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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 12 | |
혼인과 자녀
혼인 예식서가 젊은 신랑과 신부에게 교훈하면서, 혼인의 두 번째 목적을 언급합니다. 예식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혼인의 목적
둘째, 혼인으로 인류는 유지되고 번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녀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면 남편과 아내는 주님께 대한 참된 진리와 두려움 가운데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혼인의 의무
신랑이여, …당신의 매일의 소명 가운데서 성실하게 일하여, 당신의 가족을 부양하고, 가족의 필요도 도우십시오. 신부여,… 당신의 가족과 가정을 적절히 돌보십시오.
중보기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들에 따라 이들에게 주님의 복을 허락하옵소서. 주님께서 이들에게 자녀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면, 주님의 언약을 이들과 이들의 자녀에게도 견고하게 하여 주시며, 이들이 주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게 하옵소서.
혼인 예식서에 기술된 혼인의 두 번째 목적은 자녀를 중심으로 선회하고 있습니다. 혼인 생활에서 자녀들의 입지를 고려할 때, 세 가지 질문이 우리의 관심을 요구합니다.
A. 자녀는 축복입니까?
B. 우리가 받는 자녀의 수를 제한해야 합니까?
C. 받은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합니까?
자녀는 축복인가?
태초에
혼인 예식서는 혼인과 관련하여 자녀의 위치를 고려함에 따라 창세기 1장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본 장은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인류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남녀로 창조하셨다(창1:27)고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두 사람은 땅에 사람이 가득 채워지도록 전파하라고 명령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피조물에게 반영하는 사람이 지상에 두 사람뿐이어서는 안 되며,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세상 구석구석에 퍼져 있어야 합니다. |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명령은 헛되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와 그의 후손들이 번성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코끼리나 독수리가 아닌 사람을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피조물을 “그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목적은 땅에 있는 남자와 여자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도록 하려는 데 있습니다. 결국 창조주는 땅에 살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거처로 하늘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시115:16).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주님이 어떤 모습을 하셨는지를 표현하기 위해 지상에 대리인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맡기신 이 특권적인 임무,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통해, 그들은 나머지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보살피심 등을 반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피조물에 반영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두 사람만 있어서는 안 되고, 온 세상에 두루 퍼져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라고 명령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지상을 채우고 있는 수도 헤아릴 수 없는 그의 형상을 지닌 이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더욱이 이 자녀들은 혼인하여, 하나님의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함께 그들의 관계 속에서 반영해야 합니다.
타락
아담과 하와가 후손의 수를 늘리기 전에, 인류는 죄 가운데로 떨어졌고,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 타락으로 아담과 하와(그리고 그들 안에 있던 온 인류)는 하나님의 모습을 닮을 능력을 상실하고, 대신에 사단의 모습을 반영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큰 긍휼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복음을 선포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아담과 하와의 말을 들으시고, 뱀에게 그의 말씀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구속이라는 단어를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이전에 말씀하셨던 명령을 끄집어내어, “생육하고 번성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뱀에게 “너와 뱀 사이에, 너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대감을 둘 것이라”(창3:1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자녀들이 사단과의 전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때, 하나님이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앞에서 하신 명령이 죄 가운데로 떨어졌음에도 현실이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가 자녀를 가지게 될 이유에는 발전이 있습니다. 이제 그 언급은 주로 하나님을 닮을 더 많은 사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사람들이 죄가 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녀를 갖는 목적은 이제 뱀과의 적대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전쟁을 선포하셨고, 이 전쟁에서 하나님은 여자에게서 난 자녀를 통해 전쟁에 나갈 군인들을 이끌어내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녀들은 전쟁터에서 단순히 희생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통해서 승리가 임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8:2)
물론 이 모든 것은 많은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창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남자는 하나님께서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단과 더불어 정해놓으신 전쟁을 위한 전사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관두고라도, 출산하고 양육하는 일에 이후 세대에 많은 고통과 불안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담은 “아내의 이름을 여자”(이 말은 히브리어로 생명이라는 뜻이다)라고 지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아담과 하와는 생육하라는 명령에 순종했고, 사랑의 친밀함 속에서 하나가 되어 하와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창4:1).
그 후 몇 년 동안, 인류(신자와 불신자도 마찬가지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한 세대가 다른 세대를 출산했습니다(창5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창6:1)했습니다. 하지만 수가 증가하나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은 많이 늘어나지 않았으며, 지구상에 악한 자와 싸우기 위한 하나님의 군대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홍수 직전에 태어난 자녀들은 하나님이 없었고, 큰 전쟁에서 사단을 편들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인류가 늘어나 땅을 가득 채우기를 원하셨지만, 이제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창6:7) 결정하셨습니다. 홍수 때,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만 살아남게 하셨습니다.
인류가 너무 타락하여 하나님이 인류를 파괴하셔야 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 태초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새롭게 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주 하나님은 속죄를 위해 도래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를 내다보도록 했던 한 희생 제사인, 노아의 희생 제사의 “향기를 받으신”(창8:21) 뒤에,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라고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잘 닮아, 악한 자와의 전쟁에서 군사로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들판의 돌로 만들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 이런 사양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주님은 에덴동산에서 주셨던 같은 명령을 반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창8:21)라는 사실을 아셨음에도, 하지만 출생이라는 과정으로 지상에 전사들이 등장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인류는 무수히 많은 연결되지 않은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의 후손들인 가족입니다. 자녀들의 출생을 통해, 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자녀들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혼인 안에서 태어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의 힘입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4절) 이 순서를 주목하십시오! 먼저 떠남과 달라붙음이 있고, 그다음 임신과 출산을 위해 필요한 한 몸이 나옵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하나님의 구속 프로그램은 계속될 것입니다.
생육과 언약
주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 특별한 한 민족을 통해서 그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2∼3)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몇 번이고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13:16)라는 이 약속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에서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말씀의 메아리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명령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차이가 있는 이유는 아브람과 그의 아내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 “생육하고 번성하는” 과업을 이행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주 하나님께서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주 하나님은 아브람을 그를 위해 특별히 구별하셔서, 하나님께서 그의 구속 사역이 분명히 그분의 사역이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 일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향한 그의 사랑을 강력하게 주장하시면서, 그와 은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람과 세우신 사랑의 언약은 아브람이라는 한 개인에게 제한되지 않았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아브람에게 돌보도록 맡기실 모든 자녀(대대 후손)를 포함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을 때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다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사단과의 전쟁에서 특별한 입지를 차지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위탁하신 자녀들이 이 우주적인 전쟁의 전사가 되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4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녀가 없었던 연로한 부부가 생육했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사람이 셀 수 있는 별보다 더 많은 수로 후손이 늘어났습니다. |
아브라함(아브라함 안에서 사라에게도)에게 하신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책임을 면제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기에, 약속에 순종하여 처신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습니다.”(창21:2) 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래의 친밀함에 복을 주셔서, 아브라함을 큰 나라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삭(창26:4)과 야곱(창28:3,14)에게 반복해서 보여주셨던 패턴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존재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의 결과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책임은 여전히 현실로 남아 있으며, 그래서 주님께서 야곱에게 그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리고 홍수 이후에 노아에게 주셨던 같은 명령을 다음과 같이 반복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창35:11)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이 명령에 따라 처신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생육하고 번성했습니다.”(창47:27) 실제로 그들이 너무 생육하고 번성하여, 그들이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출1:7) 여기에서 선택한 용어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처음 내리신 명령을 얼마나 자주 상기시키는지를 주목하십시오. 바로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번성하는 것을 막으려고 온갖 시도를 했음에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출12:37)이었습니다. 만일 장정이 60만명이었다면, 동등 수의 여성이 있었을 것이고, 적어도 두 배 이상의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보수적으로 추산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250만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약 4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아이가 없었던 부부가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셀 수 있는 별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을 생육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태초에 내리신 명령에 그들이 순종하는 것을 보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반영하고,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는 큰 무리를 지상에 있게 하셨습니다. 태초의 명령은 분명히 태초에만 제한되지 않았습니다!
축복과 저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모든 언약도 마찬가지다)에는 약속과 의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 약속에는 순종에 대한 축복과 불순종에 대한 저주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자녀들은 축복과 저주 모두에서 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예배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출23:25∼26).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를 번성하게 하고 너희를 창대하게 할 것이며 내가 너희와 함께 한 내 언약을 이행하리라(레26:3,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신28:1,2,4,11;신7:13,14도 참조하라)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가 파종한 것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의 자녀를 움키고 너희 가축을 멸하며 너희의 수효를 줄이리니 너희의 길들이 황폐하리라(레26:14∼16,22).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 여자와 같이 동침할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찾음으로 눈이 피곤하여지나 네 손에 힘이 없을 것이며… 네가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아 곤란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살을 먹을 것이라(신28:15,18,30,32,53).
이 두 가지 강조는 이스라엘 역사 후반부에 선지자들의 말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죄에 대한 응답으로 성령님께서 호세아를 감동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호4:1,6,10)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 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여호와여 그들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호9:11∼16).
역으로 주님께서 도래하실 중보자의 속죄 사역을 통해서 회복을 약속하실 때, 그는 이와 같은 약속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사44:3∼4).
풀(사44:4)에 대한 언급은 여기에서 풍성하고 무성한 성장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습을 닮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하시려는 의도는 변함이 없으며, 지상에서 믿음의 전쟁을 치를 많은 전사를 배치하시려는 그의 목적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양육의 특권
이 모든 것을 언약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고,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은혜로 그의 신실한 자녀들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축복이라는 확실한 감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헛간에 태어난 피조물이 축복이며, 들판에 풍년이 축복인 만큼 사소한 모든 하나하나가 다 축복이었습니다. 사실 자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축복 그 이상이었습니다. 자녀들은 경이로운 유업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경건한 부모의 보살핌에 맡겨졌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그의 백성에게 언약에 의한 그의 자녀라는 선물보다 더 큰 특권이 없음을 이해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을 찬송하라”라고 명령합니다. 왜요?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기”(시113:9) 때문입니다. 더욱이,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시127:3∼5) 이스라엘의 자녀들, 곧 언약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사단과의 전쟁에서 지상에 두신 전사들이며, 승리가 가장 확실하게 주님을 위한 것임을 감안할 때, 즉 하나님의 전사들을 둔 사람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시128편)
신약의 자녀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머니들이 자녀를 데리고 그에게 나왔을 때 그가 하셨던 대로 반응하셨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어머니들이 데려 나온 자녀들은 모압 족속의 어린이가 아니었고, 로마인들의 자녀들도 아니었습니다(예수께서 이스라엘에서 수고하셨기에). 이 자녀들은 언약의 자녀였고,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사단에 맞서 치를 우주적 전쟁에서 그의 편에 두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 어머니들은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예수에게 데려와야 했고, 이 예수는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사단과 전쟁을 치러 확실하게 패배시키도록 보내신 분이시기에, 어린 자녀를 축복하는 일은 옳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10:14)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교정하셨습니다. 여기에 “이런 자”라는 말씀은 어린이 대 어른이 아니라(마치 어린이는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지만 어른은 속하지 않은 것처럼), 어머니가 예수께 데려온 자녀들(약 6명)을 가리키는데, 이 예수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보내신 총사령관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막10:16) 어머니들이 계속해서 자녀를 낳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나라에서 전사로 키우는 일이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뒤에, 승천하신 구주께서 그의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성령 도래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심지어 이스라엘의 어린아이들도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성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언약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그들이 흑암의 권세에 맞서 치르는 전쟁을 이행할 역할을 감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모습의 일부를 다시 반영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어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차별적으로 모든 어린이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2:39) 하나님께서 믿는 부모에게 맡기신 자녀들은 이웃에게 맡겨진 자녀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자녀들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고전7:14을 참조). 이것이 이 언약의 자녀들이 믿는 부모를 받도록 보장하는 이유입니다.
자녀를 열렬히 받으라
그렇다면 믿는 부모들은 마지못해 자녀를 받아들여야 합니까? 분명히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어린 자녀들을 돌보도록 맡겨진 것보다 더 큰 특권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과업은 없습니다! 시편 127편의 말씀은 여전히 진실입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3∼6절) 사실상,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와 같은 그의 교훈을 쓰도록 충동한 것도 바로 이 관점입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2:14∼15) 이 말씀은 구체적으로 아이를 출산하는 일로 구원을 얻는다는 행위 신학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때(창3:15)인 죄 가운데로 떨어진 직후에 하신 주님의 말씀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부모에게 맡기신 자녀들은 믿지 않은 이웃에게 주신 자녀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믿는 부모의 자녀들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
구원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자녀 양육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의 수많은 여인이 믿음으로 구원 역사의 다양한 단계에서 자녀를 낳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세상의 구주인 마리아가 낳을 하나님의 아들의 도래를 향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부모들은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며,”(시127:3) “자녀들이 복이었다”(시128편)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구약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서 미래시제를 사용하여 “여자들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여성의 “믿음의 수고”(자녀를 낳은 것을 믿음의 행위로 말한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로 끝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그가 교회를 계속 모으시는 사역에서, 여전히 믿음 안에 있는 경건한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인 언약의 자녀들 낳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언약의 자녀를 통해서(심지어 선교를 통해서보다 훨씬 더 많이), 주님은 세상에 그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자녀를 낳음으로 구원받는 여성에 대한 바울의 진술 직후에 이어지는 구절이 교회 직분자에 대한 것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3:1) 감독, 즉 장로가 되는 일에 마음을 둔 청년들은 일찍이 여자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더욱이 젊은이로 장로가 되고자 자극하도록 한 것은 무엇입니까? 확실히 어머니의 경건함과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데 헌신한 열심으로부터 자녀가 구주의 교회 모으시는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틀림없이 격려하였을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그리고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교회의 장래인 하나님의 어린 자녀들을 돌보는 일을 맡은 것보다 더 큰 특권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주어졌던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명령은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변함없이 반복되었습니다. 주님은 결코 이 가르침을 철회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신약 시대 경륜의 부모들에게 더 많은 특권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5:14) 이 가르침은 문화적으로 제한되지 않고, 오히려 성경적으로 모든 시대에 규범이 됩니다.
그렇다면 혼인 예식서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을 오늘 혼인하는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그리고 젊은 부부 앞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남편과 아내는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주님의 뜻을 둡니까?
믿음
이제 이 질문은 이런 입지가 오늘 세상에 현실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라는 명령이 완수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지구가 더 많은 인구를 수용할 능력이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지구는 이미 가득 차 있고, 과거 학대의 흔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관심은 극한 빈곤 속에 사는 수많은 사람에게로 마음이 갑니다. 우리의 도덕적인 의무는 지구의 제한된 양식과 용품을 더 많이 사용하는 대신에 주린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듣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양육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며, 존경할만한 일을 하기 위해 우리 문화권에서 두 명 이상의 자녀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습니다. 게다가 두 부모 모두 취업해서는 안 됩니까? 자녀들을 위해서도 품위 있는 생활양식을 유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을 꾸리기 전에 교육을 마치고 여행을 하며 다니면서, 집값을 가능한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옳고 적절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주장과 다른 많은 주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를 엄습하여 가족 규모를 제한하거나, 아니면 가정을 꾸리는 것을 연기하도록 격려합니다.
믿음은 다른 언어로 말합니다. 주님께서 창세기 1장 28절의 위임명령을 철회하신 적이 어디에도 없으며, 대신에 그분은 창세기 1장과 다른 여러 본문에서 이를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구약과 신약에서 그의 언약 백성에게 “자녀는 주님의 유업이며, 자녀는 그의 상급”(시127:3,5)이라고 고백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어린 자녀도 전통에 화살 두세 개를 가지고는 전쟁에 나가는 병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목숨을 위해 그는 사령관이 그에게 사용할 만큼의 화살을 대신 가지고 갔습니다. 주님께서 자녀들로 가득 찬 전통을 가진 이 사람에게 복을 선언하셨을 때, 그는 우리에게 자녀의 수가 둘에서 넷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이 결실(자녀)에 대해 주신 명령을 받아들이고, 또 자녀들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복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자녀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교육하시고 양육하시기 위해 필요한 “일용할” 양식(마6:11)을 우리 가정에 공급하시는 신실하심의 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인 세상에서, 이 과업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 안에서 혼인한 부부는 이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두셨습니다.
가족계획
위에서 언급한 모든 것은 가족계획에 대해서 말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가족계획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우리 시대에 가족계획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고 가고 있기에 무엇보다도 이는 사실입니다. 혼인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시대의 자녀들이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출산을 늦추거나, 제한하거나, 피임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입니다. 가족계획이 논의되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주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 문제를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삶의 어떤 영역에서도 생각 없이 행동하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는 친밀한 혼인 생활에서 오는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계획하고 생각할 수 있고, 친절하고, 선하고 자기를 비우는 등에 의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며, 또 그 본질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출산과 관련하여서도 함축된 의미가 있습니다.
피임약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피임약은 알약일 것입니다. 나는 의사가 아니므로, 이 주제에 대한 전문가의 입장에서 글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알약 사용은 강력히 반대하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알약 사용에 대한 논쟁은 알약이 의학적인 면과 혼인 생활, 두 측면 다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는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피임약(알약)은 1) 배란을 방지하고, 2)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는 것을 막고, 3) 어린 아기가 자궁 내벽에 달라붙는 것(앞의 두 가지 경우가 실패할 때 잉태하지 못하도록 하여)을 막아 결국 아기가 죽게 합니다. 물론 후자는 낙태가 개입될 가능성으로 살인하지 말라(출20:13)는 명령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알약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알약의 의학적인 부작용은 면역 체계의 억제, 우울증, 알약 사용이 끝나면 임신할 수 없게 하는 것, 유방암이나 자궁경부암에 걸릴 위험이 크게 증거하도록 하는 등 여러 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몸(성령의 전)을 잘 돌보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부작용도 알약 사용을 강력히 반대합니다. 알약 사용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알약은 공개적으로 권장되고 있고, 의학적인 부작용에 대한 대중의 지식이 억압되어 있음에도 쉽게 사용할 수 있기에, 저는 알약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경고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피임 용품(약)들은 쉽게 구입할 수 있고, 의학적으로 위험하지 않지만, 쉽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 판단으로는 피임약 사용으로 인한 혼인 문제는 전반적으로 의학적인 문제보다 훨씬 더 큽니다.
주 하나님께서 성적인 친밀함이 거룩한 울타리 안에서 자리를 얻도록 정해놓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친밀함을 소통의 수단으로, 사랑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을 주는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적인 친밀함이 욕망의 표현이나 자아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자기를 비우려는 의도로 제정하셨습니다. 게다가 주님께서 사랑의 친밀한 표현과 그분의 자녀를 주시는 복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설정하셨습니다. 경건한 부부를 위해, 자녀의 축복에 대한 이 연결고리는 친밀한 순간에 그 자체의 특별한 광채를 더합니다.
피임약 사용으로 인한 혼인 문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의학적인 문제보다 훨씬 더 치명적입니다. |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주님께서 피임의 가능성을 열어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로, 과학적으로 진보한 우리 시대에 이러한 피임법을 발견하고 쉽게 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4∼5)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피임약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 하나님께서 우리 사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피임약을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호9:11)라는 저주를 우리 경건하지 않은 사회에 내리시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관찰만으로도 하나님이 이용하도록 하시는 피임약을 그리스도인이 사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밀함과 임신 사이에 두신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젊은) 부부가 잘하는 일입니까? 이는 믿음의 행동입니까, 아니면 이기적인 행동입니까? 결국 이것은 영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영적으로 답하지 않으면, 혼인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항상 부정적일 것입니다. 반대로 이 질문에 성경적으로 만족스럽게 대답하면, 혼인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일 것입니다.
개방성
하나님의 자녀를 양육하는 특권을 부여받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은 이 자녀들이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는 가정에 맡겨진다는 것을 지시합니다. 하나님은 합당하지 않은 자들의 구원을 위해 그의 독생자를 내어주셨다는 점에서 이 사랑이 어떠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요일4:9∼10). 마찬가지로 지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은 태도는 주님께서 그의 언약 자녀들을 두시는 가정의 분위기를 특징지을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러한 자녀를 둔 부모는 자신들의 행동과 태도가 죄의 본성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움직여, 삶의 모든 부분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친밀함도 믿음에 의해 이끌려야 하며, 그래서 상대방을 위한 사랑과 친절과 인내와 온유와 절제로 특징지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갈5:22∼23). 친밀함과 잠재적인 임신 사이의 연결고리를 분리하는 것은 주님이 혼인 생활에서 친절과 인내와 절제를 증진 시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하나의 매케니즘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데 열정적인 남편(그 이유는 책임이 궁극적으로 남편에게 있으며, 남편은 머리이기 때문이다)은 이 시기에 아내가 임신하도록 하는 것이 지혜롭지 못하거나, 심지어 임신을 두려워할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기에 자신을 부인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때”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 이유는 주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한 달에 한 번 임신이 가능한 방법으로 여자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번 달에 무책임한 일이 반드시 다음 달에 무책임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달에 무책임한 일이 반드시 다음 달에 무책임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이때 아내를 임신하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남편과 아내 사이에 대화가 필요합니다. 이 대화는 현재 가족의 필요와 그러한 필요를 채우는 일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 대화는 필요한 것을 공급하기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두시는 특수한 상황에 책임 있게 처신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 대화는 대단히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상대방과 마음을 열고, 서로 이해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대화는 성경을 펼칠 것을 요구하며, 부부가 하나님의 인도와 지혜를 위해 기도하도록 합니다. 남편은 머리로서 아내를 잘 보살피기 위해, 아내에게 현명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의 보살핌과 지도력에 자신을 맡긴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대화이어야 합니다. 나는 혼인 생활에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사랑에 빠지게 하는 침실에서 나누는 대화보다 혼인의 다양한 측면을 충분히 하나가 되게 하는데 더 좋은 대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남편(하나님 앞에서 궁극적으로 책임이 있기에)이 시점(병이나 피로나 감정적인 스트레스를 이유로)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임신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때, 그는 자신을 부인함으로써 아내에 대한 사랑을 가장 분명하게 만듭니다.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배우자에게 그러한 행동은 참으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침실에서 단지 지금 임신하는 것이 현명한가에 대한 문제만 아니라, 온종일 얼마나 피곤했는지에 대한 문제나 하루 동안 경험한 여러 가지 일에 대한 문제를 두고 같은 대화를 하는 것도 촉매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이 낮에 어떤 광경을 보았는지, 자신이 만난 비서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 아내의 확인이 어떻게 필요한지를 아내에게 털어놓도록 하십시오. 아내도 남편에게 자신의 피곤함과 희망과 좌절에 대해 털어놓도록 하십시오. 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고, 성적인 친밀함의 신비 속에서 사랑의 소통을 이끄는 “한 몸”(존재와 마음과 정신도 하나다)이 되도록 하는 것은, 자신을 주든 아니면 부인하든, 바로 지속적인 대화입니다. 침실에서 이러한 종류의 사랑과 이해와 자기희생은 온 집안에 울려 퍼지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가운데 어린 자녀들을 위한 안전한 안식처를 제공합니다. 결국 이런 자기 비움이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자연적임
임신과 관련하여, 주 하나님은 아내가 임신할 수 있는지 없는지 부부가 알 수 있는 방편을 친히 손수 지으셨습니다. 여자의 몸에 배란기가 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변화가 언제 일어나는지 감지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경부점액법 세계기관(WOOMB)이라고 불리는 국제기구는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열려 있고, 이생과 내세에 속한 모든 것을 서로 돕기를 바라십니다(예식서가 이에 대해서 말한다). 부부가 오늘 밤 임신해야 할 책임이 있는지를 고려할 때, 여성의 몸의 징후를 읽고 그러한 징후의 의미를 그들의 행위에 포함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징후를 공유하고 이해하려면 대화가 필요합니다. 평균적으로 여성은 28일에 한 번 짧은 가임기를 갖습니다. 그렇다면 자녀를 더 가질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은 매달 새롭게 답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자녀를 갖지 않기로 일회성 결정을 내리는 대신에(아마 더 이상 임신을 하지 않도록 수술을 받는 것), 매달 이 질문을 새롭게 마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것은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와 꽃들을 보살피시는 아버지의 말씀과 대단히 잘 맞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6:33∼34) 만일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우리가 하루 염려로 족하다면, 확실히 임신에 대한 적용(여성의 월간 주기를 감안할 때)은 한달 염려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피곤할 수도 있고, 또 이 시점에 또 다른 임신을 위한 건강(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이 없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다음 달이나 내년에 바뀔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책임을 견지하고 일해야 합니다. 아내가 너무 빨리 임신하지 않도록 하는 측면과 또 불필요하게 다른 언약의 자녀를 거부하는 측면들에서 말입니다.
결론
주 하나님께서 언약에 의한 자신의 자녀를 특정 부모에게 맡기신 그의 행위는 심오한 축복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이 현실은 믿음의 남자와 여자를 이미 받은 자녀들에게 책임감 있게 행동하게 하고, 이 자녀들을 잘 보살피도록 자극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축복으로 더 많은 자녀를 선물로 주신다면, 참으로 주님께서 에너지와 기회를 주시는 곳에서 그리스도인 부부는 다른 자녀의 특권을 간절히 바라며 혼인의 친밀함 속에서 그에 따라 처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와 자비로 얼마나 많은 자녀를 주실지 상관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부는 분명히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분위기를 가정에서 조성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부부는 침실에 있는 이러한 결실들이 거실로 흘러넘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자녀 양육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로 한 남자와 그의 아내에게 맡기신 자녀 양육이라는 주제로 우리는 혼인 주제에서 다소 멀어집니다. 유아세례 예식서에 관한 토론은 이 문제를 더 자세하게 논의하는 이상적인 포럼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혼인 예식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신랑과 신부 모두에게 자녀 양육의 임무를 부여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녀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면 남편과 아내는 주님께 대한 참된 진리와 두려움 가운데서 그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양육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창세기 3장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합니다. 자녀를 낳은 것은 여자이며(15절), “모든 산 자의 어미”(20절)가 될 것입니다. 여자가 낳은 아이를 여자가 버리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온전한 의미에서 양육해야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는 특별히 어머니에게 적용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6:6∼7) 사도는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2:3∼5) 이 일의 성격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언약 자녀들을 훈련하는 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그대신 그리스도인 어머니의 전임 사역입니다. 이 사안이 그리스도인 아버지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자녀를 낳은 것은 어머니이지만, 이 어머니는 이전에 한 남자의 돕는 자로 합류했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되었고(하나님의 의도로), 아내가 낳은 자녀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그는 자녀와 자녀 양육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1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라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가르칠 일차적인 책임을 지우셨습니다! 그렇기에 위에 인용한 신명기 6장의 가르침은 똑같이 아브라함에게도 적용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6∼7절) 아삽은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시78:3)를 전할 것을 약속합니다. 성령께서 바울이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아버지의 과업은 재정적인 지원 이상입니다.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어린 소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말과 행동을 통해서 보여줄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심적인 그리스도인 아버지의 온전한 관심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 고립된 채로 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존재와 지성과 영과 몸의 경이로운 하나 됨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이 부부관계에서 함께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그들은 또한 자녀들이 주님을 섬기면서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린 자녀들(이제 어린 자녀가 아닐 수 있는 자녀들까지도)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에 대해서 서로 많이 논의해야 합니다. 지금 필요합니다. 이러한 자녀 양육은 혼인 생활을 풍성하게 하고, 경건한 부부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대화하도록 하며,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반복해서 나아가도록 합니다. 주님의 축복으로, 부부는 자녀들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함께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혼인을 하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의 지혜로 그들의 길에 머지않아 받게 될 책임을 감당해야 할 특권을 왜 주셨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선택한 아내는 여러분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이상이어야 합니다. 아내는 여러분의 자녀의 어머니가 될 영적인 자원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선택한 남편은 예리한 사업가나 멋진 운동선수 이상이어야 합니다. 당신의 남편은 당신이 세상에 데려올 언약의 자녀들에게 적합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그래서 가정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먼저 영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과 혼인하기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양육의 방향과 현실이 결정될 것입니다!
토론 사항
1. 여러분은 자녀를 몇 명 받고 싶습니까? 자녀들의 나이 차이가 몇 살이 되게 하고 싶습니까?
a)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여러분이 그렇게 대답하는 이유를 설명하시오.
b) 여러분의 약혼자/배우자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합니까?
2. 하나님은 왜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창1:28)고 명령하셨습니까? 죄 가운데로 떨어졌다고 해서, 이 명령이 바뀌었습니까?
3. 인류는 어느 시점에서 이 명령을 이행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어떤 시점에 혼인한 부부가 이 명령을 이행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4. 하나님께서 왜 거룩한 혼인 울타리 안에서만 자녀를 잉태하고 출산하게 하셨습니까?
5. 하나님께서 한편으로 언약적인 순종과 자녀를 많이 주심을, 다른 한편으로 언약 불순종과 자녀를 주지 않으심, 이 두 사이에 이스라엘에 두신 연결고리를 설명하십시오. 오늘날 북미의 출산율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불쾌함을 드러냅니까? 여러분의 대답을 설명해보십시오.
6. 오늘날 당신의 교회에 있는 각 가정의 규모가 30년 전만큼이나 큽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좋은 일입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습니까? 이 주제에 대한 회개를 고려해야 합니까?
7. 많은 자녀를 선물로 받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기쁨을 나타내고, 자녀가 없는 것은 그 부부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대답을 설명하십시오.
8. 시편 기자들은 자녀를 받는 일에 대해서 왜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까? 왜 그는 자녀들을 “유업” 혹은 “복”이라고 부릅니까? 이 사실이 자녀를 받는 것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
9. 경건한 그리스도인 부부가 가족계획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까? 왜 말해야 합니까? 아니면 왜 말하지 말아야 합니까?
10. 그리스도인 부부가 피임약을 사용해도 됩니까? 두 가지 입장, 즉 a) 의학적인 위험, b) 부부간의 위험에서 취한 논쟁을 사용하여 답을 달고 토론해보십시오.
11. 마태복음 6장 33∼3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계획과 관련하여 어떻게 적합한 지침입니까?
12. 당신이 혼인할 사람이 당신의 자녀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되는 것이 기쁩니까? 당신이 혼인하기 전에 이에 대해서 대화해야 할 사항들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