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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칙 주감암주州勘庵主
趙州, 到一庵主處問, “有麽有麽.” 主竪起拳頭. 州云, “水淺, 不是泊舡處.” 便行. 又到一庵主處云, “有麽有麽.” 主亦竪起拳頭. 州云, “能縱能奪, 能殺能活.” 便作禮.
無門曰, 一般竪起拳頭, 爲甚麽肯一箇, 不肯一箇. 且道, 言肴訛在甚處. 若向者裏下得一轉語, 便見趙州舌頭無骨, 扶起放倒, 得大自在. 雖然如是, 爭奈趙州却被二庵主勘破. 若道二庵主有優劣, 未具參學眼. 若道無優劣, 亦未具參學眼.
頌曰, 眼流星, 機掣電. 殺人刀, 活人劍.
I. 본칙
조주 선사가 한 암주의 처소에 이르러 물었다. “있는가? 있어?” 암주는 주먹을 들어 보였다. 이에 조주는 “이곳은 물이 얕아서 배를 댈만한 곳이 못되는군!” 하고는 곧 떠났다.
그리고는 다른 암주를 찾아가, “있는가? 있어?” 하고 또 물었다. 그 암주도 역시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자유자재로군!” 하면서 절을 하였다.
무문 화상 평하기를,
주먹을 들어 보인 것은 한 가지인데 어째서 한쪽은 긍정하고 한쪽은 긍정하지 않았는가? 말해보라.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를? 만약 여기서 한 마디 바로 이를 수 있다면, 조주의 혀에는 뼈가 없어 잡아 일으켜주기도 하고 밀어 넘어뜨리기도 하면서 말로는 한껏 자재하였음을 알 것이다.
비록 그렇더라도 조주 역시 두 암주에게 시험당한 것을 어찌할까? 두 암주를 두고 우열이 있다고 하면 아직 수행자로서 안목을 갖추지 못한 것이요, 없다고 해도 안목을 갖추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게송으로 가로되,
안목眼目은 유성과 같고 기지機智는 번개와 같아,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구나!
II. 배경
조주종심趙州從諗1선사는 조주曹州 학향郝鄕 사람으로 어린 나이에 고향 용흥사龍興寺로 출가하여 경과 율보다는 참선을 하였다고 한다. 스승을 따라 지양池陽 남전보원南泉普願2 선사를 찾아갔는데, 다음은『조주록趙州錄』에 수록된 당시 풍경이다.
스님께서 처음 은사스님을 따라 행각하다가 남전스님 회하에 이르렀다. 은사스님이 먼저 인사를 드리고 나서 스님(조주)이 인사를 드렸는데, 남전스님은 그때 방장실에 누워 있다가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는 불쑥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서상원瑞像院에서 왔습니다.”
“상서로운 모습[瑞像]은 보았느냐?”
“상서로운 모습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누워 계신 여래를 보옵니다.”
남전스님은 이에 벌떡 일어나 물었다.
“너는 주인 있는 사미냐, 주인 없는 사미냐?”
“주인 있는 사미입니다.”
“누가 너의 주인이냐?”
“정월이라 아직도 날씨가 차갑습니다. 바라옵건대, 스님께서는 기거하심에 존체 만복하소서.”
남전스님은 이에 유나維那를 불러 말씀하셨다.
“이 사미에게는 특별한 곳에 자리를 주도록 하라.”3
조주는 이후 입실하여 40년간이나 남전을 모시게 되는데, 남전 사후死後 60세가 되어서야 물병과 석장을 지니고 구법행각에 나선다. 20년을 선지식을 찾아 제방諸邦을 떠도는데, 항상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나보다 나은 이는 내가 그에게 물을 것이요, 백 살 먹은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한 이는 내가 그를 가르치리라!”4고 서원誓願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깨달음을 확인하고 다른 학인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한 편력遍歷이었던 것이다. 나이 80세가 되어 행각을 끝내고 고향 근방 조주趙州 관음원觀音院에 주석한다.
조주는 임제(臨濟義玄, ?~867)와 거의 동시대에 활약하였으나 그 가풍은 완연히 달라, 임제가 할, 방을 썼는데 반해 조주는 대담을 통한 말로써(구순피선口脣皮禪)사람들을 제도하였다. 변설辯舌이 뛰어나 많은 선문답들을 남겼는데,『벽암록碧巖錄』공안 중 12칙이 조주에 관한 것이다. 특히 <무無>자는 종문의 제 1공안으로 선종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한데, 다만 이상한 것은 그의 법을 이은 그렇다할 제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변변한 선원 하나 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다.
그때부터 주지살이를 하셨는데, 궁한 살림에도 옛사람의 뜻을 본받아 승당에는 前架(승당앞 좌선자리)나 後架(승당뒤 세면장)도 없었고, 겨우 공양을 마련해 먹을 정도였다. 선상은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 타다 남은 부지깽이를 노끈으로 묶어 두었는데, 누가 새로 만들어 드리려 하면 그때마다 허락치 않았다. 40년 주지하는 동안에 편지 한 통을 시주에게 보낸 일이 없었다.5
이때의 생활은 그가 지은「12시가十二時歌」6에 잘 드러나 있다. 찾아오는 납자들을 지도하다 120살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III. 사설
유마유마有麽有麽
조주 선사는 암주의 처소에 이르러 “유마유마有麽有麽”라고 묻는다. 이 ‘有麽’를 있느냐, 있는가?, 계십니까?, 혹은 누구 계시는가?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는데, 대부분 인사말인 “계시는가?”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물음에 대해 암주가 ‘주먹을 들어 보인 것’으로 보아 단순히 사람을 찾는 인사라고 하기에는 뭔가 미심쩍다.
요컨대 똑같이 주먹을 내밀었는데도 하나는 부정하고 하나는 긍정하여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데, 수상쩍기로 말하면 ‘있나, 있나?’ 하는 질문부터가 수상하다. ‘있나’의 원문은 ‘재마在摩’가 아닌 ‘유마有摩’다. 따라서 이 말은 집에 있느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진 것이 있느냐는 뜻의 물음인 바, 그렇다면 조주스님이 확인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겠는가.7
즉 ‘有麽’는 같은 수행자의 입장에서 암주의 수행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이 된다. 꼭 가진 것, 깨달은 것을 물었다기 보다는 20년간 제방을 두루 다니며 나눈 선문답을 ‘有麽?’와 ‘竪起拳頭!’로 상징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주가 암주를 시험하기 위해 물은 것으로, 당시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진검승부 하는 모습을 단순히 한 줄의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는가?’라는 인사말보다는 ‘있는가?’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는 여기 본칙에는 빠져있지만,『조주록趙州錄』에는 있는 ‘재입문상견纔入門相見, 문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고 나서’라는 부분을 보면 더욱 더 명확하다.
스님께서 행각할 때, 큰스님 한 분이 사는 절에 이르러 문에 들어가 인사를 나누자마자 말씀하셨다.
“있느냐, 있느냐?”
큰스님이 주먹을 치켜 올리자 스님께서 “물이 얕아서 배를 대기가 어렵구나!” 하고는 그냥 나와 버렸다. 또 한 절에 이르러 큰스님을 보고 “있느냐, 있느냐?” 하였는데 그도 주먹을 치켜 올렸다. 스님께서는 “놓아주고 빼앗으며 갖고 쥐기를 능숙하게 하는구나!” 하고 절을 하며 나와 버렸다.8
‘有麽有麽’라고 하기 전에 “纔入門相見便云”이라는 부분이 어떤 이유로『무문관』본칙에는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있는가?’ 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원전原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무문이 평창에서 우열優劣을 가리는 차별심이나 긍정이니 부정이니 하는 분별심을 경계한 것으로 보아, 중요하지 않다고 보고 의도적으로 생략했을 수도 있겠다. 이 화두는 차별과 분별을 초월한 본래심의 경지를 끌어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정성본 스님은 한 발 더 나가, 암주에게 ”계십니까?”라고 하는 인사말이 아니고, “암주는 주인(본래인)을 상실하지 않고 선(깨달음)의 경지를 살고 있는가?”라고 물은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자각의 주체를 상실하지 않고 살고 있는가?” 또는 “안신입명安身立命의 삶을 살고 있는가?”라고 물은 것이라는 의견이다. 너무 포괄적이어서 상황과는 맞지 않지만 참고할 만하다. 어쨌든 이 화두는 조주 선사가 암주들을 참문하고 점검하는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수기권두竪起拳頭
조주 선사의 “있는가?”라는 물음에 두 암주는 ‘竪起拳頭’, 즉, 주먹을 들어 보인다. 여기에 대해 종달 노사님은 다음과 같이 착어하셨다.
3칙의 구지수지俱胝竪指, 6칙의 세존염화世尊拈花와 똑같은 공안(화두)이다. 즉 구지수지의 뜻을 알았다면 세존염화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이 두 칙의 뜻을 알았다면 이 공안의 뜻을 알 수 있다.9
『무문관』3칙, 6칙, 11칙의 세 화두의 경계가 같거나 혹은 같은 종류의 답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손가락을 드는 <俱胝竪指>, 꽃을 드는 <世尊拈花> 등은 모두 불법의 근본을 나타내는 것으로, 글이나 말이 아닌 불립문자의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선종에서는 통상적으로 하나는 불법의 진리를 표현하는 불립문자의 경지를 나타내고, 둘은 진리를 체득하는 방편인 언어 문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암주는 말없이 주먹을 들어 보인다. 군더더기 없는 절대의 경지를 드러낸 것이다.
<선>이란 별 다른 것이 아니다. 세존께서 영산회상에서 꽃가지를 든 것이나, 구지 스님이 손가락을 든 것이나, 이 칙의 두 암주가 주먹을 든 것이나 모두 이치는 같고 그가 선지를 계합된다면 농부가 호미자루 드는 거나 노동자가 망치를 드는 거나 교사가 교단에서 백묵을 드는 거나 의사가 주사침을 드는 거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모두 선적이고 도 아님이 없다고 함도 이러한 데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착의끽반着衣喫飯’이 도道라고 일컬었다.10
도를 이룬 선지식의 모든 행위는 본래면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거기에서 범위를 조금 더 넓혀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무심히 행하는 모든 행동이 본래면목을 그대로 드러내는 지혜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몰입의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불립문자의 경지인 것이다. 도를 떠나 한 발 더 나가면 선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하는 모든 일이 도이고 경계 아닌 것이 없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평상심이 곧 도로, 평소의 그 마음, 일상적인 그 마음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이다. 오직 계합契合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숭산 노사님은 종종 탁자를 탁! 하고 쳐서 경계를 나타냈다. 탁하고 치는 소리는 절대적이다. 번뇌 망념이 일어나기 이전, 언어 문자의 방편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불법의 근본, 본래면목을 탁자를 탁! 쳐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탁자를 치거나 주먹을 드는 간단한 일도 무심코 하기는 쉽지 않다. 웬 만큼 수행이 되지 않고는 그런 배짱이 나오지 않는다. 아랫배에 힘이 축적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또 그렇더라도 그 근본까지 알기는 어려워, 원오극근 선사도 “요즘 사람들은 질문을 하면 손가락을 세우고 주먹을 불끈 드는데, 이것은 망상 분별일 뿐 반드시 뼛속에 사무친 투철한 견해가 있어야 한다.”11고 평하고 있다.
한 스님이 인도 다람살라에 가서 달라이 라마를 친견하였는데, 달라이 라마가 나오자 주먹을 불끈 들어 보였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다시 되돌아 나갔다고 한다. 군더더기 없는 경계를 나투었는데, 왜 달라이 라마는 긍정하지 않았는가?
감파勘破
두 암주가 똑같이 주먹을 들어 보였는데, 조주는 한 곳에서는 ‘물이 얕아서 배를 댈만한 곳이 못 된다’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자유자재하다’라고 하였다. 한 번은 긍정하고 한 번은 부정한 것이다. 그럼 누구를 긍정하고 누구를 부정하였는가? 처음의 암주는 수행의 정도가 낮아 도를 얻지 못했으므로 부정하고, 뒤의 암주는 자유자재한 도를 얻었으므로 찬탄한 것인가?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불상을 향해 형식적으로 합장하는 흉내를 내거나, 가볍게 고개를 끄떡해 보이거나 하기만 해도 꼭 성불한다 하셨는가 하면, 사리불舍利佛, 가섭伽葉 같은 이도 불도를 모른다 하여 그들의 깨달음을 정면에서 부인하신 바 있으셨다. 얼른 보아 그 기준이 뒤죽박죽인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범부는 그 미약한 선이나마 키워주셔야 하겠기에 높이 사 주신 것이고, 아라한은 보다 높은 경지로 이끄시기 위해 나무라신 것뿐이니, 칭찬에 나무람이 깔리고 나무람에 칭찬이 깃든 그 진상이야 어찌 우리들의 추측을 허용하겠는가. 따라서 조주스님으로부터 배격되었다 해서 반드시 도가 얕은 증거는 안 되고, 찬탄되었다 해서 꼭 도가 높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진의는 어디에 있었을까.
처음의 암주가 배격된 데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었겠으나, 도를 모른 것이 그 이유였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도를 모르기는커녕 주먹을 내미는 것에 의해 적적상전嫡嫡相傳의 종지를 발휘해 보인 터이나, 바로 이 점이 배격을 받게 된 근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진리는 진리로서 고정되기를 항상 거부하는 속성을 지니기에 암주의 경지를 부정한 것이니, 따라서 여기에는 상대에 대한 높은 평가가 전제되어 있다. 또 뒤의 암주는 찬양될 만한 점이 있어서 찬양을 받은 것이겠지만, 그러면서도 그 깨달음을 당분간 건드리지 않고 보존시키는 것이 좋겠다 싶어 그리 했는지도 모르며, 아니면 깨달음에 대한 집착마저 얼마만큼 떠난 사람이기에 극구 찬양함으로써 마지막 시련을 겪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비난을 견디기는 쉬워도 찬양하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12
누구를 긍정하고 누구를 부정했다고 쉽게 단정 할 수는 없다. 일찍이 종달 노사님도 똑같은 주먹이라도 처음의 암주는 가짜여서 부정하고 다음 암주는 진짜여서 긍정하였다고 보는 것은 오산이라고 설파하셨다. 첫 번째 암주의 답이 뛰어나 더 이상 물어 볼 것도 대꾸할 것도 없어, 배를 댈 곳이 없다고 하면서 떠났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구에 걸리지 말아야지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선禪아닌 것이 없는데, 누구는 꾸짖고 누구는 칭찬하였다고 보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손 한 번 들고 발 한 번 옮기는 것이 모두 선인데,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시다. 평창에서 강조한 것처럼 우열을 가리면 오히려 그르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긍정하고 부정하는 분별과 깨달음에 대한 차별에 걸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긍정과 부정을 가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수행을 통해 기존의 관념적 사고 체계에서 벗어나 어떤 말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자재한 안목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살인도殺人刀 활인검活人劍
‘살인도殺人刀’와 ‘활인검活人劍’이란 선어禪語는 당말唐末의 선승 협산선회夾山善會13 선사가 석상경제石霜慶諸14와 암두전활巖頭全豁15을 평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
협산夾山의 회상에 있던 어떤 승이 석상石霜에게 가서 문에 들어서자 문득 이르되 “안녕하십니까[不番]?”하니 석상이 이르되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사리闍梨야!”하였다. 승이 다시 이르되 “그러시다면 안녕히 주무십시오[珍重].”하였다.
그 승이 다시 암두에게 가서 전과 같이 하니 암두가 “허허”하고 두 마디 소리를 냈다. 승이 이르되 “그러시다면 안녕히 주무십시오.”하고는 이내 돌아서려는데 암두가 불러 세우고 이르되 “비록 후생後生이지만 제법 갈무리할 줄 아는구나!”하였다.
승이 돌아와서 협산에게 이 일을 이야기해 바치니, 협산이 이튿날 상당하여 그 승을 불러 앞의 일을 법답게 사뢰게 하고는 협산이 다시 이르되, “대중이여, 알겠는가? 만일 이르는 이가 없다면 노승이 두 줄기 눈썹을 아끼지 않고 말하리라!”하고, 이어 이르기를 “석상은 살인도殺人刀는 있으나 아직 활인검活人劍이 없고 암두는 살인도도 있고 활인검도 있다!”하였는데, 임제 문하에서 일곱 가지 일이 몸을 따른다[七事隨身]한 것에서 연유한다.16
두 선사가 한 납자를 제접提接한 것을 살인도와 활인검에 비유하였던 것인데, 사람을 죽이는 칼을 살인도라 하고, 사람을 살리는 칼을 활인검이라고 하였다. 이는 후에 선지식이 수행자를 이끌 때의 자재한 작용으로 자주 쓰이게 되는데, 살인도는 사람들의 미혹迷惑(어둠)된 마음을 끊고 생멸을 그치게 하는 칼이요, 활인검은 참다운 지혜(고요한 깨달음)를 얻어 보살도를 실현하게 하는 칼이다. 둘 다 모두 선지식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지혜의 칼인 것이다.
즉 살인도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차단하는 교화수단이고, 활인검은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우고 반야의 지혜를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살인도는 종래의 구습에 젖은 중생의 생멸심과 차별, 분별심을 제거하고 없애는 지혜의 칼이고, 활인검은 본래 청정한 불심의 지혜를 회복하여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반야의 지혜로 보살도의 삶으로 활발하게 작용하는 방편수단의 칼이다.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공空의 실천이 살인도이고, 본래 청정한 불성의 지혜로 만법을 여여하고 여법하게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반야지혜가 활인검이다.17
죽이기만 하고 살리는 능력이 없거나 살리기만 하고 죽이는 지혜작용이 없으면 정사正邪를 판단하는 안목 없는 스승이 된다. 그러므로 훌륭한 스승은 둘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칼은 두 개지만 칼자루는 하나인 것이다. 때로는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고 때로는 풀어주기도 하면서 수행자의 안목을 넓혀주고 계발해 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살인도와 활인검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어야 선승으로서 법사로서 기량을 갖추었다고 하겠다. 이외에도 선지식이 학인들을 지도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일곱 가지 일, 칠사七事라고 하는데, 원오극근 선사는 이를 갖추는 것은 물론이고 몸에 배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대개 선지식은 참선학인들의 지혜의 안목을 열어주고 깨달음을 체득하도록 도와주는 시설방편으로 종사들이 갖추어야 할 內外의 일곱 가지 일[七事]을 들고 있다. 외형적인 有形의 七事는 주장자, 拂子18, 禪板19, 几案20, 如意21, 竹篦, 木蛇 등의 法具이다. 안[內]으로 七事는 大機大用, 機辨急速, 語句의 妙靈, 殺活의 機鋒, 博學廣覽, 鑒覺不昧, 隱顯自在이다.
『벽암록碧巖錄』제 15칙「雲門倒一說」의 평창에 원오극근 선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七事를 갖추어 몸에 배도록 하고 같이 살며 같이 죽도록 해야 한다. 높은 것은 낮추고, 낮은 것은 높이며, 모자라는 것은 채워주고 깨달음[孤峰]에 안주하는 사람은 중생의 세계[荒草]에 들어가도록 하고, 중생의 세계에 떨어진 사람은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한다.” 원오는 노자의 말을 토대로 하여 학인들을 지도하는 선지식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22
IV. 해설
사찰 답사 I
절집을 많이 찾아다녔지만 기억에 남는 절중에 하나가 문경 희양산에 있는 봉암사23다. 이 절은 평소에는 들어 갈 수가 없고, 1년에 딱 하루 석가탄신일에만 일반인에게 개방한다. 그 외에는 절 입구를 막고 스님들이 지키고 있어 절은 물론 희양산 등산도 할 수가 없다. 수행에 지장이 있어 그런다고 하지만 절의 수행공간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화재 공간이나 산까지도 출입을 막는 것은 어쨌든 어이없는 일이다.
10년도 넘었다. 석가탄신일에 맞추어 문경에 내려가 가은읍에서 숙박을 하고 아침 일찍 절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 구석구석 둘러볼 때는 몰랐는데, 절을 나와 산등성에 있는 정진대사원오탑靜眞大師圓悟塔을 보고 산을 돌아 내려오니 길은 인산인해, 사람과 자동차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 온 차량들로 절 입구부터 아래 마을까지 빈틈이 없었다. 그대로 다 주차장이었다. 경찰들이 차량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한참을 가다 서다를 반복한 뒤에야 겨우 절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몇 년 전부터는 아예 초입부터 차량 통제를 한다고 하는데, 수행도 좋지만 피해라면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좋은 절과 산을 자기들만 즐기겠다는 이기심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보살심을 발휘해 절 안 수행 공간은 통제를 하더라도 국민이 주인인 문화재나 산은 모든 이에게 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망월사에서 한 철을 살았는데, 등산객들이 많이 와요. 도봉산 올라가는 등산 코스인데, 그 스님은 등산객이나 관광객들이 오는 것을 좋아하고, 그 주변의 산에 가서 이렇게 밥을 짓거나, 뭐 찌개를 끓이거나 하면 막 불러요. 자리가 좋다고, 이리 오라고, 전부 절 마당으로 끌어들여서 마당에서 해라, 왜 비탈진 곳에서 하느냐 이거죠.
그리고 또 비가 좀 오면은 전부 처마 밑으로 끌어드립니다. 비 맞지 말고, 처마 밑으로 오라고, 법당 처마 밑에서 하라 이거예요. 고기를 굽든지, 찌개를 하든지, 밥을 하든지, 법당 처마 밑으로 전부 끌어들입니다.24
통 크신 무애도인無碍道人 춘성春城25 스님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이 가고나면 대중들이 나와서 청소 한 번 하면 될 것을, 옳으니 그르니, 되느니 안 되느니 하며 투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청소 한 시간이면 해결될 허망한 일을 가지고 시시비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012년 오랜만에 봉암사에 다시 가게 되었다. 월봉月峰 스님이 짓고 살았다는 월봉토굴 등 산내 암자들을 둘러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전날 가서 알아보니, 암자에 있는 스님과 안면이 있거나 스님 전체 점심 대접을 하면 가능할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것도 절에서 일하시는 거사님과 절 아래 사시는 분들에게 술대접을 하면서 들은 이야기이다. 암자 좀 보자고 몇 백만 원을 들여 식사 대접할 생각은 없고, 암자 좀 둘러본다고 죽이기야 하겠나!
아침 일찍 일어나 올라가 보니 벌써 인산인해, 예전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분위기 또한 많이 달라져 법당 앞에는 꽃으로 장식된 탄생불(애기 부처)을 모셔놓고 목욕 시키는 등 여러 행사로 어수선하였다. 그동안 불사도 엄청나게 이루어져 못 보던 건물들로 절이 빼곡하였다. 암자나 둘러 볼 요량으로 암자로 통하는 길을 보니 길목마다 줄로 막고 스님이 한 분씩 의자에 앉아 지키고 있었다. 도저히 점잖은 체면에 올라가자는 말도, 그렇다고 슬쩍 올라가 볼 수도 없어, 길을 막고 앉아 있는 한 스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절집이야기 수행이야기 화두이야기로 한 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출가한지 20년이 되었다는 그 스님에게서 수행만 한 순수함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그래 이런 절 하나쯤은 있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문경 봉암사 산내암자 월봉토굴. 월봉月峰 스님이 직접 짓고 20년을 넘게 텃밭을 일구며 수행하신 곳이다.
2011년 8월 22일 101세로 열반에 드셨다. 월봉토굴은 그의 이름을 따서 사람들이
그냥 부른 것이 이름이 되었다.
새로 본 희양산 화강암 봉우리는 이번에도 왜 이리 흰지, 도도함까지 느껴졌다. 문득 땅의 기운이 그래서 사는 사람들도 그런가? 나오면서 보니 늦은 시간에도 절에서 운용하는 관광버스가 큰 길과 절을 오가며 연신 사람들을 나르고 있었다. 길에는 전을 부쳐서 파는 동네 사람들과 술병을 들고 오가는 지원군들 (도시로 나갔던 가족들이 잠시 들어와 도와주고 있었다.) 그리고 손님들로 왁자지껄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아마 절을 상시 개방하면 이런 모습이리라. 백미러에 비친 희양산은 여전히 희고 도도하였다.
팔공산八公山 은해사銀海寺 백흥암도 석가탄신일에만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은해사 산내 암자인 백흥암은 신라 말에 지어진 절로, 조선 명종 1년(1546) 인종의 태실胎室이 팔공산에 들어서자 수호사찰로 되어 크게 중수되었다고 한다. 보물 제790호인 극락전은 인조 21년(1643)에 지은 것으로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우아한 아미타삼존불을 모시고 있고, 탱화 또한 엄숙한 기운이 느껴져 저절로 긴장하게 된다. 특히 보물 제486호인 불단(수미단)은 조각이 매우 독특하고 우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처음 극락전과 수미단을 보러 백흥암에 갔을 때는, 비구니 암자인 백흥암에는 아예 들어가 보지도 못하였고,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서성이다 아쉬운 마음에 옆 산에 올라가서 절 안을 보고 원경만을 찍을 수 있었다. 거기다 차는 은해사 입구 주차장에 세워놓고, 다른 산내 암자들을 둘러보느라 하루 종일 잘 닦인 아스팔트길을 터덜터덜 걸어 다녀야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친구 스님하고 동행했을 때는 상황이 바뀌어 은해사에서 먹고 자고, 아침 차를 달려 산내 암자들을 다시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었다. 암주 스님들과 차담도 나눌 수 있었고, 백흥암 극락전에 들어가 수미단을 비롯한 탱화 등을 마음껏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필자도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은 아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정말 감동적이다. 귀한 차까지 얻어 마시고 친구스님은 산초장아찌까지 얻어 나왔으니 말이다.
보물 제486호 은해사銀海寺 백흥암百興庵 극락전極樂殿과 수미단須彌壇.
사찰 답사 II
유홍준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26로부터 시작된 답사여행은 15권에 달하는『답사여행의 길잡이』27를 모두 섭렵涉獵하였고, 민속, 지리, 풍수 등 책자를 들고 우리 땅 곳곳을 안 밟아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누비게 되었다. 대부분이 불교 문화재인 우리나라는 사찰 답사가 주를 이루어 절 순례도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名山古刹따라』등 사찰 관련 답사 서적들과 경허 선사의 숨결을 따라가는 최인호의『길 없는 길』과 같은 수행 서적들에 등장하는 사찰 등 책자에 소개 된 대부분의 절과 암자들을 둘러보았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찾아 전국을 누빈 결과, 그때 까지는 생소하였던「폐사지 답사기」를 잡지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사찰 답사를 다니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폐사지(절터) 답사의 매력이다. 폐사지가 얼마나 좋았던지 한때 탑이 있는 절터에 수행처를 지으려고 자리를 물색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아침마다 천년의 바람으로 닳아진 이끼 낀 석탑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어떨까? 아마 수행도 저절로 될 것이었다. 이는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어서, 여행 중 만난 사람들 특히 스님들은, 필자가 폐사지 답사를 다닌다고 하면 모두 이구동성으로 좋은 절터자리를 묻곤 하였다. 실재로 좋은 절터들은 다시 가보면 가까이에 옹색하나마 가건물이라고 짓고 자리를 잡고 있는 스님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데, 문화재가 있는 절터는 답사객이 끊이지 않아 저절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요즈음에는 스님이라도 그런 자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 절터라는 개념보다는, 문화재 보존 차원에서 접근하는 문화재 관련 사람들과 마찰을 빚게 되기 때문이다.
홍천 물걸리 절터28는 보물이 다섯 점이나 있어, 강원도에서 한 곳에 보물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원래 절이 있었는데, 발굴 조사 후 다시 지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던 절을 헐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굴조사 후에는 중요 문화재라 하여 절을 지어주기는커녕 땅을 수용해 영영 다시 돌아 올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주지 스님은 옆에 있는 마을로 쫓겨나 조그맣게 절을 일구며 지금은 석불과 좌대 등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보호각 열쇠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 신라 원광법사圓光法師의 혼이 서려 있는 경주 삼기산三岐山 금곡사지金谷寺址29는, 부도의 효시인 원광법사 부도탑圓光法師 浮屠塔30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곳인데도 주지 스님이 발굴을 못하게 막아 학술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2012년 초에는 있던 건물을 허물고 발굴 조사도 없이 예전 대웅전 자리에 약사전을 새로 짓고 있는 중이다.
몇 년 전 울산에 있는 어물동마애여래좌상於勿洞磨崖如來坐像31을 보러 갔었는데, 옆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마애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다. 문화재에 대해 물어보러 절에 들어갔다가 스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스님 말씀이 군 지원을 부탁하고 정비하라고 할 때는 관심도 없다가, 스님이 문화재 주위에 돌을 깔고 어렵게 정비해서 사람들의 방문이 잦아지니까, 그때서야 스님의 접근을 막고 군에서 나서서 주차장을 새로 만드는 등 부산을 떠는 중이란다.
폐사지 답사를 열심히 한 연유緣由로 폐사지 답사에 대한 글을 1년간 쓰게 되었는데, 연재 초 썼던 폐사지 답사 예찬론을 축약해서 옮겨 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은 사찰 답사에도 급수가 있다고 하였다. 입장료를 내야 하는 절을 초급 답사코스라 하였고, 입장료 없이 들어 갈 수 있는 절은 중급, 중도 절도 없는 폐사지 답사를 고급 답사코스라고 하였다.
입장료를 내야 하는 유명한 절은 항상 관광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대부분 유명한 산을 끼고 있어 등산객들로 북적이게 마련이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는 것은 사람대접이 소홀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법이 우선하고, 정작 사람은 뒷전이 되게 마련이다. 우선 절에서 멀리 떨어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게 하고 적지 않은 주차료를 물린다. 그리고 음식점들과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 사이를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하게 걸어가는 것은 아니어서, 스님들이나 절에 관계하는 사람들 그리고 신도들은 흙먼지를 날리며 차를 타고 올라간다. 일반 관람객은 돈 내고 즐비한 상점들과 음식점 사이를 먼지를 뒤집어쓰며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주차료와 입장료까지 지불하였는데도 손님대접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건 절 안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관람객들을 무슨 어린아이 다루 듯 이래라 저래라 지도하고 통제하려 든다. 그것도 무슨 큰 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행동한다. 문화재 주인은 국민인데도 말이다.
입장료 없는 절은 어떤가. 입장료가 없다는 것은 찾는 이가 적다는 것이고, 찾는 이가 적다는 것은 곧 손님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절 가까운 공터나 주차장에 넉넉히 차를 세우고, 시원한 약수로 목을 축인 다음, 천천히 걸어 절을 둘러 볼 수 있고, 문화재 또한 감상할 수 있다. 산을 좋아하는 이는 호젓한 산길을 따라 등산도 할 수 있고, 참선하는 이는 법당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운 좋으면 차 한 잔을 얻어 마시며 절에 대한 내력과 함께 수도자의 수행 이야기도 들을 수도 있다. 사람이 잘 찾지 않는 절일수록 인심이 좋아 밥 먹고 가라고 권하기도 하고 잠자리도 걱정해준다. 그러나 서두를 일이다. 요사이는 이런 사찰들을 소개하는 책자들이 많이 나와 있어 찾는 이들이 늘어나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좀 모인다 싶으면 절 입구나 아예 골짜기 초입을 막고 주차료뿐만 아니라 입장료까지 물리는데, 어디에 쓰이는 지도 모르는 돈을 내고 먼지 속을 걸어가야 할지 모른다.
그럼 폐사지 답사는 어떤가. 폐사지는 중도 절도 없다는 얘기인데, 찾는 이가 없으니 눈치 볼 것 없이 마음대로 문화재를 어르고 만지며, 사진 찍고 구석구석 살필 수 있다. 찾아가는 맛부터가 다른데, 동네 안에 숨겨져 있거나, 후미진 골짜기, 산 속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어, 보물찾기하듯 물어물어 찾아가야 한다. 자연스레 순박한 사람들을 만나고 때 묻지 않은 우리 산하에 흠뻑 젖게 된다. 문화재뿐 아니라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현장까지 직접 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산세를 따라 가다보면, 격은 낮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끼 낀 귀중한 옛 석물 들을 만날 수도 있다. 언젠가 안동지방에서 우연히 “폐탑”이라는 팻말이 있어 찾아갔더니 ‘주륵사’라는 옛 절터와 무너져 내린 삼층석탑이 있었다. 무너지기는 했지만 석가탑에 버금가는 장대한 삼층석탑에 할 말을 잃고 오래도록 서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아래 사진은 최근 모습인데 안타깝게 지금도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주륵사터 폐탑, 주륵사터는 구미시 선산군 도개면 다곡리 123번지에 있는 절터이다.
다곡은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곳으로 유명하며,
다곡과 주륵사는 청화산 아래에 있다.
설악산 영시암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법당에 들어가려는데 한 보살님이 등산객들에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기와는 오만원이고 서까래는 얼마고....... 그리고 “이번에 한 번 올리시지. 거기에 이름 다 들어가고.......천만 원이야.” 그때는 웃고 지나왔는데, 조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영시암 터가 영시암이 되고(전에는 터만 있었습니다), 지금 봉정암을 보러 올라가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로서 기와 만드시는 분 생계가 되고, 기와 올리시는 분 가족의 밥이 되고, 지나가는 등산객 죽이 됩니다(등산객들에게 죽을 권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냥 경제 활동의 일부처럼 보입니다. ‘세상에 공짜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럴 듯한데, ‘우주에는 공짜 점심이 없다.’라고 하면 더욱 더 확신이 갑니다.
절도 사람 사는 곳이니, “따뜻한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풍요로우면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확실한 진리이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면서 중도를 지키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이라고 하겠다.
지금 절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창 “공사중”이다.
V. 참구
3칙의 구지수지俱胝竪指와 6칙의 세존염화世尊拈花와 같은 화두로, 구지수지의 뜻과 세존염화의 뜻을 알았다면 이 공안의 뜻도 알 수 있다고 종달 노사님은 착어하셨다. 덧붙여 배를 댈 곳이 없다느니, 살활 자재하다느니 하는 이원적 분별에서 자유로우면 자명하다.
VI. 착어
선림구집禪林句集 오언대구五言對句. 이 착어는 오래 걸린다.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을 깨는 아주 좋은 도구이다.
VII. 재독
1. 조주선사가 왜 한 암자의 주인에게는 칭찬을 하고 다른 암자의 주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나?
2. 여러분이 첫째 암자의 주인이라면 조주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또, 여러분이 둘째 암자의 주인이라면 조주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VIII. 감상
해인사는 번잡하고,
송광사는 무신경하고,
골마다 암자는 서먹하다.
한적한 고달사!
마냥 편안한 선림원!
국보 제144호로 지정된 월출산 마애여래좌상이다.
월출산의 구정봉九井峰 서북쪽 암벽에 높이 8.6 미터의 앉은 자세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 마애불은 고려시대 초기 작품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춘 여래상如來像이다.
몸체에 비해 얼굴이 크게 조각돼 언밸런스한 아름다움이 있고,
오른쪽 무릎 옆에 높이 86cm의 공양하는 작은 동자상童子像이 새겨져 있다.
이 마애불은 지금까지 호남지역에서 발견된 마애불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규모가 9 m에 가까워
역시 호남 최대의 마애불이라 할 수 있다.
1985년 근처의 절터에서 용암사龍嵒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편이 수습되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용암사 임을 알게 되었다.
여러 문헌 자료를 통해
월출산에 용암사라는 사찰이 존재 했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으며,
또한 도선이 지목한 3곳의 비보처 중에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용암사 이외에 삼암사로는 광양의 雲岩寺, 순천의 仙岩寺가 있다.)
IX. 참고한 책과 글
1)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는 당대唐代 스님으로 호는 조주, 시호는 진제, 법명은 종심, 속성은 학씨郝氏이다. 조주曹州 학향郝鄕(지금의 산동성 山東省 하택荷澤) 사람으로, 어려서 고향의 용흥사龍興寺로 출가하였으며, 숭산 소림사 유리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안후이성 귀지현 남전산의 남전보원南泉普願 문하에 입문하여 그의 법인 홍주종洪州宗을 이었다. 이후 지방을 순례하며 여러 고승들을 찾아다니다, 80세 부터 조주성 동쪽 관음원觀音院에 머물러, 호를 조주라 하였다. 검소한 생활을 하고 시주를 권하는 일이 없어 고불古佛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897년 120세로 입적할 때는 제자들에게 사리를 수습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탑호는 진제선사광조지탑眞際禪師光祖之塔이고 시호는 진제眞際대사이다. 그는 송대에 형성된 선종오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화두를 많이 남겨 후대 선승들의 수행 과제가 되었는데,『벽암록』에 전하는 화두 100개 가운데 12개가 조주의 것이다. <무자無字>와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가 특히 유명하다.『조주진제선사어록병행장』『경덕전등록』『조당집』『속고승전』등에 생애와 일화가 전한다.
2)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은 당대唐代 남악하 선사로, 정주(하남성) 신정 사람이다. 성은 왕씨이다. 지덕2년(757) 대괴산大槐山 대혜大慧에게 출가하고, 대력 12년(777, 30세) 숭악에 가서 수구受具하였다. 처음에 성상, 삼론 등을 공부하다가, 현기는 경론의 밖에 있다는 의지를 생각하고, 마조문하에 참례하여 법을 이었다. 정원 11년(795) 지양(안휘성)의 남전산에 선원을 짓고 스스로 ‘왕노사’라 칭하며 30년간 하산하지 않았다. 논밭을 일구며 주하니, 학인들이 항상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태화 초년에 前太守 육긍의 귀의를 받았고, 문하에 조주종심, 장사경잠, 자호이종 등의 뛰어난 제자를 두었다. 태화 8년 12월 87세로 시적하였다. 특히 학인을 접화하는 방편어가 뛰어나 ‘남전참묘, 남전수고牛, 남전목단’등의 공안이 있다. (『송고승전11』『조당집16』『전등록8』『회요4』『회원3』) (불교용어 사전에서 인용)
3)『조주록趙州錄』(선림고경총서 18)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p. 19~20.
4)『조주록趙州錄』(선림고경총서 18)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 21.
5)『조주록趙州錄』(선림고경총서 18)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 21.
6)「조주의 십이시가十二時歌」
<닭 우는 축시> 깨어나서 추레한 모습을 근심스레 바라본다. 두를 옷, 소매 옷 하나 없고 가사는 겨우 모양만 남았네. 속옷은 허리가 없고 바지도 주둥아리가 없구나. 머리에는 푸른 재가 서너 말! 도 닦아서 중생 구제하는 이 되렸더니, 누가 알았으랴, 변변찮은 이 꼴로 변할 줄을! <이른 아침 인시> 황량한 마을, 부서진 절 참으로 형언키 어렵네. 재공양은 그렇더라도 죽 끓일 쌀 한 톨 없구나. 무심한 창문, 가는 먼지만 괜스레 바라보나, 참새 지저귀는 소리뿐, 친한 사람 없구나. 호젓이 앉아 이따금씩 떨어지는 낙엽소릴 듣는다. 누가 말했던가, 출가인은 애증을 끊는다고! 생각하니 무심결에 눈물이 난다.
<해 뜨는 묘시> 청정함이 뒤집어 번뇌가 되고, 애써지은 공덕이 세상 티끌에 덮이나니! 끝없는 전답을 일찍이 쓸어본 바가 없도다. 눈썹 찌푸릴 일은 많고 마음에 맞는 일은 없나니! 참기 어려운 건 동쪽 마을의 거무튀튀한 늙은이, 보시 한번 가져온 일이란 아예 없고, 내 방 앞에다 나귀를 놓아 풀을 뜯긴다.
<공양 때의 진시> 인근 사방의 밥 짓는 연기를 부질없이 바라본다. 만두와 찐 떡은 작년에 이별하였는데, 오늘 생각해보니 공연히 군침만이 돈다. 생각도 잠깐이고 한탄만이 잦구나. 백 집을 뒤져봐도 좋은 사람은 없고, 오는 사람은 그저 마실 차나 찾는데, 차를 마시지 못하면 발끈 화를 내며 간다.
<오전의 사시> 머리 깎고 이 지경에 이를 줄을 누가 알았으랴, 어쩌다가 청을 받아들여 촌 중 되고 보니, 굴욕과 굶주림에 처량한 꼴, 차라리 죽고 싶어라. 오랑캐 장가와 검은 얼굴 이가는 공경하는 맘은 조금도 내지 않고, 아까는 불쑥 문 앞에 와서 고작 한다는 말이, 차 좀 꾸자, 종이 좀 빌리자는 말 뿐이네.
(중략)
<잠자리에 드는 해시> 문 앞의 밝은 달, 사랑하는 이 누구인가! 집안에서는 오직 잠자러 갈 때가 걱정이러라. 한 벌 옷도 없으니 무얼 덮는 담! 법도를 말하는 유가劉家와 계율을 논하는 조가趙家, 입으로는 덕담을 하나 정말 이상하도다. 내 걸망을 비게 하는 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인연법을 물어보면 전혀 모르네.
<한밤중의 자시> 마음경계 언제 잠시라도 그칠 때 있던가! 생각하니 천하의 출가인 중에, 나 같은 주지가 몇이나 될까. 흙 자리 침상 낡은 갈대 돗자리, 늙은 느릅나무 목침에 덮게 하나 없구나! 부처님 존상에는 안식국향安息國香 사르지 못하고, 잿더미 속에서는 쇠똥냄새만 나네.
7) 이원섭 지음,『깨침의 美學』p. 135.
8)『조주록趙州錄』(선림고경총서 18) 백련선서간행회 편, 장경각, p. 171. 師行腳時到一尊宿院。纔入門相見便云。有麼。有麼。尊宿豎起拳頭。師云。水淺船難泊。便出去。又到一院。見尊宿便云。有麼。有麼。尊宿豎起拳頭。師云。能縱能奪。能取能撮。禮拜便出去。(古尊宿語錄卷第十四, 趙州真際禪師語錄之餘,, 中華電子佛典協會 CBETA(Chinese Buddist Electronic Text Association)
9) 무문혜개無門慧開 원저原著, 종달宗達 이희익李喜益 제창提唱,『무문관無門關』p. 129.
10) 무문혜개無門慧開 원저原著, 종달宗達 이희익李喜益 제창提唱,『무문관無門關』pp. 130~131.
11) 원오극근圓悟克勤, 정성본鄭性本 역해譯解,『벽암록碧巖錄』p. 127.
12) 이원섭 지음,『깨침의 美學』pp. 135~136.
13) 협산선회(夾山善會, 805~881) 선사는 한광漢廣의 현정峴亭사람으로 속성은 료廖씨이며 법명은 선회善會이다. 말 재주가 있고 총명했다. 처음에는 도성都城근처에서 법을 전하다가 나중에 도오道吾의 지시로 화정花亭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법을 잇고 협산 기슭에서 살았다.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14) 석상경제(石霜慶諸, 807~888) 선사는 여릉廬陵(강서성 吉安府) 사람으로 성은 진陳씨이다. 13세에 홍정서산洪井西山의 소紹 선옹禪翁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23세에 숭산嵩山에 가서 수구受具하였다. 뒤에 도오원지(道吾圓智, 769~835, 청원하, 약산유엄의 자)의 법을 받았다. 圓智 사후 學徒가 운집하여 500이 넘었다고 한다. 희종僖宗이 자의를 내리니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광계光啓 4년 2월 82세로 입적하였다. (송고승전12, 전등록155, 선림승보전5, 宗門統要속집14, 會元5, 계고략3)
15) 암두전활(巖頭全豁, 828~887)은 당대 선사로 청원하 덕산선감德山宣鑑의 제자이다. 천주泉州(복건성) 남안현南安縣 사람으로 성은 가柯씨, 휘는 全豁, 시호는 청엄대사淸儼大師이다. 영천사靈泉寺 의공義公에게 출가하여 장안長安 서명사西明寺에서 受具하였다. 처음에 교종에 몸을 담았다가 나중에 설봉의존雪峰義存, 흠산문수欽山文邃와 사귀고, 앙산혜적仰山慧寂을 배알拜謁하였으며, 德山에게 참례하여 법을 이었다. 회창사태會昌沙汰(845) 때는 서호강변西湖江邊 뱃사공으로 난을 피하였고, 후에 동정호반洞庭湖畔의 와룡산臥龍山 암두巖頭에서 종풍을 선양하였다. 광계 3년(祖堂集에는 中和5년 곧 885년) 4월 8일, 中原에 도적이 창궐했을 때, 도량을 수호하려 단거端居하다가 도적의 칼에도 신색자약神色自若하며 대규일성大叫一聲으로 꾸짖으며 시적示寂하였다(세수 60세). (송고승전23, 조당집7, 전등록16, 회요21, 회원7)
16)『종용록從容錄』(하) (선림고경총서 34), 백련성서간행회 편, 장경각 p. 65.
17) 원오극근圓悟克勤, 정성본鄭性本 역해譯解,『벽암록碧巖錄』「제100칙 巴陵吹毛劍 - 파릉화상의 취모검」 pp. 630~631.
18) 먼지를 떠는 물건. 불拂, 불진拂塵이라고도 한다. 가는 자루에 말총이나 헝겊 조각 따위를 묶어서 만든다. 특히 털의 색깔이 흰 불자(白拂)를 귀중하게 여겼다. 원래는 먼지나 모기·파리 등을 쫓아내는 데 사용했던 생활용구였으나 불교에서는 더럽고 나쁜 것을 털어버리는 상징적 의미로 받아들였다. 주로 선종禪宗에서 주지住持가 설법할 때 위엄의 상징으로 많이 사용했으며, 불교조각에서는 제석천帝釋天이나 천수관음보살상千手觀音菩薩像의 지물로 나타나기도 한다.
19) 방선 시간에 등을 기대고 쉬는 판.
20) 긴 책상, 긴 테이블, 탁자 혹은 의자, 그리고 사방침四方枕, 안석案席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사방침은 팔꿈치를 괴고 비스듬히 기대앉게 된 네모난 베개, 한 자 정도 길이의 널조각을 여섯 면으로 짜서, 겉은 다홍색과 남색의 비단으로 싸고 속에는 솜을 넣는다.
21) 불구佛具의 하나로 법회나 설법 때, 뿔이나 대, 나무 따위로 호미 모양으로 만들어 승려들이 지니는 작은 막대기. 모든 것을 뜻대로 행할 수 있다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22) 무문혜개無門慧開, 정성본鄭性本 역주譯註,『무문관無門關』p. 122.
23) 봉암사鳳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파曦陽山派의 종찰宗刹로 879년(헌강왕 5) 지증대사 지선智詵에 의해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다. 935년(태조 18)에 정진대사 긍양兢讓이 중창하고, 1431년(세종 13)에는 기화己和가 중수했다. 1674년(현종 15)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신화信和 스님이 재건했다. 1915년 세욱世旭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과 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37호 지증대사적조탑智證大師寂照塔, 보물 제138호 지증대사적조탑비, 보물 제169호 3층석탑, 보물 제171호 정진대사원오탑靜眞大師圓悟塔, 보물 제172호 정진대사원오탑비 등이 있다. 계곡 거대한 암벽에는 높이 6m의 유형문화재 제121호 마애불좌상도 새겨져 있다.
24) 김광식 지음,『춘성』pp. 273~274.
25) 춘성(春城, 1891~1977) 스님은 1891년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에서 태어났다. 속명 창림昌林, 본관은 평창平昌, 성姓은 이李씨, 법명은 춘성春城, 법호 또한 춘성春性이다. 태몽에 하늘에서 동자가 오색구름을 타고 어머니 품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어린 시절 영민함이 유난히 남달랐다고 한다.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신흥사에 가서 대웅전 부처님을 뵙고 난 후 출가의 뜻을 부모님께 고하니 불허하였다. 이후 13세에 백담사로 출가하여 만해 한용운스님 휘하로 들어가 머리를 깎게 되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백담사에서 만해 스님에게서 수학하였다. 스님은 만해 스님의 유일한 제자이기도 하다. 20세에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 스님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25세에 평안도 안변 석왕사에서 전문 강원 대교과를 수료하고 이어 강학講學을 전공하시고 강백講白으로서 전국의 운수납자를 들끓게 했다. 30세에 신흥사 주지를 맡았으며, 재임시 불전답佛田畓을 많이 확보하셨다. 35세에 석왕사 주지를 맡아 불사佛事에 심혈을 기울이셨고, 이후 서울 삼청동에 많은 신도들의 힘으로 칠보사를 창건하시고 도봉산 원통사를 중창하셨다. 40세에 덕숭산 수덕사에서 만공스님 휘하에서 법사로 전법 수행하셨다. 만공스님께서 '별전일구別傳一句가 재기처在基處요'하며, 춘성스님은 우렁찬 목소리로 일갈一喝하며 되받으나, 만공선사께서 이를 수긍치 않으셨다. 이에 스님은 수덕사 정혜사에서 겨울에 불도 지피지 않고 장좌불와를 거듭하셨고, 그 후 금강산 유점사에서 3년간 수행하시다 마지막 동안거 결제일에 '이제 잠은 항복받았다'고 하시니 드디어 무애한 대자유인으로 탈바꿈하시었다. 45세에 25하안거를 마치셨고, 60세인 1950년 6.25전쟁 때에는 북한산의 망월사를 떠나지 않았다. 60세 이후 망월사 주지, 강화 보문사 주지 등을 역임하셨으며, 80세까지 망월사 조실로 계시다가 87세에 스님은 화계사에서 문도를 모아두고 '허공에 골체骨體를 보았느냐? 만월청산滿月靑山에 무촌수無寸樹하니 현애철수장부아懸崖撤手丈夫兒니라, 팔십칠년사가 칠전팔도기로다. 횡설여견설橫說與堅說이여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니라.' 라는 마지막 법어를 내리시고 1977년 화계사에서 세수 87세, 법랍 74세로 입적하였다. 성남시 봉국사에 탑과 비가 세워졌다.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써서 욕쟁이스님으로도 통했으나 평생을 옷 한 벌 바리때 하나 만으로 살다간 무소유의 실천가였다. 극락이 마음을 떠나 따로 없고, 종교도 본래 없는 것으로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들어 사람을 버리게 된다며 종교의 참뜻을 깨우친 선승이기도 하다. 유언에 따라 사리와 재는 서해에 뿌려졌다.
26)『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1990년대 초중반 전국적인 답사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인문서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하였다. 1993년 나온 제1권「남도답사 일 번지」이후 계속 출간되어, 2012년에는 제주의 자연과 문화유산, 그리고 사람 이야기를 담은 일곱 번째 책「돌하르방 어디 감수광」이 나왔다.
27) 한국문화유산답사회,『답사여행의 길잡이 1~15』돌베개.
28) 홍천 물걸리物傑里 절터(강원도 기념물 제 47호)는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 있다. 이 사지는 절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전해오는 말에, 홍양사洪陽寺터라고 한다. 1967년 4월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철불 조각, 청자편, 수막새와 암막새기와, 암키와 조각, 토기조각, 조선시대 백자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절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절터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54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542호), 불 대좌(보물 543호), 불 대좌 및 광배(보물 544호), 3층 석탑(보물 545호) 등 보물 5점이 있다. 1982년 현재의 보호각을 새로 짓고 불상을 옮겨 보존하고 있다. 절터에서 주춧돌, 장대석 [네모지고 긴 석재로 기단에 가로로 길게 놓은 돌], 불상대좌 등 여러 석재들을 모아 놓았다. 특히 불상대좌의 사자상은 매우 정교하고 거대하다. 하나의 절에 4구의 대형 불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절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29) 원광법사(553?~637년)는 금곡사에서 수도를 하고 있었으며 589년 중국의 陳나라로 유학을 했다. 그는 거기서 전도와 교화로 이름을 떨쳤기에 중국의 당속고승전(唐續高僧傳)에 전기가 실릴 정도였다. 원광법사는 11년간의 유학에서 600년에 귀국하니 모든 국민뿐만 아니라 진평왕도 면대해서 공경하고 성인처럼 높였다. 원광법사는 귀국하여 잠시 가실사(천도 운문산 근처의 절)에 있었는데 귀산 추항에게 화랑도 화랑오계(花郞五戒)를 가르쳐 주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주역을 담당한 화랑들에게 그들의 정신적, 도덕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생활지침을 제공했던 것이다. 원광법사는 608년 왕의 요청에 의해 수나라에 걸사표(乞師表)를 지었으며 말년에는 왕이 손수 의복과 약물 등을 마련해 주었고 637년 임종하자 장례도구를 내리어 임금의 장례와 같이 했다. 그의 부도는(우리나라 최초의 부도이며) 금곡사에 안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절은 소실되었고 부도의 일부가 파괴 되었다. <현지 안내문>
30)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金谷寺址 圓光法師 浮屠塔,사리탑)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7호이다(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산 9-1). 이 부도탑은 원광법사( 圓光法師,? ~630)의 부도로 알려져 있다. 높이 2m 정도로 부서진 채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1층 몸돌 4면에는 4각형의 문틀을 새기고 파내어 불상을 안치하는 감실龕室을 만들고 그 안에 앉아 있는 불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은 밑면 층급 받침이 4단이다. 원광법사는 속성俗姓이 박씨 또는 설씨로 80세 혹은 99세를 살았다고 한다. 화랑도의 생활신조가 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주고, 수隋나라에 보낸 걸사표乞師表를 지을 정도로 불교사상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능하였다. 신라 진평왕 52년(630)에 황룡사에서 돌아가시자 명활산에 장사지내고 삼기산三岐山 아래 금곡사에 부도를 세웠다고 하는 기록이『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한다. <현지 안내문>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어물동마애여래좌상於勿洞磨崖如來坐像 (소재지 울산 북구 어물동 산122) ‘방바위’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위에 일광日光·월광月光보살을 협시로 하는 약사삼존불을 높게 돋을 새김한 마애불이다.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준다는 중앙의 약사불은 비교적 길쭉한 얼굴로, 이목구비가 약간 마멸되었을 뿐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목에는 3개의 주름이 뚜렷하며, 당당한 어깨와 강건한 신체는 통일신라를 대표할 만한 조각 수법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멸이 심한 두 손과 오른쪽 옷 주름 등에서는 다소 딱딱해진 면도 엿보인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약간 모난 듯 긴 얼굴에 원통형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데, 이마에 각각 해와 달을 표시하고 있어 일광·월광보살임을 알 수 있다. 바위 뒷면에는 서까래 같은 것을 걸쳤던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석굴사원 형식의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지 안내문>
첫댓글 얼마전에도 읽어본 글이지만, 들어갈수 없다는 절이 있다니 얘기만 들어도 약이 오른다.
법사님!
그래도, 불사 하라고, 기도 접수 하라고 조르는 절보다는 백번이나 낳읍니다.
" 1년동안 매일 새벽에 축원 해 드립니다"
" 기와 뒷면에 이름써 올려지고...."
손님이 찿아와서, 주인을 찿는데, 주먹질하는 절보다도 낳구요^^
" 차 라도 한잔 하시고 가실걸....!"득로 합장
어제도 영하산방에는 말없이 피고지는 꽃처럼, 소리없이 떨어져 내리는 낙엽처럼,
들어 온듯이. 나간듯이 하신 도반님들이,7~80분이 계시다.
요즈음 카페난을 들여다 보니, 이구석 저구석 기웃거리며, 찔러대는 득로 일색이다.
명색이 화두공부를 하는 사람이,
법사님 글주신대로 본대로 느낀대로 왜? 보여진대로 보지를 못할꼬!
말이 많으면, 마음속에 한을 얘기 한다고 하던데.......
세상 십자가 혼자 짊어진듯이......
그러고보니,요즈음 좌선 한다고 앉아있어도 , 망상의 바닷속이라!
이보시게! 득로!
허 하면, 얼큰한 삼선 쨤뽕이라도 한그릇 시켜 드시게! 득로 합장
'말없이 피고지는 꽃처럼, 소리없이 떨어져 내리는 낙엽처럼' 글 솜씨도 뛰어나십니다.
제가 새로 개인 메뉴를 만들어 드릴테니 매일 한 마디씩 살아가는 이야기, 수행이야기를 쓰시지요.
'득로 득음' '득로 왈' 혹은 '득로 칼럼'.... 원하시는 제목을 하나 알려주세요.
요즈음, 가뜩이나 좌선시에도 어수선 하기만 하던데요?
하던짓도 멍석 깔아놓으면 못 한다고 했읍니다
하도 제가 요즈음 시끄럽게 했는지,
자주 들어오셔서 한마디씩 하시던 분들도, 발길이 묘연 합니다
.
제 난이라 정하지 마시고, "이리 저리 살아 가는 이야기" 정도의.....
오시다 가시다 차한잔 마시며(차는 집에서) 격식없이 도반님들 끼리
사귈수 있는 얘기방 정도가 좋겠읍니다,
사실 저는 여러 지부에 나눠져 있는 도반님들 끼리의 "사귐의 장" 같은것이
필요 하다고 느꼈거든요.
법사님께서도 소모임 정도로 알아보신다 하셨는데, 바로 답을 못드린것은 제가 화요일만 시간이 나니
마음만 앞섭니다
만들어 주시고, 멍하니 지켜만 보시면 또 그렇고 그렇습니다
법사님께서도 깊숙히 들어오셔서
테이블 가장 자리에, 분수대도 돌려놔 주시고,
햇빛 들어오는 창가엔 감나무 꺽어진 가지라도
걸어놔 주셔고 하셔야 할듯 합니다
여지것, 법사님만 상대 하셨던 도반님들이, 서로 도반님들끼리의
사귐의 장 이었으면 합니다.(그런 저런 사귐 말구요^^)
우리 선도회 에는, 법사님들도 많으시다고 들었는데,
그리 열중 쉬엇! 하고들 계시면 되겠읍니까??
나 공부 하던 얘기며, 저 처럼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있던 얘기들도 들려 주시고 해야지요!
이 득로!또, 슬슬 열이 올라갑니다 ,하~알!(법사님들께 하는소리) 득로 합장^^
산에 나무들이 제각각이듯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면 편안합니다.
저는 카페지기니 이 카페를 지키고 관리하느라 매일 들어오지만 다른 분들은 다른 일에 매일 매진하시겠지요.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원하시는 일들을 무심하게 재미있게 하시면 좋겠습니다.
웅덩이에 물이 고이면 개구리는 자연히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참, 개인 메뉴를 만들어 드린다는 것은 매일 한 마디씩 살아가는 이야기, 수행이야기를 쓰셔서
나중에 책으로 한 권 묶어 내시라는 취지였고.
‘이리 저리 살아가는 이야기’라면 토론방을 이용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전원 합장
공개된 곳에 글을 쓰게 되면 더 열심히 쓰시게 될테고 독자의 반응도 미리 알 수 있겠습니다.
전원 합장
우리나라에 유일하게도 전라도 땅끝마을 해남에서만 나온다는 얼룩덜룩한 돌덩어리를,
강원도 정선으로 싣고가 깍아만든 돌 거북이 분수대,
경기도 여주에 있던것을
제 매장(서울)으로 옮겨와, 십년을같이 동거 하고 있는것이 있읍니다.
법사님과 상의도 없이, 그걸 산방(충청도) 연못 있는곳으로 옮길 구상을 하고 있는데
등치는 그런데, 무거워서 차량이 문제 입니다^^
- 전라도에서 강원도로, 경기도로, 서울에서 충청도로....
올때는 봉고에 실려 왔는데 .....
등어리에는 볼링공만한 돌공이 올라 타있고....
고라니? 그 근처에 얼씬 못할듯......^^득로 합장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연못이 훨씬 아기자기 하겠습니다.
차에 실을 수 없을 정도면 꽤 큰 가 봅니다.
제 차로 가능하면 서울 갈 때 가지고 와도 되겠습니다.
전원 합장
아! 읽으셨네요!
실은, 건허 거사님 꼬셔서 방학 하면 언제 일정 한번 잡아볼까 했었읍니다.
등치가 큰것이 아니라 무겁습니다,
또 하나가 있는데, 큰 사슴이 한마리가 있읍니다.(부레스-검정-숫놈)
법사님 좌선 하실때,
농땡이 치시나 지켜보는 "지킴이"로 제격 입니다.
요번 화욜날, 건허거사님, 첫눈오면 어쩌구 하시길래,
눈오면 그꼭대기를 어찌 가냐고?? 어쩌구 저쩌구.....
득로 합장
계절적으로 눈이 많이 오는 계절이 아니라서 많이 올리는 없겠습니다.
참고로 눈이 오면 앞산은 북향이라 눈이 안 녹아 경치는 좋으면서
저희 집 쪽은 남향이라 눈이 금방 녹습니다.
건허 거사님은 올라보았지만, 앞산에 오르면 설경이 또 끝내줍니다.
눈이 오면 항상 날씨가 맑아져서 시야도 명쾌합니다.
전원 합장
예! 저도 기다려집니다
주무세요! 득로 합장
제가 위에서, 시건방스럽게 선배 법사님들께 소리를 질렀읍니다
지금 전원 법사님께서도 이런저런 말씀을 해 주시는데,
들을땐 예!예! 하지만, 이 말씀을 못 알아 듣습니다.
저희가 도움되는것은 공부 하실때, 공부 하시던 얘기들을 해주셔야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내일은 끝났다고, 양지바른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나 몰라라 하시는것 같아 소리가 나왔읍니다.
죄송하옵고, 가끔 한말씀씩 해 주셨으면 해서 그랬읍니다
합장, 너업~죽. 득로 합장
노력하겠습니다. 사실 양지바른 벽에 기대 서있는 것은 아니고
물으시는 것 외에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 지 잘 모르겠고,
실재 스스로 깨우치시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못 드리거나 안 드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 아시게 됩니다.
그리고
'요즈음 좌선 한다고 앉아있어도, 망상의 바다 속이라‘
‘가뜩이나 좌선 시에도 어수선 하기만 하던데요?’ 라고 하셨는데,
예! 그렇습니다.
파도가 자고 물이 고요하면 바다 속이 다 들여다보입니다.
보이시는 대로 그대로 보시고, 떠오르는 대로 어수선한대로 그대로 두십시오.
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가칭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메뉴를 만들어 드리면 어떨까 합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나 수행담 살아가는 이야기 등등 매일 한 마디씩 쓰셔서
서로 소통하고 나중에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책으로 한 권 묶어 내시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저도 열심히 댓글을 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토론방의 ‘꿈해몽’을 <살아가는 이야기>로 옮기고,
<무문관 다시보기>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시는 것 같은데 그것도 옮겨 놓으면 어떨까 합니다.
궁금한 것도 올리시면 관심 있으신 분들이 답 하실테고,
제 의견을 물으시면 저도 최선을 다해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원 합장
말씀 주시는대로 한번 해보겠읍니다,
잘 쓰려고 하다보면 거짓말이 섞이고, 포장이 될것같은 우려가 앞섶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득로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