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3 길 위의 인문학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속 역사를 찾아서
강릉 오죽헌
보물 제 165호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짜은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오죽헌(烏竹軒)은 우리나라 어머니의 사표(師表)가 되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이 태어나고 또한 위대한 경세가(經世家)요 철인(哲人)이며 정치가(政治家)로서 구국애족(救國愛族)의 대선각자(大先覺者)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1504∼1551)는 성품이 어질고 착하며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志操)가 높았다.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文章), 침공(針工), 자수(刺繡)뿐만 아니라 시문(詩文), 그림에도 뛰어나 우리나라 제일의 여류(女流) 예술가(藝術家)라 할 수 있으며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귀감이 되고 있다.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고 명종(明宗) 19년(1564) 생원시(生員試),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모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후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 대사헌(大司憲) 등과 이조(吏曹)·형조(刑曹)·병조(兵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조선(朝鮮) 유학계(儒學界) 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大學者)로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붕당(朋黨)의 조정(調停), 10만(十萬) 군대(軍隊)의 양병(養兵)을 주장하였으며 대동법(大同法), 사창(社倉)의 실시에 노력하였다. 글씨,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파주(坡州)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江陵)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祭享)되고 있다.
오죽헌은 강릉 유현(儒賢)인 최치운(崔致雲)(1390∼1440)의 창건(創建)으로 아들 응현(應賢)은 사위 이사온(李思溫)에게 물려주고 이사온은 다시 그의 사위 신명화(申命和)(사임당의 부친)에게,신명화는 그의 사위 권화(權和)에게 물려 주면서 그 후손(後孫)들이 관리하여 오던 중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淨化事業)으로 문성사(文成祠), 기념관 등이 건립되어 현재와 같은 면모를 갖추고 선생의 위업과 교훈을 길이 추앙(追仰)하게 된 것이다.
사십여명의 참석자들에게 오죽헌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이순원 소설가
함께 자원봉사 보조 강사진으로 참여한 바우길 완클 회원들.
요렇게 겹처마 지붕이. 저도 설명을 듣고야 자세히 보았네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복원된 경포생태 습지공원을 걸어서 김시습 기념관으로 이동 중
(거동이 불편한 분들은 버스로 이동)
강릉 김시습 기념관
*매월당 김시습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의 23세 손으로 아버지는 김일성(金日省)어머니는 울진 장씨이다.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 법호는 설잠(雪岑)이며 생육신의 한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다.
강릉은 관향이자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했던 곳으로 유랑시절의 거점이였다.
격식 없는 자유로운 시와 글을 썼던 문인으로, 불교의 철학과 유교의 이상을 결합하려고 고심했던 철학자로, 몸과 생명을 중시하는 수련도교를 실천하는 사상가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동정했던 인도주의자로, 우리국토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들여 있는 전통미를 탐미했던 여행가였다.
또한 시대와 불화했던 지식인 이였으나 고결한 인품과 굳센 지조는 후세에 길이 존경받았다. 선조임금은 율곡 이이에게 그의 전기를 짓도록 하여 '매월당집'을 발간하였고 정조임금은 시호를 청간淸簡공으로 하여 그 풍모를 기렸다.
강릉지역에서는 그이 빛나는 문학과 얼을 계승하고자 기념관을 세워 선양하고 있다.
*금오신화(金鰲新話)에 대하여
기이한 이야기를 쓴 전기체 소설(傳奇體小說)의 효시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다.
총5편이 전하는데[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는 주인공 양생이 만복사에서 부처님에게 아름다운 배필을 점지해 달라고 발원하여 3년 전에 죽은 최낭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홍생이 평양의 부벽루에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천년 전에 죽어 하늘에 올라가 신선이 되어 잠시 인간세계에 내려와 부왕의 묘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기자와의 딸과 하룻밤의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야기이며,[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는 이생과 최낭자의 자유로운 사랑이야기로 죽은 아내의 환신과 다시 만나 부부 관계를 계속하다가 아내의 환신이 사라짐으로써 부부생활이 끝나는 내용이며,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는 박생이 평소 불교의 지옥설에 회의를 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지옥으로 가서 염라대왕과 오랫동안 불교와 유학에 관항 이야기를 하고 나왔다는 이야기이다.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은 한생이 용왕의 초청으로 수궁에 들어가 상량문을 써 주어 자신의 재주를 내보이고 선물을 얻어가지고 돌아온 이야기이다.
기념관에 들어가서 에니메이션도 보고, 자료도 보고
경포대 [鏡浦臺]
강원도 강릉시 저동의 경포호수 북안(北岸)에 있는 조선시대 누대(樓臺).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호.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1326년(충숙왕 13)에 지추부학사(知秋部學士) 박숙(朴淑)이 현재의 방해정(放海亭) 북쪽에 세웠는데, 1508년(중종 3) 부사(府使) 한급(韓汲)이 현위치로 이건(移建)한 후 현재까지 7차에 걸쳐 중수했다.
평면은 앞면 5칸, 옆면 5칸이며 총 28개의 기둥을 두었고, 바닥은 우물마루로 짜여져 있으며 3단의 단차를 두어 사용자의 신분 및 계급에 따라 자리배치를 달리하던 평면에서의 위계(位階)를 보여준다. 또한 벽체의 구성없이 모두 난간을 가설하여 누대가 갖는 공간적인 개방성을 보여준다. 공포는 기둥머리에서부터 초익공이 나와 주두를 감싸면서 상부의 2제공을 받고 있는 이익공(二翼工)으로 그 상부에 재주두를 놓아 대들보를 받고 있다.
기둥 사이의 창방(昌枋) 위에는 앞면과 뒷면에 2구, 옆면에 1구씩의 복화반(覆花盤)을 놓아 구조적 의장재(意匠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가구(架構)는 종보·중종보·대들보로 이루어진 7량가로서 매우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지붕의 형태는 부연이 가설된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서 양측면에 충량이 2개씩 나와 합각부의 무게를 대들보와 측면의 평주로 분산시켜 주고 있으며,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내부에는 율곡(栗谷) 선생이 10세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 鏡浦臺賦〉를 판각(板刻)한 것과 숙종(肅宗)의 〈어제시 御製詩〉를 비롯하여 여러 명사들의 기문(記文)과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경포대에 올라 해설사의 설명도 듣고, 요렇게 경포호를 바라보고 사진도 찍고
옆에서 기념사진도 찍어주었지요.
감기몸살로 불편한 몸이었지만
자원봉사자로 동행하면서
강릉에 살면서도 무심히 보았던 것들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답니다.
2013.10.12~13
길 위의 인문학/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속 역사를 찾아서
자원봉사 동행 탐방 기록/js
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실은 '금오신화'속 역사를 찾는 길에 동참하려고 12일 오후 2시, 모루에서 이순원 소설가 님의 강연을 듣고 인사도 드리려고 참가 신청을 했지요. 그런데 부득이한 일로 강연시간을 맞출 수 없어 참석 못했어요.
13일 탐방길 신청은 마감되었다며 안 받아 주더군요.
진센님께 미리 연락 하지 않은 것은 불현듯 나타나야 많이 반가워 할 것 같아서요.ㅎㅎ
아, 그러셨구나. 13일 탐방길 접수 안하셔도 제게 연락해서 함께 하셨으면 되었는데...
신화 속 역사를 알아가는, 참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었답니다.
탐방 후 탐방객들은 보내고 이순원 소설가, 자원봉사팀과 함께 식사하고 헤어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