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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현의 현대시 읽기
시와 아이러니‧2
-상황적 아이러니의 유형에 대하여
박대현
아이러니의 이중화 장치와 체계
폴 드 만은 이중화(duplication)가 아이러니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이며, 이중화는 의식 안에서 두 자아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두 자아란 곧 알라존과 에이런을 지칭하는 것이다. 아이러니의 본질로서 이중화는 바로 알라존과 에이런의 시점을 의미한다. 아이러니는 알라존의 몰락(fall)과 에이런의 상승(rising)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겸손한 에이런의 지혜는 오만한 알라존의 몰락(무지의 자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리하여 알라존의 우월성과 에이런의 열등성은 역전된다. 알라존은 우월한 존재에서 열등한 존재로 몰락하고 에이런은 열등한 존재에서 우월한 존재로 상승한다. 알라존과 에이런은 진정한 자신을 깨닫게 되는 주체 내의 불연속성과 복수적 차원을 나타내는 공간적 은유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러니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의 어원인 ‘에이런’ 개념에 충실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 희극에 등장하는 ‘에이런’은 무지를 가장한 겸손한 자세로 허풍이 심하고 자기 과시적인 ‘알라존’을 상대하면서 결국 ‘알라존’ 스스로 자신의 우월성이 아닌 열등성을 깨닫게 한다. 에이런과 알라존은 확실히 대조를 이루면서 그 관계가 역전되고 만다. ‘에이런’을 어원으로 하는 ‘아이러니’ 시는 ‘알라존’에 해당하는 누군가로 하여금 자신의 열등성을 깨닫게 하는 시다. 결국은 에이런과 알라존의 역전에 의해 알라존의 열등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이러니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 에이런과 알라존의 관계가 알라존의 우월성에서 알라존의 열등성(혹은 에이런의 우월성)로 이동하면서 발생하는 효과가 아이러니다.
아이러니의 주된 특징 중의 하나가 알라존의 우월성은 글의 표면에 드러나고 알라존의 열등성(혹은 에이런의 우월성)은 글의 이면에 숨어 있다는 점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다”(김소월, 「진달래꽃」)과 같은 언어적 아이러니의 경우에는 옳은 진술이다. 그러나 상황적 아이러니의 경우에는 알라존의 열등성이 글의 이면에 숨어 있기도 하고 글의 전개 과정에서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얼굴을 잘 보아두고
목소리를 기억해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있어라
정말이든 거짓말이든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된다
너의 말을 들은 자들은
감동이나 연민을 느끼는 대신
들은 말의 꼬투리를 캐고
너를 되잡아 칠 것이다
어떤 물음이 나오더라도
대답하지 마라
입 밖으로 한번 나간 말은 모두
오랏줄이 되어 너의 몸을 묶고
물이 되어 너의 코와 입으로
다시 들어갈 것이다
아무리 억울한 사람이라도
도와주려고 하지 마라
아무리 정직하고 싶어도
고백이나 자백을 하지 마라
그저 모르는 척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
―하지만 언제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김광규, 「언제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대장간의 유혹』(1991)
이 시의 화자는 표면적으로 폭압적인 정권 아래에서의 생존 방식을 단호하게 가르치고 있다. 입을 다물기, 대답하지 않기, 억울한 타인에 무관심하기, 고백이나 자백하지 않기, 모르는 척하기, 가만히 있기 등등의 수동적인 행동 양식은 독재 정권의 감시 체계에서 경험적으로 터득한 생존 방식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화자는 우월감에 도취된 알라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월감의 허구성을 깨닫는 에이런의 성격은 이면에 숨어 있지만 마지막에서 표면화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도대체 언제까지”는 구절은 앞에서 진술한 생존 방식이 결코 바람직하거나 정상적인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화자의 성격이 알라존에서 에이런으로 순식간에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면에 숨어 있던 에이런의 성격이 표면화되어 나온다. 언어적 아이러니의 구조는 알라존과 에이런이 수직적인 체계를 갖지만, 상황적 아이러니의 구조는 대부분 수직적 체계에서 수평적 체계로 돌아온다. 따라서 역설이 수평적 체계를 가지는 데 비해 아이러니가 수직적 체계를 가진다는 설명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것이다. 아이러니의 이중화 장치는 언어적 아이러니의 경우는 수직적 체계를 지니지만, 상황적 아이러니의 경우 수직적인 동시에 수평적인 체계를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아이러니의 분리된 시간성과 상황적 아이러니
폴 드 만은 아이러니의 특징으로 분리된 시간성(temporality)을 강조한 바 있다. 아이러니의 행위는 아이러니 대상과의 차이와 거리를 드러낼 뿐 의미의 종결과 전체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실히 유기적(organic)이지 않은 시간성의 존재를 드러낸다. 즉, 아이러니는 시간적 경험의 흐름을 순전한 자기 신비화의 과거(알라존의 시간)와 허위성의 자각으로 영원히 괴로운 미래(에이런의 시간)로 분리한다. 그런데 그 분리의 순간은 알라존과 에이런이 화해할 수 없고 분리된 두 존재로서 공시적(synchronic)으로 존재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알라존과 에이런의 시간이 나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알라존의 오만한 허위성은 에이런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며, 그것은 에이런의 의식을 통해서도 절대로 극복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단지의식적인 수준에서 그것을 다시 말하고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는 단 한 순간의 즉각적인 과정으로 나타난다. 단 한 순간에 알라존의 시간과 에이런의 시간이 분리된다. 폴 드 만에 따르면, 아이러니는 폭발처럼 즉각적이고 몰락은 갑작스럽다.물론 이때의 몰락은 알라존의 몰락이다. 알라존의 몰락은 알라존의 우월감이 열등감으로 추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이런의 겸손한 지혜는 그러한 몰락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알라존의 몰락을 중심으로 언어적 아이러니와 상황적 아이러니의 양상을 살펴보자. 언어적 아이러니에서 열등성에 대한 알라존의 자각은 거의 즉각적이다. 예컨대, ‘너 참 잘났다’를 비꼬듯 말하는 경우 화자는 에이런의 시점을, 청자는 알라존의 시점을 가진다. 청자인 알라존은 이 말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린다. 자신의 우월성(‘잘났다’)에서 열등성(‘못났다’)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거의 즉각적이다. 이 즉각성은 언어적 아이러니의 구조적 단순성에서 비롯된다. 언어적 아이러니는 ‘언어’의 이면에 숨은 정반대 의미를 알라존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 상황적 아이러니에서 자신의 열등성에 대한 알라존의 자각은 즉각적이지 않다. 시간의 흐름(독자의 읽기, 화자의 발화, 사건의 진행 등에서 발생하는 시간적 흐름)을 따른 상황의 전개 과정에서 알라존의 열등성이 드러난다. 여기서 말하는 ‘상황’은 주로 사건의 상황을 말하지만, 사건을 진술하고 읽어내는 화자와 독자의 ‘상황’까지도 지칭하는 포괄적 개념이다.(즉 상황은 화자의 발화 상황, 독자의 읽기 상황, 사건의 진행 상황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알라존의 열등성은 상황의 전개라는 시간적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므로 시에서는 ‘구조적’이고 ‘극적’인 형식을 취한다. 시의 구조적이거나 극적인 형식 자체가 시행의 선조성(linearity)에 따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이다. 상황적 아이러니와 관련해서 ‘구조적 아이러니’ 또는 ‘극적 아이러니’가 자주 사용되었던 이유다. 따라서 구조적 아이러니와 극적 아이러니라는 개념은 상황적 아이러니에 내재된 기본적인 속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3. 상황적 아이러니의 세부 유형 체계 문제
상황적 아이러니는 ‘상황’의 성격에 따라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해진다. 기존에 알려진 상황적 아이러니의 유형은 낭만적, 우주적, 소크라테스적, 순진성, 냉소적(풍자적), 희극적, 비극적, 자기 폭로(비하)의 아이러니 등등이다. 이런 유형 분류는 열등성의 내용, 알라존의 성격, 에이런의 성격, 알라존에 대한 화자(혹은 시인, 독자)의 태도에 등에 따른 것이다.
① 열등성의 내용에 따라
‧ 낭만적 아이러니: 열등성의 내용이 낭만주의적 진리와 관련될 때
‧ 우주적 아이러니: 열등성의 내용이 우주적 진리와 관련될 때
② 알라존 또는 에이런의 성격 강조에 따라
‧ 순진성의 아이러니: 알라존의 순진성이 강조될 때
‧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에이런의 시치미떼기가 강조될 때
‧ 자기 폭로(비하)의 아이러니: 알라존의 무지 폭로를 에이런이 자기 폭로(비하)로 받아들일 때
③ 알라존에 대한 화자, 시인, 독자의 태도에 따라
‧ 비극적 아이러니: 알라존을 비극적으로 바라볼 때
‧ 희극적 아이러니: 알라존을 희극적으로 바라볼 때
‧ 냉소적‧풍자적 아이러니: 알라존을 냉소적‧풍자적으로 바라볼 때
이상에서 보듯이, 상황적 아이러니의 하위 유형들은 아이러니를 구성하는 ‘상황’의 강조되는 국면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그 하위 유형은 확정될 수 없는 것인데, 아이러니의 ‘상황’에서 강조될 수 있는 국면은 이상에서 소개된 것 말고도 다양하게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소개된 것 말고도 기왕에 언급된 아이러니는 더 있다. ‘부드러운 아이러니’(샤프츠베리), ‘변증법적 아이러니’‧‘실천적 아이러니’(C.설월) 등을 비롯하여 ‘비개성적 아이러니’, ‘자기 비하의 아이러니’, ‘자기 폭로의 아이러니’, ‘순수한 부조화의 아이러니’ ‘일반적 아이러니’ 따위 말이다. 아이러니의 ‘상황’ 중에서 무엇이 강조되느냐에 따라 아이러니의 세부 명칭이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상황적 아이러니를 하위유형별로 세분화하는 것은 노력에 비해 실익이 없다.위에서 소개된 유형들은 지금까지 문학 텍스트에 가장 많이 적용되었거나 아이러니 이론에서 자주 언급된 상황적 아이러니의 하위 유형들이다. 상황적 아이러니의 시는 대부분 위에서 소개한 여러 유형들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다. 한 가지 하위 유형의 양상만을 지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① 열등성의 내용, ② 알라존 또는 에이런의 성격 강조, ③ 알라존에 대한 화자, 시인, 독자의 태도 등에 따라, 상황적 아이러니는 복합적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의 분류에서 불필요한 유형은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다. 다수의 시론에서 이 유형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 유형에 해당하는 텍스트는 소개되지 않는다. 해당 작품이 쉽게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는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시치미떼기라는 말하기 방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온 개념이다. 실제 시에서 에이런에 해당하는 인물이 알라존에 해당하는 인물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시치미떼기를 하는 장면을 서술한 경우는 잘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는 유형이 갈라져 나온 것은 아이러니의 근본 원리(알라존과 에이런의 이중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의 시치미떼기(에이로네이아)를 언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는 아이러니의 근본원리를 설명하는 빈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상황적 아이러니의 개별적인 유형으로 분류할 이유가 없다. 모든 아이러니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의 시치미떼기(에이로네이자, 즉 에이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4. 상황적 아이러니의 상황적 복수성複數性
무좀-피부진균감염증 치료제 라비진크림Ⓡ 염산테르비나린
라비진은 azole계 약물과는 달리 진균 세포막에서 스쿠알렌 에폭시다제의 작용을 저해합니다 즉 진균의 스테론 생합성 과정 중 스쿠알렌 에폭시다아제의 작용을 차단하여 에르고스테롤의 결핍과 스쿠알렌의 세포 내 축적을 초래하므로 진균 세포를 죽이게 됩니다
진균들아 이 지긋지긋한 진균 세포들아 이제 너희들이 왜 죽는 줄 알았냐? 이 약은 azole계 약물이 아니란다 너희들이 스테론 생합성을 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이미 다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스쿠알렌 에폭시다아제가 작용한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이제 너희들은 에르고스테롤이 결핍되고 스쿠알렌이 세포 내에 축적되어 서서히 죽어 갈 것이다. 내가 하루에 두 번씩 염산테르미나핀 10mg과 벤진알코올 10mg이 포함된 백색의 크림제 1g을 꼬박꼬박 바르면 너희들은 2-4주 안에 다 죽게 되어 있다. 내 발바닥을 가렵게 하던 이 못된 진균들아 벌써 에르고스테롤이 결핍되어 허덕일 가엾은 진균들아 단세포로 백날을 생각해도 멀쩡하게 의기양양 번식하다 왜 갑자기 배가 고프고 몸이 무거워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것이다 나?
나는 어떠냐고? 라미진은 국소 도포 후 5% 미만이 인체에 흡수됩니다 그러므로 전신으로서의 약물 이행은 극미합니다 까딱없지
-박순원, 「어디쯤 가고 있을까」 전문, 에르고스테롤(2017)
이 시는 사람이 무좀균에게 말을 거는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람과 무좀균의 대화는 시인의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해학과 풍자의 기질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상상력이다. 1연은 무좀균 치료제 이름과 성분명에 대한 진술이고, 2연은 무좀균 치료제의 약리 작용에 대한 설명이다. 무좀균 치료제의 포장지에 인쇄된 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3연부터 화자는 무좀균에게 말을 건다. 2연의 약리 내용을 토대로 2인칭 대상인 무좀균들에게 “너희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르고스테롤의 결핍, 스쿠알렌의 세포 내 축적)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내 발바닥을 가렵게 하던 이 못된 진균들”에게 “멀쩡하게 의기양양 번식하다 왜 갑자기 배가 고프고 몸이 무거워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것”이라고 우쭐대며 놀린다. 게다가 무좀균 치료제의 도포에도 불구하고 “전신으로서의 약물 이행은 극미하”여 자신의 몸 건강은 “까딱없”다고 ‘자랑’한다.
화자는 무좀균에 대하여 상대적 우월성을 점하고 으스댄다. 알라존이다. 이 으스댐은 화자의 허풍스런 과시벽을 드러낼 뿐이다. 그 상대가 무좀균이기 때문에 그렇다. 화자는 겨우 무좀균을 상대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자랑한다. 좀스러운 허풍선이다. 자신의 우월성을 자랑할수록 화자의 위상은 열등성의 상태로 몰락한다. 무좀균이 오히려 에이런이다. 무좀균이 반문했을 ‘너는 어떠냐?’는 물음에 알라존인 화자는 “나는 어떠냐고?”, “까딱없지”라고 희희낙락한다. 무좀균(에이런)의 이 반문과 이 반문에 대한 화자(알라존)의 대답으로 인해 화자의 위상은 희극적으로 몰락한다. 겨우 무좀균에 대한 우월성을 자랑삼는 화자의 모습은 열등성으로 드러난다. 정작 시의 화자는 자신의 열등성을 전혀 모르지만,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무좀균에 으스대는 화자가 우스꽝스럽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이미 눈치챈 상태다. 이 시의 제목이 ‘어디로 가고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어조는 화자가 거짓된 우월감에 빠져 있는 알라존에서 우월감의 허구성을 깨달은 에이런으로 이동하였음을 말해준다.
이 시는 화자의 열등성을 드러내는 것이 희극적 양상을 띠므로 희극적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희극적으로 폭로되는 화자의 열등성에 대하여 독자들이 비판적인 태도를 지닌 것으로 본다면, 풍자적(냉소적) 아이러니로 볼 수도 있다. 동시에 이 시는 화자 자신을 우월성에서 열등성으로 이동시키기 때문에 자기 폭로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황의 아이러니는 여러 유형의 성격을 동시에 지닐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강조하고 싶은 내용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상황적 아이러니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고 주목할 만한 아이러니는 낭만적 아이러니와 자기 폭로의 아이러니다. 낭만적 아이러니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이는 슐레겔(F.Schlegel)이다. 낭만적 아이러니의 근본 개념은 현실과 이상의 대립과 모순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 낭만적 아이러니는 절대와 상대, 주관과 객관, 정신과 물자체 등의 양극성에 발생하며, 시인은 환상, 특히 아름다음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갑자기 어조의 변화, 개인적 진술, 격렬하게 모순된 감상感傷을 통해 환상을 파괴한다. 이것이 낭만적 아이러니의 특징이다. 자기 폭로의 아이러니는 비판의 대상이 외부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인데, 김준오는 이러한 아이러니를 내적 아이러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론 비판의 대상이 외부 세계인 경우는 외적 아이러니가 된다. 그러나 자아 또한 세계의 한 양상이라는 점에서 자기 폭로는 세계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 낭만적 아이러니
진실과 현실 사이에 詩는 존재하는가
밤새 눈이 하아얗다
어제 오후 내내 심각하던 하늘이
마침내 읊어 놓은 이 感激
化粧室 앞에 이리저리 검둥이 발자국이 어지럽다
어지럽다, 온 세상이 하얗다
새벽에 잠들어 오후에 깨는
나는 詩라는 이름의 病 앓는 사람
오래간만에 하늘이 내려 준 축복에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다
꿈속에 어느 눈 덮인 山莊에서 舊約을 읽고 있노라니
에이프런을 두른 하얀 소녀가
양고기를 튀겨
들고 나왔다
자, 드세요…세요…요…오
배가 고파 잠을 깨니,
앞집 지붕은 그대로 허연데
하숙집 마당은 싹 치워져 콘크리이트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담배를 사려고 대문을 나서니 골목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
역시, 너무 詩的인 것은, 거부당하는 이 생활의 공간이여
먼 산의 눈이 아름답고
敵이 아닌 猶太人이 위대한 것
都市의 눈은 백해무익하다는
도시 공학도의 말이
생각났다
-박남철, 「시인의 집‧뒤」 전문, 『지상의 인간』(1984)
이 시는 눈의 낭만적 환상성과 현실의 비루함을 대비한다. 시인은 밤새 눈이 내린 아침 풍경에 “감격”한다. 이 감격은 눈으로 덮인 세상이 시인의 내면과 드디어 일치한 데서 오는 감격이다. 이는 시인 스스로 “나는 詩라는 이름의 病 앓는 사람”이라고 일컬을 뿐만 아니라 “오래간만에 하늘이 내려 준 축복에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눈이 내린 아침 풍경의 감격은 짧다. “하숙집 마당은 싹 치워져 콘크리이트 바닥이 드러나 있”고, “담배를 사려고 대문을 나서니 골목이 홍해처럼 갈라”진 것이다. 눈 내린 “감격”의 아침에 사러가는 ‘담배’도 물론 그렇지만,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성스러운 홍해와 대비되어 눈을 쓸어낸 골목의 “콘크리이트 바닥”은 신성(神聖)에 대비되는 세속의 비루한 이미지를 드러내면서 환상의 급격한 파괴를 초래한다. 시인은 잠시 거룩한 세계와 조우했으나, 곧 “都市의 눈은 백해무익하다는/ 도시 공학도의 말”을 떠올리며 비루한 현실로 되돌아오고 만다.
이처럼 낭만적 아이러니는 무한의 환상이 파괴됨으로써 일상으로 다시 내던져지는 몰락에서 발생한다. 낭만적 아이러니도 알라존과 에이런의 대립 구도가 드러난다. 1~3연의 화자는 밤새 눈이 내리는 “감격”과 더불어 꿈속에서마저 “어느 눈 덮인 山莊에서 舊約을 읽”는다. 낭만적 환상에 고무된 화자는 자기도취적인 알라존의 시점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곧 몰락을 피할 수 없다. 낭만적 환상의 눈이 환대받지 못하는 일상의 비루한 현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 시의 화자는 알라존에서 시작해서 에이런으로 끝난다. 낭만적 환상에 취한 알라존은 끝내 현실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에이런에게 지고 만다. 곧 알라존에 대한 에이런의 승리다. 그 승리의 내용이 낭만적 환상의 파괴이므로, 이 시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
이 시가 갖는 독특성은 화자가 자기 비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화자는 시인이다. 자기 고백적인 이 시는 시인의 존재론에 대한 아이러니한 진술이기도 하다. “詩라는 이름의 病 앓는 사람”이면서도 “배가 고파 잠을 깨”고 눈 내린 아침부터 “담배를 사”러 가는 모습은 시인에 대한 낭만적 환상과 일상적 비루함을 대립‧모순되게 드러낸다. “자, 드세요…세요…요…오”처럼 시인의 꿈속 장면에 대한 희화화는 시인이 처음부터 스스로를 가볍게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희화화는 시인 스스로의 자기 비하로서 희극적인 감정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시인의 비루한 일상에서 비롯되는 비극적인 감정도 내포한다. 낭만적 진실과 비루한 현실 그 어디에도 위치하기 힘든 시인의 현실적 고뇌가 낭만적 아이러니로 드러나고 있으면서도 그것에는 자기 비하, 희극적, 비극적 아이러니의 성격 또한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2) 자기 폭로의 아이러니
아침마다 단단한 돌멩이 하나
손에 쥐고 길을 걸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쳐라
누가 또 고요히
말없이 소리치면
내가 가장 먼저 힘껏 돌을 던지려고
늘 돌멩이 하나
손에 꽉 쥐고 길을 걸었다
어느 날
돌멩이가 멀리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거리에 있는 돌멩이란 돌멩이는 모두 데리고
나를 향해 날아와
나는 얼른 돌멩이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었다
-정호승, 「돌멩이」 전문, 『포옹』(2007)
이 시 또한 전형적인 아이러니 시에 해당한다. 아이러니의 본질은 알라존에 대한 에이런의 승리다. 다시 말해 에이런에 의해 알라존의 무지가 폭로되는 것이 아이러니의 본질이다. 이 시의 1~8행의 화자는 알라존의 시점을 보인다. 화자는 “아침마다 단단한 돌멩이 하나/ 손에 쥐고 길을” 걷는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쳐라”는 예수의 말에 응답하기 위해서 말이다. 화자는 스스로 “죄 없는 자”임을 확신한다. 자기 확신에 가득 차 거만하고 오만한 알라존이다. 알라존의 시점을 지닌 화자는 9~15행에서 여지없이 몰락한다.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돌멩이가 “나를 향해 날아왔”기 때문이다. “거리에 있는 돌멩이란 돌멩이는 모두 데리고” 화자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다. 화자는 “돌멩이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고 만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알라존의 시점에서 벗어나 에이런의 시점을 지니게 된다. 알라존에 대한 에이런의 승리다. 이 시는 화자 자신의 도덕적 절대성을 과신한 자신(알라존)의 무지를 폭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 폭로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선(善)과 정의(正義)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도리어 악惡이 되고 마는 것은 인류의 최근 역사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아도르노가 말했듯이, 선과 정의에 원칙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긍정)은 또 하나의 악이다. 선과 정의는 부정의 부정이 긍정으로 절대화되는 헤겔의 긍정변증법 속에서가 아니라, 부정의 부정으로 형성된 긍정이 다시 부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속에서 숨쉬어야 한다. 이 시는 오늘날의 한국 보수 기독교가 알라존의 질곡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는 시로서 시대적 재맥락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5. 아이러니와 역설
아이러니와 역설은 이중화의 장치가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개념적 구분에서 어려움이 존재해왔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20세기 비평에서 신비평가들, 특히 클리언스 브룩스가 역설에 대한 개념 규정을 명확히 하지 않고 아이러니와 유사하게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브룩스의 역설 개념은 리챠즈(I. A. Richards)의 아이러니에서 가져온 것으로 애초부터 역설과 아이러니의 개념이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리차즈의 아이러니가 충동들의 모순에 중점을 두고 있고, 브룩스의 역설이 사물의 총제적 진리 인식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다시 말해, 아이러니가 갈등하는 인간의 심적 충동을 화해시켜 주는 데 관계하는 반면에, 브룩스의 역설은 모순에 찬 세계의 실체를 드러내 그것을 초월하는 일에 관계한다는 것이다. 리처즈의 아이러니가 모순의 조화를 추구한다면 브룩스의 역설은 모순의 초월한 세계의 총체적 진리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즉, 역설이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인식 체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근본적 균열로서의 이성적 붕괴 현상으로 사물의 총체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아이러니는 이와 달리 세계가 절대적 진리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이중화 장치라는 형식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와 역설의 정신이 지닌 근본적인 차이다.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역설과 달리, 아이러니 정신의 본질은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무한한 절대적 부정성(negativity)’에 있는 것이다.
박대현 |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평론집으로 『우울한 것의 추락』, 『혁명과 죽음』, 『황홀한 아파니시스』가 있다.
송진 시인의 시창작법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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