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옥의 전설, 신창원 법률공부로 여념없어
2년간의 탈옥으로 전설이 되버린 신창원. 그 신창원이 이제는 소송의 달인이 된것으로 알려져 화제다. 신창원은 국가등을 상대로 총 4건의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이를두고 신창원이 교도소 독방에서 생활하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로 소송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신창원은 지난 5월 교도소내 수용자 인성교육의 문제점을 적은 서신 발송이 불허되고 외부의 서신 2통을 받지 못한데 항의, 정보비공개처분취소와 손해배상금 150만원을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냈다. 신창원은 지난해 6통의 편지를 교도소측이 발송하지 않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1심서 100만원의 일부승소 판결을 받은 후 항소했다. 또한 신창원은 디스크 치료를 제때 받지 못했다며 낸 손해배상 소송은 항소심서 500만원의 일부승소 판결을 받았으나 국가가 상고해 대법원에 계류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신창원은 복역 중 중졸,고입,고졸 검정고시에 차례로 합격할 정도로 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동안 도서 대출을 통해 검정고시 준비는 물론 각종 소송과 관련된 실무를 공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신창원의 연이은 소송에 교도소측은 난감해하고 있다고.
교도소측은 신창원의 소송 제기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신창원이 교도소 외부에 재판을 받기 위해 나가려면 철통 호송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곤혹스러운 처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신창원은 2.6㎡의 독방에서 11년째 지내고 있다. 신창원의 잇단 소송제기로 청송교도소 측은 소송 대응에다 법정 호송까지 해야 하는 업무 부담을 안게 됐다. 교도소 관계자는 "신창원이 독방 생활을 하지만 도서 대출이 가능하며 다른 수용자들로부터 소송실무를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신창원이 민사재판을 받기 위해 호송되는 모습은 '007 작전'을 방불케하듯 교도관들의 철저한 경비 속에 진행됐다고 한다. 교도소 측은 수갑과 포승줄을 사용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재판부가 민사재판에서는 허용할 수 없다고 결정함에 따라 신창원의 수갑과 포승줄을 풀었다. 그러나 법정에 참여한 대구지법 경비대원 등에 따르면 신창원의 다리를 천으로 가린 점으로 미뤄 신창원의 다리에 포승줄을 맨 것으로 추정됐다. 일부 언론에서 신창원의 건강상태에 대해 '종합병원', '사다리 줘도 도망 못간다'고 보도했지만 신창원은 건강한 상태로 법정에 섰다고 한다. 신창원은 지난 2007년 12월 디스크(추간판탈출증) 수술을 받아 걷거나 뛰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신창원은 이날 법정에서 "항소심 선고공판이 열리는 다음달 19일 법정에 출석하겠냐"는 재판부 질문에 "출석하겠다"고 대답했다. 민사재판 선고일에 출석하지 않아도 선고 판결문이 당사자에게 송달되는 점을 감안하면 신창원은 답답한 교도소를 벗어나 잠시라도 바깥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신창원 탈옥사건은 한편의 영화같다. 실제로 신창원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자는 제의를 신창원 자신이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옥중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신창원은 자신을 상업화하는 것 같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한다. 신창원은 1997년 교도소를 탈옥한 후, 2년 6개월 동안 108건의 강 절도를 저지르며 전국 각지로 출몰한 탈옥수였다. 신창원은 1997년 1월 20일 부산교도소의 화장실 쇠창살을 쇠톱날로 절단하고 탈출하였다. 신창원은 이후 약 2년 동안, 전국을 오가며 약 9억 8000여만원을 훔쳤고, 훔친 돈으로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을 유혹해 동거하며 아지트로 삼았다. 그러나, 동거할 곳이 없을 때는 신창원은 토굴 등에서 생활하며 쥐고기로 연명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경찰의 추격에 쫓기는 중 신창원의 담당형사인 원종열 경장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추격을 끝내 따돌려 신창원은 자신의 초인적인 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경찰은 신창원의 검거를 위해 헬리콥터를 띄우고 전경을 동원했으나 번번이 속수무책이었으며 열세 번을 눈앞에서 놓쳐 많은 경찰관들이 이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999년 7월 16일, 신창원은 숨어있던 전남 순천의 아파트에서 가스관 수리를 의뢰받은 수리공의 제보를 받은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신창원 검거작전의 공로로 당시 김진희 과장은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6명은 1계급 특진을 했다. 현재 탈옥수 신창원 검거 경찰이었던 김진희(57)씨는 제63대 광주동부경찰서장으로 부임해있고 제보자였던 김영군(38)씨는 은신처를 제보한 공로로 경찰에 특채돼 1999년부터 같은 경찰서 형사계 지역형사3팀에 근무하고 있다. 김진희 당시 수사과장은 신창원이 은신처로 삼기 위해 며칠전 월세계약을 마친 아파트의 앞 베란다와 뒤 창문을 통해 형사들이 재빨리 진입토록 지시하는 등 1시간여의 긴박한 검거작전 끝에 ‘월척’ 신창원을 붙잡는 뜻밖의 성과를 올렸다.신창원은 자신의 동거녀와 그녀가 키우던 애완견이 지켜보는 가운데 머리에 권총을 겨눈 경찰관 체포조에게 길고 긴 도피에 지쳐 자포자기한 듯 자신이 신창원이라는 사실을 자백하고 수갑을 채울 손목을 순순히 내밀었다.1997년 1월 20일 탈옥한 뒤 전국을 누비던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이 2년6개월여의 장기간 도피생활을 마치는 순간이었다.신창원의 검거 당시 동거녀는 신창원 검거와 함께 신창원을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40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신창원이 동거녀에게 사 주었다는 아파트는 동거녀가 보석으로 풀려난 후 그녀 소유의 아파트가 되었다고 한다. 이 아파트의 한 관계자는 “신창원이 검거되기 전에 신창원인 줄 모르고 한번 만났는데 신창원이 자신을 목회자라고 소개하며 나에게 신앙생활을 할 것을 권유 한 적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신창원은 책으로도 출판된 ‘신창원의 907일의 고백’ 중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하고 머리한번만 쓸어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5학년때 선생님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와, 빨리 꺼져라'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신창원은 1967년 전북 김제에서 가난한 농부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창원은 8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초등학교는 졸업하였으나, 진학하지 못하였고 교도소에서 중,고등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다. 신창원은 학교를 그만두고 1982년에 절도죄로 소년원에 들어갔다. 이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창원의 친아버지인 신흥선씨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인데 신흥선씨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아들 신창원이 소년원에 가서 새 사람이 되길 갈망하였으나 신창원은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본격적인 범죄인생을 살게 된다. 신창원은 출소 뒤에 서울로 올라갔다. 음식점 배달부 등을 하다 1983년 절도죄로 또 다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다. 신창원은 1989년 공범 3명과 함께, 서울 돈암동 정모 씨 집에서 강도행위를 하다 한 후배가 정씨를 죽여 강도치사죄로 수배를 받았고 그 해 9월 검거되었다. 검거 후, 신창원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후 1994년 부산교도소에 이감되었다.
신창원은 1997년 1월 20일 부산교도소의 화장실 쇠창살을 쇠톱날로 절단하고 탈출하였다. 이후 약 2년 동안, 전국을 오가며 약 9억 8000여만원을 훔쳤고, 훔친 돈으로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을 유혹해 동거하며 아지트로 삼았다. 그러나, 신창원은 동거할 곳이 없을 때는 토굴 등에서 생활하며 쥐고기로 연명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경찰의 추격에 쫓기는 중 신창원의 담당형사인 원종열 경장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추격을 끝내 따돌려 신창원은 자신의 초인적인 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경찰은 신창원의 검거를 위해 헬리콥터를 띄우고 전경을 동원했으나 번번이 속수무책이었으며 열세 번을 눈앞에서 놓쳐 많은 경찰관들이 이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999년 7월 16일, 신창원이 숨어있던 전남 순천의 아파트에서 가스관 수리를 의뢰받은 수리공의 제보를 받은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신창원은 재검거 이후, 22년 6개월 형을 추가로 선고받았으며, 현재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신창원은 수감 중에 고입 검정고시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고, 검정고시를 합격 한 후 모범적인 수감생활을 해오고 있다고 한다.
신창원은 2002년 이해인 수녀에게 시집 '향기로운 말을 거는 것처럼'을 선물로 받은 이후 이해인 수녀와 수 십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카님’,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이해인 수녀는 신창원이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유년시절의 사진들은 물론, 신창원이 목욕 수건을 풀어서 그 올로 짠 십자가 벽걸이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고 한다.
출처
임영미의 문화사랑방
http://cafe.daum.net/munhwa-youngmi/Ep23/87?docid=1J3Db|Ep23|87|20091016144156&q=%BD%C5%C3%A2%BF%F8&srchid=CCB1J3Db|Ep23|87|20091016144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