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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견의 죽음 산 장수와 죽은 송장
성미 급한 손견은 싸움을 이기고도 양양성을 얻지 못해 전력만 소비하고
유표는 원소에게 구원병을 청하러 가면서 유인계를 쓴다.
이로써 유표는 하룻밤 사이에 손견은 물론 강동 군사를 짓밟는다.
한편 손견을 잃은 손책은 죽은 부왕의 시체와 산 적장을 맞바꾸어 강동으로 철수한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 일곱으로 한 헌제 초평 3년 신미, 11월 7일이었다.
일찍부터 뛰어난 무용을 세상에 떨치며 큰 뜻을 펴기 위해 세력을 한참 키워 가던 때였다.
여공은 손견군이 바위에 깔리고 화살에 맞아 몰살당하자 연주포를 울렸다.
성 안에서는 전군이 출동 태세로 초조히 기다리던 중 연중포 소리가 울리자,
황조,괴월,채모 등 여러 장수들이 제각기 군사를 이끌고 나와 닥치는 대로 손견군을 찌르고 베었다.
손견이 없는데다 불시에 형주의 군사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강동의 군사들은 혼란에 빠져 도망가기에 바빴다.
한편 황개는 이때 한강 기슭에서 군선을 지휘하며 손견의 뒤를 받치고 있었다.
문득 본진에서 함성이 일며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느린 수군을 이끌고 급히 말을 달렸다.
황개가 본진에 이르러 보니 황조의 군사들이 진영을 짓밟고 있었다.
황개는 적의 선두를 이끌고 있는 황조를 보자 똑바로 그에게 말을 몰았다.
황조도 황개를 맞아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황조는 몇 합을 제대로 부딪치지도 못하고 황개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이때 손견의 본진으로 향하던 정보는 현산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내려오는 여공을 만났다.
정보는 여공을 보자 손견의 아들 손책을 보호하기 위해 말을 돌려 달아났다.
그러나 현산에서 적을 섬멸하여 기세가 오른 여공은 정보를 줄기차게 뒤쫓았다.
이에 정보도 도망가다 말고 여공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여공은 정보의 적수가 아니었다.
겨우 2, 3합도 채 넘기지 못하고 정보의 창에 찔려 여공이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여공은 큰 공을 세우고도 어이없는 죽음을 맞고 만 것이다.
양군의 격렬한 전투는 날이 밝아오면서 끝이 났다.
강동의 군사들에게는 그때까지도 손견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았다.
형주군과 강동군은 시작도, 계책도 없는 가운데 벌어진 싸움이었지만 가장 길고도 격렬한 하룻밤 사이의 전투였다.
어두운 밤중에 서로 엎치락뒤치락 뒤섞여 펼쳐진 난전이어서 양군의 사상자는 놀라울 정도로 많았고 모두가 피곤했다.
유표의 군사는 양양성으로 돌아가고, 강동의 군대는 한수 방면으로 철수했다.
손책은 한수로 철수한 뒤에야 아버지 손견의 죽음을 알았다.
어젯밤부터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근심이 되었으나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때였으므로 찾을 수도 없었다.
손책이 목을 놓아 우니 모든 장수들과 군사들도 손견의 시체만이라도 찾으려고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의 시체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손견의 머리는 장대 끝에 매달리고 시체는 양양성으로 떠메여 갔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손책이 다시 한 번 목놓아 운 뒤에 부르짖었다.
"아버님의 시신이 적의 손에 있는데 어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이오."
손책은 여러 장수들을 군막으로 불러모은 뒤 유표와 다시금 싸울 대책을 의논했다.
적장 황조를 사로잡은 황개가 나서며 말했다.
"어젯밤 적장 황조를 사로잡아 우리 진중에 묶어 두었으니, 사신을 보내 주고의 시신과 바꾸자고 하면 어떨까요?"
그러자 군리 환해가 아뢰었다.
"그 일이라면 제가 한 번 나서 보겠습니다.
저와 유표와는 이전에 친분이 있으므로 저를 사신으로 보내 주십시오."
손책이 환해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환해는 단신으로 양양성에 가서 유표와 대면하고 온 까닭을 밝혔다.
"주공의 유해와 황조를 바꾸는 것이 어떻겠소?"
유표는 환해의 말을 듣고 싸움을 끝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죽은 송장과 산 장수를 바꾸는 데 있어 쾌히 승낙했다.
"문대의 유해는 이미 관에 안치해 놓았으니 황조를 풀어 주면 돌려 드리겠소이다.
그런 다음 양군은 군사를 물려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오."
환해가 유표의 말에 고마움을 표하고 일어섰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괴량이 소리치며 나섰다.
"주공, 아니 됩니다. 절대로 아니 됩니다.
이때야말로 강동의 군사들을 한 사람도 살려서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손견의 유해와 황조를 바꿔 화평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때에 불과할 것입니다.
강동은 언젠가는 오늘의 치욕을 갚고자 반드시 군사를 일으킬 것이옵니다.
먼저 환해의 목을 벤 다음에 한수로 추격령을 내려야 합니다."
괴량의 말에 유표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자 괴량이 다시 유표를 일깨웠다.
"지금 손견은 죽고 그 아들은 아직 어립니다.
이때를 틈타 군사를 몰아 추격한다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강동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냥 돌려보내신다면 이는 고양이를 호랑이로 키우는 격으로 뒷날 형주의 후환을 만드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유표는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적이라 하나 화친을 청하러 온 환해를 죽이는 일도 그렇고,
아직 황조가 적의 손에 있으니 어찌 그를 버릴 수가 있느냐?"
"황조 한 사람을 버려 강동을 얻을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괴량이 간곡히 간했다.
그러나 유표는 한사코 괴량의 말을 물리쳤다.
"황조는 나와 서로 마음을 통하는 사이이며 충실히 나의 심복이었네.
그를 저버리는 것은 의가 아니다."
유표는 이렇게 말한 후 손견의 유해와 황조를 교환키로 하고 환해를 돌려보냈다.
약속대로 손견의 유해를 돌려 받은 손책은 군사를 거두어 뱃머리에 조기를 달고 강동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친을 곡아의 언덕에 묻고 난 후 장엄한 장례를 올렸다.
장례가 끝난 후 손책은 강도에 머물면서 어진 선비와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널리 불러모았다.
그들을 후히 대접하며 몸을 굽혀 받드니 사방에서 선비와 영웅호걸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강동의 손견이 죽었다!"
손견이 유표와 싸우다 죽었다는 소문은 장안에 있는 동탁의 귀에도 들어갔다.
"한 가지 근심거리가 없어진 셈이구나."
동탁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좌우의 시자들을 돌아보며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 아들이 지금 몇 살이나 되었느냐?"
"열일곱인 줄 아옵니다."
"아직 애송이로군."
동탁은 적이 안심하며 웃었다.
동탁은 열일곱의 손책을 아직 어린아이로만 여겼다.
이 무렵, 동탁의 교만과 횡포는 나날이 심해져 가기만 했다.
그는 상국에서 태정태사로 앉더니 이번에는 자기를 주 나라 무왕을 받들던 여상에 비하며
스스로 상부(아버지와 같은 높임을 받음)라고 칭한 후 문무백관들에게 그렇게 부르도록 했다.
의장도 천자와 똑같게 갖춰 입었으며, 그가 어전을 드나들 때에는 천자와 같은 행렬을 갖추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우 동민에게 좌장군의 직책과 호후라는 작위를 내리고,
조카 동황은 시중으로 삼아 금군(친위대)을 거느리게 했다.
아우 동민에게 어림군의 병권을 장악하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씨 성을 쓰기만 하면 나이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열후에 봉하니 천하는 동탁의 것인 듯했다.
동탁은 장안에서 2백 50리쯤 떨어진 곳에 미오라는 물 맑고 경치가 빼어난 곳에 성을 쌓게 했다.
미오의 길지를 골라 왕성을 능가하는 성을 지으니 그 성이 곧 미오성이었다.
성의 규모나 모양도 장안성과 똑같게 짓도록 하였는데 부역으로 동원된 사람이 25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실은 장안성의 금궁보다 더 화려하고 현란했다.
또한 창고 안에는 20년은 풍족하게 먹을 곡식을 쌓아 두었다.
또 이곳에 열다섯에서 스무 살까지의 미동과 미녀 8백을 뽑아 후궁에 머물게 했다.
지난날 낙양의 능침에서 파낸 재물과 보석들도 모두 미오성에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있었다.
동탁은 자기의 일가권속까지 거느리고 미오성에 거처하면서 황금과 비단, 맛있는 산해진미로 주지육림에 빠져들었다.
동탁은 미오성에 머물면서 한 달 혹은 보름에 한 번 꼴로 장안성으로 출사했다.
동탁이 출사하는 날에는 문무백관들이 장안 동편에 있는 횡문밖까지 나와 그를 전송하고 맞이하기에 바빴다.
동탁은 그럴 때마다 길가에 장막을 치고 잔치를 벌여 백관들과 술을 마시곤 하였다.
잔치를 벌여 상부로서의 위엄과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동탁이 횡문 밖으로 나가니 문무백관들은 한결같이 동탁을 전송하면서 전과 같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때마침 북지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포로로 잡힌 군졸 수백 명을 끌고 가던 행렬이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동탁은 즉시 그들을 술자리 앞으로 끌어오게 한후 그들을 나란히 세우더니 손발을 자르거나 눈알을 뽑거나, 혀를 뽑게 했다.
또 어떤 자는 큰 솥에 삶아 죽이기까지 했다.
포로들의 비명 소리와 구슬픈 통곡이 하늘에 사무칠 듯이 산천을 울리니 문무백관들은 몸을 떨며들었던 수저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동탁만은 태연히 술잔을 기울이며 즐겨 먹고 마셨다.
문무백관들에게 겁을 주기 위한 속셈도 있었던 터라 동탁은 두려움에 떠는 백관들을 보며 껄껄 웃을 뿐이었다.
백관들은 그러한 진풍경을 외면하고 귀를 막았다.
그렇다고 일어설 수도, 갈 수도 없었다.
동탁은 이같이 날이 갈수록 잔인무도해졌다.
어느 날, 천문관의 관원 한 사람이 동탁의 부름을 받고 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태사께서 부르셨습니까?"
이날은 궁궐 안의 성대에서 주연이 베풀어지는 날이었다.
주연 준비가 한창일 때 그 천문관이 온 것이었다.
"무슨 변고는 없느냐?"
동탁이 그 천문관에게 물었다.
"있사옵니다.
어젯밤에 한 무리의 검은 기운이 솟아올라 밤하늘을 꿰 었나이다.
아마도 백관 중에 흉기를 품은 자가 있지 않나 생각되옵니다."
"음-. 나를 거스를 마음을 품은 놈이 있다는 말인가?"
이윽고 주연이 베풀어질 시간이 되자 성대에서 만조백관들이 자리를 채웠다.
주연이 베풀어지고 술이 몇 순배 돌 때 여포가 바쁜 걸음으로 들어와 동탁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수군거렸다.
백관들을 술을 마시다 말고 동탁과 여포의 거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동탁은 여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음침하게 웃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음-. 저런 괘씸함... , 끌어내어 없애 버려라."
동탁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여포는 몸을 일으키더니 눈을 부라리며 만좌한 백관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이놈아 나 좀 보자!"
술자리에 끼여 앉은 사공(건설대신) 장온에게 다가온 여포가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당 아래로 끌어내렸다.
"앗, 이게 무슨 짓인가."
장온이 졸지에 당하는 일이라 얼굴이 파래지며 외쳤다.
"닥쳐라 이놈!"
여포의 그 괴력으로 비둘기라도 움켜잡듯 장온의 몸을 아예 덜렁 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후, 시종이 붉은 소반에 이상한 물건을 받쳐들고 와서 탁자의 가운데에 놓았다.
아직도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온의 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장온이 끌려가는 모습에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백관들이었다.
장온의 목을 보자 백관들도 모두 새파래진 낯빛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백관들을 살피고 있던 동탁이 소리 높여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공들은 놀라지 마시오.
장온이 남양의 원술과 결탁하여 나를 모해하려 하였기 때문에 천벌을 받은 것이오.
원술이 놈이 보낸 밀서가 장온의 집으로 간다는 것이 봉선(여포의 자)의 집으로 잘못 전해졌던 것이오.
그래서 장온의 삼족도 조금 전에 다 잡아다 목을 베었소.
공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니 놀라거나 두려워할 것 없소."
백관들은 더 이상 캐물을 수도 없었다.
술잔을 기울이는 척하다 말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사도 왕윤도 이날의 주연에 참석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수레 안에서 동탁의 전횡과 악행에 통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왕윤은 자가 자사로 태원군 기 땅 태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충의를 숭상하고 공명에 눈떠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이름을 드높인 것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그의 성품이었다.
그가 벼슬길에 올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 일화들은 널리 세상에 알려진 바 있었다.
낙양에서 지낼 때도 조조에게 동탁의 암살을 부탁하기도 했고, 지방의 군벌과 은밀히 연락을 취해 동탁 타도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아직 그 뜻은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나 나이에 비해 경골한(의지나 신념이 강해
남에게 굽히지 않는 사람)으로서의 그 성품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머지 않아 천자도, 그리고 나도 동탁 일파에게 죽임을 당하리라.'
집에 돌아와서도 왕윤은 무법부도한 동탁에 대한 울분과 고뇌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탁을 제거할 마땅한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왕윤은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지팡이를 짚고 뒤뜰을 거닐었다.
때마침 달이 휘영청 밝았다.
왕윤이 차가운 이마에 손을 얹고 밝은 달을 우러르며 깊은 시름에 잠겨 있을 때, 어디선가 탄식하는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가 들려 왔다.
'이 밤중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왕윤은 의심쩍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못 건너편에 있는 모란정의 창문에서 달빛에 반사된 가느다란 불빛이 비쳤다.
발소리를 죽이고 살그머니 다가가 엿보니 정자 안에는 가기 초선이 홀로 앉아 있었다.
가기란 고관의 저택에 양육되면서 손님이 있을 때 연회에 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며 시중을 드는 여종이었다.
그러나 왕윤과 초선은 주인과 종 이상이며, 양부와 양녀 이상의 혈육과 같은 진한 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친부모를 알지 못했다.
서역 태생인 그녀는 어릴 때 노예로서 낙양에 끌려온 것을 왕윤이 데리고 와,
구슬을 닦듯이 여러 가지 기예를 가르쳐 가기로 삼았다.
콧날이 오뚝하고, 파란빛이 도는 눈을 지닌 그 소녀를 왕윤은 자기 친딸처럼 귀여워하면서 길렀다.
그런 초선도 이제 방년 열여섯의 요조숙녀로 자라나 자색과 가무가 빼어난 미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 초선의 아름다움은 이 뒤뜰에 피어난 부용꽃도, 도리(복숭아, 자두의 꽃)의 색향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총명한 초선은 왕윤이 자기를 친딸처럼 아껴 주며 귀여워해 주자 그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왕윤은 초선의 거동을 잠시 살핀 뒤 입을 열었다.
"요망스럽게 계집이 어찌하여 이 밤중에 탄식하며 홀로 울고 있느냐,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초선이 깜짝 놀라 자세를 가다듬고 무릎을 꿇었다.
"아닙니다. 천첩이 감히 무슨 사정이 있겠습니까?"
왕윤은 이렇게 말하는 초선의 아름다운 이마에 깊은 수심이 어린 듯하여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아직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깊은 탄식을 하고 있느냐?"
"허락하여 주신다면, 아뢰옵겠나이다.
진작부터 아뢰고저 하였으나 감히 아뢰지 못하고 있었사옵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나, 숨김없이 말해 보려무나."
"대감님이 너무 가여워서... 울음이 나왔습니다.
요즘은 한결 여위시고 음식도 드시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 비길 데가 없사옵니다."
"음-."
초선은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대감님께서 천첩을 거두시어 키워 주시고 가무를 배우게 하시고
친자식처럼 사랑해 주시니 저는 태산 같은 은혜를 받은 몸이옵니다.
이처럼 너그럽게 대해 주시니 소녀 비록 뼈가 가루 되고 몸이 부서진다 하더라고 그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런데 근자에 이르러 대감님을 뵈오니 미간에수심이 떠날 날이 없는 듯하옵니다.
이는 필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었으나 감히 여쭙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밤에는 잠자리에도 드시지 못하시고 뒤뜰을 거니시니 이 선이 어찌 잠자리에 들 수 있겠습니까?
대감님을 멀리 뵈옵다가 천첩도 그만 장탄식을 하게 되었사옵니다.
혹시 천첩이라도 쓰실 곳이 있으시다면 만번을 죽어도 사양치 않고 이 몸을 던지겠..."
초선은 흐르는 눈물에 말을 맺지 못하고 옷소매를 얼굴로 감쌌다.
"음-."
왕윤은 초선에게 뜻밖의 말을 듣고 내심 놀라면서 감탄하였다.
왕윤은 문득 눈부시게 아름다운 초선의 얼굴에 서린 결의에 찬 표정을 보았다.
왕윤은 불현 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한 나라가 너의 손에 달려 있을 죽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오너라."
왕윤은 초선을 데리고 화각으로 들어가더니 초선을 자리에 앉히고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엄숙하게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였다.
초선이 깜짝 놀라 황망히 일어서며 방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대감님께서 어찌하여 이 천한 것을 이토록 놀라게 하십니까!"
"초선아, 너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천하를 구해 줄 천인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부디 네 몸을 빌어 한나라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다오!"
왕윤의 두 눈에서는 어느 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왕윤의 눈물을 보자 초선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초선아, 한 천하를 위해 너의 목숨을 내게 줄 수 있겠느냐?"
왕윤의 말에 초선은 조금도 동요의 빛 없이 또렷이 대답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비록 이 몸이 천하고 보잘것 없으나 쓰일데가 있다면 기꺼이 따르겠사옵니다.
죽어도 사양치 않겠사오니 영을 내려 주옵소서."
그러자 왕윤이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지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며, 임금과 신하 사이가 달걀을 쌓아 놓은 듯 위험하기만 하다.
이 모두가 역적 동탁때문이 아니더냐.
그놈이 천자의 자리를 뺏으러 가는데도 조정의 백관들은 그저 한숨만 쉬고 있을 뿐이다.
동탁에게는 여포라는 양자가 있는데 그놈의 무용은 천하에 아무도 당할 자가 없구나."
초선은 눈을 초롱초롱히 뜨고 왕윤이 가슴속에서 토해내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동탁을 죽이려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뜻을 이룬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놈에 의해 참수만 당할 뿐이었다.
동탁은 항상 열겹 스무겹으로 호위를 붙이고 있으며, 또 천하 제일의 장사 여포가 있어 아무도 근접하지 못한다.
다만 너 초선만이 그 일을 해낼 수가 있다.
동탁과 여포는 술을 탐하고 색을 좋아한다.
오늘 문득 네 말을 듣고보니 한 가지 계책이 떠오르는 구나.
두 사람을 맞붙게 하는 연환계가 그것이다.
먼저 너를 여포에게 시집보내기를 허락한 후, 다시 동탁에게 너를 바치는 것이다.
그들이 너를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므로 너는 두 놈들 사이에서 서로 반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싸우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즉이게 한다면 이는 천하를 구하며, 악을 없애는 길이 된다.
초선아, 네 몸을 그들 부자에게 던지는 것은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나, 천하를 바로잡는 길이 그 일밖에 없구나.
초선아, 너의 뜻은 어떠냐?"
초선은 왕윤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구슬 같은 눈물이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이윽고 초선은 고개를 들어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이미 대감께 아뢰지 않습니까.
만 번을 죽어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대감님을 위해 죽는 일이 무엇이 두렵겠사옵니까?
그들에게 이 몸을 보내 주시옵소서."
"오오, 고맙다 초선아.
그러나 이 일이 누설되는 날에는 멸족을 당하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염려 마옵소서.
천첩도 지혜를 다하겠사오며 만약 대의를 이루지 못해 난도질당하여 죽은들 후회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왕윤은 초선의 말에 다시 일어나 절을 올렸다.
절을 한 왕윤은 초선의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리니 초선의 아름다운 눈에서도 쉴새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왕윤은 가보로 전해져 오던 황금관을 꺼내 세공을 시켜 칠보로 장식한 후 사람을 시켜 남몰래 여포에게 보냈다.
여포는 값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그 진귀한 관을 받고 몹시 기뻐했다.
"왕 사도의 집에는 옛부터 명검보주가 많이 전하여 온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러나 낙양에서 천도한 후에도 이런 훌륭한 보물이 있는 줄은 몰랐도다."
여포는 용맹이 출중하였지만 단순한 사람이었다.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즉시 적토마를 타고 왕윤의 집으로 달려갔다.
왕윤은 몸소 문 밖에까지 나와 여포를 반갑게 맞이하며 후당으로 이끈후 상좌에 앉히고 술과 안주를 차려 대접했다.
답례를 하러 갔다가 더욱 큰 환대까지 받게 되자 여포는 옥배를든채 왕윤에게 깊이 감사하며 말했다.
"저로 말하면 동 태사를 섬기는 승상부의 일개 장수에 불과합니다.
사도께서는 명망이 높은 조정의 대신이신데 어찌 소인을 이토록 과분하도록 환대하십니까?"
"허허, 지나친 겸양의 말씀입니다.
지금 천하에 영웅이라 일컬어질 사람은 오직 장군 한 분뿐이오.
이 왕윤은 장군의 관작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장군의 영용무쌍한 재질을 사모하는 것이오."
왕윤이 여포를 잔뜩 치켜올리며 이렇게 둘러댔다.
그러자 여포는 비로소 천하의 영웅은 자기 한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한 듯 크게 웃으며 술잔을 받아 마셨다.
몇 순배의 술이 돌고 여포가 웬만큼 취하자 왕윤은 술시중을 들고 있는 시첩에게 분부를 내렸다.
"우리 집에 귀빈이 오셨으니 아기씨 보고 나와서 인사를 여쭈라고 일러라."
"예."
여포의 시중을 들던 시첩들이 물러갔다.
잠시 후 방 밖에서 조용한 인기척이 나더니 두 시첩이 휘장을 들어올렸다.
여포도 무심코 술잔을 놓고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첩에게 양쪽으로 부축을 받으며 곱게 단장한 초선이 들어섰다.
원래 뛰어난 자태인데다 정성을 다해 치장까지 했으니 초선의 아름다움이 눈부실 지경이었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조용히 걷는 모습은 한 떨기 모란꽃처럼 청초하면서도 요염했다.
"어서 오십시오."
초선은 손님에게 엷은 미소와 함께 매혹적인 눈길을 보낸 후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여포는 그런 초선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달보다 환하고 꽃보다도 예뻤다.
왕윤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초선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너에게는 다시없는 영광이니라.
여 장군께 술을 한 잔 올리도록 하여라."
초선은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 은어처럼 고운 섬섬옥수를 내밀어 비취 술잔을 권하였다.
여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술잔을 받고 어떻게 마셨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초선의 움직임에 따라 훈훈한 향내음이 코를 스쳤고, 가슴은 벌렁벌렁 마구 뛰었다.
술잔을 따른 초선은 곧 물러나며 휘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
"초선아, 잠깐 기다려라."
왕윤은 초선과 여포를 번갈아 바라보면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시는 여 장군은 내가 평소에 공경하는 분이며 우리 집안의 은인이기도 하다.
허락을 하신다면 옆자리에 앉아 모시도록 하여라."
왕윤의 말에 초선은 살며시 여포 옆에 앉았다.
그러나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놀란 눈이던 여포가 비로소 왕윤에게 물었다.
"이 낭자는 누구시오?"
"내 딸 초선이외다."
왕윤의 말에 여포가 더욱 놀란 듯 감탄 섞어 말했다.
"대관의 슬하에 이렇게 아름다운 따님이 있었습니까?"
"규방에서만 자라 세상 물정을 모를뿐더러 손님 앞에 나온 것도 오늘이 처음이오."
"그런 따님을 오늘 이 여포 앞에 불러 내시다니 경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장군의 방문을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를 알아 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소이다."
"이제 환대는 충분히 받았습니다.
대감, 취했소이다."
여포가 취한 중에도 문득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왕윤에게 이렇게 말하며 자리를 뜨려 했다.
"몇 잔 술에 무슨 말씀이오.
초선아, 어서 술을 권해 올리지 않고 뭘하고 있느냐."
초선은 여포의 잔에다 술을 가득 부었다.
여포는 차츰 몽롱하게 취기가 돌았다.
그러자 왕윤이 여포를 바라보며 물었다.
"장군! 이 아이를 장군의 첩으로 보낼까 하온데 장군의 의향이 어떠시오?
이제 늙은 몸이라 누구에게 의탁하여야 하나 마땅치가 않구려.
장군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마음놓고 눈감을 수 있을 터인즉..."
여포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여포는 그만 자신의 체면도 잊고 황급히 왕윤에게 물었다.
"옛? 따님을... 대감, 그 말씀이 진정이십니까?"
"어느 앞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겠소."
여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왕 사도한테 넙죽 절을 올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오, 초선을 저에게 주신다면 소장은 견마의 충성으로 왕 사도를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좋은 날을 택하여 장군의 부중으로 보내오리다."
왕윤은 짐짓 흡족한 표정으로 여포에게 말했다.
"대감, 나는 너무 취했습니다.
행보도 어렵군요."
그때쯤 취기가 오른 여포는 뜨거운 눈으로 초선을 보았다.
초선도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여포에게 은은한 눈길을 보냈다.
여포는 꿈인지 생시인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그러나 왕윤은 단호히 입을 열어 여포를 깨우쳤다.
"오늘밤은 우리 집에서 묵어 가게 했으면 좋겠소만 동 태사께서 아신다면 혹 의심하실가 근심이 됩니다.
내 좋은 날을 택해 초선을 보내 드릴테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오."
여포는 감사한 마음을 전한 뒤,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 아쉬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경국지색 초선 여포와 동탁에게 불을 당기다
왕윤은 동탁을 청하여 온갖 음식과 초선으로 하여금 동탁을 혼란케 했다.
동탁은 홀린 듯 넋을 잃고 왕윤은 초선을 동탁에게 바친다.
여포는 초선을 못잊어 승상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초선은 여포와 동탁,
두 사나이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당겨 원한을 사게 한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왕윤은 조정에 출사하자 여포가 보이지 않는 기회를 틈타 동탁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저의 누옥(자기 집을 겸손하게 부름)이 비록 누추하오나 태사를 모시고 약주 한 잔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왕림해 주신다면 큰 기쁨이겠습니다."
"사도께서 불러 주신다니 고맙소.
경과 같은 조정의 원로가 청하는데 내 어찌 마다할 수 있겠소."
동탁은 몹시 흐뭇한 듯 다음 날로 날을 정하며 선뜻 응낙했다.
왕윤은 집으로 돌아가자 즉시 산해진미를 장만하게 하고 대청에 연회석을 만들었다.
연회석의 바닥에는 능라(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을 깔았으며,
주위에 휘장을 둘러치고 눈부신 포진(잔치를 할 때 앉을 자리를 깖)을 하니 마치 황제라도 모시는 듯한 잔치자리 였다.
다음 날 정오경에 동탁은 천자의 행차보다 더 호화롭게 많은 장수들을 거느리고 왕윤의 집으로 왔다.
왕윤은 조복을 갖추어 입고 밖으로 나가 정중히 동탁을 맞으며 재배하였다.
동탁의 수레는 창을 든 수백 명의 호위군이 에워싸고 있었다.
동탁이 수레에서 내리자 시신, 백관 등이 전후좌우를 응시하며 집안으로 들었다.
왕윤은 동탁이 들어오자 다시 마당에서 두 번 절한 후, 당하에 머물러 있었다.
동탁은 왕윤이 이토록 자기를 높이 모시자 더욱 흐뭇했다.
조정의 원로에다 명문의 집안이며 성품이 곧기로 유명한 왕윤이었다.
이토록 자기를 경대하니 이제 그도 자기에게 스스럼없이 굽히어 자신과 가까워짐을 뜻하는 것이라 여겼다.
동탁은 껄껄 웃으며 좌우에 분부하였다.
"사도를 받들어 당으로 오르시도록 하라."
동탁은 왕윤에게 자기의 옆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왕윤은 동탁의 옆자리에 앉으며 송구한 듯 말문을 열었다.
"태사의 성덕이 넓고 높으니 이윤이나 주공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옵니다."
왕윤의 찬사에 동탁은 희색이 만연하였다.
왕윤은 준비해 둔 산해진미에다 술을 권하며 시첩들에게 풍악을 울리게 하였다.
거문고와 풍류 소리는 이웃에까지 널리 퍼지고 맛좋은 음식은 끊일 사이 없이 이어졌다.
"태사께서는 이제 후당으로 드시지요."
날이 저물고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왕윤은 동탁을 호젓한 후당으로 청해 들였다.
"너희들은 밖에 나가 있거라."
후당에 들자 동탁은 갑사들을 물리쳤다.
좌석에 두 사람만 남게되자, 왕윤이 동탁에게 술잔을 올리며 말했다.
"제가 어려서 천문을 좀 배웠습니다만, 당금의 천문을 보건대 한조의 운명도 이미 다한 듯하옵니다.
이제 태사의 공덕은 천하에 떨치시고 있습니다.
태사께서 순이 요를 잇고, 우가 순을 잇듯 한을 이어받으신다면 그야말로 천심과 민의에 합당할 것입니다."
왕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자 동탁은 왕윤을 곁눈질해 보며 한껏 겸양을 떨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건 내게 과분한 말씀이오.
한 번도 염두에 둔 적이 없소."
동탁은 왕윤의 말이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으나 짐짓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왕윤은 동탁이 시치미를 뗄수록 다시 그를 부추겼다.
"옛부터 '도가 있는 자가 도 없는 자를 치고, 덕없는 이가 덕 있는 이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찌 과분한 일이라 이르겠습니까?"
"하하하... 만약 이 동탁에게 천명이 돌아온다면 사도께서는 원훈이 되실 것이오."
동탁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동탁의 말에 왕윤은 머리를 조아려 절까지 하니 동탁은 이제 왕윤이 천자를 거슬러 자기에게 돌아선 것으로 믿었다.
동탁은 흐뭇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술잔을 맘껏 들이켰다.
노재상 왕윤은 접대에 소홀함이 없어 방안에 촛불을 밝혀 놓고 다시 주안상을 차리게 한 후 입을 열었다.
"교방(국악원의 단원)의 풍악만으로는 흥이 덜합니다.
마침 저의 집에 제가 기른 가기가 있어 그 기예가 볼 만하니 한번 보여 드릴까 합니다."
"그거 참 좋은 일이오."
왕윤이 주렴을 올리게 하니 주악 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가운데 시첩에게 에워싸인 초선이 나타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경국지색의 미인, 초선은 소매를 나풀거리며 교태어린 몸짓으로 춤을 추었다.
그녀를 위해 사죽관현의 절묘한 소리가 울려 펴졌다.
초선이 춤을 추는 매혹적인 모습을 노래한 시가 있다.
춤추는 이 누구요, 소양궁의 궁녀인가
날렵한 몸 놀란 기러기 같구나
동정호 봄물결 위로 나는가 했더니
저 양주 미인처럼 사뿐사뿐 걷누나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한 떨기의 꽃이련가
화당에 향 어리어 향기 그윽하네.
동탁은 초선의 아름다운 모습과 춤솜씨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음-. 훌륭한 춤이로다."
동탁이 감탄해 마지않더니 한 곡이 끝나자 또 한 곡을 요청하였다.
초선이 다시 일어서자 교방의 악사들이 더욱 신바람을 내어 연주하였고,
초선은 춤을 추며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홍아의 바른 장단 제비처럼 빠르구나
한 조각 흐르는 구름 화당에 머물렀네.
그린 듯 검은 눈썹, 나그네의 한숨 자아내고
달같이 환한 얼굴 옛 친구의 간장 태우네.
천금 같이 웃는 자태 유전으로도 살 수 없어
버들띠로 백보 단장을 꾸밀 수 있으랴.
춤추기를 다하고 주렴 너머로 추파 보내니
알 수가 없구나 초양왕이 누구인가?
눈은 초선의 모습을 응시한 채 노래 가사에 귀를 기울이던 동탁은 초선의 가무가 끝나자 감흥에 못 이겨 왕윤을 보고 말했다.
"사도, 저 아이가 누구요?
교방의 여자는 아닌 듯하오만..."
"마음에 드셨습니까.
가기 초선입니다."
"가기라고? 이리 좀 가까이 오라고 하시오."
동탁의 말에 왕윤이 얼른 초선을 불렀다.
"초선아, 태사께서 부르시니 어서 인사를 올려라."
초선은 몹시 부끄러운 듯 섬섬옥수로 고요히 발을 걷고 당 안으로 들어서며 이마를 숙였다.
가까이서 초선을 보자 동탁은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를 품에 안았으나 아직까지 보지 못했던 뛰어난 절색이었다.
동탁이 초선을 취한 눈으로 보다가 불쑥 왕윤에게 말했다.
"사도, 이 아이의 노래를 한 곡조 더 듣고 싶소이다."
왕윤이 동탁의 청을 마다할 리 없었다.
일이 뜻대로 되어 감을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초선에게 일렀다.
"태사께서 청하시니 한 곡조 더 불러라."
초선은 장단을 맞추는 단판(나무로 만든 박)을 손에 들더니 옥구슬
굴리는 듯한 당당한 목소리로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앵두 같은 빨간 입술 방싯 열리어
하얀 구슬 드러내고 봄 노래 부르네
향기로운 혀끝으로 칼날을 토해 내어
나라 어지럽히는 간신을 베려 하네.
"허, 기막힌지고."
동탁은 홀린 듯 넋을 잃고 있다 노래가 끝나자 초선의 노래 솜씨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초선이 부른 노래가 자신을 가리켜 간사한 간신에 비유한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신선의 선녀는 바로 이 초선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오.
미오성에도 가인은 많으나 초선과 같은 미색은 없소.
만일 초선이 한 번 웃는다면 장안의 분대(화장한 아름다운 여자)가 다 무색해지리라."
왕윤이 기다리던 말이라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태사께서 그토록 초선을 높이 보아주시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그토록 초선이 마음에 드셨습니까?"
"나는 참다운 미인을 오늘 밤에야 본 것 같소."
"제가 이 아이를 태사께 바치고 싶사옵니다.
받아 주실지 몰라 망설였을 뿐입니다."
동탁의 입은 함박만큼 벌어졌다.
자신이 원하던 바인지라 귀가 번쩍 뜨이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허, 사도께서 그토록 큰 은혜를 베푸시다니,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겠소?"
왕윤이 다시 한 번 간곡히 말했다.
"이 아이도 태사님을 모시게 된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왕윤은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거듭 감사의 말을 늘어놓았다.
왕윤은 즉시 수레를 준비시켜 초선을 먼저 승상부로 태워 보냈다.
초선이 자기의 부중으로 가자 동탁도 회가 동해 마음이 급해졌다.
동탁이 몇순배의 술이 돌자 취기를 핑계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사도, 이젠 돌아가야 되겠소이다.
오늘의 환대와 은혜 잊지 않을 것이오."
동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했다.
왕윤은 말을 타고 동탁의 수레를 따르며 승상부까지 배웅했다.
왕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편 어둠 속에 붉은 등불들이 길을 환히 밝힌 가운데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이쪽으로 달려오는
한 무리의 기마대가 있었다.
기마대의 선두에는 적토마를 탄 여포가 있었다.
여포는 왕윤의 앞에 다가오더니 말을 세운 후 대뜸 왕윤의 옷깃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사도는 지난날 초선을 내게 주겠다고 약조해 놓고도 오늘 태사에게 보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그래 누굴 희롱하는 거요?"
"그 일이라면 여기서는 이야기할 것이 못 되니 우선 집으로 갑시다."
왕윤은 노발대발하는 여포를 달래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 후당으로 들어가자 왕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 장군은 어째서 이 늙은이를 의심하시오?"
왕윤은 짐짓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을 지었다.
"누가 내게 와서 그러는데,
사도가 초선을 수레에 태워 승상부로 들여보냈다고 하던데 그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화가 풀리지 않은 여포는 여전히 목소리를 높인 채 물었다.
"그건 여 장군께서 몰라 하시는 말씀이요.
이 늙은이가 망령이라도 나지 않은 이상 어찌 장군에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소?"
"그럼, 어찌된 연유이오?"
왕윤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사실 그 일은 이렇게 되었소이다.
어제 조당에 나갔다 태사를 만났소.
그런데 태사께서 이 늙은이를 보시더니 '내가 상의할 일이 있어 내일 사도댁으로 찾아가겠소' 하십디다.
그래서 변변치 않은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렸던 것이외다.
태사께서 오시고 술이 몇 순배 돈 후 '내가 듣자하니 사도에게 초선이라는 딸이 있어서
내 아들 봉선에게 주겠다고 하셨다는데 나도 이야기를 듣고 또 직접 한 번 볼 겸해서 왔소' 하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래 이 늙은이가 초선을 불러내어 태사님께 인사를 시켰습니다.
그러자 태서께서 '오늘이 마침 길일이니 내가 당장 여식을 데리고 가서 봉선과 짝을 지워주겠소' 하십디다.
여 장군도 생각해 보시오,
태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어느 분부라고 이 늙은이가 감히 거역한단 말이오?"
왕윤의 말을 듣고 보니 여포는 할 말이 없었다.
그토록 씨근덕거리던 숨소리가 금세 수그러들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이 포가 잘못 알고 경솔히 처신하였습니다.
내일 다시 와서 사죄하리다."
여포가 간곡히 사죄하자 왕윤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뭐, 사죄까지 하실 것 있겠습니까?
내 딸아이의 혼수도 있으니 초선이 장군께 가면 댁으로 보내 드리도록 하리다."
여포는 초선의 혼수감을 직접 자기의 집으로 보낸다고 하자 더 이상 의심을 할 수도 없었다.
왕윤에게 백배사죄를 한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포가 집에 순순히 돌아오기는 했으나 그날 밤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쯤 초선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초선의 생각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여포는 침상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어 휘장을 젖히고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승상부의 하늘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여포는 번뇌와 욕망으로 마음을 끓이며 뜬눈으로 밤을 보내며 날이 밝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아침이 되자 여포는 양부인 동탁이 자기를 부르리라 여기며 승상 부중을 떠나지 않고 하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떠올라도 동탁에게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여포는 기다리다 못해 승상부로 등청했다.
이렇다 할 용무도 없었으나 그는 곧바로 동탁의 침전으로 갔다.
"태사께서는 기침하셨는가?"
동탁의 시첩몇이 중당에 모여 있는 걸 보자 여포가 대뜸 물었다.
"아직 휘장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시첩 중의 하나가 대답했다.
여포는 까닭 모를 불안에 사로잡혔으나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벌써 정오가 가까운데 아직도 주무시는가?"
그러자 그 중의 한 시첩이 여포에게 다가와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태사께서는 어젯밤 새로 들어온 어느 여인과 침소에 드신 뒤 아직 기침을 아니 하셨습니다."
"새로 들어온 여인이라면?"
여포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 시첩에게 물었다.
"예, 왕사댁에서 온 초선이라는 여인이라 하옵니다."
여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알이 뒤집히는 듯했다.
여포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채 중당을 빠져 나왔다.
초선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동탁이 아무리 미색에 눈이 뒤집혔다 하더라도 며느리감을 자기의 침소로 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밖으로 나온 여포는 가끔 연못 건너편 후당 쪽을 지켜보곤 하였다.
후당의 침전은 한낮이 되어서야 창문이 열렸다.
"태사께서 방금 기침하셨습니다."
한 시첩이 달려와 알렸다.
여포는 곧장 동탁의 침소가 있는 후당으로 들어가 방 뒤꼍 난간 쪽에 몸을 가린 채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이때 초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문득 창 밖 연못에 속발관을 쓴 몸집이 큰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초선이 살그머니 곁눈질해 보니 그는 바로 여포였다.
초선은 짐짓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슬픔에 쌓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비단 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는 시늉도 해 보였다.
이런 모습을 훔쳐보던 여포는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나타났다.
여포는 초선의 슬픔에 싸여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자 가슴이 메이는 듯했다.
초선의 눈물이 자기를 생각하며 흘린 것이라 생각하니 동탁에 대한 분노가 사무쳤다.
동탁은 그때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중당에 앉아 있었다.
여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동탁이 물었다.
"밖에는 아무 일 없느냐?"
"없습니다."
여포의 대답이 오늘 따라 짤막했다.
여포는 동탁의 옆에 시립했다.
동탁이 늦은 조반을 들고 있는 동안 여포는 곁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때
주렴 안을 서성이던 한 여인이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초선이었다.
여포를 바라보는 초선의 시선에는 그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과 은근한 정이 담겨 있었다.
그런 초선을 바라보는 여포는 마음이 산란하여 제 정신이 아니었다.
"별일 없으면 봉선은 그만 물러가거라!"
"동탁은 심상치 않은 여포와 초선의 눈길에 의심이 일며 노기가 치솟았으나 억누르고 말했다.
동탁은 그 후로 초선의 미색에 빠져 달포 남짓 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초선을 가슴에 품고 탐했다.
그러나 아무리 정력이 뛰어난 동탁이지만 나이가 있는지라 병치레를 할 때도 있었다.
초선은 허리띠도 풀지 않고 정성을 다해 동탁을 돌보았다.
초선의 극진한 간호에 동탁은 더욱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다.
어느 날 여포는 동탁이 몸이 불편하여 자리에 누워 있다는 말을 듣고 문안차 승상부에 등청하였다.
여포가 문안 갔을 때 동탁은 마침 잠들어 있었다.
동탁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문득 침상 저쪽에서 초선의 모습이 보였다.
초선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애원하듯 여포를 바라보았다.
그런 초선을 보자 여포는 뜨거운 것이 치솟으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초선은 여포가 자기를 보고 있자 자기 가슴을 손으로 가르키더니
이어 동탁을 가리키며 참을 수 없다는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당신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지만 동탁이 가로막고 있어서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 모양을 바라보는 여포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때 잠들어 있던 동탁이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는지 눈을 떴다.
여포가 서 있는 모습을 보자 정신을 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포가 한 곳으로 정신이 쏠려 바라보고 있자 동탁은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침상 저쪽으로 바라보니 그곳 휘장밖에 초선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동탁은 불끈 화가 치솟아 호통을 쳤다.
"네 이놈! 감히 내 계집을 희롱하다니!"
여포는 동탁의 호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포는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고 있자 동탁의 노기는 더욱 끓어올랐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저놈을 당장 끌어 내고 앞으로 이곳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
동탁은 큰 소리로 좌우를 불러 여포를 밖으로 끌어 내게 하고, 다시는 중당에 들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다.
여포 또한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으나, 그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분통이 터지는 판에 모욕까지 당한 여포는 끓어오르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다 길에서 모사 이유를 만났다.
여포는 이유에게 전후 사정을 얘기하며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제 부중에도 들지 못하고 쫓겨난 몸이 됐소이다."
여포가 씨근덕거리며 말하자 이유는 덜컥 걱정이 앞섰다.
여포와 동탁이 등을 지면 큰일이 아닌가.
아유는 여포를 달랜 후 급히 와방으로 달려갔다.
동탁 또한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가 이유가 들자 여포가 자기 애희를 희롱한 이야기를 욕설을 섞어 가며 들려주었다.
이유는 동탁의 말에 동조하는 듯 쓴웃음까지 지어 가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말씀을 듣자 하니 태사께서 괘씸하게 여길만 하옵니다.
그러나
태사께서 천하에 군림하시려면 소인의 사소한 잘못은 웃으며 용서하는 관도(관대한 법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 여포를 멀리하게 되어 그가 딴마음을 품고 태사님을 훌쩍 떠나버리면 대사를 그르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유가 동탁에게 타이르듯 말하자, 동탁도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동탁에게 있어서는 천하를 취할 야망을 펴기 위해 여포가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근심하지 마십시오.
여포는 단순한 사람입니다.
불러들이시어 금은을 내리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지시면 될 것입니다."
동탁은 이유의 충언을 받아들여 다음 날 여포를 승상부로 불러들였다.
"어제는 내가 병중이라 심신이 불편하여 네게 심한 말을 하였다.
마음에 새겨 두지 말라."
그리고는 여포에게 황금 열 근과 비단 스무 필을 내렸다.
동탁이 그렇게 예물까지 내리니 여포는 고마움을 표하고 승상부를 물러났다.
그러나
여포의 가슴에는 항상 초선의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동탁은 그럭저럭 병세가 회복되자 다시 입조하여 정사를 살폈다.
여포도 그 후 전보다는 휠씬 말수가 적어졌지만 임무에 충실하여 승상부로 등청하였다.
어느 날,
동탁은 헌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포가 전 밖에서 창을 들고 서 있는데 초선의 아름다운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가슴에 타오르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한 여포는 창을든 채 승상부로 말을 달렸다.
승상부에 다다른 여포는 말을 문 앞에 메어두고, 방천화극을 든 채 초선이 있는 후당으로 들어갔다.
"장군께서 어인 일로..."
초선이 놀란 체하며 여포에게 물었다.
"그대를 보러 온 것이요."
여포가 뜨거운 눈길로 초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초선이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이곳 시녀들의 눈이 번잡하므로 장군께서는 후원의 봉의정에 가서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곧 장군을 뒤따르겠습니다."
초선의 말에 여포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방천화극을 옆구리에 낀 채 봉의정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초선이 꽃나무 사이를 지나 버들가지를 헤치며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 모습은 구름 사이로 월궁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 더 한층 아름다웠다.
초선은 여포한테로 왈칵 달려와,
"장군..."
하며 슬픔에 겨운 목소리로 불렀다.
두 사람은 정자의 그늘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나란히 섰다.
그리고 한 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여포는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여포가 초선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그러자 초선은 여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초선, 울고 있지 않느냐?
나하고 만나는 것이 기쁘지 않느냐?
어찌하여 그토록 눈물을 흘리는가."
"아닙니다. 장군, 천첩은 너무 기뻐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초선은 흐르는 눈물을 비단으로 훔치며 여포에게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비록 왕 사도님의 친자식은 아니었으나 그 어른은 친자식처럼 저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다 장군을 뵙자 이 몸은 평생토록 장군을 모시도록 허락을 받아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태사께서 저의 몸을 더럽혀 놓을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동 태사께서 저를 장군께 데려다 준다기에 거역하지 못하고 따라왔습니다...,
첩이 그때 한을 품고도 목숨을 끊지 못한 것은 장군께 억울한 연유도 고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하는 것이 억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장군님을 뵈었으니 부끄러움을 견디며 살아 온 보람을 느낍니다.
이미 더럽혀진 이 몸, 다시는 장군님을 섬길 수 없으니 차라리 장군님 앞에서 목숨을 끊어 저의 마음을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초선은 울음을 삼키며 말을 마치자 정자 아래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지려 하였다.
여포가 황망히 초선의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나도 네 마음을 다 안다.
그러나 죽어서는 아니 된다."
초선은 여포의 손을 뿌리치려 몸부림쳤다.
"이 손을 놓으십시오.
죽게 내버려두소서.
살아 있어도 이승에서는 장군과 인연이 없는 이 몸,
마음은 날이 갈수록 괴롭고 몸은 불인한 태사의 희생이 되어 밤마다 시달릴 뿐입니다.
차라리 저승에 먼저 가
장군과 맺어질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초선, 잠깐만 기다려라.
너무 슬퍼하지 말고 기다려다오.
내가 이승에서 너를 아내로 삼지 못한다면 어찌 영웅이라 할 수 있겠느냐?"
여포가 이렇게 외치자 초선이 그제서야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지금의 그 말씀은 장군님의 진심이옵니까?
그렇다면 첩을 하루빨리 구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첩에게는 하루가 10년같이 괴롭습니다."
"아무렴, 구해 주고 말고! 잠시만 기다려라.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오늘은 그 늙은 것을 수행하여 입궐하였다가 잠시 이곳에 들렀을 뿐이다.
퇴궐한다면 금세 발각이 될지도 모르니 오늘은 그만 헤어지자."
"벌써 가시렵니까?"
초선은 여포의 소매를 잡고 홀짝홀짝 울면서 놓지 않았다.
"장군은 이 천하에 둘도 없는 영웅이라고 들어 왔습니다.
그런 장군께서 어찌하여 늙은 태사를 겁내어 밑으로 몸을 굽히고 계십니까?"
초선은 원망이 서린 시선으로 여포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나에게도 생각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여포가 초선의 손길을 뿌리치며 화극을 들고 떠나려 하자 초선이 여포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장군께서 그토록 태사님을 두려워하시는데 어찌하여 첩이 밝은 햇빛 볼 날을 기다리겠습니까?"
초선의 말에 여포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여포가 지금까지 가졌던 자부심이 초선이 앞에서 무참히 무너지는 듯 하자 그는 오기가 치솟았다.
"내가 그 늙은 도적을 두려워하다니... 나는 아직 그 누구도 두려워한 적이 없다."
여포가 이렇게 내뱉고는 화극을 내려놓은 뒤 초선을 껴안았다.
초선도 여포의 넓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저는 태사의 발소리만 들어도 몸이 떨리고 소름이 끼칩니다. 아아,
언제까지나 이렇게 장군의 품에 안겨 있었으면..."
초선이 방울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여포의 가슴을 파고들자 둘은 껴안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여포는 초선의 뺨에 자기의 뺨을 대고 비볐다.
향긋한 여인의 살내음과 함께 초선의 홍루(미인의 눈물)가 여포의 뺨까지 적셨다.
이때, 동탁은 황제에게 정사를 상주하고 있다가, 문득 심상치 않은 예감이 일어 당하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의구심이 솟아 황망히 황제께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올린 뒤 급히 수레를 몰아 승상부로 돌아왔다.
문 앞에는 여포의 적토마가 매어져 있었다.
동탁은 문지기에게 여포의 행방을 물었다.
"온후(여포의 벼슬 이름)께서는 안으로 드시었습니다."
동탁은 좌우를 물리치고 곧장 후당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노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동탁은 후당을 둘러보았으나 여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초선의 이름도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동탁은 시첩 하나를 붙잡고 물어 보았다.
"초선은 어디 갔느냐?"
시첩은 동탁의 열에 들뜬 얼굴을 보자 두려움에 떨며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계십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탁은 부리나케 후원으로 달려갔다.
동탁이 후원으로 들어서자 여포와 초선이 봉의전 아래 곡란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얼굴을 비벼대며 옥신각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탁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열화와 같이 노한 동탁은 한 모퉁이에 세워져 있는 화극을 보자
그것을 집어들며 우레와 같은 소리를 버럭질렀다.
"이노옴 여포야!"
초선을 껴안은 채 정신이 없던 여포는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동탁이 살기를 띤 얼굴로 화극을 잡은 채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여포는 얼른 품안에 품었던 초선을 풀어놓고 황급히 정자 아래로 달아났다.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동탁이 뒤쫓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여포가 어찌나 빠르게 도망치는지 비만한 동탁으로서는 따를 수가 없었다.
동탁이 여포를 따라잡을 수가 없음을 알고 손에 쥐고 있던 방천화극을 치켜들어 힘껏 여포를 향해 던졌다.
"너, 이놈 여포야!"
동탁이 던진 방천화극은 곧장 여포의 등줄기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동탁의 무예가 뛰어나다 하나 당대의 영웅 여포에겐 무용지물이었다.
여포는 날아오는 화극을 슬쩍 피하며 주먹으로 내려쳐 떨어뜨렸다.
뒤따라간 동탁이 그 화극을 주워들고 다시 뒤쫓으려했으나 여포는 이미 후당 문 밖으로 달아난 뒤였다.
그래도 동탁은 단념하지 않고 헐레벌떡 후당 쪽으로 달렸다.
그때 누군가가 급히 후당 문 쪽으로 달려오는 사람이 있어 정신없이 뒤쫓던 동탁은 그 사람과 세차게 부딪치고 말았다.
동탁의 비대한 몸뚱이가 술통이 넘어지듯 데구루루 굴렀다.
동탁이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그는 모사 이유였다.
동탁은 노기 충천해 있었으나 이유에게까지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이유는 황급히 동탁을 부축해 일으켜 서원으로 모셨다.
동탁이 씨근덕거리며 물었다.
"너는 무슨 일로 왔느냐?"
"제가 막 승상부로 들다 도망쳐오는 여포와 만났습니다.
여포가 말하기를 '태사께서 나를 죽이려 하신다.' 하기에 급히 달려오다 그만 태사와 마주쳐서 넘어지시게 하였습니다.
실로 만 번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유가 허리를 꺾으며 사죄하자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동탁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죽일 놈의 바로 여포 그놈이다.
빨리 여포를 잡아서 그놈의 목을 베어 오너라.
그놈이 내 애첩 초선을 희롱하려 들었다."
이유는 동탁의 말을 듣자 연유를 헤아릴 듯하였다.
동탁의 노기 서림 시선을 피해 잡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태사님 잠시 고정하십시오.
여포의 목을 베는 것은 태사께서 스스로의 목에 칼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동탁에게는 이제 이유의 간언도 들리지 않았다.
"글쎄, 이런 죽일 놈을 보아라.
이 일을 어찌 참으란 말이냐.
그놈이 초선이를 희롱하는 꼴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이다.
봉의정 아래 꽃밭에서 희롱을 하고 있더구나.
어서 그놈을 잡아오지 않고 뭘 꾸물거리느냐?"
동탁의 서슬이 아직도 퍼렇자 이유는 더욱 차분히 몸을 가누고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태사님의 말씀은 옳지 않으십니다.
태사님께서는 이럴 때일수록 저절영회라는 연회의 고사를 돌이켜 보시고 전후를 헤아리셔야 합니다."
이유는 지난날의 고사 한 가지를 동탁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이유와 모든 대사를 함께 의논했던 동탁인지라 그가 간곡히 진언하는 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노기를 가라앉히고 그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옛날 초나라의 장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별안간 바람이 일더니 촛불이 모두 껴져 버렸다.
장왕은 '빨리 불을 밝혀라!' 하고 좌우에게 독촉하였다.
그러나
좌중에서는 '어두운 곳에서 마시는 술도 또한 풍치가 좋지 아니한가' 하며 흥겨워하였다.
그런데 여러 신하를 접대하기 위하여 동석케 했던 장왕의 애희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를 짝사랑하던 장웅이란 장수가 어둠을 틈타 애희의 입술을 범했다.
애희는 소리를 지르려다 꾹 참고 그 신하의 갓끈을 잡아 끊어가지고 장왕의 곁으로 다가갔다.
애희가 장왕에게 말하길,
"조금 전 어둠 속에서 소첩을 껴안고 입을 맞춘 못된 놈이 있습니다.
빨리 불을 밝혀 그 신하를 잡으십시오.
갓끈이 끊어져 있는 자가 바로 그 놈입니다."
하며 자기의 정절을 자랑하듯 과장하여 호소하였다.
그러자 장왕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불을 밝히려는 시신을 황급히 만류하였다.
그런 다음 좌중을 향해 말했다.
"오늘 밤은 여러 장수의 무공을 치하하는 뜻에서 베푼 연회요. 제장이 유쾌하면 나도 유쾌하오.
이 밤이 새도록 즐겨야 하오.
다만 한 가지 오늘은 특별히 갓끈을 끊고 즐기는 연회이니 제장들은 모두 갓끈을 끊으시오."
장왕의 명에 따라 모든 사람은 갓끈을 끊었다.
그 이후에 시신들이 불을 밝혔으므로 애희의 기지도 허사가 되어, 누가 그녀의 입술을 범했는지 종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 후, 장왕은 진나라와 싸움이 일어나자, 진나라의 대군에게 포위당해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때 한 장수가 포위망을 뚫고 달려와 장왕을 업고 달아나 군왕의 목숨을 건졌다.
장왕은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그 장수를 보고 물었다.
"고맙구나.
이제 그대 덕에 목숨을 건졌도다.
그런데 그대는 대체 누구이냐?"
그러자 그 장수는,
"제가 바로 몇 해 전에 연회장에서 갓끈을 끊긴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고 말한 후 숨을 거두었다.
이유가 동탁에게 이 고사를 상기시킨 후 입을 열었다.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그 장군은 장왕의 은혜에 보답한 것입니다.
태사께서도 부디 장왕의 너그러움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동탁은 이유의 말에 얼른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듯 씨근덕대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이유가 다시 말을 이었다.
"태사, 초선이로 말하면 한낱 시첩에 불과합니다.
여포는 태사의 심복 맹장입니다.
만약 태사께서 이 기회에 초선을 여포에게 주신다면,
그는 은혜에 감복하여 태사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것입니다.
바라건대
태사께서 이 점도 헤아려 주십시오."
동탁은 이유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초선을 쉽게 단념할 수도 없는 동탁이었다.
동탁은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나도 헤아려 보겠다."
동탁의 뜻밖에도 그렇게 말하자 이유는 기뻐하며 물러갔다.
이유는 여포가 무엇 때문에 동탁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초선에게 깊이 빠져 있는 동탁과 질투로 번민하고 있는 여포를 보며 근심에 차 있던 이유였다.
그런던 차에 정영회의 고사를 들어 동탁에게 간했던 것이었다.
동탁도 자신의 말에 깨닫는 바가 있는 듯하여 이유는 한시름 놓게 되었다.
'이로써 태사와 온화의 문제는 잘 해결되겠구나.'
그러나 이유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유는 초선이 가슴에 품고 있는 계책을 알지 못했다.
한편 동탁은 이유가 물러난 후에 후당으로 들어갔다.
초선이 휘장을 움켜쥐고 울고 있었다.
"너는 어찌하여 감히 여포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느냐?"
동탁이 초선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동탁의 말에 초선은 눈물부터 흘렸다.
"태사님, 실로 원통하고 분한 일이옵니다."
"내가 이 두눈으로 보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딴 말을 하려느냐?"
동탁이 초선을 더욱 큰 소리로 꾸짖자 더욱 애처롭게 울며 말했다.
"제가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 장군께서 후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여 장군으로 말하면 태사님의 양자님이 아니시옵니까.
그러므로 첩은 여 장군을 경계하지 않고 대했는데 오늘은 방천극을 들고
와 '태사의 아들인 나를 피하느냐' 하시면서 창으로 위협하였습니다.
저는 하는 수 없이 봉의정까지 달아났습니다. 첩은 여 장군이 그곳에까지
쫓아오자 그가 못된 욕심을 품고 있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연못에라도 몸을 던져 자결하려 하자 그 자가 불쑥 첩을 껴안고 놓아 주지를 않았습니다.
생사의 고비에 서 있을 때 태사님께서 나타나시어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올 수 있게 된 것이옵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야 뒤로하고, 추한 혐의라고 벗을까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초선이 애처로이 흐느끼며 말하자 동탁의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동탁은 계집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초선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음-,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구나.
여포가 초선을 그토록 탐하니 초선아,
너를 여포의 아내로 보내고 싶은데 네 뜻은 어떠냐?"
그러자 초선이 소스라쳐 놀라더니 동탁의 가슴을 파고들며 목을 놓아 울었다.
"태사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첩의 몸은 이미 귀인을 섬겼거늘, 어찌 갑자기 저 사나운 가노에게 내리려 하십니까?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런 종놈에게 몸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초선은 벽에 걸려 있는 동탁의 보검을 뽑아들고 목에 갖다대었다.
초선의 돌연스런 행동에 동탁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칼을 뺏어 내던지고 급히 초선을 껴안았다.
동탁은 그런 초선을 보며 내심 기쁨에 겨워 더욱 사랑스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초선은 동탁을 밀치고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하면서 푸념을 하였다.
"이제야 첩도 알겠나이다.
보나마나 이유가 여포의 청을 받아 그런 진언을 하였음이 분명하옵니다.
이유와 여포는 태사님이 계시지 않을 때면 언제나 소곤소곤 밀담을 나누곤 했었으니까요.
대감의 체면도 돌보지 않고 첩을 태사께로부터 얻어 내고자 이유가 계책을 꾸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첩은 이유란 놈의 고기를 생으로 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동탁은 울부짖는 초선을 무릅 위로 안아 올려 가슴에 안았다.
"알았다. 내 어찌 너를 여포에게 줄 수 있겠느냐?"
"태사님의 뜻이 그러하다 하나, 여기 이대로 있다가는 반드시 여포에게 해를 당할 것입니다."
"염려 마라. 내일 미오성으로 돌아갈 때 함께 가도록 하자.
미오성에는 20년은 먹을 수 있는 군량미와 수백만의 군사가 있다.
나의 뜻대로 되면 너를 왕비로 만들 것이고, 만약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너에게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하겠다."
초선은 동탁의 그 같은 말을 듣고 눈물을 거두며 동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다음 날이었다.
동탁과 초선간에 오고 간 이야기를 알리 없는 이유가 동탁을 찾아왔다.
"어젯밤 여포의 집으로 찾아가 태사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여포는
태사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죄를 크게 뉘우치고 있었사옵니다."
"음-."
"오늘이 마침 일진이 좋은 날이니 초선을 여포에게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왕 내리시기로 한 이상 하루라도 빠른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동탁은 달라져 있었다.
"음-. 나와 여포는 부자지간이다.
아비가 데리고 살던 계집을 어찌 자식에게 물려주겠느냐.
우선 초선을 희롱한 죄는 불문에 붙인다고 전하고
그를 달래 두어라."
이유는 어이가 없었다.
동탁이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마음이 달라진 것은 초선의 농간 때문이라는 걸 짐작했다.
"태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사님께서는 초선이에게 너무 깊이 빠지시면 아니 되옵니다.
태사님이 도모하실 천하를 생각하시어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동탁은 어젯밤 초선에게 들은 말도 있는 터라 이유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동탁이 돌연 노기 등등하여 소리쳤다.
"이유 이놈, 너는 너의 처를 여포에게 줄 수 있느냐.
초선의 일에 대해서는 다시는 거론치 말라.
다시 입밖에 내면 목을 벨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동탁의 우직스런 고집을 알고 있는 터라 이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물러났다.
승상부를 빠져 나온 이유가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아아, 한낱 계집에 의해 우리들 모두 죽게 되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