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essay
내 이름에 대한 단상
김응숙
내 이름 석 자는 ’김응숙‘이다.
한때 개명하는 게 유행이었다. 끝순은 지영으로, 순자는 태희로, 숙희는 하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세련되면서도 좋은 운이 따르는 이름이라고 했다. 지인들이 새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그 낯선 이름들이 혀끝에서 뱅뱅 돌아 애를 먹었다. 나는 예쁘지도 않고 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이름으로 마냥 살아간다는 게 내 삶에 대한 너무 소극적인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의 아버지 함자는 ‘김인식’이고, 할아버지 함자는 ‘김홍섭’이며, 증조할아버지 함자는 ‘김헌구’다. 그 윗대의 이름은 모른다. 아니, 다 모르는 것은 아니고 석 자 중 한 자는 안다. 바로 성씨 김金 자다. 항상 맨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생물학적 정체성을 밝히고 있는 글자다.
‘숙’ 자는 맑을 숙淑이다. 여자는 시집가 남편 울타리 속에서 혼탁한 세상을 모르고 편히 살아가라는 부모의 바람이 서려 있다. 내 나이대 여자 다섯 명이 길을 가는데 뒤에서 “숙아”하고 부르면 세 명이 뒤를 돌아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대부분 유교적 성향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딸들이다.
이제 ‘응’ 자 이야기를 해 보자. ‘응’ 자는 응할 응應, 즉 반응한다는 뜻이다. 그 반응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아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출석부를 보던 선생님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유독 인상을 썼다. “응”, 힘을 주며 길게 발음하면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댔다. 당연히 연상되는 것은 똥이었다. 그 후 내 이름은 많은 친구를 즐겁게 하는 이름이 되었다.
그로부터 50년도 더 지난 지금 나는 그 아이들의 반응이 얼마나 직관적이었나를 깨닫는다. 위에 ‘ㅇ’은 입이고 아래의 ‘ㅇ’은 항문이다. 나는 먹고 싼다. 이런저런 포장이 통하지 않는, 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글자다.
두 구멍 사이에 허들이 놓여있다. 입에서 항문까지 결코 쉽게 갈 수 없다는 표식이다. 먹고 살기 위해 숨 가쁘게 뛰어가며 허들을 넘었다. 수시로 발에 걸려 넘어졌지만, 곧바로 다시 일어나야만 했다. 누구라 이 엄중한 도식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근데 너무 형이하학인가?
그러면 형이상학으로 가보자. 달이 떴다. 그리고 호수에 그 그림자가 비쳐 또 하나의 달이 떴다. 달은 이백의 술잔에도 뜨고 그대의 눈동자에도 뜬다. 실존이 운기 하니 세상은 형상이라는 반응으로 가득해진다.
두 달 사이에 수면이 놓여있다. 존재를 그윽이 품어서 나투어내는 공간이다. 다만 맑고 고요한 수면만이 온전히 달을 담아낼 수 있다. 파랑이 치면 아래에 비친 달은 일그러진다. 깃털만 스쳐도 여울지는 인간의 마음으로 본래의 달을 보기는 요원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저 이름에서만 두 달이 동그랗다.
최근에 인도 북부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인이 알려주었다. 그곳의 어느 소수민족이 ‘응’자를 이런 뜻으로 쓰고 있더라고
ㅇ : 해가 뜨고
ㅡ : 그리고
ㅇ : 해가 집니다.
다름이 아닌 하루다. 저릿한 감명을 느낀다.
“응”하고 가만히 발음해 본다. 몸속에서 어우러지는 음을 입을 벌리지 않고 낼 수 있는 유일한 소리다. 그저 음의 고저 만으로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한다. 모든 물음과 답은 네 안에 있다는 그 흔한 교훈을 온몸으로 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의미일 뿐이다. 실체를 동반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길을 잃을지 모른다. 의미 속에서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나, 현재의 ‘김응숙’이 위치한 지점에 찰싹 달라붙는다. 어느새 입에 숟가락을 넣어야 할 밥때가 다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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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숙
2015년 《에세이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현대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수필집으로 《달의 귀환》, 《몸짓》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