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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조 휘 구(俱)공은 정헌대부 문정공(文靖公)의 제9자(막내)이시며 벼슬은 진용부위 좌군사정(進勇副尉左軍司正)에 이르고 배위는 부사(府使) 인천 이계장(仁川 李繼長)의 따님이시다. 공은 1남4녀를 두셨으니 아드님은 진용교위 충순위(進勇校尉忠順尉) 세형(世衡)공이며, 1녀는 교리(校理) 의성 김항(義城 金港)에게, 2녀는 첨지중추부사 안동 권인(安東 權引)에게, 3녀는 현감 청주 정원노(淸州 鄭元老)에게, 4녀는 현감 문장손(文長孫)에게 출가 하였다. 공이 한양에서 별세하자, 세형공은 세조2년 사육신 사건이 발생하고 매죽당 성삼문(成三問)과 인척(종매부)이 되니 박해를 우려하여 모친 인천이씨를 모시고 경상도 소백산하인 영주 이산면두암(榮州伊山面斗岩)으로 낙향하여 거지(居址)를 잡으니 500여년 세거지가 되었다. 또한 9세 세형공께서는 가인의(假引儀) 부흥(復興)공, 금산훈도(金山訓導) 몽득(夢得)공까지 3대가 독자로 내려오다가 몽득공께서 만취당(晩翠堂) 개국(盖國)공과 참봉 팔국(八國)공 형제분을 두면서 손세의 번창과 아울러 문한(文翰)이 빛나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몽득공의 따님이 대사헌 진보(眞寶) 이해(以瀣:이퇴계의 형)에게 출가하니 이를 계기로 영남의 사문대가(斯文大家)들과 결연(結緣) 교유(交遊)하게 되고 당색도 남인(南人)으로 시종하게 되었다. 노서(老西)의 전성기를 이룬 조선조 초기에 있어 남인 고유의 결고(結高)를 지켜온 본 파는 후손이 환로(宦路)에 진출할 기회가 적어 높은 벼슬은 없었으나 문과 3원, 소과 8원을 배출했고 세세로 전승(傳承)한 학문과 덕행은 영남의 어느 대성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11세 몽득공의 제1자 만취당 개국공은 낙향이후 최초로 문과에등과한 분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대장으로 출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워 선무원정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 되었으니 이분의 후손들이 낙향지인 이산면 두암리(伊山面斗岩里)에 세거하여 이산종중(伊山宗中)을 이루었는데 학문과 덕행 그리고 충효절의가 대대 계승하여 그 이름이 영남일대에 떨친 종중이다. 만취당께서는 여엽(汝燁), 여환(汝煥), 여욱(汝煜), 여혁(汝爀) 4형제를 두셨는데 제1자 여협과 3자 여욱 형제가 광해군 5년 사마시에 동시 합격 하였고 더욱이 여욱공은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 하였으나 이때가 연흥부원군의 계축옥화(癸丑獄禍)가 있은 시기라서 대과의 희망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소인묵객(騷人墨客)과 더불어 산수와 풍월을 읊으면서 세상을 잊고 살게되니 한동안 과환(科宦)이 끊기게 되었으나, 2자 여환공은 효행으로, 4자 여혁공은 역학(易學)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다가 18세 장령 형(瑩)공과 19세 좌랑 용범(龍範)공에 이르러 문과에 등과하게 되었다. 특히 생원 여엽공과 여혁공은 인조4년(1626)에 고성현 도선산(道善山)의 4세 찬성사공의 묘소에 성묘를 함과 동시 통영으로 가서 선대의 묘적(墓蹟)을 탐사하고 그 기록 남행기문(南行記聞)을 남기신바 있다. 본 파의 학문은 퇴계 이황 선생의 성리학통을 이어 받아 문맥과 명성이 대대로 끊기지 않았으니 그중에도 14세 운행(雲行), 16세 식(湜), 20세 횡(鋐), 21세 기연(起淵), 옥연(玉淵), 수연(壽淵)공 등은 당세의 웅문(雄文)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한편 11세 몽득공의 제2자 참봉 팔국(八國)공이 두암에서 부석면 용암으로 분가하여 정착함으로서 부석종중(浮石宗中)을 이루었으니, 참봉공은 부호군(副護軍) 여흔(汝흔)공을 낳고 부호군공이 첨지중추부사 운창(雲昌), 운기(雲起), 운우(雲遇)공 등 3형제를 두었으나 2자는 당대에 절손되고 3자는 21세까지 내려오다가 무단으로 끊기고 오직 운창공의 후손만이 4백여년간 부석(浮石)을 세거지로 하여 이산종중과 더불어 영남의 명문(名門)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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