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업계 또는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확률이 그리 높지 않았다. 지금이야 대학에 가지 않는 학생들 찾기가 더 어려운 세상이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대학진학을 목표하는 학생들은 처음부터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지 나처럼 공고나 실고 쪽으로 진학하진 않았다. 물론 공고나 실고 출신 중에도 성적이 상위 그룹에 속한 친구들은 전문대나 사 년 재 대학에 진학을 하였다. 그 이하라도 대학에 진학할 맘만 먹으면 적당한 곳에 진학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땐 고등학교만 나와도 얼마든지 취업이 잘 되던 시대였다. 특히 건축과나 기계과 출신들은 졸업하기 무섭게 취직을 하던 때였다. 박정희 정부를 지나 전두환 정부가 시작되던 때 우리나라는 한창 개발도상국으로 발돋움하던 때였다. 도시로 매일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몰려갔고 제조업이 한창 부흥하던 때였다.
고등학교 삼학년 이학기가 시작되면서 학생들은 크게 두 쪽으로 나뉘었다. 즉 취업반과 진학반이 그것이다. 난 당연히 취업반에 속했다. 취업반에 속한 친구들은 공부는 거의 제쳐두고 각자 알아서 직장을 찾아 나가든가 아니면 학교에서 추천해 주는 곳으로 일자릴 찾아 떠났다. 불행히도 그때 우리는 개교 이래 겨우 4회 졸업생에 불과했다. 그러니 선배가 후배들을 이끌어 줄 만한 형편이 못 되었다. 그나마 담임 선생님들의 열과 성의로 건축과 학생들은 설계사무실이나 시공현장으로 연결되어 가물에 콩 나듯 나가는 정도였다. 그것도 똘똘한 녀석들 위주로 선택을 받았다. 비록 이름 없는 실고에서 건축을 공부했을망정 난 꼭 전공을 찾아 취업하고 싶었다. 그런데 친구들은 공부한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는 제조업 계통이나 유통업 쪽으로 취업하는 수가 훨씬 많았다. 전공을 찾아 간 급우들은 겨우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였다.
지루한 기다림이 싫어서 학교에 실습 계를 제출하고 직접 일자릴 알아보기로 했다. 내가 취직하고 싶은 곳은 설계사무실이었다. 집에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터미널마다 내려서 관공서가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대개 설계사무소들이 관공서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력서 같은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도화지에 시골집을 투시도로 그려 복사한 것을 여러 장 품에 안고 무슨 설계사무소 이름 붙은 곳이 보이면 무조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 혹시 설계사무소에서 일할 사람 뽑지 않나요.”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려 가지고 옷은 촌스럽게 입고 낡은 운동화를 신고 대뜸 들어와 직원 구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사람들은 일하다 말고 동물원 원숭이 쳐다보듯 나를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다. 그래도 개중엔 내 모습이 측은하였든지 한쪽 책상으로 앉게 하고 물 한 잔 내어주며 어디 학교 출신이냐며 다정스럽게 묻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당장 사람을 구하지 않으니 일단 집에 가서 기다려 보라고 하였다. 지금은 아산으로 불리지만 당시 온양이라 불리던 곳에서부터 일자릴 찾아 천안, 성환, 송탄, 오산, 수원까지 헤매고 다녔다. 수원에 마침 누님이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수원까지 일 자리 찾아 순례의 길을 끝내니 하늘에 별이 총총 떠오르기 시작했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차비만 달랑 들고 나왔으니 하루 종일 쫄쫄 굶었다. 누님 자취방에서 하룻밤 묵고 일자리 찾는 건 그만두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께서 읍내에 있는 목공소로 취직하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마침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목공소 사장이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가겠다고 하고 목공소로 찾아갔다. 도로 옆에 작은 구멍가게만한 목공소였다. 먼지가 뽀얗게 덮인 널빤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지럽게 널린 나뭇조각들이 발에 치었다. 아무 소리도 않고 목공소 앞에서 서성대다 난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곤 부모님께 차라리 시골에서 농사짓겠다고 어깃장을 놓았다. “야 이눔아 농사치가 있어야지 농사를 짓지 우리 집에 무슨 농사치가 있다고 그러냐” 허긴 그 말은 사실이다.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재산을 모두 날려 버리고 겨우 논 두 마지기가 다였으니 그것도 참 못할 짓이었다. 할 일 없이 집에서 빈둥대고 있는데 어는 날 학교 후배가 쪽지를 하나 가지고 내게 왔다. “형 이거 형 담임 선생님이 갖다 주라고 해서 왔어” 거기엔 서울에 있는 모설계사무소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자기소개서 한통과 주민등록등본 한 통을 떼서 한 번 가보라는 전갈이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설계사무소에서 날 필요로 하다니 이게 웬 말인가 뛸 듯이 기뻤다. 혼자 가기가 뭐해서 함께 자취를 하던 동네 친구와 서울로 출발했다. 출발 전 사무소에 전활 했더니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내려 전화하면 길을 안내해 준다고 했다. 우린 떨리는 목소리로 공중전화기를 돌렸다. 난생처음 서울이라는 땅을 밟았으니 어디가 어딘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자동차들과 발 디딜 틈 없을 정도의 수많은 인파들 빼곡하게 들어선 고층빌딩까지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지고 어지러웠다. 전화에서 여직원이 자세히 알려 주었는데도 우린 길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리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마중 나와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잠시 후 예쁜 아가씨가 우릴 보고 손짓을 하며 달려왔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나도 드디어 설계사무소에 취직 하는구나. 그것도 서울 한 복판에 있는 설계사무소에 말이다. 촌놈이 서울 땅 한 번 밟아 보는 것도 영광인데 더군다나 서울에 있는 설계사무소에 취직을 한다니 그야말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내수동 골목에 위치한 6층짜리 빌딩 명패엔 ‘대안빌딩’이란 이름이 붙었다. 계단을 한참 걸어 올라가 사무소 문을 열자 한쪽은 설계사무소 소장과 경리가 자릴 차지하고 있고 벽을 사이에 두고 저쪽엔 학교 제도실에서 사용했던 제도판과 같은 그러나 좀 더 세련된 도판을 앞에 놓고 뭔가 열심히 그리는 직원들이 보였다. 소장님은 우릴 보며 환한 미소로 반겨주셨다. 나와 친구는 소장님 앞에 나란히 앉아 자기 소개서와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였다. 자기소개서를 읽고 난 소장님은 고향이 어디냐 학교는 어디냐 앞으로 뭐가 되고 싶냐 등등 질문을 하셨다. 그런데 소장님은 첫 말을 할 때마다 고개를 살짝 갸웃하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러더니 우리보다 앞서 온 사람들의 이력서를 보여주었다. 무려 열다섯 명이나 되었다. 우린 바로 취직이 되는 줄로 알고 서울에 들뜬 마음으로 온 것인데 한 명을 뽑기 위해 우리까지 합쳐 열일곱 명째 면접을 본 거였다. 순간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이력서를 제출했을 텐데 우리 같은 시골뜨기를 누가 뽑아주겠는가 싶었다. 속으로 크게 실망하였다. 삼십 여분 후 우린 다시 빌딩을 나왔다. 너무도 허무했다. 이럴 것이면 서울까지 올라오는 게 아닌데...
집으로 돌아와 면접 본 사무실에서 연락이 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함께 면접을 본 친구는 어디론가 취직 됐다며 먼저 고향을 떠나갔다. 난 또 혼자가 되어 노심초사 하는 맘으로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보내고 있었다. 계절은 가을걷이가 거 반 끝나갈 즈음이었다. 보이는 풍경들이 한없이 쓸쓸하게 보였다. 고등학교 졸업해서 취직하면 부모님께 효도할 줄 알았건만 취직이란 게 이렇게 어려운 줄은 몰랐다. 도시 같으면 그래도 취업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으련만 촌에 사는 내겐 그런 혜택은 일도 없었다. 그러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였다.
십일월이 시작될 무렵 집으로 편지 한통이 도착하였다. 발신자 주소엔 면접을 본 설계사무소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 드디어 결정을 하였는가 보다 급하게 편지봉투를 열어보았다. 거기엔 짧지만 아주 정중하게 “귀하의 취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모월 모일까지 사무소로 출근하라는 통지서였다. 세상에 내게도 이런 행운이 오다니 너무도 기뻤다. 얼른 부모님께 사실을 알렸다. 오랜만에 부모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사무소 출입문 명패에 [새한건축문화연구소]라고 적혀 있다. 어색한 모습으로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내가 일할 자릴 배정받았다. 드디어 나도 사원이 되었다. 내 위로 여섯 명이 각자의 자리에서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모든 도면을 수작업으로 그리던 때였다. 책상에 커다란 티자가 하나씩 가로로 걸쳐 있고 트레이싱 페이퍼 위에 도면을 그렸다. 각종 제도용품이 각자의 책상마다 어지럽게 놓여있다. 얼마나 도면을 그렸으면 책상 모서리마다 시커먼 흑연가루가 묻어있다. 첫날 내가 그린 건 선배의 지시에 따라 흰 종이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트레이싱페이퍼를 붙이고 학교 제도시간에서 처음에 했던 것처럼 가로세로줄 긋기를 하였다.
이튿날엔 선배가 먼저 반쪽 도면을 그린 것을 복사해 주면 나는 그걸 뒤집어서 반대쪽 도면을 그대로 베끼는 작업을 하였다. 그런 작업을 한 일 주일 정도 시키더니 본격적으로 도면을 그리는 걸 시켰다. 설계사무실이라면 가장 트렌드 한 건축도면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리는 도면도 그렇고 선배들이 그리는 도면도 하나같이 기와집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 도면 중엔 이런 한옥도 한 종류인가 보다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런 식의 작업이 한 달 두 달 석 달... 계속되었다. 나의 꿈은 건축가가 되는 것이었다. 멋들어진 빌딩이나 사무소 또는 박물관 같은 현대식 도면을 배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긴 그런 사무소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장을 떠난다며 나보고 아침 일찍 어디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길이라곤 집과 직장 밖에 모르는 내게 서울상봉터미널 어디로 오라고 하니 앞이 캄캄하였다. 그래서 이른 아침 무조건 택시를 잡아타고 선배가 오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철을 타면 될 것을 비싼 택시를 탔던 것이다. 선배는 이런저런 작업 도구들을 한 꾸러미 들고서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나는 얼른 꾸러미를 받아 들고 선배를 졸졸 따라다녔다. 우린 간단하게 터미널 안에서 가락국수 한 그릇을 사 먹었다. 그리곤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강원도 오대산을 향해 출발하였다. 학교 다닐 때 난 수학여행이란 걸 한 번도 따라가질 못했었다. 돈이 없어서였다. 남들 다 수학여행 가고 난 뒤 난 혼자 뒷동산에 올라가 허망한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그런데 내가 탄 버스가 강원도에 위치한 오대산 상원사를 간다는 거였다. 수학여행지가 대부분 문화재가 위치한 곳이었는데 지금 내가 그런 곳을 가고 있는 것이다. 계절은 나무들이 모든 잎을 떨구고 나목이 되는 때였다. 상원사는 오대산 입구에서도 한참을 가야 하는 곳이었다. 택시 대신 지프차를 빌려 월정사를 지나 상원사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부처를 숭배하는 절간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내게 절간에서 뭔가를 조사한 다는 건 생소하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론 이질감이 들었다. 선배는 종무소에 들어갔고 난 상원사 법당 앞에서 기다렸다. 오대산이 코앞이다. 아래쪽은 앙상한 가지를 한 나무들이 빽빽하다. 중부능선부턴 안개가 자욱하여 산세를 알아보기 힘들다. 뽀얀 안개가 연기처럼 서리었는데 어디선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난 물끄러미 까마귀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운무 속에서 뭔가 검은 물체가 툭 튀어나왔다. 까마귀였다. 그러더니 이내 디시 운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짧은 순간의 아름다운 풍광이 내 눈에 도장처럼 콱 찍혔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금방이라도 신선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서울을 떠나올 땐 몰랐는데 상원사에선 한기가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옷을 더 껴입고 오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나의 첫 출장지의 경험은 인상 깊게 각인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선배에게 물었다. 왜 매일 옛날 건물만 그리느냐 이런 도면은 왜 그리는 것이냐 그리고 출장은 왜 다니는 것이냐고, 선배는 나의 질문에 일일이 답변해 주었다. 그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궁금증이 풀렸다. 그렇다. 나의 첫 직장은 전통건축에 특화된 고건축 설계사무실이었던 것이다. 신축을 위한 도면은 거의 드물었으며 매 건마다 오래된 문화재를 보수하기 위한 실측도면이 주종을 이루었다. 대부분의 일은 관공서와 계약을 맺어 오더를 받는 형식이었다. 그러니 한 달이 멀다 하고 문화재 현장을 찾아 실측조사를 다닌다는 것이었다. 고민스러웠다. 내가 배우고 싶은 도면은 애시당초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앞으로 난 어떻게 한담, 사무소를 그만두어야 하나 그만둔다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매일 그런 고민을 하면서도 난 퇴사를 못하였다. 그게 육 개월이 가고 일 년이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에 나도 차츰 고건축도면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선배의 도움 없이도 실측한 도면을 속도는 느리지만 혼자서 그려나갈 정도가 되었다. 시골 촌놈이 갑작스러운 서울생활에 잘 적응할 리가 없다. 눈만 감으면 고향집이 떠올랐고 부모님이 보고 싶어 견디기 힘들었다. 월급이라고 해야 한 달 방세 내고 밥값 제하고 나면 주머니에 겨우 책 한두 권 살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러니 고향에 가고 싶다고 선 듯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유일한 낙이라면 교보문고에 들어가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이는 것이었다. 사고 싶은 책은 너무 많은데 주머니에 돈은 없고 책을 사고 나면 그나마 먹고 싶은 것도 못 먹는다. 철근이라도 씹어 먹을 나이에 어느 때보다 식욕이 왕성한 때였다. 골목길을 걸어 달동네에 위치한 자취방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포장마차에서 파는 어묵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서럽게 울기도 참 많이 했다. 자취방에서 중앙청이 빤히 내려다보인다. 지금은 재개발로 다니던 직장과 자취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용비어천가’라는 이름의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다.
내 앞으로 열다섯 명이나 되던 이력서는 다 뭐였을까 하필이면 서울에서 멀고 먼 저 시골 구석에 사는 나를 직원으로 택한 까닭은 또 무엇이었을까 17:1 경쟁을 뚫고 내가 취직을 한 셈인데 나를 택한 이유가 무척 궁금하였다. 나중에 그 이유는 스스로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취직이 잘 되던 때였다. 그래서 직원이라고 뽑고 나면 석 달이 안 되어 그만두는 사례가 많았다. 더군다나 생소한 고건축설계사무소에 취직하려는 건축전공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저 시골구석에 사는 어리숙한 학생을 데려다 놓으면 서울 지리도 모르고 친인척도 없으니 금방 그만둔단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 판단은 나를 통해 확실하게 증명된 셈이다. 나야말로 소장의 잔꾀에 딱 어울릴 만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