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들| 이진해 시인
박제된 시간들 외 4편
설레이던 봄이 친절하지 않은 마스크를 주고 간다
얼굴에 봉합을 해 본다
두 손으로 두 귀에 걸어보지만
입술은 마르고
확인되지 않는 얼굴들 때문에
이 계절 낯설어진다
코끝에는 솜털 같은 공기가 쌓이고
마스크가 없는 얼굴을 피한다
불안한 걸음이 비틀거린다
차선으로 걸음이 도움닫기를 한다
햇살을 등지고 바다로 간다
펄펄 끓는 8월의 더위에 겸상을 하는 비지땀
높다란 전깃줄에 까치 두 마리
사랑싸움을 하는지 울음이 날카롭다
머무를 것인가 떠날 것인가
뿌리를 내린 나무는 그냥 그대로
인식표가 된다
꽃은 시들거나 녹아버리고
난데없이 활짝 핀 꽃을 보고
호들갑을 떨다가
시든 화분을 내던진다
계절을 바꾸려는 꽃들이 훅훅 떨어진다
문 앞에 툭 던져놓고 가는 박스에는
수 십장의 마스크가 들어있다
엘에이 초이스등급의 갈비 박스를
개봉하듯이 손이 떨린다
거실에 박제된 마스크 하나
뚫어지게 쳐다본다
시시포스의 시간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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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는 붉었지
파도소리에 눈을 비비네
동트는 시간이면
깊은 바다 속으로 자맥질하는
발걸음을 숨기는 것을 몰랐지
몰랐지
그림자 뒤에 숨어든 해바라기
까치발로 훔쳐보는
꽃잎은 언제나 필 듯 말듯
건너편 구두 가게에 박제된
구두 하나 잠깐 훔치기로 했지
그것이 덜미가 되네
굽이 너무 높았네
멀리 달아나지 못한 것은 구두 탓이야
스스로 한숨 같은 위안을 하면
붉은 토씨들은
불새의 붉은 혀처럼
마구마구 피었지
통통거리는 뱃고동 소리 흉내를 내듯
꽃잎은 바스락 바스락
귀를 닮은 고개를 내밀지
파도 소리만 들리지
붉은 혀는 달아나지 못하고
파도에 갇히네
지루한 해가 기울듯 눈을 감네
잠에 들기로 하지
굽 높은 구두는 구두 가게에 돌려주고
크고 단단한 잎 하나 파도 하나 바람 하나
붉은 저녁이네
길이 온통 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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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걷다
8월의 숲을 지난다
숲의 나무는 푸름에 잠들어 있고
계곡의 송사리 유빙처럼 떠돈다
히말라야 계곡에 발견된 조개는
어디서 흘러 왔을까
브래지어 골을 타고 내리는 땀은
엉덩이 골을 지나 발바닥에 이른다
돌방석 위에 문신처럼 새겨진다
땀도 새겨진다
음력 초하루에 문을 여는 금강계단
신발을 벗고
넓직한 돌방석이 깔린 탑을 돈다
108번은 무리야
세 번만 돌자
시작부터 마음을 정한다
부처님의 사리탑을 기준으로 사방의 둘레를 돈다
돌바닥이 뜨거워 버선을 신은 사람
두꺼운 양말을 신은 사람
샌들을 신느라 맨발인 나는
디딜 때마다 발바닥이 익을 것 같다
흰머리를 조아리며
삼복염천에 기도를 하는 비손들
계곡의 물소리 들으며
무심한 듯 기도하는
무심한 듯 흐르는
금강계단이 뜨겁다
발바닥이 뜨겁다
굵은 땀방울이 나를 매닥질한다
나는 어떻게 비벼질 것인지
자꾸만 돌고 있다
숫자들이 계곡 속으로 미끄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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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같은 꿈
장미 한 다발의 붉은 시절은 낙엽이 되어 베란다 난간에 걸려 있다 아슬아슬하다 내게 오던 장미의 꿈이었다 꿈은 이루는 게 아니고 꾸는 거라 했다 꽃잎 피울 때 꿈꾸었겠지 누군가의 웃음이 되고 기억이 되기를 여린 잎사귀 떨어질까 밤새도록 가시를 키웠지 실은 손톱이 닳도록 온 몸을 긁어댔지 날개가 돋아날 것처럼 두근거렸지 모두가 가시를 두려워했지 기뻤다 담장 낭떠러지를 벗어나고 싶었지 온 몸을 옭아매는 줄기를 거부했지 길은 앞서간 그림자의 흔적이다 밤마다 꿈은 변한다 길은 또 있다고 덤불을 걷어낸다 걷어낸 이불자락 속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버리지 못하고 매달아 놓은 장미꽃다발에도 꿈이 있었다 후회한 적도 있다 그래서 꿈이라고 위로를 한다 살아가는 게 힘이 들 때 더러 아까운 꿈 하나 위로가 되기도 한다 다른 길을 다른 꿈을 살핀다 잠은 꿈을 위로한다 그런 거다 꿈이란 게 서러워서 걸어놓기도 하고 서러워서밤새 몸 뒤척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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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다
이사를 하다보면 책들이 버려진다
무거워서 아무도 들지를 않는다
책의 제목이 있는 쪽이 등이다
배를 가르듯 펼쳐지는 쪽은 배라고 한다
책을 사람에 빗대는 것이다
요사이는 새 책을 사는 것보다
책의 등을 어루만지다가 손이 가는 책을 펼친다
가물거리기도 하고 생각이 멈추기도 하고
어쩌면 등 떠밀려 등을 내보이거나
등을 숨기거나
수없이 배를 갈라도
욕망 취향 아픔은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만 하는 등짝의 무게였다
조금씩 버린다
오래된 책들
오래된 장신구들
오래된 그릇들
오래된 이불들
하지만 그 자리가 허전해 다시 채우기도 한다
주로 책들이 그러하다
등이 무거우면 아프다
등이 가벼우면 휘청거린다
'서가'와 '십자가'의 가는 모두 시렁 '架'를 쓴다
비워도 채워도 아프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 또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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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진해는 부산에서 태어나 2008년 《새시대문학》, 2016년 《불교문예》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영남여성문학회(모시올) 회장을 역임했다. 시집으로는 『쉼표는 덧니처럼』, 『사라지는 틈』, 『왼쪽의 감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