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919년 기미년 3?1독립운동
한일강제합병으로 한반도의 식민화가 시작된 암흑의 세월 9년, 1919년 3월 1일에 이르러 늦게나마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울분으로 온 국민이 하나되어 3?1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전국 방방곡곡의 200만 이상 국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애국 애족의 민족혼이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타올랐다.
(1) 3.1운동의 힘을 고양시켜 준 신민회와 105인 사건
‘105인 사건’의 시발점은 안명근 사건이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으로 온 나라가 등불 꺼진 캄캄한 밤을 만났을 때, ‘해서교육총회’의 중심 인물로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했던 안명근 선생은 더 이상 국내에서는 활발한 독립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서간도에 한인청년들을 이주시켜 학교를 세우고, 이들을 교육하여 중국의 무관학교에 보내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 일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무기 구입 등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므로, 안명근 선생은 황해도의 안악과 신천 지역의 부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1910년 11월 황해도 신천의 민병찬 등이 이 일을 일제 헌병에게 밀고함으로써, 1910년 12월 안명근 선생은 사리원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 일경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는 이 일을 무기 구입을 위한 강도 및 강도미수사건으로 확대 과장하여 가혹한 고문을 가하였다. 또 이사건을 의도적으로 부풀려 황해도의 신민회 관계자 160여 명을 잡아들였다.
안창호는 기존 단체와는 구분되는 비밀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다 투쟁적이고 적극적인 구국운동을 모색하되, 일본 총독부에게 해산을 당해서는 안 되겠기에 비밀결사를 고집한 것이다. 실제로 일제는 1909년까지 신민회 조직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비밀조직이었던 만큼 신민회에 가입하기 위한 조건은 철저했고, 수차례 테스트 과정을 거쳐 수개월 만에 비로소 가입이 허락되곤 했다. 가입절차에 있어서 핵심적인 자격 조건은 그 목적에 걸맞게 첫째는 투철한 국가관(國家觀)과 애국심(愛國心)이 있는가였고, 둘째는 국가를 위해 피를 흘릴 수 있을 만한 담력(膽力)과 희생정신(犧牲精神)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신민회 회원은 주로 학생층이었으며, 그 연령대는 10대부터 있었으나 20대가 가장 많았고, 평균연령이 30대를 넘지 않았다. 이들은 대한매일신보, 소년 등 잡지를 통하여 신 사상을 국민들에게 계몽하였으며 독립운동의 기초를 세웠다.
이렇게 비밀결사 조직으로 활동하던 신민회가 약 2년 만에 일제에게 발각이 되기에 이른다. 일제가 항해도의 신민회 관계자 160여 명을 잡아들였던 이 사건은 ‘안악 사건’ 또는 ‘안명근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일제는 심한 폭력과 고문을 가하여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사실을 부풀려 날조하였다. 일제는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의 낙성식에 참석하려고 떠났던 당시 데라우치 총독이 선천역에 잠시 하차하는 순간 안중근의 사촌 안명근이 데라우치를 처단하려 했으나, 경비가 너무 삼엄하여 저격 순간을 찾지 못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고 또다른 조작극을 꾸몄다. 일제의 거짓말 조작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신민회의 주요 간부들이 여섯 차례에 걸쳐서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조작하여, 그들이 만든 거짓된 각본에 따라 회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12년 1월부터 일본 경찰은 조작, 날조된 내용을 가지고 허위 자백을 받기 위해, 당시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의 지시로 이들에게 가장 악독하고 잔학무도한 고문을 자행했다. 주먹과 곤봉으로 온 몸을 사정없이 구타하고 천장에 매달아 때리며, 불로 단근질하기를 8시간씩이나 하였다. 그래도 허위 자백을 하지 않자 산으로 끌고가 소나무에 묶어 놓고 칼로 위협하기도 하였다. 또한 허위로 작성한 내용을 암기하여 자백하도록 몇 전이고 연습시켰으며, 암기할 때까지 고문을 가했다.
1912년 8월 30일, 제 1심에서 18명은 “충분한 근거가 없다.”라는 이유로 무죄를 언도받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다. 그래서 ‘105인 사건’이라 불리게 되었다.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 주모자급 6명은 10년, 그 외 18명에게는 7년, 39명에게는 6년, 나머지 42명에게는 5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유례가 없던 최대 규모의 공판이었다.
한편 105인 사건으로 선교사들은 국외로 추방시키려 했던 일본은, 본 사건이 확대되어 세계 여론으로부터 종교 탄압이라는 거센 항의와 비난을 받게 되자 선교사들에 대한 구속 및 추방을 철회하였다.
105인 사건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대였던 ‘신민회’의 실체가 드러나 해체된 것은,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국민들의 항일독립정신이 더욱 고취되었고 ‘신민회’의 항일의식을 계승, 승화, 발전시켜 국내외에서 많은 이들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데, 그 민족적 힘이 약 10년 후에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한 3?1운동에서 잘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915년을 전후해 풀려난 ‘신민회’ 회원 대부분은 1919년 3?1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또한 같은 해 4월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우는 지도력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