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한시로 읽는 역사 이야기 (13)
요절한 아들 묘에서 곡한 영의정 김수항
조해훈(시인, 고전평론가)
12월 26일 새벽에 아들 묘에서 곡하다(十二月二十六日曉 哭兒墓·십이월이십육일효 곡아묘)
그믐달 드문 별빛이 새벽 구름 비추는데(缺月疏星映曙雲·결월소성영서운)
빈산에 쌓인 눈은 외로운 무덤 덮고 있네.(空山積雪掩孤墳·공산적설엄고분)
평생의 지극한 슬픔을 오늘 밤 통곡하니(百年至慟今宵哭·백년지통금소곡)
지하의 영혼은 듣고 있는가.(能遣精靈地底聞·능견정령지저문)
위 시는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인 『문곡집(文谷集)』 권6에 수록돼 있다.
문곡 김수항은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문사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상헌의 손자다. 김수항은 위로 김수증(金壽增)·김수흥(金壽興) 두 형을 두었는데 이들 삼형제는 ‘삼수(三壽)’로 불렸다. 그런 김수항이 여섯 째 아들 김창립(金昌立·1666~1683)이 요절하자 그 무덤 앞에서 곡을 하면서 시를 읊은 것이다.
김수항의 여섯 아들은 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김창업(金昌業)·김창즙(金昌楫)·김창립(金昌立)이다. 모두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세간에서 이들 형제를 부러워하며, ‘육창(六昌)’으로 불렀다. 그 중 김창립은 막내아들인데, 제대로 뜻을 펴보지도 못한채 18세에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김수항은 당시 영의정 신분인데다 자식을 앞서 보낸 아버지여서 장지인 경기도 양주(楊州)의 석실(石室)까지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가슴은 더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같은 문집 권6에는 이듬 해 8월 잃은 아들 김창립의 생일에 지은 시가 실려 있고, 권22에는 「죽은 아이의 행장」이, 권24에는 대상(大喪) 때까지 지은 제문 5편이 실려 있다. 이로 볼 때 당시 김수항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창립의 형인 김창협이 지은 묘지명을 보면, 1689년 김수항이 죽음을 맞이하던 날 “네 아우(김창립)의 묘지(墓誌)를 내가 오래전부터 짓고 싶었으나 슬픔이 너무 심해 문장을 만들 수 없었다. 이제 나는 끝이니, 네가 꼭 묘지를 지어라.”라고 유언을 했다고 한다. 아들 감창립이 죽고 6년이 흐른 뒤 김수항은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끝내 요절한 죽은 막내아들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위의 시를 지은 12월 26일은 바로 그 아들 김창립의 기일이었다. 김수항은 당시 장지에 가지 못하였다. 그러고 보면 위의 시는 다음 해 기일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믐달에 별빛도 드문드문한 추운 새벽이다. 산속에서 눈 덮인 채로 있는 자식의 찬 무덤을 찾아갔다. 아들의 무덤을 내려다보니 가슴이 미어져 통곡을 한다. 언 땅에 묻혀 있는 아들이 아비의 곡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누구든 아버지라면 김수항의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병으로 일찍 죽은 자식의 죽음을 7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아파하던 김수항의 시를 보면서 독자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하다.
위 시는 어떤 역사적인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그래도 위 시를 끌어온 것은 김수항이라는 인물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펼치기 위함이다. 김수항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유배지인 전남 진도에서 사사되었다. 아버지가 정치적으로 희생되자 그의 아들인 김창집·김창협·김창흡 형제는 모든 걸 버리고 은거에 들어갔다.
김수항 가문은 본관이 안동이다. 알다시피 안동 김씨 가문은 조선말에 들어서 세도 정치의 대명사로 인식될 정도로 그 세(勢)가 대단했다. 제23대 순조, 제24대 헌종, 제25대 철종까지 세 임금의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다. 그러다보니 그 누구도 견제할 수 없는 권력을 반백 년 넘게 휘두른 대표적 외척 가문이다. 중앙 정계를 장악한 이들이 한양의 장동에 거주하였기에 ‘장동 김씨’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중 안동 김씨의 김상헌(金尙憲·1570∼1652)은 병자호란 당시 강렬하게 척화를 주장하며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의 동생 김상용(金尙容·1561~1637)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순국하였기에 절개의 상징이 되었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제17대 효종(재위 1649∼1659)으로 즉위했다. 그때 김상용의 외손녀가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1618~1674)가 되었다. 유난히 손이 귀했던 안동 김씨 가문이었는데, 김수항이 무려 여섯 아들을 둔 것이었다. 이들이 장동 김씨의 원조인 셈이다.
1674년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세상을 떴을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1624~1688)의 복상 문제를 두고 노론과 남인 사이에 소위 말하는 ‘2차 예송(禮訟)’이 벌어졌다. 이때 노론은 남인에게 패했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 후기 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이 일어났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왕실의 전례문제(典禮問題)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서인과 남인 사이에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가 죽자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났다. 예송문제가 재현된 것이다.
이에 앞서 봉림대군 효종이 1649년 즉위했다. 그는 주화파를 몰아내고 10년 동안 송시열 등 척화파 사림의 지지를 받아 북벌을 준비하다 갑자기 죽고 만다. 그리하여 효종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기간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1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이 논쟁을 1차 예송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 한다.
서인 쪽에서는 1차 예송 때처럼 차자부로 다루어 대공설을 주장하고, 남인은 장자부로 다루어 기년상을 주장해 논쟁이 일어난 것이 2차 예송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2차 예송에서는 서인인 현종비의 장인 김우명과 김우명의 조카 김석주가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남인과 연결해 남인의 장자부 기년설을 찬성했다. 그리하여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의 복제는 기년상으로 정해지고 조정의 권력은 허적을 비롯한 남인에게 넘어갔다.
이때 현종이 갑자기 죽고 만다. 제19대 국왕인 숙종(재위기간 1674~1720)이 즉위해 송시열과 그를 옹호하는 서인 세력을 제거하고 윤휴·허목 등의 남인에게 정권을 맡겼다. 그러자 이에 반대해 서인들이 송시열 구명운동을 벌이고 효종의 차자 기년설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송시열을 제거하고 정권을 주도하려던 김석주가 오히려 남인 세력에게 밀려 위태롭게 되었다. 다시 서인 세력과 연결해 허적·윤휴 등을 역모로 몰아 남인 세력을 제거하는 경신대척출이 1680년(숙종 6)에 일어났다. 이로 인해 예송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김수항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김수항이 1689년 태조 어용(太祖御容·태조의 영정)을 전주에 모셔놓고 돌아오는 길에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남인이 재집권한 것이다. 남인의 인물을 함부로 죽였다고 장령(掌令) 김방걸 등이 김수항을 탄핵했다. 이 일로 김수항은 진도로 유배되었다.
이어 예조판서 민암을 비롯한 6판서·참판·참의 등 남인 정치인들 수십 명이 김수항을 공격했다. 또한 사헌부·사간원이 함께 계문을 올려 결국 김수항은 사사되었다. 이는 김수항이 경신대척출 이후 위관으로 남인들에 대한 옥사를 다스렸고, 특히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인의 우의정 오시수(1632∼1681)를 처형했기 때문이었다. 즉, 이에 대한 보복이었다.
김수항에 대해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보겠다. 그는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형인 김수흥(1626∼1690)과 함께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김수항은 1675년(숙종 1)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윤휴·허적·허목 등의 공격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원주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왔다가 다시 전라도 영암 구림으로 이배되었다.1680년 영의정에 올랐고, 1681년 『현종실록』 편찬 총재관을 지냈으며,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전라도 진도에 유배된 후 사사(賜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