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나라 북부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이정기 장군을 아시나요?
중국 산동성 청도(青島)에서 제남(濟南)의 중간에 위치한 청주(青州)라는 도시가 있다.
지금은 크게 주목을 받지 않고 있는 도시이지만, 이 청주가 바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 장군이 다스리던 치청(湽青) 왕국의 수도이다.
이정기는 자체적인 법률을 집행했으며 스스로 문무백관을 임명하고 세금을 거두어 한 푼도 조정에 바치지 않았다. 이정기의 모든 행동은 唐 황실의 존망마저 위협하였다.
이정기의 치청湽青 번진藩鎭이 하는 일은 모두 당 조정의 근본을 위협했다. 《산동통사》
'번진'은 당나라 때 변방을 다스리는 독립적인 군사집단이었다. 번진의 세력이 확장되자, 당 조정은 군대를 동원하여 각 번진을 진압하였으나 이정기의 치청 번진은 오히려 세력을 확대하여 당 조정의 황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세력이 되었다.
다른 지역의 절도사 세력(번진)인 '전승사'라는 인물이 이정기에 대항하였지만 참패를 하고 신하가 되어,
이정기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여 황제의 예로 이정기를 받들었다. 《자치통감》
실제로 이정기의 영토는 오늘날의 산동성 외에 하북河北의 모든 지역과 회하汇河의 이북 지역까지도 포함되었다. 이는 당나라 영토의 북쪽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면적이다.
이정기는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668년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재건을 두려워하여 20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을 중국으로 끌고 갔다. 중국으로 끌려온 유민들은 오늘날 북경시 북쪽에 위치한 조양시(朝陽市)인 '영주'에 정착하였다. 영주는 동북지역의 군사요충지로 유능한 군인을 선발하였고, 이정기도 여기에 참가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안록산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명성을 날리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이정기는 초고속 승진으로 26세에 장군에 오르고, 30세에 병마사에 오른다.
그후 절도사의 모함으로 죽음에 처하였으나 이정기를 따르던 부하들이 절도사를 축출하고 이정기를 절도사에 추대한다. 부하들의 추대로 절도사에 오른 이정기는 761년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 등주(登州)에 터전을 마련하여, 762년 반란군의 근거지였던 청주성을 함락하고 인근 9개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말을 잘 타고 활쏘기에 능했던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은 이정기와 그의 군대는 삽시간에 산동성과 하남성 일대를 장악하고 唐나라 황실과 맞서는 힘을 갖춘 인물이 된다.
이정기의 빠른 확장에 두려움을 느낀 唐 황실에서는 당나라 최고의 관직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제수하고 요양군왕(饒陽郡王) 의 칭호를 내려 이정기를 무마한다. 이제 이정기는 황제의 아래인 2인자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정기의 목표는 당나라의 신하(臣下)가 아닌 고구려인으로 唐과 대항하는 것이었다.
이정기가 다스리던 산동반도 일대는 당唐 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어쓰며, 이정기의 나라였다.
이정기가 차지했던 산동반도의 경제력의 기초가 되는 요소는 소금과 철 동銅 등의 풍부한 물자였다.
이정기는 우선 소금의 주요 생산지를 점령하여 王國의 재정수입을 확보하고 철과 銅의 생산시설도 점령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발해와 통일신라, 왜矮 등과 무역을 독점하여 얻어진 재정을 바탕으로 정치ㆍ경제적 안정을 이루며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이에 더하여 독자적인 법령은 명확하고 공평하였으며, 세금 또한 가벼워 당시 대륙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였다. 《구당서》
777년 이정기는 지금의 동평현(東平縣)인 운주로 수도를 옮긴다. 운주는 唐나라 수도 낙양落陽에서 불과 300 km 거리에 있다.
이정기가 운주로 수도를 옮기자 唐 조정은 경악했다.
드디어 이정기의 목표를 읽은 것이다. 이정기는 낙양으로 연결되는 모든 운하를 차단하고 당을 물리칠 준비를 마쳤으나, 781년 7월 갑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구당서》
이정기는 떠났지만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이납이 '제(濟)'라 칭하는 독립국을 선포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역사의 뒷켠에 묻혀 있던 고구려 후손 이정기가 세운 나라 치청(湽青)을 우리 역사에 편입시켜야 하지 않을까?
* 이정기가 고구려 유민이 아닌 백제인이라고도 하는 기록이 있는 것은
그의 고향이 황해도 부근이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 이정기의 역사는
오래전 KBS 역사스페셜 프로에 방영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