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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넓은 세상과의 소통, 유화당계안
프롤로그
‘계契·稧’는 예로부터 있어 온 사람들 간의 상호협조조직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동일한 목적 아래에서 계를 결성하는데, 대체로 일정 액수의 돈이나 물품 따위를 모아 계를 운용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동계·친목계[마을주민이나 회원 간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하는 계], 혼상계·상조계·상포계[혼례나 상례를 목적으로 하는 계], 종계·문중계[종중·문중 운영을 위한 계], 유계[유림조직의 계], 학계·서당계[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계]’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유계는 과거 전통사회에서 선비, 유림이 결성한 계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도남동 유화당에서 결성된 유계 중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아주 특별한 계가 있다. 바로 ‘유화당계’다. 유화당계는 2017년 9월, 유화당계안有華堂契案이 필자에 의해 처음 발견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유화당계안에는 놀랍게도 총 885명의 계원 명단이 등재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계모임이 있었다
계는 한자로 ‘契’라고도 쓰고 ‘稧’라고도 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계’라는 한자를 중국에서는 ‘새기다’, ‘약속하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우리처럼 친목모임이란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契’자의 한자구성원리는 단국대, 교학사, 민중서림 등에서 발간한 자전에는 비슷하게 설명되어 있다. 참고로 네이버 한자사전에는 ‘契’자의 한자구성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契자는 ‘맺다’나 ‘언약하다’, ‘새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契자는 大(큰 대)자와 㓞(새길 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㓞자는 칼(刀)로 목판에 무늬(丰)를 새기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새기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목판에 무늬를 새기는 것은 지워지지 않는 굳은 결의를 연상케 했다. 그래서 㓞자는 후에 굳은 약속이라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언약’이나 ‘계약’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소전에서는 사람 간의 약속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여기에 大자가 더해지면서 지금의 契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계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된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동유는 저서 「주영편」에서 계의 어원이 한자가 아니라 우리 순수 고유어라고 했고,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의 풍속으로는 시골의 모든 향·읍·방·리에 계가 만들어져 있다”며 계가 널리 유행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 대구에는 지금도 수 백 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오고 있는 계가 몇 개 있다. 가장 오래된 계로는 600년 내력을 지닌 ‘강선계’다. 이 계는 대구 수성구 시지에서 시작됐다. 고려 말 조선 초 지금의 수성구 시지에 세거한 밀양박씨, 아산장씨, 옥산전씨 세 문중의 계모임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구 효목동에는 400년 역사의 ‘대명14현’ 계모임이 있다. 조선 중기 한 날 한 시에 ‘숭정처사’를 자처하며 팔공산자락 대명동[지금의 동구 도동]으로 집단이주를 한 숭정처사 14인의 후손들이 결성한 계로 이 모임 역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달서구 강창에는 ‘이락서당계’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이락서당을 건립한 9문중 11마을 30인의 후손들이 중심이 된 계모임이다. 또 달성군 도동서원에는 ‘교부계’가 있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 생전에 만들어진 계모임으로 그 역사가 무려 540년이나 된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계모임, ‘도남동 유화당계’
현재까지 알려진 대구지역 계 중 규모가 가장 큰 계는 도남동에 있다. 바로 유화당에서 결성된 ‘유화당계’다. 아쉽게도 지금은 명맥이 끊겼지만 계원 명부에 해당하는 유화당계안에는 무려 885명에 이르는 계원 명단이 등재되어 있다. 대구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초대형 유림계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유화당에서 처음 결성된 유화당계는 2017년 9월 필자에 의해 유화당계안이 발견됨으로써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계안은 다른 말로 ‘계첩’이라고도 하는데 서문·입의·좌목·발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과 발문은 계를 만들게 된 전말을 밝힌 글이고, 입의는 요즘 말로 회칙, 좌목은 명부에 해당한다.
유화당계안은 1913년 음력 5월 하순에 처음 작성된 것으로 유화당계의 내력과 계원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유화당계안은 일반 계안과는 다른 몇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먼저 유화당계안 좌목座目에 오른 계원 수가 무려 885명이나 된다는 점과 계원의 거주지가 대구·칠곡을 넘어 전국에 걸쳐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유계나 서당계안에 등재된 인원수는 많아야 100명 안쪽이다. 그런 만큼 유화당계안에 올라 있는 총 885명이라는 계원수는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의 거주지가 대구·칠곡을 넘어 영남권, 나아가 전국적인 양상을 보인다는 점 또한 매우 특이하다.
참고로 계안에 등재된 전체 885명 중 앞쪽 절반에 해당하는 413명을 대상으로 한 간단한 통계치 한두 개만 살펴보자. 우선 계안에 나타난 성씨는 모두 79개 성씨다. 이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광주이씨 이하 전의이씨에 이르는 상위 12개 성씨가 전체 79개 성씨에 대해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씨 | 광주이씨 | 인동장씨 | 부림홍씨 | 동래정씨 | 인천이씨 | 의흥박씨 | 경주최씨 | 선산김씨 | 성주도씨 | 연안이씨 | 일선김씨 | 전의의씨 |
인원 | 45 | 33 | 25 | 17 | 15 | 13 | 12 | 11 | 11 | 10 | 9 | 9 |
백분율 (%) | 10.9 | 8.0 | 6.1 | 4.1 | 3.6 | 3.1 | 2.9 | 2.7 | 2.7 | 2.4 | 2.2 | 2.2 |
누적 백분율(%) | 10.9 | 18.9 | 24.9 | 29.1 | 32.7 | 35.8 | 38.7 | 41.4 | 44.1 | 46.5 | 48.7 | 50.8 |
다음은 거주지에 대한 것으로 대구와 칠곡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계안에 등재된 인물의 거주지는 모두 24개 지역이 확인되는데 상위 12개 지역만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 중 ‘대구·칠곡’은 둘 다 합쳐도 38.5% 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약 61%는 ‘대구·칠곡’을 제외한 영남권 전 지역에 걸쳐 있다. 기타 전라도 장흥[2명]과 충청도 보은[1명]도 나타난다.
지역 | 칠곡 | 대구 | 의흥 | 인동 | 선산 | 의성 | 창녕 | 성주 | 군위 | 의령 | 하양 | 안동 |
인원 | 85 | 74 | 62 | 48 | 34 | 18 | 13 | 12 | 10 | 10 | 8 | 6 |
백분율(%) | 20.6 | 17.9 | 15.0 | 11.6 | 8.2 | 4.4 | 3.1 | 2.9 | 2.4 | 2.4 | 1.9 | 1.5 |
누적 백분율(%) | 20.6 | 38.5 | 53.5 | 65.1 | 73.4 | 77.7 | 80.9 | 83.8 | 86.2 | 88.6 | 90.6 | 92.0 |
살펴본 것처럼 유화당계안에 등재된 885명 중 전반부 413명을 대상으로 한 일부 통계자료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의미 있는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유화당계안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이고 정밀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더욱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사족을 하나 달면 유화당계의 계장契長[회장]이자 좌목에 맨 처음 올라 있는 농암聾巖 이상석李相奭[1835년생]과 좌목의 맨 마지막에 올라 있는 진성이씨 이규락李奎洛[1898년생]은 서로의 생년을 비교해보면 무려 63년이란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유화당계안도 한 대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다른 오래된 계안처럼 대를 이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유화당에서 나온 계안으로는 유화당계안 외에도 기남계안이 있다.
에필로그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17년 9월 26일 오후. ‘팔거역사문화연구회’ 배석운 회장 외 몇 분 이사들과 함께 유화당을 찾았다. 종부님은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집에서 보관해오던 서책·문서·현판 등을 미리 마당 한 쪽에 꺼내 놓았다. 곰팡이가 슬고 쾌쾌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날 확인한 여러 서책 중 필자는 개인적으로 인천세고(곤坤)·유화당계안이 특별히 눈에 띄었다.
며칠 후 한학을 전공한 전공자 두 명과 함께 다시 유화당을 찾았다. 위 책을 한 번 더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두 달 후인 2017년 11월, 혼자 또 다시 유화당을 찾았다. 역시 책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도남동 유화당에 얽힌 스토리는 그 두 책에 다 담겨 있었다. 그야말로 보물 중에 보물이었다. 물론 유화당 보물 중 절대 빠뜨릴 수 없는 보물이 권기순 종부님이란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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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앉을자리의 차례를 적은 목록. 통상 성명, 생년 간지, 자字, 본관, 거주지 등을 기재한다.
○ 거주지가 영남권을 벗어난 예는 좌목 후반부에 더 많이 나타난다. 참고로 의흥은 군위의 옛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