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위덕자재보살(威德自在菩薩)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부처님의 발 앞에 절한 후,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두 무릎을 세워 꿇고, 합장하고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원각의 성품에 수순하는 법을 널리 분별하셔서 보살들로 하여금 마음의 광명을 깨닫고, 부처님의 원음(圓音)을 받잡고 닦아 익히지 않고도 좋은 이익을 얻게 하셨나이다.
위의 청정헤보살장 까지에서 대승의 관행을 다 말씀했다. 그리고 미륵보살장에서는 끊어야 할 미혹을 밝히고, 청정혜보살에서는 중득해야 할 진리를 밝혔는데 그것으로써 멈추면 중근에 해당하는 사람은 더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공리공론에 빠지기 쉬우므로 여기서부터는 실제 수행에 들어가는 방법을 보이신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지닌 법신의 위덕으로 하여금 자재하게 한다. 원각성! 범부의 순히 따르는 방법에서부터 십지에 든 보살이나 십지에 들지 못한 보살의 순히 따를 방법만해도 반야에 밝지 않고서는 그 경지를 알지 못하거든 하물며 어떻게 여래의 수순을 따를 방법을 알수가 있을까? 말이다. 그러나 여래는 여래의 최상승 구경의 돈법을 알리고 싶어 '일체시에 망념을 내지 말라. 일어난 망심은 없게 하지도 말라. 망상경계를 만나거든 알려하지도 말라. 앎이 없는 경지에 이르거든 진실을 가려내지도 말라' 한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으니 이것만은 반야종근이 없이는 도저히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근기가 이렇게 낮을 때는 위력사용이 요구되는 것이다. 대용맹심과 대정진과 대방편이 필요한 것이다. 확실무애한 방편법을 잡아 가짐과 분발무적인 정진력을 가차하지 아니하고는 무명을 꿰뚫고 반야 불빛을 만나 여래의 수순한 땅을 밟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고로 이때에 자재를 얻으신 위덕자재보살이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는 대용맹심 대 정진력으로 삼매 방편력을 가차하여 자재를 얻으신 위덕자재보살이시다. 그는 어둠에 걸리어 나가지 못하는 보살과 중생들을 위해 부처님께 이러한 것을 물어서 일깨워 주소 싶었다. 그리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고 먼저 부처님의 은덕을 찬양하였다.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널리 저희들을 위하시어 원각성을 순히 따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어 모든 보살들이 마음 광명을 얻어 부처님의 둥그신 음성을 받은 결과 닦아 익히지 않아도 좋은 이익을 얻게 하시었나이다.'하였다.
세존이시여, 비유하건데 큰 성(城)에 밖으로 네개의 문이 있어 어디로 오르든지 외가닥 길이 아닌 것과 같이, 일체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거나 보리를 이루는 것도 한 가지 방편에 그치지 않나이다.
비유에서 '어떤 성에 네개의 문이 있다.'함은 수행인에게는 세가지의 관행이 있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니, 삼관의 설명이 본장의 주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삼관의 설명을 생략한다. 부처님의 법성에도 문이 많은 것이오니 법성에 들어와 불국을 장엄하려는 자나 보리도를 성취하려는 자는 자신의 처지와 환경 반야근기의 대소유무에 따라 적당한 방편을 가져야 할 것이옵고 반드시 한개 방편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이러므로 저희들은 이러한 원이 있어 여쭈어 봄입니다 하였다.
오직 원하옵나니 세존이시어 저희들을 위하여 일체의 방편과 절차와 그리고 수행하는 사람에는 몇 종류가 있는가를 널리 말씀해 주시어 이 모임의 보살과 말세의 중생들로서 대승을 구하는 이로 하여금 깨달음을 빨리 얻고 여래의 큰 적멸 바다에 노닐게 하옵소서.
여기서 말하는 큰 원은 공간에 있어, 시방세계 시간에 있어 과현미래 이렇게 넚은 시,공에 있는 법 배우는 자들을 위하시어 방편 일체에 대하여 그 점차 닦을 차례차례를 말씀하여 주시며 아울러 그 닦는 사람들과 그 닦는 방편 종류가 대략 몇가지가 되는지 자상하게 드러내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는 크나 크신 법성에다 문을 여러개 벌려 놓았지만 저의 어리석은 무리들은 문을 두고도 모르며 알고도 들어가지 못하나니 이 이유는 우매한 중생들이 문을 두고도 보지 못하는 이유도 있지만 어떠한 문이 내가 들어갈 문인지도 알지 못하는 탓이오니 수행방편의 절차와 수행인이 가져야할 적당한 방편종류를 밝게 드러내 보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시사 이 모임에 참석한 보살과 그리고 말세중생에 대승을 구하는 자로 하여금 속히 깨달음이 열리어서 당신의 큰 적멸바다에 들어가 노닐게 하옵소서 하였다.
이렇게 말하고는 오체를 땅에 던져, 이렇게 세 번 청하고 다시 처음과 같이 앉았다. 그때 세존께서 위덕자재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선남자야 그대들은 보살들과 말세의 중생을 위하여 여래에게 이와 같은 방편을 물었구나. 너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로 말하게 되리라. 그대들에게 말해 주리라.' 이에 위덕자재보살이 가르침을 받들고 기뻐하며 대중들과 함께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선남자야 위없는 묘각이 온 세계에 두루하여 여래와 일체 법을 내나니, 일체법과 더불어 동체(同體)이어서 평등하므로 모든 수행에 실제로 둘이 없는 것이다.
수행방편의 점점 닦는 차레와 닦는 사람에 있어 그 닦는 방편의 종류를 위덕자재보살은 부처님에게 물었고 그에 따라 온갖 정성을 다하자 부처님은 위덕자재보살의 정성에 감복하여 말새 주실 것을 승낙하시고 다음과 같은 말머리를 먼저 꺼내시었다. '위 없는 묘각이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일체 여래를 내나니'를 말씀하셨다. 어떠한 것이 위 없음이가! 말이 다한 곳이다. 말이 남아 있다면 마지막이란 곳은 될 수 없다. 마지막 곳이 아니면 위없는 곳이 될 수가 없다. 그리고 생각도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생각할 틈도 남아 있다면 마지막이란 곳이 될 수가 없다. 그러면 마지막이란 곳은 어디인가' 곧 적멸인 곳이다. 이 저멸인 곳은 적멸없음으로 갈 뿐이다. 적멸인 고로 미묘작용을 짓는다. 또 미묘작용이라 해서 미묘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없음으로 미묘작용인 것이다. 왜냐하면 없음에서 잎에가 있는 탓이다. 그런데 일체가 있음은 있음이 아니요 적멸을 실시하는 장소이다. 즉 적멸을 행동화하는 곳이다. 즉 적멸은 말아닌 말로 웅변하는 입인 것이다. 이러므로 모든 일체가 있는 것이 적멸로 있는 것이다. 그 이유가 위없는 곳의 적멸을 미묘화 하는 것이다. 이 적멸의 미묘한 행상만은 시방에도 살아서 있다. 이런 까닭에 적멸은 적멸이 아니요 이름이 적멸으로써 일체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일체가 있음은 일체가 있음이 아니요 이름만이 일체가 있음으로 적멸은 실현하고 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행상을 가지고 이름함이다. 깨달음은 곧 살아있다는 그것이다. 살아있다는 그것은 곧 움직임인 것이다. 움직임은 곧 살아 있다는 것이다. 또 살고 움직임을 깨달음이요 살고 움직임이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행상을 가지고 이름함이다. 깨달음은 곧 살아있다는 그것이다. 살아있다는 그것은 곧 움직임인 것이다. 움직임은 곧 살아 있다는 것이다. 또 살고 움직임을 깨달음이요 살고 움직임이다. 이러한 미묘한 소유자인 깨달음은 시방에 두루한 것이다. 이 까닭에 시방세계가 움직이는 것이니 그에 삼라만상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이 까닭에 움직이는 것이니 그에 삼라만상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이 까닭에 시방세계는 깨달음이니 삼라만상이 깨닫지 아니함이 없다. 이같이 위없는 법의 적멸 법칙을 자기 몸과 마음에 실현하여 실현과 실현아님이 없는 평등한 자는 그 이름이 여래이다. 이런 여래는 모두가 적멸의 미묘한 깨달음에서 출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여래는 법이면서 삼라만상과 더불어 하나인 것이다. 적멸은 깨달음의 움직임과 만상이요 움직임과 만상을 깨달음은 적멸인 까닭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적멸없음에서도 평등이요 움직임과 만상에서도 평등이요 적멸과 움직임과 만상과도 평등인 것이다. 이 까닭에 경에 '묘한 깨달음과 여래와 일체법이 한몸으로 평등하다'하였다. 중생은 본래 이 평등으로의 일부분이면서 전체인 평등자이다. 이 까닭에 수행이 있을 수 없고 법이 있을 수 없다. 하나도 없는데 둘 이상이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수행상에 선후나 절차나 종류를 말할 수 없다. 이것들을 말하는 자는 위없는 묘각을 모르는 소치에서 생기는 소리이다. 이 까닭에 부처님께서 먼저 중생이 일찍부터 여래평등자이어서 닦을 것이 없음을 폭로하신 것이다.
방편으로 수순하는 데는 그 수효가 한량이 없지만 돌아갈 바를 두루 거두울진댄 성품의 차별에 따라 세 종류가 있느니라.
일찍부터 중생이 여래로 평등하여 닦을 것이 없지만 이것을 모름에 있어서 이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방편이 한량이 없으며 그들이 궁극적으로 돌아갈 바는 여래적멸 평등성지 한 곳을 지향하게 된다. 이 까닭에 이 모든 무수한 방편을 둥글게 거두어서 적멸의 성품을 향하고 차별없는 차별을 내자면 마땅히 세가지 종류를 말할 수 있다. 이를 삼관이라 한다.
선남자야 만약 보살들이 청정한 원각을 깨닫고서 원각의 마음으로써 고요함을 취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으면, 망념이 맑아진 까닭에 심식[識]이 번거로이 요동했음을 깨닫고 조용한 지혜가 일어나나니, 몸과 마음의 객진(客塵)이 이로부터 영원히 소멸하는 것이니
지금부터 삼관 즉 세가지 방편을 말하게 된다. 그러나 이 방편을 행하고자 하려면 먼저 깨끗한 각성을 깨치고 나서라야 한다. 적어도 부처님 원음에 의하여서 중생이 볼래부터 여래와 평등임이 깨우쳐지고 나서라야 된다. 그래서 본래 닦을 것도 깨달을 것도 없는 줄을 알았지만 이장과 사장에 가로막혀 본래 평등이 드러나지 않을 때에는 세가지 방편이 필요한 것이다. 또 설혹 그런 깨달음은 없을 지라도 ?? 방편법을 듣고서 믿는 마음이 깨끗하여서 법 대로만 하게 된다면 된다. 왜그런고 하면 깨끗이 믿는 마음은 곧 각성이니 깨뜻한 믿음은 둘이 아닌 그 마음인 까닭이다. 이 방편문은 누구든 깨끗한 마음이면 되는 것이다. 이 까닭에 경에 '깨끗한 원각성을 깨닫고'그리고서 방편문을 행할 것을 말씀하셨다. 깨끗은 망상이 없어 깨끗이다. 이러므로 경에 '깨끗이 깨달은 마음으로서 고요를 취해 수행을 삼으라'하였다. 이같이 하여 모든 생각을 맑게 함으로 해서 업식에 번거롭던 움직임이 깨쳐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각을 맑힘으로 아뢰야식 가운데에 생멸하는 모양을 깨달아 극히 고요한 지혜로 오래 관찰할 때 객진번뇌의 티끌이 영원히 멸하고 대광명체가 나타나니 이것이 최초 정관이 되는 것이다.
안으로 적정한 경안(輕安)을 일으키느니라. 적정때문에 시방 세계에 계신 여래들의 마음이 거기에 나타남이 마치 거울 속의 그림자 같나니, 이 방편은 사마타(奢摩他)라 하느니라.
이것은 공부한 효능을 보인 것이니 이제 무명혹은 녹아짐에 안으로 적정경안을 발하고 시방이 확연하고 법신이 드러나니 모든 여래의 마음이 이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거울 가운데 묘한 현상과 같다. 제불 법신이 나의 성품과 합하는 것이다. 사마타는 우리 말로 하자면 적정 즉 '적적고요'란 뜻이니 인땅에 있어서는 그친다는 뜻이다. 이 판법을 성취하면 번뇌장을 끊고, 아공의 진리를 증득하여 신심주에 들어간다.
선남자야, 만일 모든 보살이 깨끗한 원각을 깨치거든 깨끗한 각심으로써 심성(心性)과 및 근진(根塵)이 모두 환이 있는 자를 제도한다란 말도, 이를 제도하기 위한 원력도, 크나큰 자비도, 지혜도 모두가 환인 것이다. 또 환을 환으로 아는 것도, 환을 면하려 하는 것도, 환을 말함도, 모두가 환으로의 대상인 것이다. 이러므로 경에 '모든 보살이 깨끗한 깨달음을 깨닫고서 깨끗이 깨친 마음으로써 마음과 성품을 더불어 육근과 욕진에 미치기까지 모두가 환을 인하여 되었음을 지각한다'하셨다. 그러므로 심성과 근진이 모두가 실체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허깨비가 나타난 것과 같이 허망한 것으로 관찰한다. 심성과 근진이란 18계를 뜻하는데 모두가 근본무명과 진여의 세게를 등지고 일어났고, 그 근본무명에서 다시 18계가 생겼으니, 무명 자체도 허망한데 1계가 어찌 진실하겠는가. 이런 사실을 깨달아 알고는 곧 환 같은 지혜를 일으켜서 환이 되는 것 즉 무명을 제거하고 다시 환같은 수행문을 일으켜서 환같은 중생을 구제하려는 생각이 간절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증대하여 용맹정진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돌보지 않게 되는 것을 가엾이 여김이 경안이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마음도 환이지만 이 환은 중생 무명을 상대한 환인 까닭에 비지의 환인 것이니, 상대가 다하기 전에는 다하지 ㅇ낳고 증장하다가 무명이 다할 때 함께 다흐는 것이다. 이것이 자타환이다. 멸하여 적멸없을 때면 문득 대비의 가엾고 편안함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환이다 하니 가볍고 비지가 없어지니 편안할 것이다.
일체 보살이 이로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차츰차츰 더해가나니, 환이 되는 것을 관찰함은 환과 같지 않은 까닭이며, 환과 같지 않다고 관찰하는 것도 모두가 환인 까닭에 환의 모습을 영원히 여의느니라. 이 보살들이 원만히 하는 묘한 수행은 흙이 싹을 자라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런 방편을 삼마발제라 하느니라.
비지의 환관을 일으킨 일체 보살들은 이 관문을 끊는 고로 비지와 환관이 행으로 일어나 해와 행이 점차 증진함으로 불을 이루는 것이니, 해행이 증진하는 이유는 비지환은 무명환과 같지 아니한 때문이다. 이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저 환을 관하는 자는 환과 같지 아니한 연고'라 하셨다. 진여본각 위헤는 지헤다 망식이다 하는 분별이 양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환이 되는 것, 즉 무명을 알고서 환화를 일으켜 중생을 제도하고, 다음에는 환같은 지헤를 일으켜 환이 되게 하는 무명을 제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깨닫는 마음은 지혜마저 쓰러져버리면 지혜나 심식이 모두 없어져서 환의 모습을 영원히 여읜다. 그리하여 십지의 초인 환희지에 드나니, 이것이 보살들의 묘한 수행을 만족히 채우는 형태이다. '흙이 싹을 자라게 한다'함은 흙에 종자를 심어 열매를 거두는데 종자는 본각에 비히고, 싹은 환의 지혜에 비기고 열매는 깨들음에 비기니, 본각에 의해 환의 지혜를 일으키고, 환의 지헤에 의해 수행을 쌓아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에 결합하는 방편이니, 이를 삼마발제라 한다. 삼마발제라 함은 등지라 번역하니, 정과 환을 균등히 유지하므로써 보다 수승한 지위에 이음이다. 이 관문에 의지하는 보살은 부처님의 원력과 비력과 지력이 같은 고로 제도면에서는 같이 부처이고 수행면에서는 같이 중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제도도 같이하고 수행도 같이 하는 이 벙편이야말로 보살들의 묘각행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또 불과 보살이 환의 변화력을 인용하여 제도하는 고로 변화력이라고도 함이다.
선남자야 만약 모든 보살이 청정한 원각을 깨닫고서 청정한 원각의 마음으로 환화(幻化)와 조용한 모습들을 취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걸림이 되나 지각없는 밝음은 온갖 장애에 의하지 않는 줄 분명히 알아 장애와 장애없는 경계를 영원히 초과하나니, 세계와 심상을 수용하되 모습은 티끌 세상에 있으나, 마치 그릇 속의 종 소리가 밖으로 나가는것 같이, 번뇌와 열반에 서로 구애되지 않을 것이니라.
환화를 취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둘째의 삼마발제에 집착되지 않는다는 뜻이요, 조용한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함은 첫째의 사마타에 집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같이 양면을 취하지 아니하였어도 만약 몸과 마음이 인식에 들어오면 이는 걸림인 것이다. 몸과 마음이 다 걸림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 환화에 질애와 모든 마음에 고요를 취하지 않았으면 몸인 질애상과 고요인 마음상이 있어 알려지는가' 몸과 마음이 걸리고 마니 걸림으로써 참의 환화 및 모든 고요의 모양을 취했지 아니했나, 취했나를 알아 볼 수 있다. 몸의 촉각으로 느끼는 작용을 각이라 하고, 마음으로 사물을 식별하는 것을 지라 한는데 여기에서 드러내려는 명에는 이런 자와 각이 없으므로 기잦없는 각명이라 하고, 이 지각없는 각명은 어떤 장애에도 의존하지 않으므로 이 정체를 바로 보는 이는 장애와 장애없는 경계를 영원히 초월한다 하였다. '세계와 신심을 수용한다'함은 장애와 장애없는 경계를 초월하였더라도 그의 생애가 유난히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종자대로 국토에서 몸과 마음으로써 행주좌와하면서 기쁨과 성냄을 느끼고 산다. 그러나 겉모양이 범부와 같다해서 완연히 범부라 해서는 안된다. 이들은 겉모습만이 키끌 세계에 있을 뿐이요, 내면의 세계는 생사와 열반의 끄나풀에 걸리지 않는 존재를 소유한 것이다. 마치 어떤 그릇속에다 종을 달고 치면 그 소리가 밖으로 울려 나오는 것같이 세간 일체는 아무런 집념이 없다. 이러한 곳을 이름하여 무지각명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 무지각명에서는 일체가 걸리지 않는다. 이 까닭에 걸리고 안 걸림까지 뛰어 넘어 자성과 환화가 걸리지 않음 같이 티끌지역 속에 있어 세계에 몸과 마음을 수용하여도 걸리지 않는 것이다. 마치 종속의 소리 같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띠끌지역은 종이요, 세계 및 신심은 소리인 까닭이다. 이런 연고로 번뇌와 열반도 서로 걸리지 않는다. 열반은 종이요, 번뇌는 소리인 까닭이다.
안으로 적멸의 경안을 일으키느니라. 묘각이 적멸의 경계를 수순함에는 나와 남의 몸과 마음으로미치지 못하는 바이니, 중생과 수명이 다 들뜬 생각이니라. 이런 방편은 이름이 선나(禪那)라고 한다.
적멸의 경안이라 함은 조용함과 환화에 집착되지 않음으로써 의례히 나타나는 적멸의 현황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거뜬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적멸의 경지는 묘각진심으로서 만이 수순할지 언정 나와 남을 따지는 사상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말씀마다 묘각이 적멸의 경계를 수순함에는 나와 남의 몸과 마음으로는 미치지 못할 바라 하였다. 나라 함은 아상이요, 남이라 함은 인상이요, 다음에 나오는 중생과 수명은 중생상과 수자상이니, 이 사상이 있으면 적멸의 경안은 알도리가 없다. 그 이유로서는 초지에 오르는 보살은 아집과 법집의 분별과 구생을 모두 끊어야 되는데 사상이 있으면 아법이집의 분별구생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적멸의 경안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런 방편을 선나라고 하는데 선나라 함은 정과 헤가 하나인 뜻이요, 몸과 마음이 하나인 뜻이요, 환화와 자성이 하나인 뜩이요 보리와 번뇌가 하나인 뜻이요, 생사와 열반이 하나인 뜻이다. 이상 세가지 관문에서 모두 첫머리에 깨달았다는 말을 한 것은 앞에 나온 경문의 견해를 알았다는 뜻이니, 처음의 사마타에서는 문수장의 견해요, 다음의 삼마발제에서는 보현장과 보아장 전반의 견해요, 마지막 선나에서는 보안장의 후반과 금강장의 견해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선남자여, 이 세 가지 법문은 모두가 원각에 친근하고 수순하는 길이니, 시방의 보살들의 갖가지 방편이 일체같고 다를지라도 모두가 이와 같은 세가지 사업(事業)에 의하나니, 만일 원만히 깨달으면 곧 원각을 이루리라.
이 세가지 관문은 인지법행이다. 사마타는 적정을 취하는 지관이요, 정관이요, 공관이며, 삼마발제는 호나다운 삼매를 익히는 환관이요, 비관이요 지관이며, 선나는 적멸을 살리는 불이관이요, 적관이요 중도관인 것이니 이 세가지 큰 관법은 일체수행방편문에 근본이 되고 있다. 이 삼대관을 익히는 자는 여래의 원각에 친근함이고 순히 따름이고 실습함이고 훈련함이다. 시방의 여래는 이를 인하여 성불했고 삼현십성도 이를 인하여 수행의 기점을 삼기 때문이다. 같고 다른 방편이라 함은 지상 보살은 평등의 법을 증득하기 때문에 같다하고, 지전보살은 평등성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다르다 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본다면, 처음의 사마타관을 닦으면 아집을 끊고 상이각을 증득하니, 이는 이승의 방편이요, 다음의 삼마발제를 닦으면 아집과 법집을 모두 끊고 수분각을 증득하니, 이는 지상에 든 보살의 방편이다. 이와같이 차츰차츰 닦아 들어가서 마침내는 구경각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원만히 증득하면 곧 원각을 이루리라 하였다.
선남자야 가령 어떠한 사람이 거룩한 도를 닦고서 백.천.만.억 아라한이나 벽지불과를 교화하여 과위를 얻게 하더라도 다른 어떤 사람이 이 원각의 무애 법문을 듣고, 일찰나 사이에 수순하고 닦아 익힌 것만 같지 못하느니라.
이 법을 닦고 있는 선남자나 이 법을 닦을 뜻을 둔 선남자는 이 법의 무량한 가치를 알아야 한다. 불법에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소승에 속한다. 그러나 신선이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인이나 하늘 어떠한 나라에 사는 중생들이라도 아라한에 비하면 그 지혜나 모든 면에 있어 백만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가령 어떠한 사람이 있어 거룩한 도를 닦음이 능히 저 백천만억의 모든 아라하, 벽지불을 교화하여 모두 성취를 얻게 했다 하더라도, 다시 사람이 이 원각의 무애법문을 듣고 단지 일찰나경만이라도 순히 따라 익힘만 못할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무애법문에 대해 오래도록 수행하면 그 복이 얼마나 많을까는 짐작할 일이다.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기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위덕 그대는 마땅히 아소 위없는 대각의 마음은 본래 두 모습 없건만 온갖 방편에 따르건대 그 수효가 한정이 없느니라
여래가 총괄해서 말할진대 세 종류가 있게되니 적정(寂靜)인 사마타는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비치는 것 같고 환(幻) 같은 삼마제는 싹이 자라는 것 같고 적멸인 선나는 그릇 속의 종소리와 같으니 위의 세 가지 묘한 법문은 모두가 원각에 수순하느니라.
온 세계의 여래들과 큰 보살들이 이를 인하여 도를 이루나니 세 가지 일을 원만히 증득하므로 마지막 구경의 열반이라 하느니라.
적정인 사마타는 거울에 그림자가 비치는 것 같다고 함은 망념을 쉰자리에 지혜가 나타나는 현상을 뜻한다. 나머지는 언급한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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