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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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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동쪽으로 소백산맥(小白山脈)을 경계로 경상북도 상주시, 서쪽과 북쪽으로 청원군, 남쪽으로 옥천군 및 대전광역시의 대덕구와 접한다. 1읍 10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보은군 보은읍 이평리 45번지이다. 동쪽 경상북도와의 경계에는 소백산맥이 뻗어 있고, 서쪽 청원군과의 경계에는 노령산맥에 딸린 산지가 중첩한다. 소백산맥은 북단부에서 금단산(767m)·묘봉(874m)·속리산(1,058m)·형제봉(803m)·구병산(877m) 등을 일으키고 있으나 보은군·상주시 사이의 안부 시루봉고개(175m)를 지나면서부터 산세가 급격히 약화되어 천택산(683m)·팔음산(772m)으로 이어진다. 속리산은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한 비로봉·입석대·문장대·경업대·관음봉 등 연봉이 이루는 산악미·계곡미와 울창한 자연림의 임상(林相) 및 명찰 법주사 등을 포함하는 넓은 범위의 산역(山域)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소백산맥에 비하여 산세가 약한 노령산맥은 청원군과의 경계부의 국사봉(587m)·피반령·샘봉산(462m)에서 옥천군의 환산(581m)에 연결된다. 비록 고도는 낮지만 교통장애가 큰 산맥으로, 군의 북단부 내북면(內北面)에서 청원군 미원면(米院面)으로 흐르는 미원천의 지류 하곡을 따라 청주시로 통하는 도로가 지나갈 뿐이다. 중앙부를 관류하는 보청천은 북쪽 군계에 있는 구룡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면서 보은분지와 삼승분지를 형성하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탄부(炭釜) 하곡평지를 형성한 뒤 북쪽으로부터 남류하는 삼가천을 합치면서 남쪽으로 물길을 바꾸어 옥천군으로 흐른다. 중앙에 펼쳐지는 보은·삼승·탄부 평야는 땅이 비옥하고 수리와 교통이 편리한 곡창지대인 데 반해 북부 달천의 상류 속리천은 산간계곡을 곡류하고 있어 뚜렷한 평야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기후는 중부 내륙지방에 위치하여 위도에 비해 한서 차이가 심하며, 겨울과 여름이 긴 내륙기후의 성격을 띤다. 연평균기온은 10.5℃로 서울특별시·인천광역시와 비슷하다. 1월 평균기온 -4.2℃, 8월 평균기온 24℃로 연교차가 크다. 강수량은 한국 평균강수량과 비슷한 1,167mm이다.
조선의 건국과 보은 1. 충청도에의 이속(移屬)과 군명의 개칭
조선왕조 초기 태종 13년(1413)에 고려말(高麗末)의 행정체계에 의하여 경상도 상주(尙州)에 예속되었던 5개의 군현(郡縣) 즉 옥천(沃川)?보령(保令)?황간(黃澗)?영동(永同)?청산(靑山)이 충청도(忠淸道)에 예속이 되었다.
이후 태종 16년(1416) 8월에 이조(吏曹)의 요청에 의하여, 보령(保令)이 충청도 서해안에 있는 보령(保寧)과 음(音)이 비슷하여 혼동을 일으키는 일이 많다고 하여, 보은(報恩)으로 개정(改定)되었다. 이때 함경도의 청주(靑州)가 북청(北靑)으로 바뀌고, 강원도 양주(襄州)를 양양(襄陽), 영산(寧山)은 천안(天安), 보성(甫城)은 진보(眞寶), 보주(甫州)는 예천(醴泉), 횡천(橫川)은 횡성(橫城)으로 고친 것과 함께 모두 7개 읍이었다. 이로써 고려시대에 부르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까지 불리우던 보령(保令)은 한날 고호(古號)로 남고 새로이 보은(報恩)이라 칭하게 되었다.
2. 세종대(世宗代)의 보은(報恩)?회인(懷仁)
세종대에는 조선왕조의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어가던 시기이며, 민본사상(民本思想)에 의거하여 생산력(生産力)이 증대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보은지역이 충청도 청주(淸州)로 이속(移屬)되므로서, 충청도?경상도의 경계를 이루었던 지역 구분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변화는 언어?습속?생활권에 이르기까지 점차 변화하여 충청도의 기질로 바뀌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중앙집권체제하의 보은?회인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세종대에 이르러 파악된 형편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 보은현은 호(戶)가 327, 구(口)가 1,457로부터 612호(戶)이상으로 증가하였거나. 국역(國役)에 편성된 호구(戶口)와 실제로 존재하던 호구와 차이가 있다. 회인(懷仁)은 호(戶)146, 구(口)633으로 나타나 있다. ② 군역(軍役)에 편성된 사람들의 숫자는 보은의 경우 시위군(侍衛軍) 64, 수성군(守城軍) 1, 선군(船軍) 136명이고 회인은 시위군 12, 진군(鎭軍) 18, 선군 37명으로 군정(軍丁)에 모두 268명이 소속되었다. ③ 당시 호구(戶口)와 관련하여 토착(土着)의 성씨로는 보은의 경우 이(李)?최(崔)?김(金)의 3개와 임언부곡(林偃部曲)의 홍(洪)?석(石)등 모두 5개 성씨이고, 회인은 토성(土姓)이 이(李)?홍(洪)의 2개 성씨가 있다. ④ 회인은 토지가 척박하고 기온이 춥다고 하고, 보은은 토질이 척박하나 5곡의 재배가 적당하다고 하여 산악지대임을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보은이 보다 농업에 적당한 곳임을 밝히고 있다. 당시에 생산되던 농산물은 보은고 회인에서 공통적인 것으로는 조?팥?교맥(蕎麥)?배?뽕나무?닥나무이며, 보은의 경우와 달리 회인에서는 기장?피?콩?보리가 있어 보다 잡곡위주의 농사임으 보여준다. 간전(墾田)은 보은이 5,229결(結)로 이 가운데 논이 1/3이 넘는데 비하여, 회인은 1,146결 가운데 논의 비율이 1/9에 불과하였다. ⑤ 토산물은 보은의 송이(松?)?신감초(辛甘草) 및 은석(銀石)이고, 회인의 석철(石鐵)?상수정석(常水精石)이 알려져 있다. ⑥ 국가에 현물(現物)로 납입하는 공물(貢物)은 보은의 경우 벌꿀?황밀과 버섯?대추?호도?송자(松子) 등을 비롯하여 칠?지초와 짐승 가죽으로 다양하나, 회인은 단순하였다. 약재로는 회인의 백부자(白附子) 하나에 비하여 보은은 연꽃술?인삼?오가피?백복령?당귀?위령선?안식향 등이 기록되어 있다. ⑦ 각 고을에 도기소(陶器所)가 있어 그릇을 생산하였는데, 보은은 외임리(外任里)였고 회인은 둔안리(芚安里)에서 생산했는데 품질은 모두 하품(下品)에 속하였다. ⑧ 봉수로(烽燧路)는 고려시대의 것을 이용하여 금적산(金積山)에서 청산(靑山)의 박달라산(朴達羅山) 봉화를 받아 북(北)으로 회인의 용산참(龍山站)을 거쳐 청주(淸州) 상령성(上嶺城)으로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⑨ 보은의 오정산석성(烏頂山石城)은 아직도 유사시에 대비하는 중요한 입보처(入保處)로서 군창(軍倉)이 설치되어 있었고, 회인의 호참산석성(虎站山石城)도 입보용(入保用)의 산성(山城)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⑩ 당시 두 고을의 전세(田稅)와 공물(貢物)은 육로(陸路)로 아산만(牙山灣)에 이르러 다시 해로(海路)로 운송하였다. 15세기 중엽부터는 충주(忠州)에 이르러 강선(江船)으로 운반하게 되었다. ⑪ 주요한 관도(官道)는 역(驛)이 보은현 경내의 원암(元巖)과 함림역(含林驛)이 있었으므로 청주~보은~청산을 경유하는 통로가 간선(幹線)이었다고 할 수 있다. ⑫ 월경지(越境地)가 있고, 특수한 행정구역이 아직도 존재하였다. 월경지는 공물의 배정과도 관계가 있는 곳으로 청산현(靑山縣)에 소속된 주성부곡(酒城部曲)이 있었다. 부곡은 임언부곡(林偃部曲 : 현 임한리 주변)이 있었는데, 차츰 직촌화(直村化)되어 갔다.
3. 15세기 후반의 보은?회인
문종(文宗)이 즉위한 1450년으로부터 연산군(燕山君)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서는 세조의 속리산(俗離山)행차와 복천사(福泉寺) 경영을 비롯하여 이 고장이 한때 주목을 받기도 하였고, 조선왕조 초기의 제도?문물이 갖추어지면서 장차 이고장에도 문풍(文風)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된 시기였다.
문종(文宗)이 세종(世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승(僧) 신미(信眉)는 속리산에 복천사(福泉寺)를 개창하고 있었는데, 왕은 이때 감사(監司) 권극화(權克和)에게 단청하는 일을 돕도록 하였다. 당시 유학(儒學)을 숭상하는 사풍(士風)에 의하여 커다란 정치적 문제로 조야(朝野)가 떠들석하였다.
1470년(성종원년)에 이르러 군액(軍額)이 경정(更定)되었는데, 이때 보은은 본디 688명이었다가 650명으로 되고, 회인은 188명에서 150명으로 조정되었다. 그후 성종3년에는 다시 보은이 580명, 회인은 100명으로 조정되었다. 이들 군사(軍士)들이 중앙군(中央軍)에 있어서는 오위(五衛) 가운데 중위(中衛)에 해당되는 의흥위(義興衛)에 소속되었다. 위(衛)에는 중(中)?좌(左)?우(右)?전(前)?후(後)의 5부(部)로 구성되었는데, 보은?회인은 청주진관(淸州鎭管)이므로 전부(前部)에 소속되었다.
15세기 후반에 보은지방에는 문풍(文風)이 높아지게 되는데 강원감사(江原監司)까지 지낸 한유문(韓有紋)이 보은땅에 살게 되었고, 두 번이나 과거에 합격하여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낸 김타(金?)가 살면서 유교적 소양에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윽고 중종대(中宗代)에 이르러서는 사천(私踐)신분인 막동(莫同)이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니, 이때 충청도가 타도에 비교하여 향약(鄕約)이 잘 시행된다고 하고, 김정(金淨)과 같은 사림(士林)이 등장하여 새로운 기운으로 훈구파(勳舊派)에 대해 비판적 자세로 위민정치(爲民政治)르 주도하게 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훈구대신이던 홍윤성(洪允成)은 회인사람이었다. 회인에서도 유풍(儒風)이 일어나 이우(李祐)와 같은 효자가 나타나기도 하였던 것이다.
4. 세조(世祖)의 속리산(俗離山) 행행(幸行)
세조(世祖) 9년(1464) 12월 왕은 정현조(鄭顯祖)와 김개(金漑)로 하여금 온양온정(溫陽溫井)의 행궁(行宮)을 돌아보고 오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음달인 1465년 봄에 행행(幸行)키 위한 일이었다. 2월에 이르러 도성에 머물며 지킬 사람들을 임명하고 왕과 중궁(中宮)이 온양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광주(廣州) 문현산(門縣山)에 이르러 사냥하는 구경을 하고, 죽산(竹山) 연방(蓮坊)과 진천(鎭川) 광석(廣石)을 거쳐 청주(淸州) 초수(椒水)(현재의 초정약수)에 이르르게 되었다. 이러한 거동을 보아 당초 온양온정(溫陽溫井)에 간다는 것은 일종의 암행(暗行)을 위한 풍문에 불과하였고,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세조의 순행은 날자별로 살펴보면, *병오(丙午)일 : 청주에 도착 노인(老人)?유생(儒生)?창기(娼妓)들이 가요(歌謠)를 받침. 노인(老人)들에게 주육(酒肉)을 내림. *기유(己酉)일 : 청주에서 출발하여 저녁에 회인에 도착. (이때 피반령(皮盤嶺)을 넘어감) *경술(庚戌)일 : 보은현 동헌(東軒)을 지나 저녁에 병풍송(屛風松)에 도착했다. 병풍송(屛風松)이 지금의 정이품송(正二品松)이다. 이때 승려(僧侶) 신미(信眉)가 배알하고 떡 150쟁반을 바치니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신해(辛亥)일 : 속리사(俗離寺)에 행차하고, 또 복천사(福泉寺)에 행차하였다. 복천사(지금의 福泉庵)에는 쌀 300석, 노비 30명, 토지 200결을 하사하고, 속리사(지금의 法住寺)에는 쌀과 콩 30석을 하사한 다음 행궁(行宮)에 돌아왔다. 이러한 실록(實錄)의 기록을 보면, 당시 이 곳의 행차와 관계되는 흔적으로 훗날 많은 일화와 얘깃거리로 남아있게 되었다. 특히 정이품송(正二品松)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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