일몰이 그렇고, 밤과 낮이 그렇고, 만남과 헤어짐이 그렇고, 삶과 죽음이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다. 진정한 희망은 절망의 끝에서 날아오른다. 거기 아픈 자식의 어깨를 토닥이는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있다. 긍정과 부정은 서로를 견인하는 강력한 힘이다. 기쁨과 슬픔이 그렇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그렇고, 성공과 실패가 그렇고, 자유와 구속이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남쪽의 반대가 왜 북쪽인가 방향만 다른 뿐 간은 형제인 것을. 흑색의 반대는 왜 백색인가 농도만 다를 뿐 그 사이에 다양한 색채가 존재하는 것을. 동물의 반대가 왜 식물인가 식물도 은밀히 움직이는 생명인 것을. 남자의 반대는 왜 여자인가 둘 다 똑같이 소중한 인간인 것을.
세상의 모든 말들은 서로가 이웃이다. 직선으로 평행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곡선으로 휘어져 원으로 만난다, 그러니 세상에 틀린 말은 없다. 조금씩 다른 말이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 토방마루에 빙 둘러앉은 식구들의 저녁 밥상처럼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서 하나이다. 천지간*의 둥근 울음
겨울 정도리 바닷가에 가보았다. 지치고 찢긴 희망처럼 날리는 눈보라를 따라갔다. 무수하다는 돌멩이들이 둥글게 몸을 맞대고 있는 정도리 몽돌밭. 모난 돌멩이 하나로 끼어 이 적요(寂寥)의 겨울 하루를 보내고 있다.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삶의 물음표 같은 부표들 바다에 하얗게 띄우고 소나무 숲에 찢어지게 열린 바람소리 본다. 눈 감고 누워 있으면 몽돌들의 울음소리 바닷게들처럼 귓속을 들락거리고 있다.
파도가 말을 가르치는 정도리 바닷가. 제대로 발음이 될 때까지 돌멩이들의 귀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소리로 종일토록 정도리 바닷가는 때글때글 깨어 있다. 때로는 가슴을 치는 때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소리로 돌멩이들은 끊임없이 제 모난 살점을 덜어내며 둥글고 단단해진다. 찌그러진 불협화음을 받아 얼른 둥글게 오므리는 저 소리의 반복 교차. 오랜 시간의 퇴적을 쌓고 또 부수는 저 울음 속에 정도리 바닷가의 내밀한 세계가 있다. 서러움 따위를 다 눌러 죽인 끝에야 찾아오는 정갈한 소리의 비밀이 있다.
정도리 바닷가 몽돌들은 색깔과 무늬가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모두가 둥글다. 서로에게 둥글어서 아무렇게나 뒹굴어도 아프지 않는 것들이 함께 모여 한세상을 이룬다. 시퍼렇게 침입한 바다를 팔 벌려 감싸는 해변의 끝에서 끝까지를 맨발로 걸어본다. 몽돌들의 이마를 짚노라면 단단하게 여문 말씀들이 차례로 발바닥에 와 닿는다. 그것들은 모난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한다. 모든 둥근 것들은 모난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가만 들여다보면 다채로운 세월의 물결무늬 선명한 그것들은 가끔씩 들여다보는 자의 얼굴을 되돌려 주기도 한다.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를 알아 구계(九階)의 질서로 빛나는 몽돌들, 가장 몸이 가벼운 것들이 바다 깊숙이 유영하리라.
다시 정도리 바닷가에 굵은 사유의 눈발이 치고 있다. 이제 파도는 무지의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며 몇 번이고 타이른다. 오래 절망을 견딘 자만이 둥글고 단단한 희망 하나를 품을 수 있다고, 뼈 시린 바닷물에 깊게 몸 담근 자만이 비로소 아름다운 진실 하나를 건져낼 수 있다고, 돌아가라 돌아가라 되뇐다. 이윽고 저물 무렵 정도리 바닷가에 동그란 해가 걸린다. 각진 마음의 기슭을 물들이며 환하고도 따스한 상처가 걸린다. 내일 새벽이면 또 저 몽돌들이 더욱 차고 정갈한 목소리로 다도해 전체의 섬들을 불러 깨우리라.
*완도 정도리 바닷가를 배경으로 쓴 윤대녕의 소설 천지간에서 빌려옴.
김선태 *1960년 전남 강진 출생. *199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6년 월간 《현대문학》에 시와 문학평론 추천으로 등단. *시집 간이역 작은 엽서 동백숲에 길을 묻다 살구꽃이 돌아왔다 그늘의 깊이 한 사람이 다녀갔다 햇살 택배 등. *문학평론집 풍경과 성찰의 언어 진정성의 시학 등. *영랑시문학상, 송수권시문학상, 시작문학상 등 수상. 현재 목포대 국문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