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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말 대구에서 만난 중국인과 일본인
1.
조선의 제 14대 임금 선조(1552 - 1608)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대구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어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을 설치한다. 대구에 경상감영을 설치한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군사적 중요성이다. 조정에서 임진왜란 이전에는 대구의 군사적 중요성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대구는 지리적으로 경상도의 정중앙에 자리잡아 동서남북 어느 방위에서 보아도 균형을 이루는 중심축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륙지방에 위치하여 군사적 전략거점으로 활용하기 좋은 고장임을 알았을 것이다.
대구(大邱)는 ‘큰[大] 언덕[邱]으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또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고향이다. 16세기말 이 땅 대구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대접전을 치른 지역이었다. 임진, 정유 두 차례의 왜란의 결과 조선을 침략하였던 일본의 토요토미(豊臣秀吉) 정권은 도쿠가와(德川家康)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는 만주에서 일어난 누르하치에 의해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졌다. 그러나 정작 피해 당사자였던 조선만은 예외였다. 울부짖는 백성을 뒤로하고 한양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야반도주하였던 무력한 임금 선조는 임금 자리를 잃지 않고 여전히 아들 광해군(1608 -1623)과 함께 조선을 다스리게 되었다. 아들에게 세습된 권력은 이후로 장장 3백년을 더 이어간다.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왕조의 생명력이다.
조선왕조는 자발적인 근대화에 실패하고 재침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지만 조선왕조의 역사는 재평가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본다. 한때 우리의 역사를 패배주의의 관점으로 보았던 과거가 있다. 침략자들의 의도와 조종에 놀아난 어리석고도 한심한 노릇이다. 어디 그것이 식민사관에만 그치겠는가? 중화사상에 물들어 항상 자신을 소국이라 여겼던 시절과 중원을 호령하였던 단군조선과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역사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기초로 한 소설을 쓰면 황당한 가짜의 역사라고 매도하곤 한다. 오늘날 중국의 동북아공정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현장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지금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으니 예지력(叡智力) 없는 위정자들의 정책과 학자들의 죽은 공부에 탄식만 할 뿐이다.
2.
우리는 대구에서 16세기말 조선의 풍토와 풍속에 매료된 두 세계인들을 만나볼 수 있다. 우선 그중의 한사람인 두사충(杜師忠: 두보의 21대손)을 먼저 만나본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는 명나라의 명풍수 두사충(杜師忠)의 묘가 있다. 그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으로 올 때 조선에 온 유명한 풍수사였다. 오늘날이든 옛날이든 지형을 모르고서는 전쟁을 치를 수가 없는데, 두사충은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와 병영 위치 선정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여 터를 잡아주는 수륙지획(水陸地劃)의 주사(主事)였다. 당시 지리참모는 대부분 풍수가들이 담당하였다. 또 그는 개인적으로는 수군도독 진린(陳璘)의 처남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귀국했던 두사충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조선에 온다. 조선의 아름다운 산하와 풍습에 매료된 그는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두 아들과 함께 귀화한다. 조선 조정의 배려로 현재 경상감영공원 일대의 땅을 하사받아 살았다. 조국 명나라와 아내 그리고 형제를 그리워하면서, 그는 대명단(大明壇)을 쌓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관복을 입고 명(明)의 천자를 향해 배례를 지냈던 곳이 대덕산 앞의 대명동(大明洞)이다. 아호도 모명(慕明: 명나라를 그리워함)으로 바꾸고 대명처사(大明處士)라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모명선생유결(慕明先生遺訣>이라는 풍수서와 한국정신문화원에서 발간한 『구비문학대계』에는 두사충과 관련된 수많은 전설을 남겼다.
두사충의 묘는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영천과 경주 사이를 달리는 운주산을 거쳐 사룡산 - 상원산 - 대덕산 - 두리봉을 지나 형제봉(196m) 아래에서 회룡고조형국(回龍顧祖形局)을 이루고 곤파(坤破)에서 계자정향(癸子丁向)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형제봉 뒤로는 금호강이 감아주고 있다. 이는 명당보국 안의 생기(生氣)를 보호해주는 공배수(拱背水)이며 수전현무(水纏玄武)하는 길수(吉水)이다. 주변 산들이 편안하면서도 위엄 있게 이곳을 감싸고 있다. 도심에 있지만 개발에 밀리지 않고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명당임에 틀림없다. 재미있는 것은 묘소 뒤편에 국가정보원 지부와 2군사령부가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후손 두재규(두사충의 11대손)씨는 “살아 계실 때도 군대 속에서 살았는데 돌아가셔서까지 군사들을 보초로 세울 정도로 땅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셨다”고 말하였다. 풍수에서는 “사람은 자기의 세계관에 맞는 땅을 찾아 들어간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사충의 세계관과 당시의 풍수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두사충은 생전에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 - 1598)과 교분이 두터웠다.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만나는 자리에 그가 합석한 것이 동기였다. 이순신의 인품에 매료되었던 그는 이순신이 전사하자 충청도 아산까지 찾아가 그의 묘 자리를 잡아준다. 이순신 장군 후손들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7대손 이인수 삼도통제사가 두사충의 비문을 쓰게 된다. 그 비문에 충무공의 묘지 소점에 대한 고마움을 언급하였다. 훗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16년 만에 이장되고 그 자리는 이순신의 손자가 들어간다. 이순신은 전란 중에 두사충을 가끔 만나 술을 나누고 시 한수를 지어주며 고마운 마음을 남겼다.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인데 ‘복야’는 중국의 벼슬이름이다.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함께하고 北去同甘苦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 하네 東來共死生
성 남쪽 타향의 달빛 아래 城南他夜月
오늘 한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 今日一杯情
3.
또 한 사람의 세계인인 사야가(沙也可) 김충선(金忠善,1571 - 1642)을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서 만날 수 있다. 녹동서원은 모하당(慕夏堂: 중국를 그리워하여 지어진 호) 김충선을 추모하기위해 정조 13년(1789)에 영남유림에 의해 지어진 서원이다.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으로 1884년 훼철되었다가 1914년 중건하고 1971년 현재의 자리에 이전하였다.
<김충선(金忠善)의 녹동서원(鹿洞書院)>
거기서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왜와의 전쟁을 함께 극복한 일본인(降倭人)을 만날 수 있다. 이순신은 김충선이라는 일본 출신 장수에게 조총과 화약 만드는 법을 보급하도록 하였다. 김충선이 남긴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는 “답통제사 이공서”에 이순신의 하문에 충심으로 답하는 편지가 실려 있다. 조선의 승리를 위해 열과 성을 다했던 김충선의 마음이 눈물겹도록 고마울 뿐이다. 22세의 젊은 나이에 왜의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 좌선봉장으로서 부모와 아내 그리고 자식을 버리고 침략전쟁에 앞장섰던 그가 귀화 후 조선 땅에 살면서 떠나온 고향(和歌山縣)과 부모 형제 그리고 가족에 대한 향수를 문학적 표현을 통해 50년의 삶을 한시와 시조로 남겼다.
南風有時吹
開戶入房內
悠然有聲去
消息無人來
남풍이 건듯 불어
문을 열고 방에 드니
행여 고향소식 가져온가
남의 퇴침 급히 일어나 앉으니
그 어인 광풍인제
지나가는 바람인제
忽然有聲 忽不見이라
허허 탄식하고
성그러이 앉아 있으니
이내 생전의
骨肉之親 소식을 알 길이 없어
그로서 슬퍼하노라. (모하당문집 <南風有感>)
김충선은 본명이 사야가(沙也可)라고 하는 일본인으로,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가등청정(加藤淸正) 휘하의 선봉장이었던 그는 “섬나라 오랑캐의 명분 없는 전쟁에 동조할 수 없다.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겠다”며 3천의 부하를 거느리고 침략 7일 만에 경상좌병사 박진(朴晋)에게 귀화한 인물이다. 그가 쓴 강화서(講和書 : 귀순을 청하는 글)를 보면
“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그는 조선 땅을 밟으면서 이 땅의 아름다운 풍속과 유교문화에 감화를 받았던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그는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성명을 하사받고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된다. 이어서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고 그리고 병자호란 때는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과를 올려 삼란 공신으로 일컬어진다. 1602년에 대구로 내려가 진주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사슴과 벗하며 학문에 열중하다 죽었다. 그는 우록(友鹿) 김씨 시조가 되었다. 왕이 내린 본관이라 하여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고도 한다. 후손들은 번창했고 시조 김충선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농사를 짓고 여유 있을 때 공부하며 군자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의 존재는 1970년대 일본소설계의 대부 시바료따료(司馬遼太郞)가 우록동을 방문하고 NHK방송이 “풍신수길을 배반한 사무라이 사야가”라는 다큐멘타리를 방영하고서 일본에 알려진다. 사야가의 일본 후손을 찾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아직도 소식은 없다.
진실로 용기 있는 사무라이 김충선의 묘소를 찾는 길은 감회가 컸다. 참다운 삶을 산 위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은 과연 명당일까?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앞산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니 이내 이마에 땀방울이 솟는다. 김충선의 묘가 위치한 삼정산 용맥은 백두대간의 매봉산 분기점에서 낙동정맥으로 내려와 사룡산 - 구룡산 - 발백산 - 선의산 - 남성현재 - 상원산 - 삼성산 - 통점령 - 헐티재 - 비슬산 지맥에서 좌선하여 삼정산 정상에서 용맥이 내려와 양분된 2개의 봉우리로 갈라지는데 주용맥과 함께 삼각형태를 이루면서 삼정산의 삼각지점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삼각형의 피라미드의 중심점에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삼성산(三聖山)을 바라보면서 회룡고조형국(回龍顧祖形局)을 하고 있다. 혈장 앞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인공으로 축조한 석축 위로 오목한 와혈을 이루고 임자병향(壬子丙向)으로 자리하고 있다. 왼편에 정실과 측실을 나란히 거느리고 누워있다. 안산(자양산)은 치마를 걸어둔 산 모양인 현군사(懸裙砂)다. 그 아래로 후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우록리 마을이 보인다. 시봉하는 여인들이 많은 자리이고 손이 번창할 터임이 분명하다. 산수가 서로 만나는 곳을 길지(吉地)라 한다. 황학산과 치령산 줄기인 서계천과 동계천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물이 다시 우미산에서 흐르는 물과 합류되어 모하당 점혈지 앞에서 궁수(弓水)모양으로 서출동류(西出東流)하다가 삼산리에서 팔조령에서 흐르는 계곡과 만나서 신천(新川) 남출북류(南出北流)로 금호강(琴湖江)으로 흐른다. 타국에 귀화하여 뿌리내리고 산 사람이 들어갈 만한 자리이다. 아쉬운 점은 뒤에서 볼 때, 오른편으로 한 발짝쯤 물러 썼으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충선의 흔적이 남아있는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를 풍수학적으로 살핌으로써 김충선의 택지관을 엿볼 수 있을 것이고 또 그의 고향이 어디였는지를 추리하여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사야가 김충선이 처음 마을을 조성하였을 당시 마을의 입지와 공간 배치 그리고 각종 부속 건물들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마을의 특성과 일본의 특정 고장과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개 타국에서 삶터를 잡을 때 떠나온 고향과 유사한 분위기를 갖춘 곳을 찾아 터를 잡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더구나 그 당시 김충선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경상도 이곳저곳에 많은 땅을 하사받았다. 즉 사야가 김충선은 스스로 얼마든지 마음에 드는 택지를 골라 집을 짓고 살수 있었을 것이다.
4.
임진왜란은 당대의 걸출한 세 사나이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순신은 왜적을 물리치고 전사하여 청사에 길이 빛나는 명장이 되었다. 명풍수 두사충은 머지않아 망하게 될 명나라와 아내를 버리고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와 조선에 뼈를 묻었다. 침략군의 선봉장 사야가는 해동 군자국의 백성 김충선이 되었다. 4백 년 전, 이 땅은 지금처럼 이민 가서 벗어나고 싶은 터가 아니라 귀화해서 살고 싶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삶터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 땅에서 풍수를 논하고 유교의 성리학과 주역을 공부하면서 우정을 꽃 피웠다. 한편 두사충이나 김충선을 시조로 하는 후예들은 완전한 토종 한국인으로 거듭나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자못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편 가르기를 잘 한다. 세계시민, 우주시민을 지향하는 열린 마음 없이 민족의 미래는 없는 것이다. 4백 년 전, 국적이 달랐던 세 사람 모두 이 땅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심심찮게 그들을 찾는 참배객이 이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는 일본인들도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으로 말미암았으나 선린 우호의 길잡이가 된 셈이다.
우리의 국토는 그 어느 곳이나 아름답고 사람이 살 만한 곳이다. 서양식 자연관으로 보면 마땅히 개발하여야 할 산악지대로 인식될지 모르지만 국토의 곳곳에 역사와 사람의 숨결이 생생히 살아있는 땅이 우리의 산하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산하는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문제는 결코 서양식의 개발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서울의 청계천이 서양식의 개발 논리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에서도 풍수의 논리를 되새겨볼 수 있다. 완전한 복원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의 풍수논리인 것이다.
풍수는 땅의 논리에 그치지 않는다. 잘 들여다보면 사람과 자연의 조화의 길이 보인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게 모르게 느끼고는 있다. 풍수가 주장하는 바는 자연과의 조화와, 사람사이의 공동체를 이루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자는 것이다. 바람과 물이 없이는 인간은 물론 동물과 식물 그리고 자연도 원활히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다. 바람이 너무 지나쳐도 생물이 살기 어렵고 물 또한 넘쳐도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온다. 바람과 물의 조화,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해와 자연재해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지구를 살리고 인류가 편안하게 살아가는 첩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