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저편, 그 아름다운 시간을 떠올리며
윤 현 규 (제48회 졸업. 현 전남교육청 기획감사관)
고향, 소꿉동무, 아지랑이, 달빛 여울, 복사꽃, 자운영, 하얀 발자국 그리고 영원히 머물 것만 같았던 기억들……
그 옛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월의 상처마저도 추억의 기쁨으로 감쌀 수 있으련만, 이 모두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전설의 고향이 되고 만 지금……
가난하고 힘들었던 과거, 그 슬픔의 꺼풀들을 양파껍질처럼 벗겨가며, 또는 낭만의 여울에 묻혀버린 참으로 많은 것들을 되새기며,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숱한 세월 지나 이제 먹고 사는 건 많이 좋아졌다지만 잃어버린 것 또한 많은 것 같다. 생활은 여유로워졌지만 마음의 여유는 잃어버려 옛날 그때가 오히려 좋았다는 말을 되뇌곤 한다.
초등학교시절, 그 아름답던 시간 속에 묻어둔 추억이 초저녁 등불처럼 환하게 비쳐온다.
우리가 6학년이던 1960년 그 당시 2개 반은 남학생, 1개 반은 여학생, 그리고 다른 1개 반은 남녀 혼합이었으며, 한 학급의 학생수는 60여명이었다.
세월의 끝에서 우리는 졸업식 날을 맞았다. 그날, 앞줄의 키 작은 아이들이 먼저 훌쩍거리면 어느새 뒷줄까지 번져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송사와 답사를 읽던 구령대 위 재학생과 졸업생 대표들도 이내 함께 울어버리고 고개 숙인 동무들의 검정 고무신에는 눈물방울이 빗물 되어 떨어졌다.(운동화 신은 학생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슬픔과 함께 6년 동안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담벼락 아래 양지바른 곳에 포대를 깔고 소꿉놀이하면서 어른들처럼 여보, 당신하고 서로를 부르곤 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여자아이가 풀을 손으로 뜯다 여린 손에 상처가 나면, 사내아이들은 그 손을 호호 불어주고 쑥 잎을 구해 돌멩이로 찧어 붙여주곤 했었다.
초등학교 입학 당시 급식소는 생각조차 못했으며, 학교수업도 저학년은 2부제라서 오전반, 오후반이 따로 있었다. 생활이 넉넉한 극히 몇 안 되는 애들이나 가방을 맸지 대부분은 교과서, 공책, 철제 필통을 한꺼번에 묶어 다니는 책보가 고작이었다.
내 고향 남석리는 학교와는 시오리 이상으로 상당히 먼 거리에 위치하였다. 책보를 매고 매일 왕복 30리 길을 보행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네를 출발하여 징검다리를 건너고 보를 지나야만 신작로가 나왔다. 때로는 물을 건너야 하고, 강우량이 더 많을 때는 그나마 훨씬 거리가 먼 다른 코스의 길을 이용해야 했다.
가로수는 플라타너스가 주종이었는데 윗가지를 너무 많이 쳐 꽁지 빠진 새처럼 보였고, 길바닥은 자갈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버스도 다니지 않았고 5일장날에나 화물차가 뜸하게 다녔으며, 우마차가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담임선생님께서는 우리 마을 아이들이 다 도착해서야 겨우 안심하시곤 했다. 집에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통신수단도 매우 불편하여 인편이나 서신이 아니면 의사소통할 방법이 없던 시절이었다.
장마가 지면 수리시설이 불안전한 시기라 물난리를 감수해야만 했다. 고지대 마을사람들은 굳이 홍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지만 비만 오면 우리는 항상 걱정이었다. 비에 흠뻑 젖는 것은 예사이고, 물을 건너면서 생명의 위험까지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홍수가 심할 때는 집이 잠기고 가재도구와 가축이 떠내려가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강물을 따라 올라온 피라미와 송사리를 잡는다고 고무신을 벗어들고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곤 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헌책 모으기를 했다. 친한 동무끼리 몽당연필을 나눠 주고 지우개는 반으로 잘라 나누어 쓰기도 하였다. 도시락은 쌀이 섞이지 않은 보리밥이 전부라서 찰기가 없이 거칠었고, 반찬도 김치 아니면 장아찌가 고작이었으며, 멸치무침은 그저 부러운 대상일 뿐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1년에 몇 차례 굳어진 분유를 배급받을 때에는 얼마나 기뻤는지, 하지만 너무 많이 먹고 배탈이 나기도 했었다.
시험은 수시로 봤지만 1학기 기말고사는 방학 전에 보았다. 이 시험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비로소 방학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시험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 나는 4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초등교육을 받게 되었다. 완고하신 조부님께 한문을 공부하며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당시 전남대학에 재학 중이시던 재종형님이 설득하셔서, 조부님께서 신문화와 사회 환경을 다소나마 이해하시고 결단을 내리신 결과였다.
그래서 2년 6개월의 짧은 초등학교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서산리 출신 배원주 선생님을 첫 담임선생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등교한 지 한달이 채 되지 않는 어느날 시험을 치르는데, 보기에 있는 명칭이 동물이면 ○표, 식물이면 ×표를 하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도대체 복숭아라는 것이 동물인지 식물인지 알지를 못해 그대로 백지로 두고 말았다. ‘복성’이 ‘복숭아’로 불린다는 것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야말로 촌뜨기 무지렁이의 혹독한 시련이었다.
자연시험에서 직렬, 병렬에 관한 문제는 다행히 며칠 전 배운 기억으로 다 맞출 수 있어서 시험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처음으로 접해 본 신 학문의 경험이라서 그런지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5학년 때는 남평 출신이신 김종진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다. 그 분은 초등학교 선배님이시기도 했다.
5학년 가을 운동회 날이었다.
만국기가 국기봉에서 건너편 플라타너스 나무까지 수없이 내걸리었고, 하얀 횟가루가 설탕처럼 반짝거렸다. 지금은 유니폼 복장을 하지만 당시에는 평상복을 그대로 입고,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채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목 터지게 응원했던 그 어린 열정이 너무 새롭기만 하다.
기마전에서 흘린 코피를 닦을 새도 없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밀가루에 얼굴을 박고 엿 골라 먹기에 열을 올렸다. 손님 모셔 달리기, 어머니 달리기, 그리고 제법 늠름한 모습의 상급생들 400미터 계주 때는 코너마다 아이들을 앉혀 인간띠를 만들었다.
그 중 가장 하이라이트는 오자미 던져 박 터트리기였다. ‘축 운동회’ 플래카드가 오색 꽃가루와 함께 박 속에서 터져 나왔고 점수도 많았다. ‘賞’자와 1등, 2등, 3등 도장이 찍힌 공책이나 연필이 상품이었는데 운동회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갈 때 마치 승리자의 전리품인 양 마구 흔들며 뛰어가던 모습들이 그립다.
늘 간직하고 싶은 푸른 하늘 아래서 펼쳐지던 그 가을의 축제가 지금도 기억 속에 활동사진처럼 어른거린다.
초등학교 시절의 옛 기억은 항시 기억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 기억은 늘 질긴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반가운 만남으로 이어지곤 했다. 김종진 선생님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 나는 광주교대 초등교원연수원의 교장 승진 대상자 연수에서 회계분야에 대해 강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3시간을 열심히 강의하고 돌아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음성이 예사롭지 않았다. 뜻밖에 김종진 은사님이셨다. 너무 장하고 대견스러우며 정말 명강의를 하였다고 칭찬해 주셔서 쑥스러웠다. 어릴 적, 선생님의 높으신 인격과 강의 기법을 힘써 체득하였더라면 이보다 더 나은 강사가 되었을 텐데……
6학년이 되면서 연세 높으신 이임주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다. 음악시간에 풍금을 치면서 열정적으로 지도해 주시던 모습, 흑판 위에 ‘克己’라고 크게 쓰신 후 오랜 시간 설명해 주시던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나의 뇌리 속에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교훈으로 남아있다.
왜 어린 우리에게 ‘克己復禮’의 어려운 화두가 제시되었는지, 그 배경이나 연유는 알 수가 없으나 노 스승님은 의지와 소신이 남달리 강하셨던 분으로 기억된다.
선생님들의 운동은 매주 수요일 열리는 교직원 배구대회가 유일한 종목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중위를 보시면서 젊은 선생님 못지않게 승부욕이 강하셨고, 가끔 상대편과 입씨름 하시던 모습도 그때 처음 보았다.
졸업하기 한두 달 전에 방주간 장혁군과 선생님 관사에 기거하면서 공부했던 추억도 있다. 선생님께서 많은 것을 우리에게 베푸셨는데, 이제는 유명을 달리하셨다. 선생님, 다시금 머리 숙여 삼가 명복을 빕니다.
담임선생님 외에도 많은 선생님들이 생각나지만 특히 근엄하면서도 인자하셨던 배봉민 교장선생님과 학교 앞 문방구의 부지런하신 소사 아저씨, 매일 수업 시작과 끝을 알려주던 종소리의 전도사 배은자 누나의 따스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빙청각에서의 야외학습 또한 잊기 어려운 기억이다. 청초하고도 함초롬하게 피어오른 연꽃의 자태며 주변에는 야생화가 어찌 그리도 많던지……
실과시간이면, 빙청각 아래 실습답의 모내기와 벼ㆍ보리 베기는 우리들의 몫이었지만 그 노작교육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다.
이제 우리도 벌써 60줄 나이……
아름다운 추억을 같이 했던 짝꿍은 지금 어느 하늘 밑에서 기억 저편의 아련한 풋사랑을 잊고나 있는 것인지……
유난히도 추운 날, 또는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먹구름을 피해 물레방앗간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추억의 씨앗을 심었던 남석리 친구들도 이제는 다들 세월을 반추하는 나이가 되었겠지.
음악시간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풍금에 맞춰 배웠던 노래하며, 봄날 열어둔 창문으로 스며 들어온 살구꽃 향기가 온 교실을 가득 채우곤 했었지.
수업이 끝나면 짝꿍의 집 대청마루에 나란히 배 깔고 엎드려 국어책을 펴놓고 함께 숙제를 했었다. 몇몇 친구는 그도 모자라 서로가 평생의 반려자로 맺어져 지금도 아주 행복한 모범 커플로 소문이 자자하다.
큰 행낭을 맨 우체부가 ‘편지요!’하고 마을에 들어서면 모두가 반갑게 맞이하고 개도 꼬리를 치며 따라다녔다. 일상의 기쁨을 배달하는 전령사라서 누구에게나 반가운 존재였다.
밤늦게 하교할 때면 들려오던 다듬이 소리는 우리 마음을 푸근하게 하였으며, 달빛에 비치던 초가지붕 위의 박덩이는 왜 그리 아름다운지……
유년의 기억이란 현실과 논리를 벗어나는 그 어떤 것이다. 예순의 나이가 되어도 그 기억을 떠올리는 자리에서는 누구나 감상적이 되고 만다. 어린 시절은 영원토록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모교의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감회가 새롭다. 포도송이처럼 추억이 주저리주저리 되뇌어지고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었던 그 시절의 깊은 정을 느껴본다
아무쪼록, 우리 후배님들이 더욱 힘찬 기상을 품고 세계로 웅비해 나가기를 기원해 본다. 아울러 혈육 같은 정을 나누어 가진 우리 남평초등학교 제48회 동문들의 건승을 빌고 또 빈다. ♠
개교 100주년에…
최 일 섭 (제49회 졸업. 경기도 안양초등학교장)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열번이나 강산이 변하는 오랜 세월동안 오늘이 있기까지 헌신적으로 힘써주신 교장 선생님 이하 교직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그리고 선후배 ‘남평인’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룩한 발전과 변화가 우리의 참교육에 정말로 좋은 밑거름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모교에 다닐 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았고 추억어린 잊지 못할 사연이 있었습니다.
운동장 보수를 위해 책보(책을 가지고 다닌 보자기)를 가지고 일정시간을 할애하여 새여울(남평다리)다리 밑에 있는 모래를 담아 운동 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던 일, 빙청각 주변 청소를 선생님께 칭찬 받기위해 말끔히 청소 했던 일, 식목일이면 산에 나무를 심었던 일, 소풍(현장학습) 장소로 지덕산, 증심사, 정자산 등 지금 같으면 걸어갈 수 없는 먼 곳 까지 도시락 들고 보물찾기, 오락시간을 가졌던 일… 운동회 날이면 지역주민이 모두 참석하여 운동장을 발 디딜 틈 없이 성황을 이루었던 지역 축제… 영화를 볼 수 없었던 시절이라 나무 그늘 밑에서 학년별로 돌아가며 변사(연극 해설자)가 나와서 했던 연극을 재미있게 보았던 일… 5.16 군사혁명 뒤 국민교육헌장을 줄줄 외웠던 일… 광주에 있던 중학교에 합격하기 위해 저녁 늦게까지 수업을 해 주신 고마우신 선생님들… 돌이켜보면 어렸을 적 추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우리 남평초등학교는 개교 당시 부족한 것이 많았었지만 그동안 모교에서 근무한 여러 교직원들과 학부모님, 지역 주민이 열심히 노력하여 이제는 아주 좋은 학교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 모교가 이렇게 좋은 학교가 될 수 있도록 수고해주신 역대 교장 선생님과 교직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후배 어린이 여러분!
우리 어린이들도 모두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 모두에게 꿈을 심고 가꾸어 주는 배움터인 우리 학교를 아끼고 가꾸며 더욱 빛나는 자랑스러운 학교가 되도록 힘과 마음을 모으는데 다 같이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학교의 주인은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을 언제나 마음속 깊이 새겨주고 우리 모두 훌륭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도록 앞장서서 나아가기 바랍니다.
긴 역사를 지닌 자랑스런 남평초등학교 동문 여러분…
모교가 발전할 수 있도록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리며 학교 발전과 사랑스런 후배들을 열심히 지도해 주시고 계신 교장 선생님과 교직원 여러분의 건강과 모든 “남평인”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자랑스런 남평초등 100년
배 기 운 (제50회 졸업. 제16대 국회의원)
내가 50회로 졸업한 남평초등학교(졸업당시는 ‘남평남교’였다)가 이렇게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다. 치욕의 일제강점기로 접어들기시작하였던 1906년에 개교하여 숱한 오욕의 역사를 거치면서 금년에 100주년을 맞이하는 모교 남평초등학교가 나는 명문고, 명문대를 나왔지만, 이제 ‘명문초등’ 졸업생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다.
남평초등 교정에 들어서면 언제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교문의 위치가 옮겨지고 빙청각이 없어지고 우람한 체육관이 들어서고 학교앞 논밭이 상가로 변했지만,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꿈이 영글어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
내가 40여년전 남평남교를 다녔을 때 교장선생님은 나의 백부님이셨다. 그러나 ‘공부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나이에 그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고, 백부님이 교장이라는 사실을 뚜렷이 의식하지 못한체 졸업했던것 같다. 백부님의 후광(後光)은 졸업후 수십년이 지나 내가 공인(公人)이 되려고 했을 때 엄청나게 큰 힘으로 다가온다.
오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호남인이 한반도의 통치권자가 된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지난 2000년 총선에서 내가 나주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을 때 ‘배봉민 교장선생님’의 위력이 나타났다. 당시 남평뿐 만 아니라 산포, 봉황, 세지, 다도 등지에서 많은 유권자들이 백부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백부님과의 나와의 관계를 묻고 확인한 후 나에 대환 지지와 신뢰를 확연하게 더해 주셨던 것이다. 지금도 그런 분들이 많이 계신다.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은 내가 선거에서 무난히 승리하여 지역과 국가에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남평초등의 교장이셨던 백부님의 음덕(陰德)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남평초등은 내가 꿈을 키우고 졸업한 모교일 뿐만 아니라 백부님이 재직하셨던 학교이기 때문에 나는 남평초등에게 무한대의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제16대 국회 재임중인 2002년 어느날 모교로부터 일일교사로 초빙되어 후배들에게 강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교실을 가득 메운 백여명의 고학년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는 순수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 줄까 고민하다가 열악한 환경속에서 공부하는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자신감(自信感)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실증적인 예들 들어주었다.
“값비싼 영약 산삼을 캐는 심마니는 깊은 산속에서 산삼 한 뿌리를 발견하면 그 위치를 표시 하고 훗날 다시 와서 그 주변을 샅샅히 뒤진다. 그 주변에는 반드시 또 다른 산삼이 있게 마련이다.”
대법관 참모총장, 국회의원 등을 배출한 남평초등은 앞으로도 훌륭한 인물을 얼마든지 배출할 수 있으므로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취지에서 해 준 말이다. 그렇다. 남평초등 후배들이여!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남평초등 출신이 나주시장이나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장관이나 대통령인들 하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모교의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비 건립과 빙청각 중건 등 어려운 사업을 성공적으로 주도해 주신 정명호 총동문회장님과 준비위원장이신 한병기 선배님의 숨은 노고에 감사드리며 기념책자 편찬이라는 중책을 수행해 주신 최정웅 선배님,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행사준비에 만전을 기해주신 동문 제위들의 노고에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우리들의 이 모든 노력이 우리 후배들의 사회공헌을 통하여 모교사랑, 남평사랑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희미한 어린시절 추억들
김 연 호 (제51회 졸업)
바라보기만 해도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이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해맑은 햇살속에 친구들과 마냥 행복에 겨워 깔깔 거리며 조잘거렸던 어린시절 우리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온다.
지금은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랑스런 남평초등학교의 51회의 졸업생으로, 모두가 행복해 하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에, 그때의 추억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온 대지가 초록물결로 넘실거리는 신록의 계절에 잠시 동안 초록의 타임머신을 타고 50년전 우리들의 코흘리게 개구쟁이의 시절로 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내가 남평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시절에는 남평초등학교 어린이들 중에서 집이 가장 먼 5km(오계리 석치마을)나 되는 거리에서 등하교를 했다. 그때의 겨울은 지금의 겨울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서운 한파가 계속되는 계절이라 동요속의 노래가사처럼 손이 꽁공꽁, 발이 꽁꽁꽁 얼어붙는 것은 기본이고, 겨울철 드들강가를 걸어서 등하교를 하면 얼굴은 온통 얼어서 홍당무로 변해버린다. 아마도 그때는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이라 보온 내의, 보온 신발, 귀마개가 없어서인지 어린 마음에 더더욱 춥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래도 우리들은 좀 더 나은 편이었다. 쪽돌(남석)에서 다니는 애들은 반드시 수문통거리를 오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80m나 되는 지석보를 조심조심 해서 건너야 학교를 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번은 지금은 생각해보니 음력 사월초팔일 이었던 모양인데, 마을 아주머니 한분이 떡을 해 가지고 탑골절(봉암사)에 가고 계셨다. 떡을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떡 얻어먹을 욕심으로 학교는 땡땡이 치고, 절에 가서 하루 종일 놀다가 하교시간 맞추어 집에 가던 일… 나중에 어떻게 알았는지 부모님께 칭찬(?)받았던 일 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가난한 시절의 우리의 마음을 대신하는 모습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또래의 아이들 중에는 겨울이면 손발에 시꺼멓게 때가 앉고 손등과 발등이 쩍쩍 갈라진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한달에 한번 정도 위생검사 하는 날이 정해져 있었다.
키가 작고 몸집이 작아서 9살에 입학했던 나는 유난히 손발 씻기를 싫어해서 1학년 10월 어느날 김소림 담임선생님이 위생검사를 하시다가 내 손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더럽다고 호되게 매를 때리던 웃지 못할 기억 때문인지, 50이 넘은 지금도 우리 동창들 보다는 화순도곡 온천을 자주 다닌다.
하교시간쯤에 비가 오면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마음속은 어떻게 비를 피해서 집에 갈까 하는 궁리뿐이었다. 책보(당시에는 책가방이 대부분 없음)를 대각선으로 허리에 둘러메고 그 위에 상의 겉옷을 입고 빗속을 뛰던 일을 생각하면 어린 마음에도 우리가 늘 보고 공부하는 책이 비에 젖는 것은 싫었던 모양인 것 같다.
그래도 하교시간에 비가 오면 집에서 옷을 말릴 수가 있어서 좋았는데, 등교시간에 비가 오면 우산, 비옷이 귀하던 그 시절에는 정말 답답하고 학교 가기가 싫었던 것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서원마을 하희종, 봉산마을 문장식, 당거리 최상옥 등, 학교를 같이 다닌 어릴적 친구들 지금은 모두들 잘 살고 있겠지?
어쩌다 등하교 길에 고물 화물차나 마차를 만나면 횡재해서 공짜로 편히 가던 등하교길…
왼손잡이이던 나는 별나게 구슬치기를 좋아해서 소재지에 사는 재철이랑 서원마을 옆산으로 독구슬(구슬모양의 돌)을 한참동안 파서 주머니에 가득 담아 가지고 오면서 금은보화를 구한 양 흡족해하던 철없던 내 어린시절 모습…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0여년 후 아빠가 되어서 어린 남매를 세발 자전거에 태우고 모교에서 놀아주면서 아빠의 초등학교 시절 얘기를 할 때면, 특별히 자랑이라고 내세울 것은 없지만 언제나 그 시절의 추억은 가슴 설레이는 기쁨과 그리운 향수로 순수한 행복감에 빠지게 하곤 한다. 그런 나의 행복이 어린 자녀에게 아빠의 고향, 아빠의 모교(남평초등학교)에 대한 변하지 않는 사랑의 마음임이 얼마나 전달되었을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순수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 나의 마음속에 늘 푸른숲과 아름다운 정원으로 남아있기에 모교에 대한 사랑과 고향에 대한 사랑을 늘 푸르게 키워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사랑하는 친구들아!
가끔씩 삶의 무게가 우릴 힘들게 할 때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속에 살아있는 우리들의 순수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잠시동안 여행을 다녀오자.
그리고 서로 따뜻한 마음으로 보듬어 안아주면서 다시 새롭게 삶을 향해 도약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도록 하자.
언제나 그 시절로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추억을 지닌 우린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모른다. 늘 행복을 선택하고 환한 미소로 삶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들이 되도록 하자.
남평초등인의 긍지를 살립시다
서 희 열 (제54회 졸업. 총동문회 사무총장)
예로부터 남평은 삼성삼평(三城三平)이란 긍지를 자랑하는 지역입니다. 저는 남평에서 태어나 남평에서 자란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곡성, 보성, 장성 그리고 남평, 함평, 창평을 일컬어 삼성삼평이라는 자랑스러운 명예를 남겨주고 떠난 기록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중에도 남평은 일제시대때 ‘고춧가루 서말먹고 물속을 삼심리를 기는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지역인데 이뜻은 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아무리 물질적으로 회유하고 구슬려도 아부하지 않고 굴하지 않는 자주민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하던 선조님들이 일본군에 잡혀가서 고문을 받던때 고춧가루 서말을 거꾸로 매달고 코에 부어도 굴하지않고 또한 물속에 얼굴을 쳐박아 이제는 불 것이다 해도 다시 살아나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일본인들이 한국을 떠나면서 남평인들은 고춧가루 서 말 먹고 물속을 삼심리를 기는 사람들이라는 자랑스러운 기록을 남겨주고 떠났다고 합니다.
이제 남평초등학교가 한세기를 맞이하면서 정말로 역사와 전통을 살리고 항상 남평초등인이라는 긍지를 갖고 어디에서 살던지 변치 않는 남평초등인이 되기를 빌겠습니다.
끝으로 남평초등학교 일백주년 기념행사를 맞이하여 총동문회 사무총장직을 맡으면서 한가지 느낀점은 역시 남평인의 긍지는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정명호 총동문회 회장님 그리고 한병기 일백주년 준비위원장님을 비롯하여 최정웅 선배님의 성의와 추진력을 보면서 역시 남평인만이 갖고 있는 긍지가 살아 있다는 점을 세삼느끼면서 앞으로 남평은 서로 화합하고 서로 협력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점을 느끼면서 남평초등학교 총동문회 사무총장직을 맡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앞으로 더욱 열심히 지역에 봉사할 계획입니다.
회 고
배 성 주 (제54회 졸업. 제9대운영위원장)
원 그려 휘날리는 낙화 살피니
춘풍 벗삼아 결실을 기약하랴
거목 잎새 펼쳐 연륜의 그늘내려
오열막는 샘터 개구쟁이 놀이터
육년간 윤회속에 동심일군 교정이네.
나지막한 책걸상 정진의 발판되어
칠판 쳐다보며 눈 뜨고 귀 밝혀
흙먼지 운동장 심신을 단련하니
선생님의 훈계속에 뿌리내린 인내심
사시사철 정진하랴 나를 키웠네.
지석강의 맑은물 전도 일러주고
월현대산 높은기상 정진의 표상되어
비바람 몰아친들 인생여로 밝혀내니
학창시절 담은 교훈 삶의 기둥 세워
일백년 전통 모교 잊지못할 보금자리
현실의 근간이니 생이 모태일세.
영원히 빛나는 남평인
김 재 만 (제60회 졸업)
남평초등학교 선배, 동창, 후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 60회 부회장 김재만 인사드립니다.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춘삼월도 눈 깜작할 사이에 지나가고 벌써 산구비마다 넓은 들녁마다 온통 아름다운 꽃들과 신록의 계절인 오월이 다가왔습니다.
몇십년전 엄마 손잡고 빡빡머리와 단발머리에 고무신 신고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넓고 넓은 운동장에서 재잘거리며 철 모르고 입학하여 친구들하고 장난치며, 푸르디 푸른 드들강 바라보며 소풍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우리 남평초등학교가 졸업생을 93번째로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1년 365일 내내 푸른 하늘만 약속하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기쁨과 고통을 모두 다르게 느끼며 여기까지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인생의 길목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지금 이순간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이 자리에서 어린시절 그때의 정다운 얼굴들을 바라보며,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철없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하고 순수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젊은이는 꿈과 희망을 먹고 자라고 나이가 들어서는 추억속에 산다고 하였는데 우리 모두 추억의 날들을 떠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행복한 삶의 한자락이 될 것이며 우리 학교 건물과 운동장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넓은곳인줄 알고 뛰어놀던 이 장소가 지금은 작아 보이는 것은 그 만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커졌기 때문이겠지만 이곳에서 다시 만나 우리모두 하나되어 많은 행사들을 치르며 크게 웃을 수 있는 것 또한 우리들만의 아름다운 추억이며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지나온 100년의 전통이 너무 자랑스럽고 소중한 날들이 있듯이 앞으로 다가올 남평초등학교의 미래 역시도 지금처럼 변함없이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들만의 소중한 우정의 끈을 놓지 마시고 먼 훗날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한사람 한사람되어 영원히 빛나는 남평초등학교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순간순간이 소중합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가장 가치있게 보내시길 바라며 이곳에서의 추억이 기쁨으로 가슴 가득히 담고 살 수 있는 평생 잊지못할 고귀한 추억의 장소가 되길 기원하며 남평초등학교 100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의 추억
김 명 옥 (제63회 졸업)
나의 유년의 기억 중에 초등학교 시절, 가을 운동회에 대한 짤막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껏 100m 달리기 기록이 22초 이내였던 적이 없던 나로서는 가을운동회 날 달리기 시합만큼 지긋지긋한 일이 별로 없었답니다. 십여 명이 달리면 으레 꼴등은 맡아논 당상인지라 뙤약볕 아래에서 숨이 턱에 차게 달리는 것이 얼마나 싫었던지요.
3학년이던가 4학년이던가 어느 해 운동회 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내가 달리기 시합에 살짝 빠져도 모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달리기 시합이 다 끝날 때까지 화장실에 가 숨어 있었지요. 잠시 후 운동장으로 돌아왔는데…
그래도 괜히 경계하는 마음에 운동장 주변만 빙빙 돌다가 모른 체하고 아버지가 계시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백두산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아버지께서 내가 달리기에 빠진 걸 알고 계시는 거예요.
아휴~ 하늘이 노랗다 못해 하얘지는 것 같았지요.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오신 운동회 날, 내가 유일하게 등장하는 달리기 시합이 다 끝나도록 보이지 않는 나를 눈이 빠지도록 찾고 계셨던 겁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신 아버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회초리로 종아리를 엄청 때리셨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거라시면서요.
그 시절 특유의, 정말로 하기 싫은 일들, 예방주사 맞는 일이나 대변 채취 같은 일 등등이 종종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론 뭐든 빼먹을 생각을 아예하지 못했지요.^^*
또 조금만 큰 비가 오면, 마산을 휘돌아 나와 광이리와 평산리 사이 들판을 가로지르는 개울 중간에 있는 둑이, 들판을 향해 무작정 달려 내지르는 물살에 넘쳐서 등굣길이 막히곤 했습니다. 조금 큰 아이들은 바지가랭이를 걷어 부치고 건너기도 했지만 나는 체격이 작아서 언제나 아버지가 업어서 물길을 건네 주셨지요. 호랑이보다 더 무섭던 아버진데 어쩜 그 때만은 아버지의 등이 그리도 든든하던지요.
그 때 아버지는 나를 등에 업고 물길을 건너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지 한 달여 만에 사진사 대동하고 학교로 찾아오셔서 운동장쪽 화단위에 저를 올려 세우고 사진을 딱 한 방만 찍어주시곤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는 말씀을 남기고 사진사와 총총히 돌아가시던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또 다른 장면 하나, 갑자기 도서관 문이 드르륵 열립니다. 대여섯 명의 아이들은 황급히 보던 책을 숨기느라 부산스러워지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찰나, 눈치 빠른 선생님의 불호령이 여지없이 떨어집니다.
“방금 너희들 숨긴 거 뭐야? 다 내놔 봐! 어서! 대회가 낼모렌데 이 녀석들 오늘은 도저히 못 봐주겠군! 다들 엎드려 뻗쳐!”
퍽! 퍽! 퍽!
뭐냐고요? 초등학교 때 5, 6학년으로 구성된 ‘고전읽기부’라는 특별활동 같은 게 있는데,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 모여서 고전인지 뭔지 모를, 참 지루하고 재미없는 책들을 읽어야했어요. 그런데 하라는 고전읽기는 안하고 만화책, 소설책들을 고전책 안에 세우고 읽다가 들켜서 줄빳다 맞던 장면이랍니다. 우린 아얏 소리도 못 질렀지요. ㅎ ㅎ
언젠가 한 번 꼭 그 도서관에 들러보리라 마음먹은 지가 여러 해 건만 고향에 갔다가도 무엇에 그리 바쁜지 건중건중 돌아와 버리곤 했는데, 올해 모교건립 100주년 생일 잔칫날 꼭 들러 보렵니다. 나의 서른 몇 해 전 손때 묻은 책들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지, 아마도 한 권도 없겠지만 그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얼마 전에 몇몇 친구들과 6학년 때 담임이셨던 박정수 선생님을 찾아뵈었더니 반가움과 서운함을 동시에 표현하시더군요. 그리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뜻을 지닌 빙청각 복원사업의 의미도 설명해 주셨습니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 [學不可以己]
푸른색은 쪽에서 취했지만 [靑取之於藍]
쪽빛보다 더 푸르고 [而靑於藍]
얼음은 물이 이루었지만 [氷水爲之]
물보다 더 차다. [而寒於水] - 荀子(순자) 勸學篇(권학편) -
이렇게 멋진 남평초등학교를 모교로 둔 것이 정말 자랑스럽고, 한 세기동안이나 고향을 묵묵히 지키며 우리를 키워낸 모교의 100주년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당신의 향기
박 혜 덕 (제63회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