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남성의 석림현은 소수민족인 '이족'의 자치구역이라고 한다.
운남성의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수가 많아 35만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석림관광구 주차장 앞에 재래 시장이 서고 있었다.
가무잡잡하지만 건강하고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이 갖가지 채소와 과일, 곡식들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시골 장터의 모습과 별반 다름이 없으나, 한 가지, 모든 거래는 저울로 달아서 한다는 것이었다.
'호박 한 개에 얼마' 도 아니고, '배추 두 포기에 얼마' 도 아니었다.
호박, 배추, 무 할 것 없이 흥정이 붙으면 무조건 저울에 올려 달아 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석림 공원 입구에는 수 십 명씩의 이족 처녀들이 화려한 전통의상을 차려 입고, 군데군데 줄지어 앉아 있는데, 모두 명찰을 달고 있었다.
모두들 관광객을 안내하는 가이드들이었다.
이족의 여자들은 머리에 뿔이 달린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뿔이 둘이면 처녀이고, 하나이면 약혼한 사람, 기혼자는 뿔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뿔을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남자가 이 뿔을 만지는 것은 '청혼'을 의미한다.
청혼을 받은 처녀는 남자가 마음에 들면 그 뿔을 뽑아서 남자에게 주게 되는데, 이 때 남자는 이를 절대 거절할 수가 없다.
한국 남자가 뿔을 건드리면 백발백중 뽑아 주게 되어 있단다.
뿔을 받은 남자는 그 처녀와 결혼하여 데리고 가던가, 그 처녀의 집에 가서 최소한 3년간을 살아 주어야 한다.
그게 싫으면 다리라도 하나 내놓기 전에는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행여 실수라도 하여 그 뿔을 잘 못 건드리는 날에는 최소한 다리 하나는 내 놓아야 한다?"
이로부터 '불조심'도 '개조심'도 아닌 '뿔조심'이 운남 여행의 키워드가 되었다.
석림의 진입로는 형형색색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가히 꽃의 도시라 불릴 만하였다.
꽃의 종류는 대부분이 알 만한 금잔화, 팬지, 베고니아, 샐비어, 페튜니아 등이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선 시절을 달리 하여 피는 꽃들이 여기선 한꺼번에 어우러져 피어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바위가 숲을 이루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호숫가에 큰 나무가 노란 꽃을 매달고 있었다.
눈에 익은 꽃이라 자세히 보니 모감주나무였다.
화원유원지의 모감주나무 군락이 생각났다.
일 년 내내 봄이라 하여 春城으로 불리는 이유가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天下第一寄觀'이라는 석림으로 들어섰다.
석림 역시 아득한 옛날에는 바다 밑이었을 것이다.
판구조이론에 따르면, 아시아 대륙판과 인도판이 부딪히게 되고 접합부가 융기하면서 히말라야 산맥이 형성되었다는데...
이 곳도 히말라야 산맥의 연장선상에 있는 지대인가 확실히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바다 밑이 융기되어 산이 되고, 그리고 또 기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다 밑에서 형성되었던 석회암 층은 빗물에 녹아 내리고,
녹다가 남아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이 기기묘묘한 바위의 군상들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수의 빗방울들이 이 바위들의 틈을 파고들었을까?
모진 풍상을 견뎌낸 바위의 숲, 아니 억겁의 세월의 숲 속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억겁의 침묵이 인생 백년 심사를 웃고 있는 듯하다.
바위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정말로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많다.
입구에서 제일 먼저 증명사진 장소를 제공하는 낙타 바위,
운남의 모든 코끼리들의 대장 같아 보이는 코끼리 바위,
두드리면 종소리가 나는 종석(손바닥으로 치니 진짜 종소리가 났다),
석림의 중앙에 있으면서 심장의 모양을 닮아서 이를 만지고 지나가면 심장이 튼튼해진다는 심장석,
몇 번을 쓰다듬으며 사진도 찍어 두었다.
아! 참으로 연약한 짐승이여!
여기서도 바위 조각을 뜯어내어 팔고 있었는데, 구향동굴에서와는 달리 야미로 하는 녀석 같았다.
슬며시 한 번 관심을 보여 보았더니, 도롱뇽같이 생긴 무슨 파충류의 화석을 들고 와서 끝까지 달라붙었다.
40위안(6,000원, 구향동굴의 10분의 1)이면 가짜라 하더라도 기념이 될 만하다는 사람들의 부추김도 있고 해서 돌 조각을 또 하나 샀다.
중국 와서 지금까지 산 것이 돌 조각 두 개다.
이 곳 석림 뿐만 아니라 운남에는 굵은 실 같은 것으로 짠 가방이나 손지갑 따위를 많이 팔고 있다.
가게마다 진열해 놓고 있고, 관광지나 거리의 행상들도 이런 물건들을 엄청 들고 다니며 판다.
그런데, 그 가격이 매우 싸다는 것이다.
기저귀 가방 만한 것을 1달러라 외치고 다니니 말이다.
분명히 손으로 짰을 것 같은 데 무슨 재료를 쓰길래 이렇게 싼 것인지?
석림 입구에서 이족 여인들이 모여 앉아 무슨 풀잎 같은 것을 열심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손바닥 보다 좀 작은 나뭇잎의 뒷면에 희고 진득진득한 물질이 붙어 있는데,
이것을 여인들이 뜯어내면서 손으로 비벼서 실을 뽑아내고 있었다.
옛날에 할머니가 솜 고치에서 물레로 실을 자아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 나뭇잎은 유카리아 나무의 일종에서 채취하는 잎이라 한다.
유카리아는 유럽과 호주 등지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이 곳 운남성은 고산지대이고, 석회암이 많은 지역이라 식물이 잘 자라지 않기 때문에 이 유카리아를 유럽에서 수입해다 심었다고 한다.
지금은 길가의 가로수나 산등성이 곳곳에서 잎이나 가지의 모양은 수양버들 비슷하며, 몸통은 목백일홍(사루스베리)처럼 껍질을 벗고 있어, 흐느적거리는 여인의 누드를 연상시키는 나무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유카리아인데, 이 유카리아의 일종의 나뭇잎의 뒷면에 이런 물질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나뭇잎은 지천으로 많고, 무진장하게 있는 것이 사람이고 하니, 이렇게 만든 물건이 쌀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이런 물건은 싼 것이라고 업신여길 것은 아니란 생각을 해 본다.
우리 나라에서 저렇게 만들면 얼마를 받고 팔아야 할까?
십만원? 삼십만원?
석림에서 다시 곤명으로 돌아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 길을 뒤로 돌아 석림을 지나 곧장 가면 베트남으로 가는 길이다.
베트남까지 10시간 정도 면 갈 수 있단다.
계곡으로 버스가 달리는데, 까마득히 위쪽에 철도가 보였다.
곤명에서 베트남으로 가는 철도인데, 1903년에서 1909년에 걸쳐 프랑스에서 건설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철도의 침목 한 개당 한 사람의 중국인이 죽어갔다고 하는 피눈물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며 오늘도 기차는 달리고 있다.
이 산골의 할머니가 곤명에 나가 새끼돼지를 사 올 때도 이 기차를 타고 오게 되는데, 오르막을 오를 때 기차의 문이라도 열릴라치면 새끼돼지가 그 열린 문으로 뛰어내려 도망가고,
할머니가 뒤따라 뛰어내려 그 새끼돼지를 잡아 가지고 다시 올라타고 오기도 했단다(믿거나 말거나 ; 필자 주).
어린 시절 시골의 기차와 관련된 동네 형들의 무용담이 생각난다.
오입(그 때는 가출하는 것을 오입이라 했다 ; 필자 주)을 가서 돈이 떨어지면 야매(정확한 발음은 야미(闇)일 것임 ; 필자 주)로 기차를 타고 다니는데, 차장이 검표를 하러 다가오면
앞쪽 칸으로 가서 뛰어 내려서 꽁무니 칸으로 다시 올라타곤 한다는 것이었다.
"하이고, 그 차장들은 마카 등신인강 꼭 뒤칸에서부터만 검표를 하게?"
이 기차를 타고 베트남 쪽으로, 또 버스를 타고 미얀마 쪽으로 가면 많은 소수민족의 마을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소승불교를 믿는 타이족도 있고,
2층집을 짓고서 1층에는 가축을 키우고 2층에는 사람이 거주하는 와족이 있는데, 2층에서 변을 보면 그대로 일층의 가축에게로...제주도 통돼지가 생각키우는 대목이다.
곤명 서쪽의 대리시를 중심으로 자치주를 형성하고 사는 백족은 흰 옷을 즐겨 입으며, 이 곳에서 나는 돌을 대리석이라 부른다.
대리석은 이곳의 대리석과 이태리대리석이 좋은데, 재질은 이태리 대리석이 좋지만, 무늬는 이곳의 대리석이 뛰어나다고 한다.
여강 쪽에 사는 나시족은 여자들이 매우 강하여 남자들을 지게 같은 데에 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 곳의 남녀는 결혼 전에 동거를 하게 되는데, 아이를 낳으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은 과부촌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만약 나그네가 이 과부촌에 잘 못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몇 명의 여자들이 달랑 들고 들어가 버리는 수가 있단다.
며칠 후 코피철갑을 하고 기어 나오기도 하고, 어쩌다가는 그냥 없어져 버리기도 하고...
그래도 '이 곳에선 그만' 이라는 무시무시한 곳도 있다니...
"코피만 각오한다면 한 번 가 봐? 그러나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면... 아이고 안 되겠다."
이들이 사는 여강의 '옥명설산'은 해발 5,000미터 정도의 만년설이 덮인 산으로 이 산 기슭에 세계 100대 골프장 중의 하나인 여강골프클럽이 있고, 이 산에서 나는 송이가 여강송이인데 중국의 송이 가운데서 가장 비싸게 팔리며, 일본 천황가에 납품되는 것이라 한다.
한데, 이 여강송이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돼지의 먹이로 쓰였다고 한다.
다양한 장례 풍습을 가지고 있는 '장족'도 있다.
화장과 매장은 그래도 현대적 방식이고, 사체를 물에 띄워서 고기가 뜯어먹게 하는 수장이나, 높은 돌이나 나무 위에 얹어 놓아서 새들이 먹게 하는 천장(풍장 또는 조장이라고도 부름 ; 필자 주)의 고대적인 풍습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우리의 고대 장례 풍습에도 천장이 있었다).
여기서 새를 잡다간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단다.
새를 사람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매개체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늘을 숭배하는 천신사상은 도교의 중심사상이라 할 수 있는데, 원래는 고대의 민간 신앙과 노장사상(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 사상)이 결합하여 종교의 형태를 갖춘 것이 도교이며, 도교의 주신을 원시천존 혹은 옥황상제라 한다.
도중에 청과시장이 있었다.
상당히 큰 건물이 있으나 건물내부는 폐허처럼 보였고, 건물 앞쪽의 도로변 공터에 수십명의 청과상이 줄지어 노점을 열고 있었다.
주로 복숭아가 많고, 나머지 과일의 종류나 모양은 우리 나라와 비슷하지만 럭비공 모양의 것은 못 보던 과일인데 저게 '망고'인가 하는 것이지 싶다.
노점 뒤쪽에 줄지어 서 있는 경운기에 호루(천막)를 씌운 간이 자가용 세단 안에는 어린애들이 놀고 있는데, 그 중 한 놈은 얻어터졌는지 울면서 한 손으로 콧물을 닦으면서 한 손으론 고추를 주무르고 있었다.
"아이고, 저거 복상 까끄라기 만지고 사타리 주물러 가주고 우얄라 카노?"
경험 있는 사람은 안다. 그 복숭아 까끄라기의 비밀을.
복숭아 3개에 9원(1,350원) 달라 하였는데, 아마 가이드가 값을 깎아서 사는 모양이었다.
복숭아는 껍질이 잘 까지고, 물도 많고 맛이 아주 좋았다.
어제 저녁 일찍 잠을 잤던 탓에 오늘은 차창으로 지나는 풍경을 좀 더 음미할 수 있다.
도로변 곳곳에 주유소들이 굉장히 큰 규모로 설치되어 있고, 주유하는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고 종업원만 몇 명씩 주욱 대기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 대부분 주유소의 풍경이다.
주유소는 모두가 국영이란다.
운남성에는 상당량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지만 개발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만디, 언젠가 전 지구의 석유가 고갈되었을 때, 그 때를 위하여?
무섭다.
'汽車修理(기차수리)' '實力修理廠(실력수리창)'
세멘 비름팍에 얼룩덜룩 페인트로 이런 글씨를 써 놓고 그 밑에서 무엇들을 열심히 두드려대고 있는데, 도저히 씌어진 글씨처럼 그리 실력 있게 보이지는 않는다.
무슨 철도청 산하 정비창인가 싶겠지만, 이 곳들이 자동차 정비소들이다.
(汽車;자동차, 火車;기차)
'洗車加水'라고 씌어 있는 곳도 있는데, 세차와 간단한 정비도 하는 곳이다.
'온천장'이라 쓰인 간판이 보이고, 그 앞에는 택시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다.
그 택시라는 게 전부가 삼발 오토바이에 캡을 만들어 얹어서 4명 정도의 승객을 태울 수 있게 만들어져 있는데, 이 곳의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의 하나다.
북한에서 운영한다는 식당과 한약판매소를 겸하고 있는 '度假村'이란 건물로 들어갔다.
북한 정부와 연변의 조선족 자치정부, 그리고 중국당국의 합작형태라고 한다.
즉 북한에서 돈과 약재 등을 대고, 연변에서 운영자와 판매원 등 인력을 파견하고, 중국 당국에서는 허가 내지 감독권에 의거한 지분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유창한 표준 발음의 선전원이 약 선전을 하였다.
김일성이 살아 있던 시절 김일성 장수문제연구소에는 주치의가 무려 1,700명 있었는데, 이들이 이제는 외화벌이 일꾼이 되어 약장사에 나섰다고 하면서, 그 효과야 믿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열을 올린다.
몇 가지의 북한 말 알아맞히기 퀴즈도 내면서 관심을 모으려고 한다.
"전구(불알), 형광등(긴불알), 샹들리에(떼불알) 등은 익히 알려진 바이고,"
"팬티, 고추, 여성의 거시기를 북한 말로 뭐라 할까요?"(답은 개별 문의 요망 ; 필자 주)
우황청심원의 원방이라는 '공증단'이 한 통에 100달러(120,000원), 또 무슨 단이라는 것이 200달러이며 국내의 신용카드도 되고, 여행사가 보증을 해 주면 외상으로도 줄 수 있으니 가져가서 자세히 감별해 보고 나서 돈을 부쳐 줘도 된다고 해 샅는다.
약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였다.
출입문 위의 유리에 김일성체의 연붉은색 글씨로 '모란봉 식당'이라 씌어진 곳으로 들어가 한식 메뉴로 점심을 먹었는데, 쌈 된장이 자꾸만 추가 주문되고 있었다.
운남민족촌에는 20여개 소수민족의 전통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각 민족의 건축물, 생활 도구, 의상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민속 춤 공연도 했다.
운남성 박물관에 도착했다.
공룡의 발자국화석과 뼈가 전시되어 있고, 공룡의 화석은 미국, 캐나다, 영국 그리고 중국에서 많이 발견되었다고 억센 북쪽 사투리를 쓰며, 표정도 굳어 있는 조선족 해설사가 설명을 해 준다.
이 공룡들은 지금으로부터 6,500만 년 전에 멸종이 되는데, 그 멸종의 원인으로
1) 위성 충돌설
2) 육식공룡의 과다 번성
3) 지구의 사막화
4) 빙하기설 등의 학설이 있다고도 설명해 준다.
현재까지는 '빙하기설'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안다.
고고실에는 기원전 500년 무렵 의 청동제 저금통과 청동제 북(징?) 등이 전시되어 있고, 기원 전 200년경의 왕족의 묘 발굴 모형이 전시되고 있으며, 그 속에 조개껍질(화폐?)과 비취
등이 있는 것이 보이고, 청동제 농기구와 철기 및 철기의 금형 등도 보인다.
이 곳 운남지방의 B.C.200년경은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이행해 가는 과도기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 때의 한반도에서는 북 쪽의 위만조선에서 일부 철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남쪽의 삼한(진한, 마한, 변한)은 아직 청동기시대였을 것이다.
따라서 철기 시대의 도래가 한 반도 보다는 이 곳 운남지방이 약간 앞서거나 거의 동시대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청동기와 철기 시대의 유적에서는 거의 토기가 함께 발견되는데, 이 곳에서는 토기의 흔적은 전혀 없는 것이 다르다.
청동기와 철기 시대에 '토기'의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이 이상하다고 해설사에게 물어 보았으나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전시실보다 판매실에 많은 물건들이 있었다.
사람들도 많이 북적대고 있었고, 예쁘고 상냥한 말씨의 조선족 판매원도 있었다.
각종 조각이나 공예품과 그림, 자수, 의류, 차등을 팔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박물관인지 백화점인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오후 6시경의 시가지 도로에는 퇴근하는 자전거의 행렬이 볼 만하다.
자전거의 모양도 가지가지, 타는 사람의 모습도 형형색색이다.
아직 날렵한 모양의 기어 자전거나, 경기용 자전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작업복을 입은 사람, 신사복에 넥타이를 맨 사람, 대부분 바지를 입었으나 치마를 입은 여성도 있고, 미니스커트에 자전거를 타는 여성도 없지 않다.
미니스커트 입고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다가 접촉사고를 내는 수가 많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뒤쪽에 달린 치마 지퍼가 열려 내복을 허옇게 보이며 자전거를 열심히 타고 가는 여성이 있으나, 뒤따라가는 아무도 구경만 하고 갈 뿐 얘기를 해 주지는 않는 모양이다.
누군가가 "저 여자 자꾸 열린 것도 모르고 가는 거 봐라." 하니 버스의 저 쪽 줄에 앉아 있던 사람들까지 이 쪽 창가로 와서 죽 내다본다.
"나 참 못 말린다. 못 말려. 자꾸만 열려 갖고 뭐가 빈다고!"
여기는 큰 도로에는 대부분 자전거 전용차선이 있고, 자전거의 통행 방법도 다른 것 같다.
한국에서 자전거는 신호등 앞에서 내려서 끌고 보행자 신호에 따라서 건너야 하지만,
이 곳에서는 차량과 같은 신호에 따라 직진도 하고 좌회전도 하고 하는 것이다.
차량의 통행 방향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우측통행이다.
이 곳의 거리에는 서양 사람은 정말 보기가 힘들었다.
여성이 직장에 나가면 남성이 가사와 육아를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집에서는 아예 취사를 하지 않고 하루 네 끼를 사먹는 집들이 더 많다고 한다.
'서울노래방'아라는 간판이 보였는데, 곤명 유일의 한국 노래방이라 한다.
그런데 장사는 그리 신통치 않은 모양이라 한다.
저녁에는 기어이 발맛사지를 하러 갔다.
한 방에 푹신한 의자 이십여 개가 줄지어 놓여 있고, 의자 앞에는 보조 의자 같은 것이 하나씩 놓여 있다.
"이래 전부 한 데서 한다 말이가?"
"저 쪽에는 독방도 있더라."
"전신맛사지는 독방에서 하는 거 아이가"
뭔가 조금 음침한 상상을 했던 사람들의 약간은 실망스런 표정과,
전신맛사지나 독방에 아직 미련이 있는 총각(?)들의 불만을 무시한 채,
남녀 맛사지사들이 김이 술술 나는 커다란 나무통을 하나씩 들고 죽 들어왔다.
내 앞에 온 녀석은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머슴애인데, 인상이 아주 좋고 팔뚝도 제일 단단해 보이는 것이 그래도 맘에 들었다.
무슨 약 냄새가 나는 뜨끈뜨끈한 물에 발을 담그게 해 놓고, 어깨와 팔 등을 주물러 주는데 조금씩 괜찮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약물에 담가 두었던 발을 꺼내서 손가락 끝 또는 손가락을 굽힌 손마디로 주무르고 누르고 하는데 "아 정말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괜찮았다.
그런데 옆자리의 총무는 영 아니라는 표정으로 "임마는 불쌍해 못 보겠다" 고 한다.
그 앞에서 발을 붙들고 끙끙대고 있는 녀석은 열 댓 살은 되어 보일까 말까 하는 어린 녀석인데 땀을 콩죽같이 흘리는 모양이 완전 시로도인 것 같아 보인다.
"박 사장이 오늘 제일 되게 걸렸어" 하기도 하고
"이거는 역시 여자보다 남자가 하는 게 낫겠다" 하는 소리도 들렸다.
오늘은 모처럼 재수가 있어 실력 있는 맛사지사가 나한데 걸려 든 모양이다.
그제의 그 5성급 호텔에 다시 돌아왔다.
오늘은 잠이 좀 더 잘 올 것 같다.
(下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