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자랑 멋자랑 문학기행을 마치고
‘맛 따라 멋 따라’ 문학기행을 마치고
-달가람 시조문학회- 김 영 애
3월 1일 11시40분 충남 강경 역에 도착해 열차로 서울에서 내려오시는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대합실 한쪽 공간에 설치된 넓은 젓갈 판매장을 들여다보며 이번 문학기행이 곰삭은 젓갈처럼 인생을 삭히는 여행이 될 것이라 예감했다. 12시 40분, 각지에서 오신 회원과 열차에서 내린 회원이 반갑게 손을 잡으며 만난 인원은 18명이다. 여행은 누구와 하느냐가 중요한 것, 반가운 얼굴들이 만났으니 ‘맛 따라 멋 따라 문학기행’의 성공을 점칠 수 있었다.
첫 일정을 맛보기로 시작하는 점심 메뉴는 황 복어 탕이었다. 50년 전통의 맛을 자랑하는 태평식당을 찾았다. 일정 안내가 있은 후 상이 차려지기까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웃음 속에 즐거운 담소가 오갔다. 석우 김 준 박사님은 이 식당은 생황복만 쓰며 먹는 법은 복어를 먼저 건져 먹고 국물은 밥을 말아서 먹는 게 좋으며 특히 국물이 보약이라 하셨다. 배 색깔이 금빛 찬란한 황 복어는 토막 쳐서 끓인 게 아니라 통째로 넣어 끓였고 육질이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국물 맛이 담백했다. 복을 다 먹을 때쯤 작은 뚝배기에 ‘애’라고 하는 내장 탕이 나왔다.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한 마음으로 한 수저 떠 보니 순두부처럼 곱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이어서 우어 회 무침이 빨갛게 담겨 나왔다. ‘우어’는 관절에 좋고 눈이 밝아지며 피부에 좋다니 배는 부르지만 사양할 수가 없었다. 칼칼하면서 단맛 섞인 매운 맛으로 보기에 좋은 만큼 맛도 빼어났고 입을 가뿐하게 해 주었다. 별미를 앞에 두고 정담은 한이 없지만 일정대로 멋을 찾아 나섰다.
오후 4시경 가람 이병기선생의 생가에 도착했다. 전북 익산시 여산면에 위치한 가람선생 님의 생가는 선생님의 높다란 동상이 먼저 우리를 맞았다. 일제강점기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말과 글을 펜으로 지키시고 시조를 개척하신 선생님께 경건히 추모 묵념을 드리고 생가를 살폈다. 초가로 이엉을 얹은 조촐한 선비 집 마당에는 주인을 대신 해 냉이 쑥 꽃다지가 마른 풀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수령200년의 탱자나무가 집의 운치를 더하고 집 뒤를 싸안는 푸른 대나무 숲은 흐린 하늘을 향해 쑥쑥 자라고 있어 선생님의 절개를 보는 듯 했다. 안방, 사랑채, 고방채, 모정이 있는 가옥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겨웠고 부엌 옆에 있는 장독대에는 많은 항아리들이 줄을 지어 엎어져 있어 빈집임을 실감케 해 숙연했다. 백일홍과 동백 고목을 물속에 안은 장방형 연못가에 서서 그 옛날 마음을 적셔가며 민족을 위해 고뇌하신 선생님의 모습을 잠시 그려 보았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
선생님께서는 바람 부는 날 이 연못가에 서서 ‘별’을 짓지 않으셨을까.
저녁식사를 위해 가는 길에 김 준 박사님의 고향선배 김명수 장로님 댁에 잠깐 들렀다. 두루마기 차림의 장로님께서는 걸쭉한 사투리와 유머로 연신 우리들을 웃기시며 긴장을 풀어주셨다. 해풍 냉각 미. 뽕잎 자반고등어, 두 번 구운 김, 부안군 홍보책자 등 푸짐한 선물을 주셨는데 모두가 후배 사랑 이란 것을 짐작하니 남자 분들의 두터운 정이 “멋”으로 다가왔다. 장로님께서는 할렐루야를 집대성하시고 글자체를 특허내시는 등 종교계에서 거목으로 활동하실 뿐 아니라 부안을 온몸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위기상 선 채로 한 모금 받아먹은 부안 막걸리의 시원한맛은 장로님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잊을 수 없다.
선물을 받아서 인지 멋스럽게 살아가시는 어른을 본 때문인지 숙소를 찾아가는 길에 서산을 넘는 해가 한결 더 고와 보였다. 석양이 솔밭 사이를 환하게 비추더니 이내 바알간 불을 능선에 붙이며 곱게 넘어가고 있었다. 여정모텔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위해 다시 차를 탔다.
저녁은 곰소 바다횟집으로 늦은 시간이라 조용했다. 회는 동해안이 좋은 걸로 알고 있지만 서해안의 회상차림도 특이 했다. 회가 나오기 전에 동죽조개탕, 백합조개구이가 나오고 은박지에 싼 조개구이가 미각을 돋구었다. 소라, 게, 곤약, 쭈꾸미, 가오리 등이 나와서 해산물을 자주 접하지 못한 나는 보는 것만 해도 만족했다. 신입 회원 김 두수님의 인사가 있는 사이 커다란 회 접시가 나왔다. 보통 회는 가늘게 채친 무위에 얹혀 나오는데 이 집은 잔잔한 옥돌을 냉장 했다가 깔고 회를 얹어내었다. 신선도가 오래 갈 것이다. 우럭, 농어회에 굴 가리비 멍게 해삼 피조개가 딸려 나와서 그 많은 종류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딱 한 잔만 소주를 하듯 딱 한 곡씩으로 여흥을 풀고 첫째 날을 마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3월 2일 둘째 날이 밝았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잔 숙소는 내소사 근처였다. 아침식사를 위해 잠깐 걸었는데 돌담의 정취와 부드러운 바람, 꽃망울을 살찌우는 성급한 산수유를 본 것은 생각지도 않은 덤이었다. 일정에 없었지만 아침식사 시간을 절약해 내소사 경내로 들어갔다. 내소사를 안고 있는 등가산 봉우리는 바위와 솔이 어울려 태고의 멋이 보였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때 세워졌는데 당나라장수 소정방이 찾아온 것을 기념해 이름 붙였고 원래 소래사로 불렀다며 입장권을 사는 사이 자경 전선구 선생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600미터를 이어선 전나무 숲길은 ‘함께 나누고픈 숲길’전국대회에 선정된 길로 너무도 아름다웠다. 마른 갈잎을 밟으며 신선한 숲길을 걷자니 상쾌한 기분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전나무 사이사이 개 벚나무 단풍나무가 심겨져 있었고 길 우편으로 벚나무가 도열한 도로가 있어 물오르는 봄철이나 물드는 가을의 정경이 얼마나 색색으로 아름다울지 짐작이 갔다. 목탁소리 청아한 대웅보전은 단청이 없는 채로 단아하고 연꽃무늬 문살의 자색 진 아름다움에 넋이 빠졌다. 시간에 쫓겨 돌아서는 길에 팽나무에 걸린 작은 팻말의 글이 보였다.
“아니온 듯 다녀가세요.”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가달라는 부탁이다. 그런데 어쩌나. 다시 오고 싶은 마음 한 자락은 두고 가야겠는데. 까치들의 인사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길 양옆으로 싹이 올라 온 마늘 양파들이 밭을 푸르게 했고 뽑다 만 상추 배추가 별로 춥지 않은 이 지방의 겨울을 일러 주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광이 좋아 자경선생님께 즉흥시조 한 수를 졸라 봤다. 조르긴 했지만 설마 시조가 나오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들판
새벽 별 파란빛이 가득 쌓인 회색들판
반짝이던 서릿발이 화해처럼 녹아내려
아물히 봄을 켜드는 아지랑이 웃음소리.
절창이 아닌가. 세월이 가면 나도 즉흥시로 절창을 할 때가 있을까. 욕심이겠지.
바지락선이 점점이 떠 있는 조용한 바다를 끼고 있는 새 만금 방조제를 둘러보고 변산반도 석정공원에 있는 신석정 시비를 찾았다. 목가적 시인이신 그는 촛불을 시작으로 10여 편의 아름다운 저서를 남기셨는데 시비에는 “파도”가 음각되어 있었다. 동행한 신군자 시인과 유강 선생님께서 시비를 쳐다보며 “파도”를 낭송하셨다. 숨을 죽이고 들었다.
“갈대에/ 숨어드는/ 소슬한 바람/ 9월이 깊었다. / ....”
우뢰 와 같은 박수소리가 나고 가슴으로 옮기는 감동을 맛보았다. 펼쳐진 바다를 향해서 시를 낭송하고 음미하는 이 장면은 시조를 사랑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광경이라 시조의 맛을 알고 인생의 멋을 즐기는 사람들 틈에 내가 끼여 있구나 하는 행복감에 잠시 젖었다.
황사로 뿌연 길을 헤치며 부안군 서림공원에 안치된 매창묘를 찾았다. 매창은 선조6년에 아전의 서녀로 태어나 기생으로 살면서 애끓는 사랑을 노래한 시 220여 편을 남겼으니 시조의 대가라 할만하다. 전해오는 것은 54편 정도이며 ‘이화우’라는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시비가 있었다.
이화우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난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별은 언제나 아프고 슬프지만 전세나 후세에 누가 이만큼 절절한 이별의 아픔을 표현했을까. 공원 안에는 ‘임 생각’이라는 시와 생전에 마음을 나누던 유희경과 허 균의 시비도 있었는데 내 눈에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가여운 매창의 치맛자락이 보이는 듯 해 속으로 나도 한 수 읊어 보았다.
매창 시비 앞에서
시향 따라 찾아 온 천리 남짓 매창 뜸엔
임 그리며 삭인 세월 침묵으로 흐르는데
이봄 또
외씨버선을
당겨 신는 여심이여.
점심으로 고창 풍천 장어를 먹기 위해 산솔 가든으로 향했다. 삼인교 하천에는 물길보다 더 넓은 갈대밭에서 갈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풍천장어는 전북 고창군 선운산 일대에 서식하는 뱀장어를 말하며 작설차, 복분자술 과 함께 선운산의 3대 특산물로 일컫는다고 한다. 장어 뼈튀김이 먼저 나왔는데 바삭거리고 구수한 맛이 좋았다. 잡젓과 밴뎅이 속젓이 빠지지 않고 나왔고 풍천장어는 크고 굵은 편이며 곱게 썬 생강 채와 같이 삭인 깻잎에 얹고 장어소스를 얹어 쌈을 싸 먹으라 했다. 입안에서 감도는 고소하면서 부드러운 그 맛을 비길 데가 없었다. 김 준 박사님께서 식사 중 간간이 가르침의 말씀을 하셨다. ‘그리움의 시를 쓰자. 그러자면 사물을 볼 때 애정을 가지고 봐야하며 사랑으로 보라’는 요지였다. 우리들이 멋은 찾지 않고 맛에만 취할까 걱정이 되셨나보다. 예부터 풍천장어 한 절음에 복분자 술 한 잔이라 했다. 설동필님께서 가지고 오신 빛깔 고운 복분자 술을 딱 한 잔씩 하고 우리는 식탁에서 김 박사님의 ’라파로마‘를 청해 들었다. 그 연세에 그 노래를 아신다는 것도 멋이요, 부르신다는 건 더 큰 멋이요, 일정을 생각해서 한 소절로 끝내는 센스는 더 엄청난 멋이라 생각했다. 박수를 치면서 일어섰다. 미당 서정주님의 생가방문을 위해서였다.
만약 봄이라면 동화 속 같이 보일 실개천을 건너 마당을 들어서니 동백나무 울타리가 정겹고 물 마른 두레박우물이 빈장독대와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위채와 아래채로 된 단촐한 구조였다. 대문 없는 마당 끝에 바싹 마른 국화가 서 있었다. 가을이라면 어느 곳에 선 국화보다 의미가 깊을 텐데 말라서 보잘것없다. 나는 금빛 찬란한 노란색을 마른 꽃 위에 칠하고 그윽한 향기를 얹어 보았다. 그것이 시를 쓰는 사람들의 멋이 아니겠는가. 말라 틀어진 국화도 미당 댁 국화는 의미가 깊다.
이웃에 있는 폐교를 수리하여 미당 기념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생전에 가족을 무척 중시하셨다는데 가족애가 시로 나타나 “국화꽃 옆에서”라는 걸작이 나왔을 것이다. 친일헌시를 읽는 마음이 매우 쓰렸고 친일변명을 하는 글은 더욱 마음이 쓰렸다. 하필이면 그 시대에 태어난 운명과 뛰어난 필력이 죄가 아니겠는가?
장성에는 여류시조시인 정춘자님이 계셨는데 길목이라 잠시 들렀다. 인정을 담은 복분자 차를 내 주시고 하서 김인후선생의 15대손이신 김병효 어르신과 함께 우리 일행을 필암 서원으로 안내해 주셨다. 필암 서원은 선조 23년 하서 김인후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고향에 세운 서원이라 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정책으로 호남에서는 필암 서원만 남았다니 그 중요성이 대단한 것이었다. 현판은 현종임금님의 친필이며 출입문에 해당되는 확연루를 지나면 공부를 하던 청절당. 유생들의 생활관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북쪽으로 사당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장각에는 인종임금께서 하사하신 목죽도가 보관되어 있었고 편액은 정조대왕 어필이라 했다. 상상외로 진기한 문화재가 많아 볼 것이 많았으나 해가 기울어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
기운 해를 뒤로하고 장성댐에서 붕어찜을 마지막 식사로 마주 앉았다. 이 식사가 끝나면 헤어져야 할 사람들! 마음이 찡해 오는데 김병효 어르신께서 시조를 읊으셨다.
짚방석 내지마라/ 낙엽인들 못 앉을까/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달 돋아 온다/
아이야 박주산채일망정 없다말고 내어라/
어르신의 낭송은 또 다른 멋이다. 연세가 높으셔도 명문가의 자손은 멋과 향을 오래도록 지니시나 보다. 붕어찜에 시래기를 깐 것이 이채로웠는데 붕어도 맛이 좋았지만 시래기의 맛도 좋았다. 정춘자님께서 특별히 주문해둔 잣을 동동 띄운 솔잎차는 등에 기분 좋게 땀을 한줄기 내려주며 여행의 피로를 풀어 주었다. 솔잎차로 마지막 맛 경험을 마무리 하고 멋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송전 회장님은 글 쓰는 정열과 끈끈한 정이 달가람회를 이끈다며 참석한 회원에게 감사의 말씀을 하셨지만 회원입장에서 생각하니 회장님이하 안내를 맡으신 유강 고두석님이나 두레를 알뜰히 해 주신 고동우 사무국장님께 오히려 우리가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장성 댐 푸른 물에 어둠이 깔리고 있을 즈음 젓갈이 삭아가는 고장에서 사유의 깊이를 더하며 인생을 멋으로 삭이는 문학기행을 마무리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