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인물]
(2) 존 쥬얼 (John Jewel 1522-1571) : 성공회개혁의 변증가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은 무얼 믿고 무얼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입씨름을 벌입니다.
16세기 성공회개혁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은 사제가 결혼해도 되는지, 예배를 라틴어로 드려야 하는지 모국어로 드려도 되는지, 사제가 아닌 평신도가 성서를 읽어도 되는지 등등을 놓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또 성찬례를 드릴 때 빵과 포도주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용서는 하느님께 직접 받는지 사제를 통해서인지 등등도 논란거리였지요.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진리의 근거를 어디서 찾는지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뭘 어떻게 하고 뭘 믿어야 할지 어떻게 아는가, 또는 진리의 출처가 어디인가라는 질문입니다.
16세기의 경우 어느 세력이든 진리의 출처로서 성서의 권위는 모두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바가 무엇이고 누가 그 뜻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놓고는 크게 둘로 입장이 갈렸습니다.
하나는 로마교회의 입장으로 교회가 성서해석의 권한을 갖는다는 것인데 이때 교회란 교황을 정점으로 한 성직자계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의 입장으로 개별 그리스도인과 공동체가 성령의 안내를 따라 성서를 해석할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 쥬얼은 당시 옥스퍼드에서 가르치고 있던 대륙의 개혁신학자 피터 마타의 지도 아래 신학을 공부하고 1552년에 졸업하는데 향후 10년 이내에서 교회가 어마어마하게 변하는 두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곧 1553년 메리여왕의 즉위요 1558년 엘리자베스여왕의 즉위입니다.
메리여왕 치하는 개혁적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다시 로마교회로 개종하든지 숨죽여 살거나 시골에 처박히든지 아니면 잡혀서 화형을 당하든지 하는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하필 이 무렵 쥬얼은 토마스 크랜머 재판에서 크랜머의 공증인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는지 그저 시끄러운 걸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평생 후회할 일을 하게 되는데 곧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한다는 문서에 서명을 한 일이었습니다.
후에 쥬얼은 이 일을 공개적으로 참회했지만 그의 적들은 두고두고 이를 비방거리로 삼았다고 합니다. 여하튼 이 서명사건 이후에도 쥬얼은 안전하다고 느끼질 못해 결국 1555년 대륙으로 피신하고 먼저 영국을 떠난 스승 피터 마타를 다시 만나 공부하게 됩니다.
한편 로마교회는 1545년 이래 트렌트 공의회의 이름으로 산발적으로 모여 영국교회를 줄곧 이전에 없던 짓을 하는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1559년 11월 26일, 영국에 돌아와 있던 존 쥬얼은 “도전하는 설교”(Challenge Sermon)라는 제목으로 로마교회를 향한 반격의 포문을 엽니다.
이 설교에서 쥬얼은 로마교회의 오류 스무 댓가지를 열거합니다.
대개는 미사와 관련하여 사제가 사적인 미사를 집전한다든지 평신도에게는 포도주는 주지 않고 빵만 준다든지 성체거양을 우상숭배적으로 한다든지 하는 문제를 꼬집습니다만, 무엇보다 교황이 보편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주장, 평신도는 성서를 읽지 못하게 하는 것, 평신도가 알지도 못하는 언어로 예배를 드리는 행위 등을 공격했습니다.
그는 이런 것들이 성서에도, 아직 분열을 경험하지 않았던 초기 6세기 동안 공의회나 초대교부들 저술 어디에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니 만약 근거를 댈 수 있거든 대 보라고 도전한 것입니다.
그러니 정작 “이전에 없던 짓을 하는 이단”은 로마교회가 아니냐고 공격한 것입니다.
이후 쥬얼의 설교는 도발적이긴 하나 더 정교하고 조직적인 방식으로 성공회 개혁의 입장을 방어하는 내용을 담습니다.
마침내 쥬얼은 1561년 “영국교회의 변론”(An Apology of the Church of England)이라는 글을 썼고 일 년 뒤에 책이 발간되는데 로마가톨릭 신학자들이 주로 라틴어로 저술하는 점을 감안해 라틴어로 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3년 내에 두 영역본이 등장합니다.
이 책은 가히 센세이션을 일으켜 이후 존 쥬얼은 이 책 때문에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인물이 됩니다.
“변론”에서 쥬얼은 역사적 신경에 근거해서 영국교회를 옹호했고 삼성직(주교-사제-부제)에 대해 언급할 때도 성서 어디에도 한 주교가 다른 주교들 위에 군림해도 좋다는 증거가 없으며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일 뿐 일개 피조물이 “귀에 달콤한 말을 노래하는 기생충들로 둘러싸이지 않는 한” 감히 자신을 그 위치에 둘 수는 없다고 공격합니다.
이어 사제의 결혼, 성찬례를 둘러싼 교리 등 성공회의 입장을 변론하면서 영국교회는 초대교회의 관습을 회복한 것이지 로마의 주장처럼 이전에 없던 것을 교회에 들인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로마교회야말로 성서와 초대교회에 없던 짓을 하는 교회라고 꼬집습니다.
역시 초대교회의 관습에 근거하여 영국의 교회는 지역의 시노드를 통해 스스로를 개혁할 권한이 있다고 성공회 개혁이 불법이라는 주장을 일축합니다.
대륙의 종교개혁가들과 마찬가지로 존 쥬얼 역시 성서가 교회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믿을지 궁극적 출처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의 권한 역시 교황이나 주교들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서의 의미가 늘 자명한 것은 아니라고, 따라서 해석이 필요하다고 짚는 점에서 극단적 종교개혁가들과 쥬얼은 차이가 있습니다.
쥬얼이 자꾸 초대교회 교부들이나 공의회의 해석에 기대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즉 어떤 해석이 분명치 않을 땐 그리스도와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해석을 보라는 것이지요.
그에게 중세교회는 “온갖 잡다한 무법”을 교회에 덧붙인 불순한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믿을지 논란을 벌일 때는 성서와 더불어 초대교회가 성서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후대의 성공회 사상가들은 늘 존 쥬얼이 명시한 이 논거 위에 자기 주장을 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존 쥬얼 이전의 토마스 크랜머도 성서와 초대교회 및 이성을 교회가 진리를 판단하는데 기반이라고 했지만 이를 원리적으로 명시한 인물은 존 쥬얼입니다.
한 세대 후에 활약할 성공회의 대표적 사상가 리처드 후커 역시 존 쥬얼 밑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영국의 오랜 교회나 대성당에는 쥬얼 당시의 관습을 따라 지금도 그의 변론을 설교강단에 줄로 매어둔 곳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들(로마 가톨릭)을 떠난 것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교회나 사도들을 떠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네 교회와 우리 교회를 비교해보라 하십시오.
그러면 자신들이야말로 부끄럽게도 사도들로부터 멀리 떠났음을 알게 될 것이고 우리가 떠난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변증」에서)
이주엽 신부 (프란시스, 분당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