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짚신문학회』 호에 승선하다!
짚신문학 20주년 기념비 제막식에 다녀와서 -
배 성 희
573돌을 맞이한 한글날, 우리 고향 마천에 새로운 명소가 생겼다. 마천 섬말에 커다란 문학비가 세워졌다. 시비(詩碑)나 공덕비(功德碑)는 더러 세워지기도 했지만 문학비는 처음이다. 짚신문학회 20주년을 기념하여 오동춘 회장님이 나고 자라신 고향 땅 해 잘 드는 언덕에 ‘짚신문학 공원’을 만들고 그 안쪽 중앙에 웅장하게 자리를 잡았다.
나는 마천중학교총동문회 회장님을 대신하여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더욱이 새내기 회원으로서 뜻깊은 자리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춘천에서 5시간이나 걸려서 가야 하는 거리이긴 했지만 새로운 세계로 입문하는 설레임이 커서인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초가을 경치는 가는 길을 더욱 행복하게 해 주었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억새들이 달리지만 말고 같이 놀자고 햇빛에 빛나는 털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푸른 물 뚝뚝 떨어질 듯한 하늘 아래 조금씩 익어가고 있는 나뭇잎들은 어떤 색으로 변신할지 기대에 부풀어 있는 듯 보였다.
휴게소에서 산 따끈한 호두과자 한 봉지와 집에서 내려온 커피로 허기를 달래며 도착한 마천 섬말. 더할 수 없이 맑고, 깊어 보일만큼이나 푸른 하늘과 지리산 기운 잔뜩 머금은 공기가 반가웠다. 길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카메라에 담고, 몇 채 안 되는 집들을 품고 있는 산등성이와 오늘이 최고 아름다운 듯 깊어진 하늘도 몇 컷 담았다.
행사장으로 올라가니 몇 분들이 다과를 준비하느라 분주하시다. 섬말 이장님께서 먼저 알아보시고 반갑게 맞아주셔서 낯선 분위기가 좀 가셨다. 좀 있으니 서울에서 버스가 도착하여 회장님을 비롯한 내빈들과 선배 회원님들이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올라오셨다. 회장님 외에는 아는 분이 한 분도 안 보였다.
한 숨을 돌린 후 행사장으로 향했다. 40년 역사를 가진 지리산 교회 옆, 90평 남짓한 땅을 깔끔하게 정돈해서 잔디를 심고, 10톤이나 되는 자연석을 다듬어서 기념비를 만들었다. 푸른 빛이 약간 감도는 큰 바위에 새겨진 ‘짚신문학 기념비’라는 글씨가 참 잘 어울렸다.
함양군수님을 비롯한 지역 내빈들이 오시고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한글 사랑, 나라 사랑, 짚신 사랑’이라는 표어답게 무반주로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다. 우리 나라가 모든 면에서 녹록지 않은 위기 상황에서 목소리로만 울려 퍼지는 애국가 가사가 푸르른 하늘과 어우러져 이전과는 다른 간절함으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애국가 4절 부르기 운동은 회장님께서 항상 강조해 오셨는데, 행사를 진행할 때는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참석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1절만 해 왔었다. 이번에 가을 하늘 아래서 애국가를 부르면서 마음에 새로운 다짐이 되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소중히 여기는만큼, 그리고 그 마음을 더욱 다지기 위해서라도 내가 주관하는 모든 행사에서는 4절까지 다 부르리라.
회장님의 인사 말씀은 힘이 있으셨다. 80을 훌쩍 넘기신 분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힘있는 목소리로 고향 마천에 대한 애정, 짚신 정신에 대하여, 거짓 없는 참삶, 뼈있는 뼈삶, 빛 있는 빛삶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50여 명은 될 듯한 내빈들을 한 분도 빠짐없이, 그것도 원고 한 장 없이 다 소개하시는 모습 속에서 오신 분들에 대한 애정과 그분의 열정을 볼 수 있었다. 사회를 보신 임문혁 시인이 50년 동안 제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말씀이 참 인상적이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지만 송골 오동춘 회장님은 이름뿐만 아니라 제자와 수많은 작품, 그리고 곳곳에 세워진 시비를 비롯하여 마천 최초의 문학기념비를 남기시는 듯하다. 한글과 나라에 대한 사랑, 고향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최고 가치로 삼고 열정으로 달려오신 삶의 열매가 아닐까 싶다.
신입생인지라 생소한 어르신들, 생소한 용어들에 신경을 바짝 세우고 집중해서 듣고 보아야 했는데 참여하신 분들은 오랜 시간 함께 해 오신 여유와 서로에 대한 애정이 끈끈해 보였다. 문학을 하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차분하게 정돈된 세련미를 갖고 계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내빈들은 대부분 다과회 장소로 가고 회원들끼리만 참여하는 3부 순서가 되었다. 문학인들은 어떻게 놀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문인들답게 시 낭송회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셨다. 지면에 있을 때는 누워 있던 시가 낭송하시는 분의 목소리를 통해 입체감 있게 살아서 마음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시 낭송의 묘미를 새삼 발견하게 되었다.
지리산 교회는 나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라 담임 목사님을 뵙기 위해 시 낭송을 다 듣지 못하고 다과회 장소로 먼저 옮겼다. 대학 시절 신앙 고민을 한창 하고 있었을 때 지리산 교회 바닥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다. 그 때 그 자리를 고스란히 지켜 오신 목사님께 감사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중학교 시절 목사님 아들의 이름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어서 안부를 여쭈었더니 반가워하셨다. 차분하고 착했던 후배는 목사가 되어서 서울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가 신앙생활 하기 어려움이 있다는 말씀을 드리니 사모님께서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하신다.
회장님께서 이번에 수필가로 등단했다는 소개를 해 주셔서인지 처음에 느꼈던 거리감이 없어지고 다과를 나누는 동안 먼저 인사들을 건네주셨다.
다과회 음식은 최고였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주운 도토리로 쑨 묵은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있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아침과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해 허기가 져 있던 터라 두 접시나 비웠다. 갓 담은 겉절이와 고기의 조화도 끝내주었다. 맑은 공기와 물을 먹고 자란 원료로 만들어서인지 지리산 음식에는 특별한 신선함이 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고향 음식을 먹을 때 몸이 즐거워하는 걸 보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내 몸 구석구석에 숨어 있었던 게 틀림없다.
어머니와의 저녁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사를 드리고 뇌전으로 향했다. 그 경사진 비탈길을 걸어서 올라가려면 한참이었는데 차로 가니 순간이다. 학창시절 그 가파른 길을 올라가려면 숨을 한번 고른 후에 올라야 했다. 실덕마을 자리가 딱 우리 동네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매일 하면서 올라갔던 것 같다.
차 소리에 어머니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리고, 고추며 상추, 호박, 가지, 호두, 자연산 표고버섯, 뒤뜰에서 닭이 낳은 계란 등 뭐든 싸 주신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인월 고깃집에서 맛난 저녁을 먹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찾아뵙고 이런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80을 넘기신 어머니가 아무리 건강하신들 우리 곁에 얼마나 계실까 싶은 것이다. 눈을 잠깐 붙인 후 어머니와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춘천으로 향했다. 맑은 하늘에 달도 밝은데 유난히 많은 별들이 밝게 빛나고 있다. 그런 별을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1999년 3월 1일 창단하여 회장님을 비롯한 선배 회원님들께서 20년을 오롯이 지켜 오신 짚신문학회에 첫발을 디뎠다. 잘 갖추어진 배에 무임승차한 기분이다. 아직은 어설프고 낯선 발걸음이지만 한글 사랑, 나라 사랑, 짚신 사랑(고향 사랑)의 정신은 말과 글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 내 마음에도 자리잡고 있던 중요한 가치들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용히 곱씹어 보았다.
사람이 마음에 그 길을 계획할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잘 안다. 계획한 적도 상상한 적도 없었던 이 길을 통해서 어떤 삶이 펼쳐지게 될지 기대가 된다. 먼저 길을 열고 걸어가신 선배님들의 발걸음을 되밟으며 조심스레 따라가 보려 한다. 자신이 어떤 옷을 입게 될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익어가고 있는 단풍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