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백구야 날 속이랴마는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도화야 물따라 가지마라 어부가 알까 하노라. |
桃花야 떠가지 마라 魚舟子 알까 하노라
청량산 열두 봉우리는 나와 백구만이 알고 있다. 백구는 선비를 표상하는 새이므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함부로 청량산을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복숭아꽃이 믿을 수 없어 걱정이다. 강 따라 흘러가면서 마을마다 자랑을 늘어놓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복숭아꽃더러 물길 따라 내려가지 말라고 당부한다. 강 아래쪽에서 그것을 본 어부와 뭇사람들이 도원경이 그곳에 있구나 믿고 너도 나도 몰려와서 함부로 대할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청량산을 숨겨두고 혼자 독차지 하려 하였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나 대상에게 남이 함부로 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이 함부로 대해도 좋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퇴계에게 있어 청량산은 바로 그러한 대상인 것이다.
4. 자연으로 돌아와 서당을 짓다
그렇다면 퇴계는 청량산만 사랑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퇴계는 자연 자체를 사랑하였다. 관직에 머무르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강과 산, 구름과 하늘이 있는 자연을 그리워하였다. 산수은거(山水隱居)를 꿈꿨고,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였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향리로 돌아가 초가삼간 지어놓고 살고 싶어 하였다. 벼슬을 칠십여 차례나 사직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런 퇴계는 마침내 49세에 이르러 풍기군수를 마지막으로 관복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서른한 살 재혼하실 때, 온혜에 지어서 살던 달팽이집(芝山蝸舍) 대신에 토계리 개울가에 터를 잡고 한서암(寒棲庵)이라는 세 칸짜리 집을 짓고 거처를 정하였다. 장차 원대한 사업을 하고자 하는 터전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고, 검소한 집이었다.
퇴계가 그토록 자연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이유는 어디 있었을까? 퇴계가 산수은거를 바라는 것은 도가나 불가를 따르는 사람들처럼 세상을 탈출하고 속세와 인연을 절연한 채 혼자 고고하게 살아가고자 하거나 혼자 깨닫고자 하는 그런 은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연으로 돌아와 산천경개 구경하며 하는 일없이 편한 세상 살고자 하는 그런 은거는 더욱 아니었다. 퇴계는 산수은거를 통해서 하고 싶은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고, 제자들을 교육하여 인재를 기르고 싶었으며, 착한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어 하였다. 너무도 뚜렷하고, 절절한 목표가 있었다.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도, 깊은 산속에 숨어서 은자처럼 고고하게 사는 것도, 그리고 시골에 묻혀 편하게 남은여생 보내는 삶도 모두 퇴계의 바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한 자신의 심정을 다음의 ‘오사(吾事)’ 시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오사(吾事); 나의 할 일>
高蹈非吾事(고도비오사) 높은 지위는 내 하고자 하는 일 아니네
居然在鄕里(거연재향리) 흔들리지 말고 향리에만 있고 싶어
所願善人多(소원선인다) 내 소원은 착한 사람 많아지는 것
是乃天地紀(시내천지기) 이것이 천지의 덕 갚는 도리 아닌가
자신의 능력과 인품이 한계를 드러낼 때까지 때로는 그 한계를 숨기면서까지 높은 지위에 오르고 또 오르고 싶어 하는 우리네 현대인들이 한 번 쯤 깊이 새겨들을 퇴계의 정신이다. 여기서 고도(高蹈)란 고거(高擧)와 같은 뜻으로 ‘속세를 탈출하여 은거한다’ 또는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권오봉교수는 ‘퇴계선생일대기’ 책에서 설명하였다. 어느 쪽이든 퇴계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학문을 하고, ‘선인다(善人多)‘의 세상을 건설하는데 자신의 사업을 설정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퇴계선생의 위대한 저술이나 독창적인 이론들은 대부분 60세 이후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향리로 돌아온 오십세 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십년간 쉬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정진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자연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이 서당건축이었다. 초가삼간 살림집 한서암을 짓고, 그 아래 개울가에 서당을 지었는데, 방 한 칸, 마루 반 칸짜리 당(堂)이었다. 부엌도, 방구들도 없다. 이것이 대학자 퇴계가 오십세에 건축한 계상서당(溪上書堂)이다. 지금 보아도 도저히 서당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규모였다. 그렇지만 이 초라한 서당 앞에 서보면 누구라도 옷깃을 여미게 되고 스스로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퇴계는 그래서 위대한 분임을 느끼게 한다. 이 한 칸 반짜리 서당에 제자 학봉이 찾아오고, 율곡이 가르침을 받고자 와서 사흘을 머물다 갔으며, 숱한 선비들이 제자 되고자 찾아들었다. 후세인들은 퇴계 탄생 오백주년이 되는 2001년에 이 서당과 자택, 계재를 복원하여 계상학림(溪上學林)이라고 이름 붙였다. 마땅한 호칭이다. 아니 오히려 율곡이 계상서당에 와서 선생을 뵙고 ‘공자, 맹자의 학문으로부터 흘러나와 주자와 같은 빼어난 봉우리를 이루었네’(溪分洙泗派, 峯秀武夷山)라고 고백한 것처럼 이곳은 동양 성리학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될 수 없는 곳이다.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을 찾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계상서당을 찾아보고 한서암 마루에 한 번 앉아보기를 권하고 싶은 곳이다.
약 십년간 계상서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니 점점 제자 수가 많아지게 되자 좀 더 큰 집을 짓고자 하여 찾다가 발견한 곳이 지금 도산서당 자리이다. 퇴계자신도 놀랄 정도로 아름답고 딱 맞는 곳이었다. 여기에 퇴계는 두 번째 서당을 짓는데 곧 도산서당(陶山書堂)이다. 세 칸, 여덟 평짜리이다. 그것도 사년이나 걸렸다. 직접 설계하였지만, 짓는 도중마다 퇴계는 크지 않을지 걱정하였다. 확장한 서당이라고는 하지만 육십세에 지은 서당치고는 참으로 검소하고, 소박하다. 당시 퇴계는 벼슬도 고위직을 지냈고, 재산도 이때는 적지 않았으며, 특히 전국에서 수많은 제자들, 문인들이 찾아올 정도로 지명도가 높은 때인데도 지금 보는 것처럼 세 칸 규모의 작은 집에 불과하였다. 배울 수 있고, 가까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자연이 주위에 있으면 족한 것이지 집이 크다고 학문, 교육이 더 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퇴계는 몸으로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물질의 탐욕 늪에서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서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그 메시지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감동하고 따르고자 한다.
이처럼 퇴계는 나이 오십에 처음 서당을 지으면서 온혜 넓은 들판도 아니고, 예안이나 안동읍내 도시도 아닌 토계 개울가에서 십년, 강가 골짜기에서 다시 십년을 살다가 떠났다. 산수은거를 실천하였고, 착한 사람 많은 세상을 위해 스스로 행하면서 살았다. 제자 학봉(鶴峯)께서 직접 지은 ‘퇴계선생실기’ 마지막 부분에서 ‘아, 겨레의 위대한 스승이시여‘라고 절규하는 소리가 그대로 쟁쟁하다.
5. 퇴계의 인간적 면모와 自然 사랑
퇴계는 배산임수의 개울가, 강가에 거처를 정하여 살면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 속에서 소요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실천하였다. 학문을 하고, 교육을 하며, 저서를 집필하고, 시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집안 대소사뿐만 아니라 처가와 외척의 길흉사까지도 살피면서 사람의 도리를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흔히 학문에 몰두하는 대학자들은 집안 살림이나 인간관계에는 매우 어둡거나, 무심한 경우가 많았으나 퇴계는 그렇지 않았다. 제자, 지인, 아들, 손자 등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퇴계는 놀랄 정도로 세세하고, 치밀하게 주변을 챙기시고 관리하셨다. 편지를 통해 제자, 지인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었으며, 편지로 집안 대소사 처리나 아들, 손자를 가르치기도 하면서 보통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편지글만 수천 통이나 된다. 오늘날 컴퓨터 자판기만 두드리면 금방 수십장 쓰고, SNS로 온갖 소식들을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에도 퇴계선생의 편지글 수만큼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속에서도 퇴계는 산을 찾아 유산을 즐겼다. 소백산을 올라 유산록을 남기고, 안동 풍산의 학가산(鶴駕山)을 찾아 명옥대에서 강도(講道)를 하고 시판을 남겼다. 자택을 나서 반나절이면 닿는 청량산을 다닐 때에는 낙동강 강변길을 따라 다녔다.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고 완상하며 그 속에서 학문과 수양을 닦았다. 그 속에서 공자, 맹자, 주자가 걸었던 여던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면서 어김없이 자연을 사랑하는 시를 남겼다.
다음 시는 64세 때 벽오 이문량(1498~1581)등 일행과 청량산에 가기로 하면서 새벽에 약속 장소에 이문량이 나오지 않자 먼저 출발하면서 읊는 장면이다.
烟巒簇簇水溶溶(연만족족수용용) 안개낀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졸
曙色初分日欲紅(서색초분일욕홍) 새벽여명 걷히고 붉은해 솟아오르려 하네
溪上待君君不至(계상대군군부지) 강가에서 기다리나 님은 오지 않아
擧鞭先入畵圖中(거편선입화도중) 내 먼저 고삐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제1구, 제2구에서 새벽안개와 흐르는 개울물 소리, 새벽 여명이 걷히며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여지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묘사하였다. 제3구와 제4구에서는 무슨 사연인지 약속 시간에 오지 않는 친구를 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떠나는 장면이다. 기승(起承)구는 자연과의 관계, 전결(轉結)구는 사람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라는 표현이 참으로 놀랍다. 퇴계선생의 문학적 표현의 대단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가 성리학자이지만 또한 대단한 시인으로 인정받는 이유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퇴계는 자연을 소요하면서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글로 시로 대화도 하고 교훈도 남겼다.
청량산으로 향하면서 낙동강 강변을 따라 자연을 감상하고, 자연 속에서 천리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에 대해 사색과 대화, 사색을 하고 시를 지었다. 그 길은 지금 여던길로 복원하여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 여던길에는 퇴계가 지은 시들이 곳곳에 시비로 새겨져 전해오고 있다. 그 중에 한 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彌天長潭(미천장담) : 메네 긴 소>
長憶童時釣此間(장억동시조차간) 한참동안 기억해보네 어릴적 여기서 낚시하던 일
卅年風月負塵寰(삽년풍월부진환) 삼십년 세월동안 속세에서 자연을 등지고 살았네
我來識得溪山面(아래식득계산면) 내 돌아와보니 알아볼 수 있네 옛 시내와 산모습
未必溪山識老顔(미필계산식노안) 시내와 산은 늙은 내 모습 결코 알아보지 못하리
어릴 때, 노닐던 고향의 시냇가에 늙어서 돌아와 생각에 잠겨서 읊은 시이다. 함께 친구로 지내던 시내와 산은 그대로여서 나는 알아보겠는데, 속세에 부질없이 돌아다니다 늙어서야 돌아온 나를 친구인 저 산과 시내는 알아보지 못할 것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느낄 수 있는 시로써 퇴계의 자연에 대한 동경과 사랑을 짐작할 수 있는 시이다.
6. 유산(遊山)은 독서이다.
퇴계는 유산(遊山)을 독서와 동일시하였다. 퇴계에 있어 산과 자연은 바로 학교이고 도서관이며, 학문의 전당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시가 아래 시이다. 청량산 도립공원 입구에 시비로 새겨져서 드나드는 사람들로 하여금 “첵을 읽음이 곧 산을 오르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讀書如遊山 : 독서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讀書人說如遊山(독서인설여유산) 사람들 말하기를 독서가 유산과 같다지만
今見遊山似讀書(금견유산사독서) 이제 보니 유산이 독서와 같구나
工力盡時元自下(공력진시원자하) 공력을 다 했을 땐 원래 스스로 내려오고
淺心得處摠由渠(천심득처총유거) 얕고 깊음 아는 것 모두 저로부터 말미암네
左看雲起因知妙(좌간운기인지묘)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 보며 묘미를 알게 되고
行到源頭始覺初(행도원두시각초)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써 처음을 깨닫네
絶頂高尋勉公等(절정고심면공등) 높이 절정을 찾아간 그대들에게 기대하며
老衰中輟愧深余(노쇄중철괴심여) 노쇠하여 중도에 그친 나를 깊이 부끄러워하네
사람들은 산을 많이 찾는다. 찾는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운동과 건강, 여가활용, 친구와 어울림, 사진촬영, 질병치료 등등의 이유를 말한다. 심지어는 ‘산이 거기 있어서 산을 찾는다’는 다분히 철학적인 이유도 말하기도 하고, 등산 후 내려와서 하산주(下山酒) 한 잔 하는 재미로 찾는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퇴계에게 있어서 산을 오르는 것은 곧 책을 읽는 것이었다. 방에서 책을 펴들고 글자 행간의 의미를 깊이 파고드는 독서도 좋은 공부이지만, 나무와 숲이 있고, 하늘과 구름이 날고, 새와 산짐승이 노니는 산에서 천지생물의 나고 자라고 죽음을 사색하는 것이 곧 공부이며, 천리의 운행을 느끼고, 함께 오르는 사람과의 인간관계에서 배우는 공부가 유산에서 할 수 있는 독서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퇴계는 학문과 교육 틈틈이 유산을 하고, 강이나 자연을 찾아 사색하고, 명상하면서 시를 짓고, 공부를 하였다.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늘에서 명한 성품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인간학도 유산에서 얻는 공부이었다. 즉 자연을 공부의 장소로 생각하였다.
7. 퇴계의 自然속의 공부
퇴계가 산수은거를 그토록 바랐으며, 자연에 돌아와서 개울가에 집과 서당을 짓고 살면서 자연을 교실, 강당으로 하면서 하였던 공부는 무엇보다도 인간존중,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다음의 시를 살펴보자
<청량산을 찾아 숙부님을 생각하며 1>
淸凉寺裏憶陪遊(청량산리억배유) 청량사속에서 모시고 노닐던 옛일을 생각하니
丱角如今雪滿頭(관각여금설만두) 총각머리였던 것이 이제 백발이 되었네
鶴背幾看陵谷變(학배기간능곡변) 학 등에서 굽어보니 산천은 몇 번이나 변했던고
遺詩三復涕橫流(유시삼복체횡류) 남긴 시를 거듭 외며 눈물짓네
제1구에서 어린 시절 청량산에 숙부님을 따라와 모시고 공부하며 놀던 옛일을 회상하고 있다. 이때가 15세 되던 해로써 넷째 형(온계)과 함께 와서 공부하였던 때이다. 제2구에서는 당시 총각머리였던 내가 이제 백발이 되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오십년의 세월 간극을 회상하는 중심에 숙부가 계신다. 제3구에서 학의 등에 올라 바라본 산천은 많이도 변했다. 나만 변한 것이 아니라 산천도 세월도 변했음을 읊고 있다. 학의 등에서 굽어본다는 표현은 시적언어 이지만 실제 청량산 입석대에서 청량정사로 올라가는 길에서 산 아래 산천을 바라보면 마치 자신이 학의 등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 길은 오백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엣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에 퇴계선생을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제4구에서 퇴계의 인간 사랑에 대한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남긴 시는 곧 숙부께서 열다섯 조카와 머물면서 지으셨던 시이다. 퇴계는 이 시를 여러 차례 거듭 외우고 읊으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체횡류”(涕橫流)라고 표현하였다. 눈물이 가로로 흐른다고 함은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옆으로 닦는다는 의미이다. 숙부 송제공은 아버지 없이 자란 퇴계에게는 곧 아버지이고 스승이었다. 열두 살에 논어를 배웠고, 열다섯 살에 청량산에서 작은 아버지를 따라와 모시고 글을 배웠으며, 그해 안동부사로 부임하신 숙부를 따라 안동에서 공부를 배우기도 하였다. 아깝게도 숙부 송제공이 퇴계 17세 되던 해 병으로 안동관아에서 돌아가신 후 퇴계는 누구에게도 배울 수 있는 스승이 없어서 자칫 학문을 포기할 정도로 숙부의 위치는 퇴계에게는 컸던 것이다. 60이 넘어 청량산에 찾아온 퇴계는 그런 숙부를 생각하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시로써 닦아내고 있다. 너무도 감동적인 인간 사랑의 모습이다. 오늘날 삼촌은 고사하고, 부모, 형제간에도 인륜이 무너지는 현상을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는데, 퇴계는 숙부에 대해 이토록 애절한 감정을 시로서 노래하고 있을 정도로 인간애가 깊었으며, 자연을 통해서 퇴계는 인간 사랑의 뜨거운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다시 또 한 수를 읽어보자
<청량산을 찾아 숙부님을 생각하며 2>
重尋唯覺我爲人(중심유각아위인) 거듭 찾으면 내가 사람임을 깨닫네
流水桃花幾度春(유수도하기도춘) 흐르는 물과 복숭아꽃은 몇 번째 봄이련가
汝輩他年知我感(여배타년지아감) 너희들도 훗날 내 느낌을 알게 되리
當時同汝少年身(당시동여소년신) 그 때 너희처럼 소년의 몸이었음을
퇴계는 오십오 세, 육십사 세 때, 청량산을 찾아서 한 달 정도 머물렀다. 그럴 때마다 손자, 조카들을 데리고 왔었다. 위 시는 숙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동행한 조카, 아들, 손자 등에게 보이면서 인간 사랑의 공부를 가르치는 내용을 표현하였다. 자신이 숙부에게 그렇게 인간 사랑을 배웠고, 자신 또한 늙어서 조카, 손자들에게 이러한 인간 사랑을 노래하였으니, 이렇게 자란 조카, 손자들 또한 인간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퇴계는 말로써 가르치는 교육방법보다 스스로 행동으로 몸으로 가르치는 교육방법을 더 많이 활용하였다. 그러한 퇴계의 가르침은 생애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이 시 또한 그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청량산과 청량정사를 찾으면서 퇴계의 자연과 인간 사랑의 면모를 느낄 수 있고 배울 수가 있다.
8. 淸凉精舍
청량정사는 퇴계선생이 어릴 때 공부하였던 자리에 후학들이 건립한 건물이다. 선생의 후손 이중봉(李中鳳, 1871-1907)이 쓴 「오산당중건기(吾山堂重建記)」에 의하면 “이 건물은 선생이 남기신 뜻을 받들어 후학과 사림(士林)들이 힘을 모아 조선 순조(純祖) 32년(1832)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이곳은 퇴계 선생을 기리는 수많은 후학들의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되었으며 성리학,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의 성지가 되었다, 건립된 후 이 자리에서 여러 차례 유학, 성리학에 대한 강론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1896년에는 청량의진(淸凉義陣)이 조직되어 의병 투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는데, 곧바로 그 해 일본군이 방화하여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01년에 중건한 것이다. 강당 이름은 퇴계의 '오가산'을 취하여 '오산당(吾山堂)이라 하였고, 마루는 운서헌(雲棲軒), 방은 지숙요(止宿寮), 문은 유정문(幽貞門)이라고 이름 지었다. 현판 글씨는 조선말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9)이 썼다.
청량산에 올라 청량사 들르고, 하늘다리 구경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지만, 산을 오르는 것이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청량정사를 찾아 운서헌 마루에 앉아 보고 퇴계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의미있는 공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사 마루에서 퇴계 시 한 수 읊어보기를 권한다.
<望淸凉山 : 청량산을 바라보다>
불향선산작은진(불향선산작은진) 선산을 찾았으나 은사되지 못하고서
망산청절괴종진(망산청절괴종진) 맑은 산 바라보며 티끌자취 부끄러라
금문치간침운학(금문치간침운학) 들으니 이 구름골에 묵밭갈이 들었다니
늑측풍제회유인(늑측풍제회유인) 부지런히 바람뜰을 쓰는 이가 있으리라
9. 글을 마치며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수련 프로그램 중에서 수련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코스 가운데 한 곳이 청량산이고 청량정사이다. 그것은 거기에 퇴계선생께서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형체가 아니라 숨결이 있고, 자취가 있으며, 시가 있고, 가르침이 있다. 퇴계의 인간사랑, 인간존중의 철학이 그곳에 남아있다. 그래서 조선 후기 사회 선비들이 생전에 한 번은 찾고 싶어 하던 유학의 성지이었고, 오늘날에도 수련원을 찾는 수많은 교육생들이 이곳을 찾아서 퇴계를 본받고자 한다. 하물며 학문을 하고자 하는 분이라면 어찌 청량산을 찾아보지 않을 수 있으며, 더욱이 평생 학자의 길을 가고자(學而終身) 하는 분들이라면 청량산에 왔을 때, 어찌 산만 보고 절간만 보고 갈 수 있으랴. 마땅히 청량정사, 오산당에서 선생의 가르침을 궁구하고 나를 돌아보는 유산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