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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문화(2022)
송은석(수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위원)
e-mail: 3169179@hanmail.net
수성구 고산동 톺아보기
프롤로그
지난 2022년 초가을, 대구시 수성구 고산 2동에서 흥미로운 마을투어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2022년 주민참여예산사업에 선정된 고산2동 주민자치위원회의 ‘고산사랑 마을투어’다. 이 투어는 고산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봄으로써 고산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나아가 애향심을 고취시키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오랜 논의 끝에 ‘고산사랑 마을투어’ 콘셉트는 다음과 같이 결정됐다.
“고산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부터 시작해 시대순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산 고유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대표 문화유산들을 살펴본다”
예를 들면 1억 만 년 전 공룡이 남긴 공룡 발자국에서부터 시작해 청동기시대 유적인 지석묘군, 고산이란 지명의 출발점인 고산[고산서당], 노변동 사직단, 문중 유산 충효재, 신매시장, 근대유산 고모역사, 현대건축물 삼성라이온즈파크 등을 둘러보고, 대구무형문화재 제1호 고산농악을 체험하는 식이다. 시범투어 포함 총 11회 진행된 ‘고산사랑 마을투어’는 성공적이었다. 투어에 참가한 주민들은 하나같이 “고산에 이런 중요한 역사와 문화가 있었다니!”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투어에 전문해설사로 참여한 필자와 함께 지면을 통한 ‘고산사랑 마을투어’를 한 번 해보자.
1억 만 년 전 ‘욱수천 공룡 발자국 화석산지’
대구시와 경산시 경계는 대체로 욱수천을 기준으로 동쪽이 경산시, 서쪽이 대구시 수성구다. 이곳 수성구 욱수동 욱수천 변에 공룡 유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억 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를 살다 간 공룡 발자국 10여 개가 남아 있는 욱수천 공룡 발자국 화석산지다. [대구 수성구 욱수동 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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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수천 공룡 발자국은 하천 바닥과 하천 변 두 곳에 남아 있다. 각기 다른 두 개 지층면에 서로 다른 모양의 공룡 발자국이 남아 있어 발자국을 남긴 공룡은 두 마리로 추정된다. 발자국 모양으로 봐서는 두 마리 모두 네 발로 걷는 초식공룡[용각류]이다. 이곳 공룡 발자국은 2001년 성명여중 지구과학 교사 박두광씨가 발견했다. 수성구에는 욱수천 외에도 매호천과 신천 수성교-동신교 사이, 지산동 계곡과 무학산 등에도 공룡 발자국이 남아 있다.
1억 만 년 전 대구는 거대한 호수였다
약 1억 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 대구를 포함한 경상도 일원은 거대한 호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호수에는 많은 양의 퇴적물이 쌓여 호수는 식물이 무성한 습지로 변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구분지는 초식공룡의 천국이었다. 먹이를 찾아 나선 초식공룡이 퇴적물 위에 발자국을 남겼고, 발자국 위에 겹겹이 퇴적물이 쌓이면서 발자국은 화석이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발자국 화석은 다시 수천수만 년 세월에 걸친 풍화작용에 의해 퇴적층이 벗겨지면서 지금처럼 화석으로 우리 앞에 드러난 것. 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공룡 발자국 화석산지는 약 100곳인데, 이 중 대구에 10여 곳, 경북에 50여 곳이 있다.
맥반석 자갈 위를 흘렀던 맑고 빛나는 욱수천과 욱수동
욱수동(旭水洞)은 약 5백 년 전 경원이란 선비의 아버지가 처음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 이 지역 하천에는 맥반석 자갈이 많았는데 그 위를 흐르는 물이 맑고 깨끗했다. 그래서 햇빛을 받으면 눈이 부실 정도로 하천이 반짝거려 ‘빛날 욱(旭)’ 자를 써서 욱수천이라 하고 그 동네를 욱수동이라 이름했다. 욱수천은 총길이가 약 6km에 이르는데 봉암골로 이어지는 상류는 깊은 계곡을 형성하고 있으며, 중·하류는 아파트 단지와 들판 사이를 흐르고 있다. 인근 경산은 우리나라 최대 맥반석 산지요, 맥반석 온천 상대온천이 있어 욱수천 유래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청동기인이 남긴 ‘사월동 지석묘군’
수성구 사월동에는 두 곳의 지석묘군이 있다. 욱수천을 기준으로 서쪽 사월보성아파트 107동과 108동 사이에 4기가 있고, 동쪽 사월교회 옆에 6기가 있다. 그런데 큰 바윗돌처럼 보이는 이 돌덩이는 그냥 돌덩이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4천 년 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인 사월동 지석묘(支石墓)[대구시기념물]다. 지석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인돌을 말한다. [대구 수성구 사월동 464]
청동기시대 대표 유적 고인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선사유적 중 하나다. 형태는 자연석을 사용해 지상 또는 지하에 매장시설을 만들고, 그 위에다 덮개돌 역할을 하는 윗돌을 얹은 형태다. 고인돌은 ‘돌을 괴다’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다. 우리나라를 ‘고인돌의 나라’라고도 한다. 이는 지구상에 현존하는 6만기의 고인돌 중 절반이 넘는 3만기 이상이 한반도에 집중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인돌이라는 표현과 관련해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다. 고인돌을 영어로 하면 ‘돌멘[dolmen]’인데 우리말 ‘돌멩이’와 발음이 비슷하다. 또 고인돌을 영어 발음으로 표기하면 ‘Go in’ + ‘Dol’이 되니 ‘돌 안으로 들어간다’란 의미가 되고, 고인돌을 한자로 표기하면 옛사람의 돌, ‘古人乭’이 되는 것도 흥미롭다.
고인돌의 종류와 기능
고인돌은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蓋石式)으로 구분한다. 북방식 고인돌로 알려진 탁자식은 탁자 다리처럼 생긴 받침돌을 세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것이다. 남방식 고인돌인 바둑판식은 다리 역할을 하는 받침돌 대신 작은 굄돌을 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것이고, 개석식은 받침돌이나 굄돌 없이 땅 위에다 바로 덮개돌을 올린 것이다. 고인돌 기능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청동기시대 부족 지배층의 무덤이라는 설이다. 그 외 제사를 지내는 제단, 혹은 영역이나 경계 등 무엇인가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 등이다.
고인돌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고인돌은 종류에 따라 만드는 방법도 달랐다. 탁자식 고인돌은 먼저 받침돌을 세우고 받침돌 높이만큼 흙을 쌓아 흙무더기를 만든다. 그 위로 덮개돌을 끌어올린 다음 앞서 쌓은 흙을 제거한다. 마지막으로 시신을 받침돌 사이 무덤방에 놓고 돌로 입구를 막아 고인돌을 완성했다. 반면 바둑판식과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흙으로 덮은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얹는 식이다. 즉 탁자식은 지상에 무덤방이 있고, 바둑판식과 개석식은 지하에 무덤방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지명 유래가 된 ‘고산’과 ‘고산서당’
대구시 수성구 동쪽 끝에 ‘고산(孤山)[95m]’이 있다. 들판 사이에 홀로 외로이 솟아 ‘외로운 산’ 고산이다. 이 산 북쪽 끝자락에 유서 깊은 서당이 하나 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최고 유학자로 알려진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강학한 것으로 알려진 고산서당[서원][대구시문화재자료]이다. [수성구 성동로37길 39-3(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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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서당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퇴계 이황[1501-1570]과 우복 정경세[1563-1633]를 기리는 서당이다. 고산서당은 1560년(명종 15) 건립된 ‘고산서재’로부터 시작됐다. 이후 ‘고산서원’으로 승격, 임란 때 소실·복원됐다가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1868년] 때 훼철됐다. 1879년 강당만 다시 복원해 ‘고산서당’이라 이름하고, 2020년 사당 숭현사(崇賢祠)를 복원했다. 하지만 2021년 발생한 화재로 강당 건물은 사라지고 지금은 사당만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과거 고산서원은 강당, 사당, 동·서재, 문루 등을 모두 갖춘 서원이었다. 서당 이름 ‘고산’과 문 이름 ‘구도(求道)’는 이황이 직접 지었다. 사당 숭현사는 2020년 복원 때 기존 이황, 정경세 외에 동고(東皐) 서사선[徐思選·1579-1651]을 추가 배향했다. 현재 ‘고산서원서당유림회’가 중심이 되어 서원 승격을 추진 중에 있다.
수성구 ‘고산’ 지명 유래가 된 고산서당
대구와 경산 사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고산으로 불렸다. 고산은 고려·조선·근대기까지 오랜 세월 경산에 속했다가 1981년 대구시 수성구에 편입됐다. 본래 고산이란 지명은 고산서당이 자리한 고산에서 유래됐다. 하지만 고산이 지명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은 이곳에 세워진 고산서당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황의 후손이자 조선 말 경산 현령[시장]을 지낸 이만승이 지은 ‘고산유허서당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경산은 영남의 작은 고을에 불과했지만, 고산에 나의 선조 퇴계 선생이 오시면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는 이름 없는 작은 산, 고산이 퇴계라는 인물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는 의미다.
퇴계 이황은 정말 고산에서 강학을 했을까?
이황이 고산에서 강학(講學)했다는 사실을 두고 현재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강학 사실을 의심하는 쪽에서는 이황이 고산에서 강학을 했다면 본인 혹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 어딘가에 관련 내용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것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반면 강학 사실을 신뢰하는 쪽에서는 ‘고산유허서당기, 고산서당 상량문, 고산서원 동·서재 중수기, 구도문기, 고산서원 훼철시장, 고산서당 창건기사, 강학유허비’ 등 고산서당에 남아 있는 모든 기록물에 빠짐없이 이황의 강학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148년간 고산서원 사당터를 지킨, ‘퇴도이선생우복정선생강학유허비’
이 비는 1872년 당시 경산 현령 이헌소가 비문을 짓고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비를 세운 세 가지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과거 이곳에서 이황, 정경세 두 선생이 강학한 사실이 있었음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고, 둘째는 서원철폐령 때 사라진 서원 터를 표시하는 것, 셋째는 명당이라는 이유로 이 터를 탐내는 풍수가들을 막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이자 명풍수였던 두사충이 자신의 묏자리로 처음 정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묻히지 못하고 수성구 만촌동 모명재 뒷산에 묻혔다. 이 비는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 이후 148년간 빈터로 남은 고산서원 사당 자리를 지켜오다 2020년 사당을 복원할 때 사당 옆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야외 역사박물관, 고산
수성구 성동에 있는 고산은 야외 역사박물관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산 정상부에는 길이 약 2km에 이르는 삼국시대 토성(土城)인 성동산성이 있고, 남쪽 능선에는 와요지[瓦窯址·기와나 그릇을 굽던 가마터]가 있으며, 남쪽 산자락과 들판에는 고분군과 지석묘 등이 많이 있었다. 또한 고산 남동쪽 정상에는 조선시대 군사통신시설인 성산봉수(城山烽燧)가 있었고, 북쪽 끝자락에는 고산서당[서원]이 있다. 현재는 고산서당을 제외한 대부분 유적이 경작 등의 이유로 훼손이 되었지만 아직도 흔적은 찾아볼 수 있다. 참고로 성동(城洞)이란 지명도 ‘성이 있는 동네’에서 유래됐다.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 ‘노변동 사직단’
수성구 노변동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남쪽 유니버시아드로 너머에 잘 가꿔진 잔디 동산이 있다. 이 동산 정상부에 흔히 잘 볼 수 없는 특이한 유물이 있다. 조선시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올렸던 노변동 사직단(社稷壇)[대구시기념물]이다. [수성구 노변동 4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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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왕조국가시대에는 왕은 물론 백성에게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은 농사였다. 그래서 중앙은 물론 지방에서도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런 류의 제사가 있었는데, 이 제사들이 ‘사직제’란 이름으로 정비된 것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와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서울 도성은 물론 전국 300여 고을마다 지방 사직단을 조성해 사직제를 지냈다. 사직제는 토지신인 ‘사’와 곡식신인 ‘직’에게 평화와 풍작을 기원하는 제사이며, 사직제를 지내는 제단이 곧 사직단이다. 노변동 사직단은 1999-2000년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했다. 현재 우리나라에 제단 형식으로 복원된 사직단은 7-8곳에 불과하다. 이중 조선시대 사직단 원형에 가장 가까운 사직단이 노변동 사직단이다. 발굴 당시 인위적 훼손 없이 허물어진 모습 그대로 발굴됐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복원이 가능했다.
조선시대 사직제는 임금과 고을수령이 지낸 국가 공인 제사였다
조선시대 편찬된 국조오례의에는 제사를 대사·중사·소사·주현제 등으로 구분했다. 이중 가장 중요한 제사인 대사는 사직대제와 종묘대제였다. 사직대제는 국토를 관장하는 토지신과 곡식신에 대한 제사이며, 종묘대제는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제사였다. 그래서 두 제사는 국가에서 주관했고 제주(祭主)는 임금이었다. 그런데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신 종묘는 서울 한 곳에만 있었지만 사직단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300여 고을에 모두 있었다. 그래서 서울 사직제는 임금이 직접 지냈지만 지방 사직제는 임금을 대신한 고을수령이 지냈다.
“전하!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
사극에서 종종 접하는 대사 중에 “전하!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가 있다. 전쟁과 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 등장하는 대사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며, 사직은 국토를 관할하는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다. 따라서 종묘와 사직은 한 왕조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다. 우리나라와 중국에는 예로부터 ‘좌묘우사(左廟右社)’란 말이 있었다. 임금이 거처하는 궁궐을 등지고 섰을 때 왼쪽[동쪽]에 종묘가 있고 오른쪽[서쪽]에 사직단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전 왕조의 종묘와 사직단을 없애고 새 왕조의 종묘와 사직단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만큼 왕조국가시대엔 종묘와 사직단이 중요했던 것. 지방 사직단 경우도 좌묘우사 원칙에 따라 관아의 오른쪽에 사직단을 세웠다.
과거·현재·미래가 공존, ‘충효재·모운당·정충각·정효각’
대구시 수성구 노변동 노변공원과 월드메르디앙 아파트 사이에 충효재(忠孝齋) 혹은 정충각(旌忠閣)·정효각(旌孝閣)이라 불리는 옛 건물들이 있다. 이곳 노변동에서 400년 세거한 청주정씨 노변문중 재실이자 정려각이다. [수성구 노변공원로 7길 7(노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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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대구 수성구 노변동 출신으로 충과 효를 실천해 임금으로부터 각각 충신과 효자 정려를 받은 노암 정동범[1710-1793]과 그의 아들 면암 정지언[1740-1814]을 기리는 재실과 정려각(旌閭閣)이다. 재실로는 모운당(慕雲堂)과 충효재 두 동이 있다. 모운당은 옛 재실이고, 충효재는 1996년 모운당 일원을 정비할 때 모운당을 업그레이드해 새롭게 창건한 새 재실이다. 다시 말해 모운당엔 문중의 과거 역사를 담고, 충효재엔 문중의 현재와 미래를 담고자 한 것. 기존의 정충각과 정효각도 충효재를 창건할 때 위치를 조금 옮겨 지금의 모습으로 중수했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잠시 붓을 놓고 칼을 들어도 된다, 충과 효를 실천한 정동범
정동범은 이인좌의 난[1728년] 때 19세 나이로 칼을 들고 일어나 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 후 성주 목사였던 이보혁이 그의 공을 치하하자 그는 모든 공훈을 사양하고 고향 노변동으로 돌아왔다. “선비는 군자로서 밝은 세상을 만나 마땅히 인륜을 밝히고 학문으로 이름이 나야지 군공으로 이름이 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이후 그는 노변동에 살면서 부모 봉양과 강학으로 여생을 보냈으며 충 못지않게 효행으로도 세상에 이름이 났다.
하늘이 내린 효자, 정지언
정동범의 둘째 아들 정지언은 하늘이 내린 효자였다. 한번은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백약이 효과가 없자, 조왕신과 북두칠성에게 지극정성으로 빌었다. 그날 밤 그의 꿈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타나 말하길 “네 아비의 병에는 개기름이 즉효약이다”고 했다. 놀라 잠에서 깨어나 보니 호랑이 한 마리가 다리 여섯 개 달린 개 한 마리를 물고 와 마당에 던져주고는 사라졌다. 그 개를 지쳐 기름을 내 아버지께 드리니 아버지 병이 나았다고 한다. 또 아버지 상 때 묘소에 있는 소나무를 붙들고 통곡하니 소나무가 고사했다가 3년 상이 끝나자 다시 살아났고, 상중에 슬픔으로 정신을 잃자 산신령이 나타나 약물을 먹여주어 기력을 회복했다는 등의 많은 일화가 전한다.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 ‘고모역사’
수성구 시지동에서 고모동을 지나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로 이어지는 고모령 고갯길 한편에 운영이 종료된 옛 고모역사(顧母驛舍)가 있다. 하지만 고모역은 폐역이 아닌 ‘고모역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해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수성구 고모동 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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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개통한 고모역은 통근열차와 완행열차 등이 정차했던 동대구역과 반야월역을 잇는 대구선의 작은 역이었다. 한때는 농산물을 유통하려는 상인들, 통근열차를 이용하는 직장인들과 학생들, 인근 군부대 군인들 그리고 입영열차를 이용하려는 이들로 북적이던 역이었다. 하지만 대구선이 폐선 되면서 2004년 여객운송 종료, 2006년 화물운송이 종료되면서 역운영이 중단됐다. 이렇게 폐역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질뻔한 고모역은 2018년 ‘고모역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해 옛 추억과 함께 새로운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참고로 고모역은 1949년 발표된 가수 현인의 노래 ‘비 내리는 고모령’, 1969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비 나리는 고모령’의 배경이기도 하다.
다양한 고모령 스토리
고모역이 자리한 고모동과 고모령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지명유래가 전한다. 크게 나눠보면 오래된 전설과 일제강점기·한국전쟁 같은 근대사와 관련 있는 스토리로 나눠진다. 스토리를 요약해 소개하면 이렇다.
○ 모봉·형봉·제봉 전설
아주 오랜 옛날 고모동에 힘이 센 오누이가 살았다. 하루는 오누이가 산 쌓기 내기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빠보다 누이가 더 빨리 산을 쌓았다. 오빠는 저고리 앞섶으로 흙을 날랐지만 누이는 치마폭으로 흙을 옮겼기 때문. 결국 심술이 난 오빠는 커다란 바위로 누이가 쌓은 산 정상을 납작하게 눌러버렸다. 지금도 형봉(兄峰)은 정상이 뾰족하고 제봉(弟峰)은 평평한데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이 모습을 본 엄마는 속이 상해 집을 나가 버렸다. 한참을 걷다가 어느 고개에 이르러 아이들이 생각나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이 고개가 ‘되돌아볼 고’, ‘어미 모’ 고모령, 부근 정상이 모봉(母峰)이다.
○ 엄마와 아들의 이별고개
일제강점기 때 지금의 고산지역에 한 홀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대구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홀어머니는 매일 대구 감옥에 면회를 갔다가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고모령에 이르면 꼭 뒤를 돌아 아들이 갇힌 대구 감옥 쪽을 바라보았다. 이 고개만 넘으면 더 이상 대구 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어머니가 뒤돌아본 고개라는 뜻에서 고모령이란 이름을 얻었다. 또 일제강점기 때 징용으로 끌려가는 아들, 한국전쟁 때 징집된 아들, 그리고 군입대를 앞둔 아들과 엄마가 서로 뒤를 돌아보며 헤어진 곳이라고 해서 고모령이란 이름을 얻었다.
○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엄마를 돌아본 동삼(童參)
옛날 고모동에 홀어미를 모시고 어린 아들 하나를 둔 금슬 좋은 부부가 있었다. 어느 날 홀어미가 중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했다. 이때 탁발을 하러 온 스님이 “댁의 아들을 삶아 어머니께 드리면 병이 낫는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부부는 “아이는 다시 낳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한 번 돌아가시면 다시는 볼 수 없다”며 결국 아들을 희생시키기로 했다. 부부가 펄펄 끓는 가마솥에 아이를 넣는 순간 아이가 엄마를 쳐다보면 환하게 웃었다. 한참을 솥뚜껑을 부여잡고 울던 부부에게 갑자기 바깥에서 “엄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멀쩡하게 사립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부부는 깜짝 놀라 솥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아이가 아닌 아이로 둔갑한 천년 묵은 산삼, 동삼(童參)이 들어 있었다.
대구삼성라이온즈 파크
속칭 ‘라팍’이라고 불리는 삼성 라이온즈 홈구장으로 2016년 준공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팔각형 야구장으로 미국 메이저리그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홈구장인 ‘시티즌스 뱅크 파크’를 벤치마킹했다. 특이한 점은 국내 대다수 타 구장과는 달리 홈팀 덕아웃이 3루 쪽에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예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시절 건축구조상 햇빛이 많이 드는 1루 쪽을 피해 3루 쪽에 홈팀 덕아웃을 설치한 전통을 이은 것이다. 동시에 홈팀을 고려해 전광판도 중견수 뒤편이 아닌 홈팀 덕아웃 맞은 편인 우익수 쪽에 있다. 라팍은 수용인원이 29,000명으로 우리나라 야구장 중에서 수용인원이 가장 많은 야구장이며, 내야 관중석과 그라운드의 거리가 18m로 매우 가깝다는 특징이 있다.
대구무형문화재 제1호 고산농악
대구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고산농악은 ‘웃각단·아랫각단·숲골각단·대밭각단·꽁지’ 등 수성구 대흥동 옛 다섯 마을을 배경으로 자생한 농악이다. 고산농악은 1990년대 고산지역의 급격한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맥이 끊어지지 않고 현재까지 잘 유지 전승되고 있다. 마을당제[동제]와 함께 행해진 고산농악은 ‘당산제굿’, ‘지신밟기’, ‘판굿’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산제굿[천왕내림굿]은 풍농·안택·가축무사 등 지역민들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의례로 상당산제굿(성지골)·중당산제굿(대밭 뒤)·거리굿·하당산제굿(숲골각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신밟기는 당산제굿을 통해 내린 신을 모시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신을 달래고 안녕을 기원하는 것으로 문굿·성주굿·조왕풀이·장고방풀이·용왕풀이·고방풀이·방앗간풀이·마굿간풀이·마당풀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굿은 고산농악의 마지막 절차로 주민 모두가 한데 어울려 대동제를 즐기는 자리다. 모두 12마당으로 입장·인사·태극놀이·이열놀이·오열놀이·닭쫓기·오동놀이·멍석말이·농사굿·판굿·살풀이·인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산농악만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일반 고깔의 두 배 크기인 큰 고깔을 들 수 있다.
에필로그
고산동을 가리켜 속칭 ‘고산’이라고도 하고 ‘시지(時至)’라고도 한다. 기성세대는 주로 고산, 젊은 세대는 시지라고 부른다. 이는 1990년 초 이 지역 택지개발이 시작될 때 ‘고산’이 아닌 ‘시지택지개발지구’로 네이밍한 탓이다. ‘고산’ 보다는 ‘시지’가 어감이 좋다는 것이 이유였다. 시지란 지명은 조선시대에 지금의 시지동에 있었던 관립숙박시설 ‘시지원(時至院)’에서 유래됐다. 고산이든 시지든 어쨌든 신도시로 탈바꿈한 고산의 과거 역사와 문화는 찬란했다. 역사와 문화에서는 평지돌출(平地突出)이 힘든 법이다. 어떤 식으로든 뒤를 받쳐주는 뒷배경이 있어야 뭐라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린 이번 ‘고산사랑 마을투어’를 통해 고산이 지금처럼 신도시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산 고유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동시에 고산은 앞으로도 무한성장의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았다. 외로운 산 고산이 퇴계란 인물을 얻어 세상에 이름을 낼 수 있었던 것처럼 고산의 미래 역시 사람에 달렸다. 이번 ‘고산사랑 마을투어’에 참여한 주민 모두가 고산 홍보대사가 되어 주었으면 더 바랄나위가 없을 것 같다. 고산은 필자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10여 년을 고산[삼덕동]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시지택지개발 당시 이곳에서 많은 양의 고대국가 압독국 유적·유물이 출토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