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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계성, 영주도독 조문홰의 임시숙소에서는, 조문홰가 심복 서연을 앞에 두고 조심스레 묻고 있었다.
“수일 전 파사사에서 고가장 노장주의 손주 조영이 이루하라는, 그 송막도독 이진영의 계집아이, 그리고 경승 고양원을 만난 이유가 무엇일 것 같은가?”
“소인은 워낙 우둔한지라 도무지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경교 신자인 듯한 이루하가 조영을 끌어들인 게 아닐까요?”
“무슨 목적으로?”
“혹시 그 계집애가 조영에게······.”
서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너도 고양원이 중국으로 귀화한 고려 왕족임을 알고 있겠지?”
“네, 나리.”
“그럼, 그 계집과 그녀의 종이 다시 고가장을 찾아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서연이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네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게 아닐까요? 근래 그들이 그토록 빈번히 왕래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함부로 속단하지 말게.”
두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한 군사가 숨 가쁘게 들어와 복명했다.
“나리, 성문이 닫히고 밤이 되었는데도, 이루하와 그녀의 계집종이 고가장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방금 전 전서구傳書鳩 가 가져왔습니다.”
“오, 그래?”
촛불에 비친 조문홰의 낯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복명한 군사가 나간 후 조문홰는 서연에게 물었다.
“자네는 내가 일러준 대로, 고가장의 구조를 잘 파악해 두었겠지?”
“예, 나리.”
그는 품에서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두루마리를 펴서 그 안에 그려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설명했다.
“고가장은 전면과 우측으로 들어가는 길에 사랑채를 비롯해 남자 식객들의 숙소가 있고 그 뒤편, 담으로 둘러싸인 내부에 여인들의 안채와 숙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인네들의 구역은 사면이 담장으로 싸여 있어서 외간 남자들이, 내부의 종들이라도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자네는, 그 중 어디쯤에 이루하라는 계집애가 투숙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여인들의 지경 내에서 아름답고 큰 집의 가장 아늑하고 은밀한 곳에 그녀를 모셨을 것입니다.”
“자네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네. 오늘 밤 자네가 두 가지 일을 지휘해 주어야 하겠네.”
“분부만 내리시면, 수화사지水火死地라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사전에 약속한대로, 지금 즉시 거란 출신의 대도大盜 귀수신투鬼手神偸와 연락을 취해 그의 부하들 가운데서, 무술과 지략, 경신술輕身術(몸을 가볍게 움직이는 기술)이 뛰어난 고수들 몇 명만 동원하도록 하게. 귀수신투에게는 직접 고가장으로 잠입해서, 이루하와 그녀의 시녀가 잠자는 곳을 찾아내게 하고, 밖에서는······.”
그 다음 말은 조문홰가 서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문홰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는 서연에게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었다.
“잊지 말게. 우리의 가장 큰 목적은, 후고구려 패거리들이 고승과 고조영에게 보냈을지도 모를 밀서를 입수하는 것이네.”
서연은 다짐을 받은 후 조문홰의 숙소에서 물러나와 곧장 검은 밤빛 속으로 사라졌다.
그 날 밤 조영은, 그토록 빼어나고 놀랍고 신비롭고 기이한 인물, 일개 여종이면서도 황녀보다 더한 기품과 특이한 매력을 풍기는 여인 여미아가, 그리고 그녀의 여주인 이루하가 자신의 집에 묵고 있다는 사실에, 방바닥에 누웠지만 가슴이 설레어 잠이 오지 않았다.
조영의 눈앞에, 낮에 보았던 여미아의 그 아름답고 청아한 모습이 어른거렸다. 이국적인 기품을 가득 풍기는 이루하의 자태도 목전에서 오락가락했다.
‘이루하가 낯설게 느껴지는 남의 집의 매력적인 매화라면 여미아는 우리 집 뜰의 온갖 기화요초들 가운데, 고고하고 화려하기 짝이 없어, 모든 꽃들을 웅시하던 만첩홍매화 아니 황홀한 진분홍 모란화 같아.’
‘이루하는 겨울철 하늘 높이 뜬 차갑고 맑은 보름달이라면, 그녀의 시녀 여미아는 초여름 서산으로 넘어가기 전 옅은 구름 속에 잠겨, 황홀한 붉은 빛을 누리에 뿌리는, 아! 한 걸음에 달려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지켜보고 싶은, 고혹적 기운을 활화산처럼 발산하며 휘도는 듯한 태양.’
‘하지만 저 빠알간 사과, 미끈한 홍옥, 풀무 불에 단 쇠처럼 정열적으로 타오르는 매혹적인 해가 아쉽게도 서산 밑으로 마구 넘어가고 있다. 아! 안타깝다, 내일도 저 기가 막힌 광경을 엿볼 수 있을까?’
조영은 두 여인들의 기품을 번갈아 떠올리며 각가지 상념 속을 헤매다가, 그녀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가장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환희를 느끼며,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한동안 애썼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의 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다. 해시亥時(밤 10시)나 되었을까? 불을 켜고 <삼일신고>와 <행심록>, 그리고 대진사 대덕 고양원에게서 얻어온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 <예수메시아경> 등을 읽어보았다.
글자 속에서 여미아와 이루하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마음을 집중해 책을 읽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쳐다보며 여미아를 생각하다가, 자정이 지나 자리에 누웠다. 좀처럼 눈을 붙이기 어려웠다.
결국엔 자리에서 또 일어나 이번에는 불을 켜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경승 고양원에게 배운 기도법으로 하나님을 불러보았다.
‘대덕님 말씀으로는 우리 신교神敎의 삼신일체 상제 하나님과 경교의 하나님이 결국, 만유를 창조하신 동일한 하나님이라 하셨으니, 그 하나님의 현풍玄風(성령)이 내게 임하시도록 나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과 교통해, 메시아 예수님의 공덕(인격)을 내 속에 쌓아야 하지 않겠는가?’
‘여미아에게서 풍기는 그 신비롭고 성스런 기운도,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 했지?’
이런 의념들이 머리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바람이 좀 세게 부는 듯, 여러 가지 잡음이 들려왔다.
축시丑時(새벽 2시경)쯤 되었을까. 갑자기 밖에서 소란한 소음이 일더니 한바탕 고막을 찢을 듯한 호각소리가 밤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저 자를 잡아라!”
놀랍게도 그건 여인의 목소리였는데, 한어漢語도 고려말도 아닌, 거란어였다. 얼핏 듣기에 이루하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이어서 계속해서 호각소리가 일어나고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깜짝 놀란 조영은 신속히 옷을 주워 입고 장검을 잡은 다음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밖으로 나가보니, 여기저기서 하인들이 뛰어나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조영이 소리를 질렀다.
“각자 제 위치로 가라!”
이리저리 닫던, 병장기를 든 고가장의 하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조영은 안채의 이루하와 여미아 등이 염려되어 담장을 넘어 안채로 날아 들어갔다. 호각소리와 호통의 진원지는 그곳이었다.
그 때 안채의 마당에서 복면을 쓴 야행인 네 명이 검을 손에 들고 몸집이 작은 두 여인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들도 손에 검을 들고 있었다.
“흥! 너희들이 감히 우리를 넘보다니, 오늘 임자 만난 줄 알라!”
이루하가 소리를 빽 질렀다. 조영이 바라보니, 그 네 야행인은 조영의 출현과 주변사태의 변화에 놀랐는지, 그녀들과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도피하려 하는 것 같았다. 마침 그 순간 그들 중 한 명이 몸을 빼내 도망하려다가 조영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순순히 칼을 내려놓고 오라를 받으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조영이 무게있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야행인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느닷없이 휘파람을 불자, 그 소리가 신호인 듯, 네 야행인은 일제히 검을 휘두르며 재차 공격해왔다. 네 사람이 두 패로 나뉘어 각각 조영과 두 여인을 맡아 돌진했다.
조영은 침착하게 검을 받으며 야행인 둘을 여유있게 상대했는데, 이루하와 다른 여인이 걱정되어 얼핏얼핏 바라봤지만, 그녀들도 수세에 몰리지 않고 잘 상대하고 있었다.
그 사이 고가장 안채의 담장 주위를 고가장의 가신家臣 장정들이 겹겹이 둘러쌌다. 그 중 무예가 뛰어난 몇 사람이 손에 횃불을 들고 안뜰 대문을 열며 조영 등이 드잡이질을 하는 곳으로 들어왔다.
사방이 횃불에 더욱 환해지자 조영은 상대의 검을 막으며 이루하와 함께 싸우고 있는 여인이 누구인가를 흘낏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다름 아닌 여미아였다.
여미아가 그토록 탁월한 무예의 소유자인지는, 조영이 꿈에도 몰랐었다. 그녀의 여리고 성스런 기품은 무예와 전혀 어울리지도 않았고, 그녀의 모든 언동으로 판단할 때, 그녀는 무예의 무武 자도 모르는 여인 같았기 때문이다.
고가장 안채의 하녀들은 손에 무기들을 들고 나왔지만,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신음소리가 나서 조영이 깜짝 놀라 그곳을 바라보니 여미아에게 덤벼들던 야행인이 검을 손에서 놓치며 보기 좋게 나둥그러지는 것이었다. 여미아가 무슨 수법을 썼는지 모르나, 그 야행인은 기절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루하와 대결을 벌이는 거한은 기세등등하게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루하는 주로 방어에 치중하고 매서운 공격을 삼가고 있는 것 같았다.
조영을 표적으로 삼아 검을 휘두르는 거한들은 조영의 봉쇄에 번번이 검로劍路가 막혀 쩔쩔매고 있었다. 조영은 삼극팔괘검법의 “폐閉” 기법으로 상대가 검을 날리기만 하면 미리 그의 마음을 예측한 듯 선제 기습을 가해 그들이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하게 했다.
여미아가 때려눕힌 거한의 손발을, 한 하인이 오라로 결박했다. 그가 거한의 두건을 벗기려 하자 조영이 소리쳤다.
“잠깐! 두건을 벗기지 말고 그를 깨우라!”
하인은 멈칫 하다가 그의 몸을 주물러 깨어나게 했다. 깨어난 거한은 손발이 묶여 있는지라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여미아는 이루하와 조영이 상대와 싸우고 있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조영은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거한들의 공격을 속속 미리 차단해 버린다. 얼마 있지 아니해 조영과 상대하던 거한들도 검을 놓치고 썩은 집단 쓰러지듯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중 하나가 다시 일어서려 하자 조영은 번개같이 다가가 그의 급소를 차서 넘어뜨렸다. 오라를 든 하인들이 즉시 와서 그들의 손과 발을 묶어버렸다.
조영이 이루하를 보니, 그녀는 시종 여유만만하게 야행인과 싸우고 있었다. 그 거한은 세 동료가 모두 쓰러져 밧줄에 묶이는 것을 보고 투지를 잃은 것 같았다.
그 때다.
돌연 어디선가 큰 소리의 외침이 밤하늘을 찢었다.
“불이야! 불이야!”
조영은 깜짝 놀라 소리 나는 곳으로 뛰어나갔다. 고가장의 바깥 담장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간 조영은 담장 위로 올라가 사방을 바라다보았다. 고가장의 동서남 삼면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거센 밤바람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고가장을 삼킬 듯 몰려오고 있었다.
“질서 정연하게 물을 퍼 나르고, 집 사방으로 물을 뿌려 방어막을 만들라!”
조영의 외침에 하인, 식객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불길이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그 사이에 마을 사람들도 모두 일어나 집집마다 물을 들고 고가장 쪽으로 달려왔다.
고가장은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홀로 위치해 있었다. 그 불은 누가 인위적으로 가연성 재료를 쌓아 지른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초목은 아직도 겨울철의 티를 벗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무서운 화마에 쉽게 점령당하고 있었다.
그 아우성 속에서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더니, 이삼백 명은 됨직한 기마병들이 고가장 쪽으로 몰려왔다. 그들도 불을 끄는 대열에 동참해 손에 든 소화기消火器를 휘둘러댔다.
다행히도 마을 사람들과 기마병들, 또 고가장의 하인들 및 식객들, 도합 수백 명의 노력에 불길은 잡히고 이내 모두 꺼졌다. 고가장 주변의 숲이 상당부분 불에 탔으나, 불은 고가장의 담장 바로 밖에서 간신히 정지되었다.
조영은 불을 끄러온 마을 사람들과 고가장의 모든 손님들에게 사의를 표하고,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온 인근 군영의 기마 군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장군! 감사합니다. 군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 밤 큰 일 날 뻔했습니다.”
조영의 말에 앞장 서 있던 기마대의 장수가 한 발 나서며 말했다.
“뭘요, 당연한 일입니다.”
장수는 곧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조영 형! 나를 몰라보겠소?”
“아니, 누구시더라?”
“저, 서연입니다.”
“아, 서 장군! 조 대인을 모시는 분이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정말 이만하기 다행입니다. 어떻게 불이 났습니까?”
“글쎄요. 전에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아마도 우릴 시기하는 어떤 자들이 일부러 불을 지른 것 같습니다.”
“천하에 나쁜 놈들! 붙잡기만 하면 엄벌로 다스리겠소.”
서연은 분노하며 덧붙였다.
“밤중에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고 대인은 안녕하시지요?”
그의 말끝에 누군가가 대답하며 나섰다.
“이 늙은이를 염려해 주어서 고맙소.”
서연이 바라보니 백발이 성성하고 하얀 턱수염이 길게 내려온 한 동안의 노인이 옷자락을 밤바람에 표표히 날리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고가장의 노주인 고승이었다. 고승은 그에게 사의를 표하며 물었다.
“조 대인의 헌헌한 풍채를 뵈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기서 또 그 호랑이 같은 부장副將을 뵈니 너무나 반갑습니다. 조 대인도 평안하시지요?”
“네, 염려주신 덕분입니다. 그럼 저희들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여기까지 와서 수고하셨는데, 한밤이지만 집에 들어가 술이라도 한 잔씩 하고 가시는 게 어떨지요?”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지금은 근무 중이라서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럼 이만.”
서연은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말에 오른 다음 일행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바람같이 사라졌다.
조영은 그와 작별한 후 거한과 싸우던 이루하가 염려되어 물었다.
“할아버지! 이루하 공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벌써, 네 놈을 붙잡아 심문하고 있는 중이다.”
“어떤 놈들입니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지는 않았지요?”
“오냐! 네 뜻이 바로 내 뜻이다.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느냐?”
“그냥 훈계하고 돌려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네, 할아버지.”
“너의 마음이 무척 깊어졌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들의 무예가 몹시 뛰어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좀도둑이 아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우리 집을 침입한 거다.”
고승은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후 덧붙였다.
“우리를 원수로 여기는 자들에게 우리도 똑같이 대응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용서하면, 원수가 없어질 것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말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고승과 조영이 안으로 들어오니 대부분의 손님들은 모두 방으로 돌아가고 이루하와 여미아가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고, 이거 죄송해서 어떻게 합니까? 처음 오셨는데, 편히 쉬지도 못하고 이런 난리를 맞으셨으니.”
고승이 대단히 죄스러워하며 그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아닙니다, 대인. 오늘 밤 강호江湖의 험난함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루하가 대답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는데요.”
“잠이 싹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얘기나 좀 나누다 날이 새면 돌아갈까 합니다.”
조영도 사의를 표했다.
“오늘 밤 두 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환난을 만나 큰일을 치를 뻔 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들 방으로 가시는 게, 조용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이루하는 안채 구역에서 자신들이 머무는 숙소로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
하녀들이 차를 내왔다. 고승이 찻잔을 손에 들기 전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두 분을 너무 놀라게 한 죄에 대해, 다시 한 번 용서를 빕니다.”
“아유, 그런 말씀 마세요. 대인.”
이루하가 손을 내저었다.
“도대체 간덩이가 얼마나 큰 자들이 위세 당당한 고가장에 침입해서 이런 야료를 부리게 되었습니까? 그들을 붙잡았으니, 신원을 파악했겠죠?”
이루하의 물음에 고승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묵묵부답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하실 건가요? 관아로 넘겨야죠?”
“아닙니다.”
“네?”
이루하가 놀라며 반문했다.
“그럼 어떻게?”
“고이 되돌려 보낼 작정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나요?”
“모르는 게 오히려 좋습니다.”
고승이 대답했다.
이루하가 고승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제가 그네들을 상대해보니, 그들이 거란인의 전통무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얀 놈들 같으니라고.”
“혹시 그들이 이쪽을 속이기 위해 거란의 전통무술 기법을 사용한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거란 무예에 웬만큼 정통해가지고는 생사의 관두에서 그렇게 익숙한 거란무예를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공주님의 말씀은 그네들이 거란인 무사들일 거라는 뜻입니까?”
조영이 물었다.
“네, 맞습니다.”
“그럼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할 게 없습니다. 아마도 우릴 미워하는 적들에게 뇌물을 받고 포섭되었을 것입니다.”
“공주님을 노리고 고가장에 들어왔다는 뜻이군요.”
“그래요. 불을 지른 자들도 아마 같은 편일 것입니다. 그들이 고가장을 아주 만만하게 본 것 같습니다.”
조영이 손을 저었다.
“오늘 밤 두 분 아가씨께서 그들을 잡으셨습니다. 두 분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우리가 여기에 없었더라면 그네들이 여기에 올 필요도 없었겠죠.”
이루하가 조영의 말을 잘랐다.
“근데, 여미아 아가씨가 그런 놀라운 절학을 터득하고 계신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조영이 여미아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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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7. 22. 삼복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