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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북쪽에 사막이 있다.
근거문헌: 계산기정(薊山紀程) 제5권 부록(附錄) 도리(道里), 계산기정(薊山紀程) 제2권,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중종실록 59권 22년 의 기록, 해봉집(海峯集) 권지(券之)2 칠언사운(七言四韻) 송김안변(送金安邊),
상촌집 9권, "동사강목 제8상갑신 고려 숙종(肅宗) 9년부터, 병인 고려 인종(仁宗) 24년까지 43년"의 기록, 연원직지(燕轅直指) 제6권, 담헌서(湛軒書) 외집 8권(外集 卷八) 연기(燕記) 경성기략(京城記略),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제2편 오화연필(五花沿筆) ○ 을묘년(1855, 철종 6) 11월[17일-27일] 25일(갑신) 이상 사막과 낙타와 연관된 기록임
필자주석: 역사의 자료를 분석해 보면 청(淸)의 북경(北京)은 사막지대에 있었다. 오늘날의 북경은 사막지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북경은 가짜일수 밖에 없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청의 북경이 사막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
청의 북경이 사막에 있었다는 것은 사서(史書)에 대한 오역(誤譯) 또는 잘못된 기록이라 한다. 과연 그럴까? 청(淸)의 북경(北京)을 찾기위한 그나마 가장 좋은 자료는 조선의 사신들이 남긴자료일 것이다.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는 조선 후기의 기록들이고, 책의 저자도 서로 다른 사람 이다. 그런데 거의 동일한 기록을 남겼다.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의 대륙의 상황과는 전적으로 다른 기록 이다. 현재의 대륙은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지금의 북경까지는 모래땅이 아닌 거의 초원지대가 주를 이룬다.
지금의 대륙이 사막화가 많이 진행되었다고 하지만,이는 산업이 발달되면서 환경공해로 인한 환경재앙의 결과 이다. 이 책들이 기록된 시기가 약 250년 전후인데,250 여년 전에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이고,
지금처럼 환경공해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지금처럼 사막화가 진척되기 훨씬 이전의 상황 이다. 어느 혹자는 위의 기록을 토대로 청나라의 북경까지 가는 길은 사막의 길이었다.라고 말하자,
구체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단순 모래일수 있으므로 근거로서 빈약하므로 사막일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럼 일반 평지의 단순모래라고 가정 하자.그런데 어찌해서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의 기록처럼,
아주 가볍게 부는 미풍에서도 일반 평지의 모래가 앞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연기나 안개가 낀것 처럼 되고 사람의 피복,모자,얼굴에 모래가 달라 붙어 잘 떨어지지 않고,옛적의 가마(=교자)안에서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언덕처럼 수북히 쌓이고 북경과 500리의 거리에 있는 사하역의 상황은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히고,말 배까지 묻히는 모래지역이 시문에 언급된것 처럼 30리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지역이 사막 말고 그 어느 지역에서 가능하냐?고 묻자,
어느 혹자는 아무 답변을 하지도 못했다.사막이 아닌 지역에서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수가 없다. 위의 기록을 보면,압록강 건너서 부터 모래지역 즉 사막지역인데,북경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사막의 어려움이 가중되는데 그 여정중에 요동,산해관이 아주 심하며 더더욱 심한 지역은 영평부의 사하역으로 말의 배까지 모래가 묻히는 지역이 30여리에 달한다고 한다.
또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의 공통된 기록은 북경(北京)과 북경 인근의 토질이 검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북경은 사막지대에 있는데 그 모래의 특징은 검은빛의 토양=회색빛의 토양을 지닌 지역 이다.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북경은 지질적으로 세계적으로 아주 드문 아주 독특한 특질의 토양을 가지고 있다. 즉 북경은 검은 모래 사막(회색빛 모래 사막)의 토양 이다.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위의 기록상에서 전하는 어떠한 조건도 만족하지 않는다.
또한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북경은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연행일기(燕行日記)의 기록처럼 겨울에도 춥지 않다고 한다.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연행일기(燕行日記)의 저자는
각기 다른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서로 공통된 기록들을 기록하고 있다.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연행일기(燕行日記)의 저자는 북경의 겨울이 마치 남방지역의 기후와도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사막지방의 아주 전형적인 특징을 말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 북경 지역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그 다음날에는 그 흰눈이 쌓이지 않고 그 흔적 조차 없다고 한다. 지금의 북경이 그런가?
지금의 북경의 겨울이 마치 남방지역의 기후와도 같아 하루 종일 눈이 와도 그 다음날에는 그 흰눈이 쌓이지 않는 지역 인가? 본인이 아는 지인 중에 북경에 사업차 자주가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현재의 북경의 겨울이 남방지역의 기후와도 같아 하루 종일 눈이 와도 그 다음날에는 그 흰눈이 쌓이지 않는 지역이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 지인이 저보고 뭔 환타지 소설 같은 소리냐며 본인에게 핀잔을 준 적이 있다.
실제로 중앙아시아등 지역 사막의 겨울 날씨가 보기 보다 온난한 날씨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을 근거해서 보면,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가짜이다.
또 위의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의 기록을 보면,북경(北京)에는 나무가 귀하므로 불은 모두 석탄을 쓴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리고 사막을 대표하는 동물인 낙타가 나오는데 석탄이 매우 무거우므로 꼭 낙타를 사용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가축중에 하필이면 왜? 낙타를 이용했을까? 사막지대에서 사막에 적응된 동물인 낙타가 물자수송에 가장 적격이었다는 그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므로,즉 북경은 사막지대에 있었다는 증거 이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의 기록을 보면,북경(北京) 부근에는 "수백 리 안에 나무가 있는 곳이 없고 농사로 수수를 많이 심어 나무를 대신하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위의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북경과 그 부근이 사막지역임을
알수 있는 기록 이다. 사막이 아니고서는 "수백 리 안에 나무가 있는 곳이 없고 농사로 수수를 많이 심어 나무를 대신하며"라는 기록이 성립될수 없으며,또한 "아주 가볍게 부는 미풍에서도 모래가 앞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연기나 안개가 낀것 처럼 되고 사람의 피복,모자,얼굴에 모래가 달라 붙어 잘 떨어지지 않고,옛적의 가마(=교자)안에서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언덕처럼 수북히 쌓이고 북경과 500리의 거리에 있는 사하역의 상황은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히고,말 배까지 묻히는 모래지역이 시문에 언급된것 처럼 30리에 달한다."는 기록이 성립될수 없다. 또한 낙타는 혹한의 지역에서 살수 없는 동물 이다.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北京)은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위의 사실 그 어느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한다. 즉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가짜의 허구의 북경(北京)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된다. 위의 기록들에서 역사상의 북경(北京)과
조선의 북쪽은 사막지대에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알수 있다.
2. 조선에 총령이 있다.
총령(蔥嶺)의 진실을 알기 위한 선행 학습:
심전고(心田稿)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거등만록(車燈漫錄)》
"효람(曉嵐) 기윤(紀昀)이 일찍이 황하의 물 근원을 가서 찾아보고 하원기(河源記)를 지어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곤륜(崑崙)은 곧 지금의 화전(和闐 신강성에 있는 땅 이름)의 남쪽 산인데 황하의 물이 여기서 나온다. 원 세조(元世祖)가 도십(都什)을 보내어 찾았으나 겨우 성수하(星宿河 운남성에 있음)에 이르러 그치었다. 그런데, 지금은 곧바로 발원처(發源處)에 이르러 그 땅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다.” 장건(張騫)이 이른 데는 서역 36국인데, 무릇 그 범위가 2만 리로서 지금은 전부 중국의 군현에 들어 신강(新彊)이라 부른다. 면적의 크기가 과거에는 없었던 일이다. 서쪽은 돌궐(突厥)을 지나가고 서남쪽은 토번(吐蕃)에서도 2, 3천 리를 더 나아간다. 신독(身毒)은 곧 인도(印度)이며, 현도(懸度)는 피산(皮山)에 있어 판도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감숙(甘肅)은 오래 전부터 내지(內地)이고, 약수(弱水), 흑수(黑水)는 함께 감숙 내지에 있다."
필자 주석: 현재의 역사에서 총령지역은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청조(淸朝)의 대학자 효람 기균은 총령과 관련된 감숙(甘肅) 지역에 약수(弱水), 흑수(黑水)가 있다고 했다.
현재의 감숙성 지역에 흑수=흑룡강이 있기나 한가? 또한 역사에서 흑룡강의 북쪽에 백야현상 이라는 자연현상이 존재하며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다고 했다. 현재의 감숙지역에 백야현상이 존재하는 지역인가?
또한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인가? 또한 효람 기균은 신강(新彊) 지역의 강역이 연무(延袤) 2만리(二萬里)라 했으며 그 강역 안에 돌궐(突厥),토번(吐蕃),인도(印度),현도(懸度),장건(張騫)이 이른 데는 서역 36국이 있다고 했다.
현재의 신강(新彊) 지역이 연무(延袤) 즉 동,서로 1만리,남북으로 1만리의 강역인가? 또한 신강 지역 안에 돌궐(突厥),토번(吐蕃),인도(印度),현도(懸度),장건(張騫)이 이른 데는 서역 36국이 있기나 한가?
이러한 논리와 근거로 현재의 히말라야=총령설은 엄청난 모순과 오류라는 것이다.
해국도지(海國圖志) /卷030 西南洋○中印度沿革(原無今補輯)
條支國臨西海(案:此西海謂地中海,《魏書》謂此西渤海也)
(조지국은 서해에 임해 있다. 살펴보건데 이 서해는 지중해를 일컨는다. 이는 위서에서 일컨는 서발해 이다.)
해국도지(海國圖志) /卷003
至《北魏書》則分蔥嶺以東、流沙以西為一域,蔥嶺以西、海曲以東為一域,者舌以南、月氐以北為一域,兩海之間、水澤以南為一域,州居部畫,綱紀秩然。
其言條支,西渡海曲一萬裏,為大秦國,而指其海旁出,與中國渤海東西相直,則明知為地中海,非西洋大海。
(북위서에 의거하여 구분하여 보면 총령이동은 유사 이서가 한 지역이 되며,총령 이서는 하곡 이동이 한 지역이 되며,자설 이남은 월저(월지) 이북이 한 지역이 되며, 양해의 사이는 수택이남이 한 지역이 되며
이 지역들에서 살고 있는 부족들의 모습은 기강이 있으며 질서가 정연하다.
그 말에 따르면 조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해곡 1만여리의 대진국이 되며 이는 그 바다의 측면으로 나오는 것을 가리키며 중국과 발해는 동서로 맞 닿아있어
이는 분명 지중해가 됨을 알수 있으며 서양대해가 아니다.)
해국도지(海國圖志)/卷074
今歐羅巴、利未亞之山,皆發脈蔥嶺,邐迤而盡於西海。
(지금의 유럽,아프리카의 산은 다 총령에서 발원하며 (그 산 줄기가) 구불구불 이어져 서해에서 끝난다.)
필자 주석: 효람 기균이 말한 감숙 지역은 총령과 관련된 지역이다. 해국도지의 기록에 의하면 총령이 유럽,아프리카의 근간이 되는 산이라 했다.
현재의 히말라야산이 유럽과 아프리카의 근간이 되는 산 인가? 또한 해국도지의 기록에서 중국과 발해가 동서로 맞 닿아있고 또 이 발해가 지중해라 기록하고 있다.
절대로 현재의 히말라야 산을 말하는 기록이 아닌 것이다. 현재의 지중해와 관련된 코카사스 산을 말하는 기록인 것이다. 즉 코카사스 산맥이 옛날의 총령인 것이다.
이러한 총령이 조선에 있었다.
근거문헌: 숙종 23년 정축(1697,강희 36) 6월3일 (신해), 숙종 32년 병술(1706,강희 45) 3월25일 (계미), 숙종 37년 신묘(1711,강희 50) 5월2일 (경인), 해봉집(海峯集) 권지(券之)2 칠언사운(七言四韻) 안변가학루운(安邊駕鶴樓韻),
사가시집 제21권 시류(詩類) 또 길성 김 태수의 시에 답하다 2수 이상 조선에 총령이 있었다는 근거 문헌임.
3.조선의 강역은 만리지국(萬里之國) 이다.
근거문헌: 세조실록 7권 3년의 기록, 세조실록1권 1년의 기록, 학봉일고 부록 제1권 만원서(輓轅書) [유생(儒生) 이대기(李大期) 등], 고대일록 제1권 임진(壬辰, 1592) 가을 9월, 동계집 연보 문간공 동계 선생 연보(文簡公桐溪先生年譜)
필자 주석: 어떤 혹자가 말하길 우리의 역사에서 말하는 만리지국(萬里之國)의 의미는 한반도의 해안선의 길이를 돌고 돈 길이의 총합이라 한다. 그런데 실록등에서 역사의 강역을 말할때 폭원(幅員)이라 했다. 즉 폭원은
가로의 길이를 말한다. 또 금사(金史)에서 또 요사(遼史)에서 자신들의 강역을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표현했다. 이 역시 어떤 혹자의 논리로 봐야 한다. 어느 한쪽만 치우친 논리는 더 이상 논리가 아니다.
어떤 혹자의 주장 대로 라면 금나라나 요나라나 한반도 크기만한 강역을 가진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논리가 아닐수 없다.
4. 조선은 천자의 수도를 가지고 있다.
천자(天子)의 수도(首都)를 알기 위한 선행 학습:
다산시문집 제9권 책문(策問) 의 글을 보면
"..,황제(皇帝)의 도읍(都邑)은 동경(東京)ㆍ서경(西京)ㆍ남경(南京)ㆍ북경(北京)이 있는데, 그 웅거한 형세가 어느 곳이 가장 나은가..." 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관련,
국조보감 제10권 세조조(世祖朝)의 기록을 보면,
"양성지가 상소하여 여러 조항의 정책을 진달하였다. 그 내용은, 1.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는 일, 2. 한성을 상경(上京)으로, 개성(開城)을 중경(中京)으로,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전주(全州)를 남경(南京)으로,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함흥(咸興)을 북경(北京)으로 정하는 일..,"
5. 조선의 임금은 천자(天子)의 관모(통천관(通天冠))를 사용했다.
근거문헌: 승정원일기 영조 즉위년 갑진(1724, 옹정2) 9월 30일(경오) 맑음, 현종 즉위년 기해(1659,순치 16) 5월8일 (무진) 오시에 대렴을 하다
필자주석: 현재의 역사에서 조선이 천자(天子)의 관모인 통천관(通天冠)을 사용한 시기가 대한제국때 이다. 그러나 실록에서는 대한제국 그 이전에 천자(天子)의 관모인 통천관(通天冠)을 사용했다.
6. 조선 임금은 천자의 어복(御服)을 입었다.
근거문헌: 세조 12년 병술(1466,성화 2) 3월6일 (정미), 사가시집 제21권 시류(詩類), 사가시집보유 제1권 시류(詩類)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 시, 사가시집 제31권 시류(詩類), 사가시집 제52권 시류(詩類)
필자주석: 방송의 사극에서,또는 역사의 유물이라는 조선 임금의 초상화에서 보였던 한결같은 자색(紫色) 계열의 임금의 복식은 거짓임을 알수 있다.
위의 사가시집 31권의 기록에서 사가시집의 저자는 울금(鬱金)이 썩어 한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울금(鬱金)이란 식물은 한약재이면서 그 당대 황색(黃色)계열의
염료 이며 이 염료로 임금의 옷을 황색으로 염색하여 바칠려고 했는데 이 울금(鬱金)이 썩어서 이를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대만(臺灣)의 국립대만예술교육관의
자료를 보면 옛날에 울금(鬱金)의 뿌리로 염색하여 황제=천자의 옷을 만든다고 한다. 이 울금(鬱金)의 색깔을 자황색(赭黃色) 이라 한다고 한다.
울금(鬱金)이라는 염료로 만든 임금의 복식은 울금포(鬱金袍)라고도 하며, 또 다른 말로 자황포(赭黃袍)라 하며 이를 줄여서 자포(赭袍)라 하기도 한다.
여러 고문헌을 보아도 자포(赭袍),자황포(赭黃袍)는 천자(天子)를 말하는 것이라는 기록들이 넘쳐난다.조선의 임금은 이런 천자의 복식을 입은 그 당대의 진정한 천자 였던 것이다.
7. 조선은 천자(天子)의 사당을 가지고 있다.
근거문헌: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임진년 하 만력 20년(선조 25년(1592년), 난중잡록 4(亂中雜錄四) 경자년 하 만력 28년, 선조 33년(1600년), 다산시문집 제22권 여문(儷文) 양청계(梁靑溪) 유사시 서(遺事詩序),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와 다산시문집 제22권의 기록은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인데 조선의 종묘사직이 구묘(九廟)임을 기록, 청음집 제 13 권 칠언절구(七言絶句) 지천(遲川)이 지은 시의 운을 차운하다,
순조실록 6년 병인(1806, 가경 11) 10월 22일(을미), 선조(1590, 만력 18) 4월 1일(임신),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2월 20일(을사), 광해군 14년 임술(1622, 천계 2) 5월 3일(무술),
효종 2년 신묘(1651, 순치 8) 6월 12일(정사), 숙종 15년 기사(1689, 강희 28) 7월 18일(임자), 숙종 15년 기사(1689, 강희 28) 7월 25일(기미), 선조실록 51권 27년(1594년)의 기록,
난중잡록(亂中雜錄) 계사년 하, 기축록(己丑錄) 하 의 기록...............외 다수의 기록.
필자주석: 세종실록 11년 기유(1429, 선덕 4) 4월 7일(임오) 근정전에 나아가 책문을 내어 선비들을 시험하다 의 기록을 보면,
"옛날에 천자(天子)는 칠묘(七廟)를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오묘(五廟)를 제사하고, 대부(大夫)는 삼대(三代)만 제사하고, 관사(官師)는 이대(二代)만 제사하고, 서민(庶民)은 일대(一代)만 제사하는 것이 《예경(禮經)》에 나타나 있으며 국가에서도 따르는 바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에 의하면 천자(天子)는 칠묘(七廟)를, 제후는 오묘를 제사한다고 했다.
유교적 군주제도에 있어서 법치 질서의 근간인 예경(禮經)=예기(禮記)의 기록을 토대로 한 기록이며 태조실록에서는 예조(禮曹)에 부탁하여 논의하여 일정한 제도로 삼겠다고 했으며,
세종실록에서는 예경(禮經)=예기(禮記)에서 말하는 질서를 국가에서도 따르는 바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껏 배워왔던 역사 지식을 토대로 보면 조선은 소위 명(明)나라에 제후로서 사대를 한 나라 이므로
칠묘(七廟)의 종묘사직이 아닌 오묘(五廟)의 종묘사직을 가진 나라 이어야 한다. 그러나 위의 언급한 문헌을 보면, 조선은 천자(天子)의 사당인 칠묘(七廟) 또는 칠묘(七廟)의 변형인 구묘(九廟)를 가진 나라라 기록하고 있다.
즉 조선이 천자국(天子國) 이었다는 증거의 기록인 것이다.
8. 조선의 임금의 죽음은 천자(天子)의 죽음이다.
근거문헌: 단종 1년 계유(1453,경태 4) 4월23일 (경술), 상촌선생집 부록2 유제문(諭祭文), 연산군 1년 을묘(1495,홍치 8) 2월28일 (임오), 명종 22년 정묘(1567,융경 1) 5월21일 (을해), 숙종 9년 계해(1683,강희 22) 12월28일 (을축), 영조 즉위년 갑진(1724,옹정 2) 9월22일 (임술)
순조 3년 계해(1803,가경 8) 12월28일 (기축)........외 다수의 기록
필자주석: 천자(天子)가 죽으면 붕(崩)이라고 하고, 제후는 훙(薨)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 조선의 임금이 죽으면 붕(崩)이겠는가? 훙(薨)이겠는가? 지금까지 배워온 지식으로 조선은 제후국이므로 훙(薨)이 맞다.
그러나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의 임금의 죽음에 대해 붕(崩),천붕(天崩)이라 했다. 즉 조선의 임금들이 천자 였다는 것이다.
황제(皇帝)의 죽음에 대해 높임말로 선어(仙馭),안가(晏駕) 라고 하며 왕이나 왕족이 죽으면 훙서(薨逝),훙거(薨去) 라고
한다. 황제(皇帝)의 죽음에 대해 높임말로 昇遐(승하), 登遐(등하), 上賓(상빈), 崩逝(붕서), 天崩(천붕), 禮陟(예척), 陟方(척방)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 임금의 죽음에 대해 왕이나 왕족이 죽으면 훙서(薨逝),훙거(薨去)라는 용어와 더불어 천자의 죽음을 말하는 선어(仙馭),안가(晏駕),上賓(상빈),승하(昇遐),천붕(天崩)등의 용어가 무수하게 등장 한다.
즉,조선의 임금들은 천자들이었으며 조선왕조실록은은 천자와 제후의 역사가 뒤섞인 역사 이다.
어떤 혹자는 말하길,조선에서 황제의 죽음에 대해 붕어(崩御),붕서(崩逝)라 하는데 제후 왕의 죽음에 대해 天崩(천붕)이라 한것은 "소중화(小中華) 의식이나 모화(慕華) 사상에 따른 것"으로 본다고 한다.
이는 말도 되지도 않는 말 이다. 진정으로 소중화,모화사상을 가졌더라면 이른바 유교의 질서 가치관의 그 표본인 예기(禮記)의 기록대로 천자의 신하로서 그 시대의 질서를 절대로 순종해야만 한다.
9. 조선은 임금의 신하들 중에 왕작(王爵)을 가진 신하가 있다.
근거문헌: 중종 5년 경오(1510,정덕 5) 8월18일 (신축), 명종 8년 계축(1553,가정 32) 3월14일 (경인), 선조 27년 갑오(1594,만력 22) 12월4일 (정미), 선조 32년 기해(1599,만력 27) 4월4일 (계축), 경종수정실록 1년 신축(1721,강희 60) 12월6일 (임술),
필자주석: 지금껏 배워온 역사에서 조선의 임금은 명조(明朝) 혹은 청조(淸朝)의 천자(天子)에게 왕작(王爵)의 작위를 받은 제후 이다.
그런데 실록에서는 조선의 임금의 신하들 중에 왕작(王爵)의 작위를 가진 신하들이 나온다. 지금껏 배워왔던 역사지식을 바탕으로 보면 조선의 임금은 상국에서 제후로 봉작을 받는 왕작(王爵)을 받는 신분인데,
전제군주 시대에 제후가 자신의 신하에게 왕작을 하사할수 있을까? 이는 절대로 타당치 않다. 즉 조선의 임금이 천자 였다는 것이다. 조선의 임금이 천자였기 때문에 신하에게 왕작을 하사 하였던 것이다.
참고로 세종실록에 의하면 지방명(地方名)+군(君)이 왕작과 같다고 했다. 예컨데 남양군(南陽君),흥해군(興海君),달성군(達城君) 은 왕작과 같은 신분으로 이들의 그 실체는 지방의 제후인 것이다.
10. 조선의 임금은 신하에게 천자(天子)만이 할수 있는 제후의 작위를 주고 그 제후에 걸맞는 봉토(封土)를 주었다.
11. 조선의 임금은 신하에게 천자(天子)만이 할수 있는 철권(鐵券)을 주었다.
근거문헌: 선조 40년 정미(1607,만력 35) 12월28일 (병술), 선조 40년 정미(1607,만력 35) 12월28일 (병술), 선조 41년 무신(1608,만력 36) 1월3일 (신묘), 숙종 6년 경신(1680,강희 19) 8월30일 (병술), 숙종 7년 신유(1681,강희 20) 5월21일 (계유),
경종 3년 계묘(1723,옹정 1) 3월13일 (임진), 영조 4년 무신(1728,옹정 6) 7월19일 (무진) , 영조 14년 무오(1738,건륭 3) 2월14일 (병신), 기축록 상(己丑錄上) 황혁(黃赫), 택당선생집 제7권 교서(敎書) 정사공신 능성군 구굉에게 내린 교서[敎靖社功臣綾城君具宏書]
필자주석: 고종 1년 갑자(1864, 동치3) 8월 2일(경오) 비 의 기록을 보면,
“제후는 천자에게서 봉토(封土)를 받는데, 천자가 대사(大社)에서 봉하는 방위의 색인 흙을 흰 띠[芧]로 싸서 주므로 이것을 모토(茅土)라 하며, 제후가 받은 흙을 국도(國都)에서 사로 삼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모토(茅土) 라는 것은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내리는 봉토(封土)를 의미 한다. 이는 일개의 제후가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위의 선조,숙종,경종,영조실록과 기축록,택당선생집의 기록에서 조선의 임금이 신하들에게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내리는 봉토(封土)를 의미하는 모토(茅土)를 하사 한다. 이는 조선의 임금이 천자(天子)라는 것이다.
위의 경종실록,영조실록은 더욱더 황당한 기록 이다. 경종실록,영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신하에게 철권(鐵券)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철권(鐵券) 이라는 것의 이칭으로 단서철권(丹書鐵卷),금서철권(金書鐵券)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세습적으로 면죄권을 주는 증서이기도 하지만 이는 매우 드물고 제후로서의 관작이나 봉토,봉읍을 준다는 증표 이다. 이러한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조선의 임금이 진정한 천자(天子) 였다는 것이다.
12. 실록에서 조선은 만승지국(萬乘之國)=천자국(天子國) 이라 기록하고 있다.
근거문헌: 경세유표 제7권 지관 수제(地官修制) 전제(田制) 9, 석담일기 하권(石潭日記卷之下) 만력 구년 신사(萬曆九年辛巳) 1581년(선조 14), 약천집 제13권 의(議), 용재총화 제1권, 우계집 제3권 장소(章疏) 2 선조, 율곡선생전서 제15권 잡저(雜著) 동호문답(東湖問答),
태종 13년 계사(1413,영락 11) 9월9일 (을유), 태종 18년 무술(1418,영락 16) 8월9일 (병술), 세종 31년 기사(1449,정통 14) 2월9일 (경신), 인조 14년 병자(1636,숭정 9) 9월22일 (계해) , 효종 6년 을미(1655,순치 12) 5월11일 (갑오) , 현종개수실록 1년 경자(1660,순치 17) 7월16일 (기사),
필자주석: 상촌선생집 제51권 구정록 상(求正錄上)의 기록을 보면,
"1봉(封)은 사방 3백 66리로서 합계 10만 정이니 최소한 병부(兵賦)로 6만 4천 정ㆍ융마 4천 필ㆍ병거 1천 승을 낼 수 있는데, 이는 제후의 봉토 가운데 큰 것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를 일컬어 ‘천승지국(千乘之國)’이라고 한다. 천자의 기내(畿內)는 사방 1천 리로서 합계 1백만 정이니 최소한 병부로 64만 정ㆍ융마 4만 필ㆍ병거 1만 승ㆍ융졸(戎卒) 70만 인을 낼 수 있는데, 이런 까닭에 천자를 ‘만승지주(萬乘之主)’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네이버 백과에서 말하는 만승(萬乘)의 의미를 보면,
"승(乘)은 병거·전차(戰車)의 뜻이다. 1만 대의 병거를 갖출 수 있는 광대한 영토를 만승지국(萬乘之國)이라 하며, 그 영주를 만승지군(萬乘之君)이라 하였다. 중국 주(周)나라 때의 천자(天子)는 자기 직할영토에서 1만 대의 병거를 갖추어야 하는 제도가 있었으므로 만승은 천자의 호칭이 되었다. 천승(千乘)은 병거 1,000대를 갖출 수 있는 제후라는 뜻이며, 그 영지를 천승지국(千乘之國)이라 하였다. 백승지가(百乘之家)는 병거 100대를 갖출 수 있는 가문이라는 뜻이며, 경(卿)·대부(大夫)의 지위를 가리켰다."라고 되어 있다.
병자호란 그 당대 혹은 그 후대의 기록인 인조실록,효종실록,현종실록,남구만의 약천집,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제7권의 기록에서 이 당대는 소위 청(淸)때이며 조선은 청에 항복이라는 굴욕을 겪은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이 당대의 조선은 만승의 나라
즉 만승천자의 나라라 기록하고 있다. 하늘의 해가 둘 일수는 없다. 전제군주 시대에 조선이 사대를 하는 나라가 명이며 청인데 실록에서 조선은 스스로가 만승지국=천자국이라 기록하고 있다.
13. 조선의 경기도 면적은 동,서 1천리,남,북 1천리의 면적 이다.
근거문헌: 고종 16년 기묘(1879, 광서5) 8월 10일(신해) 맑음, 삼봉집 제1권 육언절구(六言絶句) 신도 팔경의 시를 올리다[進新都八景詩]
필자주석: 상촌집의 기록을 보면, 1봉(封)이 10봉이 되면 기(畿)이니 1기는 사방 1천 리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천자의 기내(畿內)는 사방 1천 리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1봉(封)은 사방 3백 66리로 제후의 봉토 가운데 큰 것에 속하는 것 이라 기록하고 있다. 즉 천자의 기(畿)는 제후의 1봉(封)이 10개가 모인것으로 이 기(畿)는 사방 1천 리 이며 이것을 일컬어 기봉(畿封)이라 하며 또 다른말로 기전(畿甸)이라 하며,
또 다른 말로 경기(京畿)라 하며 또 다른 말로 중국(中國)이 되는 것이다. 기록에서 이러한 경기도의 면적이 동,서 1천리,남,북 1천리의 면적 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를 한반도에 대입해 보면 경기도의 면적이 한반도의 1/3이나 된다. 나머지 지방은 지각변동으로
바닷물 속에 감춰져 있었던가? 이것으로 한반도 조선론이 극명한 오류임을 알수 있다.
14. 조선은 동번(東蕃),서번(西蕃),남번(南蕃),북번(北蕃) 이라는 번후(蕃侯)를 두었다.
근거문헌: 숙종 33년 정해(1707,강희 46) 2월30일 (계축) , 영조 5년 기유(1729,옹정 7) 11월2일 (임신), 숙종 24년 무인(1698,강희 37) 7월25일 (정유), 영조 11년 을묘(1735,옹정 13) 9월9일 (을사),
선조 30년 정유(1597,만력 25) 1월22일(계축), 영조 9년 계축(1733,옹정 11) 12월22일 (기사), 숙종 39년 계사(1713,강희 52) 윤 5월10일 (병진), 경종 3년 계묘(1723,옹정 1) 12월15일 (경신).............외 다수의 기록.
필자주석: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은 명조(明朝),청조(淸朝)에 사대를 하는 나라이며 명조(明朝),청조(淸朝)에서는 조선을 동번(東藩)이라 일컨는 기록들이 참으로 많다.
조선의 상국(上國)이 명조(明朝),청조(淸朝)인데 또한 조선은 명조(明朝),청조(淸朝)의 동번(東藩)인데 위에서 인용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참으로 어이없게 일개의 제후국 조선은 동번,서번,남번,북번을 둔 천자국 시스템의 국가 이다. 즉 조선은 동,서,남,북의 번후를 둔 천자국 이었다는 것이다.
15. 조선은 천자(天子)의 관학(官學)을 두었다.
근거문헌: 고종 13년 병자(1876, 광서2) 8월 1일(기축) 맑음, 점필재집 시집 제17권 [시(詩)] 인일 조강을 마친 뒤에 중사가 선사주를 승정원에 전해 주다[人日朝講後中使傳宣賜酒於承政院],
정조 15년 신해(1791,건륭 56) 11월7일 (무인), 고종 3년 병인(1866, 동치5) 3월 10일(기사) 맑음 영돈녕부사 김좌근에게 궤장을 하사하고 내린 교지, 우계연보보유 제3권 문묘에 종향할 때에 내린 교서(敎書) [제학(提學) 이민서(李敏敍)]
필자주석: 조선의 학문적인 특징으로 사학(四學) 또는 오학(五學)이 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의하면 천자는 사학(四學)을 설치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은 사학(四學) 또는 오학(五學)이 존재한 국가 였다. 여기서
오학(五學) 편제는 주대(周代)에 성립된 제도로서 중학(中學)은 벽옹(璧=辟雍), 남학(南學)은 성균(成均), 북학(北學)은 상상(上庠), 동학(東學)은 동서(東序), 서학(西學)은 고종(瞽宗)을 말 합니다. 여기서
예기(禮記) 왕제(王制)편에 의하면 벽옹(璧=辟雍)은 천자(天子)의 학교라 한다. 점필재집,고종실록의 기록에서,벽부(璧府)는 벽옹(璧=辟雍)을 의미하는 기록으로 즉 천자(天子)의 학교, 중학(中學)을 의미하는 기록 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바에 따르면 대한제국이 처음으로 황제국이 된 시기가 1897년인데 고종실록을 보면,그 시기 이전에 조선은 천자의 학교 벽옹(璧=辟雍)이
있었다. 또한 점필재집의 저자는 김종직으로 조선 중기 때의 사람 이다. 이 당대에도 조선은 천자의 학교 벽옹(璧=辟雍)이 있었다.
즉 조선이 천자국=황제국 이었다는 증거의 기록인 것이다. 고종실록의 주석에서 천자의 학교 벽옹(璧=辟雍)을 성균관이라 주석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벽옹(璧=辟雍)은 중학(中學)이며 성균은 남학(南學) 이다. 또 위의 기록에서 정조실록에서 상상(上庠)의 유생은 북학(北學)의 유생을 말하는 것이며 고종실록에서 말한 동서(東序)는
동학(東學)을 말하는 것이며 우계집에서 말한 고종(瞽宗)은 서학(西學)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두다 조선의 학교를 말하는 것이며 이 학교는 조선의 동,서,남,북,중의 그 방위별 학교를 둔 것은
동,서,남,북의 번후를 둔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조선의 수도를 중심으로 사방(四方)의 번후와 그 방위별 학교를 두었고 그 학교는 각 번후 지역 학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것이 조선의 붕당정치의 근간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거치면서 전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동,서,남,북인 이라는 사색당파라는 아주 배타적인 정치 행태로 변하게 되었다고 본다.
16. 조선의 임금은 여일인(予一人),여소자(予小子) 라는 천자(天子)의 호칭을 사용했다.
근거문헌: 계곡선생집 제9권 제문(祭文) 42수(首), 순조 9년 기사(1809,가경 14) 11월26일 (임오), 태조 7년 무인(1398,홍무 31) 9월12일 (갑신), 태종 4년 갑신(1404,영락 2) 11월16일 (갑인), 단종 2년 갑술(1454,경태 5) 2월13일 (갑오),
예종 1년 기축(1469,성화 5) 5월20일 (계묘), 성종 2년 신묘(1471,성화 7) 3월27일 (경자), 연산군 1년 을묘(1495,홍치 8) 6월2일 (계축), 중종 11년 병자(1516,정덕 11) 12월22일 (무진), 선조 1년 무진(1568,융경 2) 2월25일 (을사),
효종 10년 기해(1659,순치 16) 윤 3월10일 (경오), 현종개수실록 1년 경자(1660,순치 17) 1월3일 (기미), 숙종 7년 신유(1681,강희 20) 10월27일 (병오), 경종 2년 임인(1722,강희 61) 9월21일 (계묘),
영조 15년 기미(1739,건륭 4) 5월6일 (신해) , 정조 2년 무술(1778,건륭 43) 1월12일 (계유), 순조 1년 신유(1801,가경 6) 7월4일 (무인), 헌종 4년 무술(1838,도광 18) 2월13일 (을묘), 철종 1년 경술(1850,도광 30) 2월1일 (갑자)
필자주석: 백호전서 제39권 잡저(雜著) 독서기(讀書記) 효경외전 하(孝經外傳下) 명기편(名器篇)
천하에 임금이 된 이를 천자(天子)라고 하니, 제후(諸侯)로부터 조회를 받고 직책을 나누어 주며, 정사를 주고 일을 맡기며, ‘한 사람[予一人]’이라고 한다. - 이는 다 빈자(擯者)가 하는 말이다. 천하란 밖으로 사해(四海)까지 미치는 지역 모두를 말한다. 한(漢)에서는 만이(蠻夷)에 대하여는 천자라고 칭하고, 왕후(王侯)에 대하여는 황제(皇帝)라고 칭하며, 근례(覲禮)에는, “백부(伯父)는 이리 오시오. 나 일인이 가상히 여기노라.” 하였다. 여(予)는 여(余)의 고자(古字)이다..............
천자가 상을 벗기 전에는 ‘나 소자(小子)’라고 하고 살아서도 이름, 죽어서도 이름을 부른다. - 살아서 이름을 부르면서는 소자왕(小子王)이라고 하고, 죽어서도 소자왕이라고 한다. 진(晉)에 소자후(小子侯)가 있는 것은 천자 호칭을 참람하게 칭한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일인(予一人)과 여소자(予小子)가 원래 무엇인지 언급하고 있는 기록은 예기(禮記) 곡례하편(曲禮下篇)의 기록 이다. 문종실록의 기록에서는 여소자(予小子)! 이 3자(字)가 바로 군상(君上)의 칭호라 했다.
즉 여소자(予小子)의 의미는 백호전서의 기록처럼 천자(天子)를 의미 이다. 이는 예기(禮記) 곡례하편(曲禮下篇)의 기록이기도 하다. 또 백호전서의 기록에서 여일인(予一人)은 천자가 제후(諸侯)로부터 조회를 받고 직책을 나누어 주며, 정사를 주고 일을 맡기며
자기 스스로를 자칭하기를 여일인(予一人)이라 했다. 이 역시 예기(禮記) 곡례하편(曲禮下篇)의 기록 이다. 이처럼 조선의 임금은 당대의 천자(天子) 였던 것이다.
17. 조선의; 임금은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하사하는 동궁(彤弓)을 하사했다.
근거문헌: 세조 4년 무인(1458,천순 2) 2월12일 (신축), 세조 6년 경진(1460,천순 4) 11월11일 (계미), 성종 8년 정유(1477,성화 13) 11월2일 (을축), 태종 5년 을유(1405,영락 3) 6월27일 (신묘)
필자주석: 네이버 백과: ≪시경(詩經)≫ 소아(小雅) 동궁편(彤弓篇)의 주석(註釋)에 따르면, 적궁(赤弓)•주궁(朱弓)이라 하였는데, 색깔을 붉게 칠하여 장식한 활임. 소(疏)에 따르면, 옛날 중국에서는 천자(天子)가 정벌(征伐)의 공(功)이 있거나, 여타의 유공(有功)이 있는 제후(諸侯)에게 하사하였으며[天子賜有功諸侯 諸侯有征伐之功 王以弓矢賜之也], 천자나 제후만이 사용한 활이었다고 하는데, 전쟁에 나갈 때에만 지니고 나갔다고 함. 네이버 백과를 보면 시경(詩經)의 글을 인용 설명하고 있는데 천자(天子)가 정벌의 공 또는 여타의 공이 있는 제후에게 하사하는 활을 일컬어 "동궁(彤弓)"이라 한다고 한다. 또 정조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동궁지십편에서 (동궁의 의미가) “천자가 공이 있는 제후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활과 화살을 하사한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조실록 4년의 기록에서 윤자운(尹子雲)의 시에서 (자신이) "동궁(彤弓)"을 하사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세조실록 6년의 기록에서 신숙주가 "동궁(彤弓)"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성종실록의 기록에서 허종이 "동궁(彤弓)"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태종실록에서는 조준이 조선 태조에게 "동궁(彤弓)"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이 "동궁(彤弓)"의 의미를 모르는 나라가 아니다. "동궁(彤弓)"은 천자와 제후의 전유물이었으며 제후에게 있어 "동궁(彤弓)"은 천자에게 받은 공훈에 따른 포상인 것이다.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에서도 "동궁(彤弓)"의 의미는 천자가 공있는 제후에게 주는 것이다. 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조선의 임금들은 신하에게 "동궁(彤弓)"을 하사했다. 일개의 제후가 천자를 흉내내어 천자의 행위를 한다는 것은 소중화가 아닌 유교적인 질서를 문란케한 반역 행위 이다. "동궁(彤弓)"의 의미로 알수 있는 사실은 조선의 임금들은 천자(天子)라는 것이다.
18. 조선왕조실록에서 황제국(皇帝國) 고려(高麗)를 말하고 있다.
근거문헌: 세종 23년 신유(1441,정통 6) 윤 11월9일 (임신)
필자주석: 세종실록의 기록에서 "(고려가)만승천자(萬乘天子)로서 지존(至尊)의 자리를 스스로 가볍게 하여..........."라고 기록하고 있다. 원문에서는 ,"萬乘自輕至尊" 만승(萬乘)만이 기록하고 있는데 만승은 "만대의 병거(兵車)"라는 뜻으로 천자(天子)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해서 만승천자(萬乘天子)라고도 말한다. 또한 천자의 신하인 제후는 천승(千乘)이라 한다. 고려가 다른 나라에 조공을 바치다 세월을 보내는 나라 였다면 고려에 대해 천승(千乘)이라 기록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려를 만승(萬乘)의 나라 즉 만승천자(萬乘天子)의 나라로 기록하고 있다. 즉 고려는 황제국 이다.
19. 중원 대륙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였다.
근거문헌: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3
필자주석: 홍재전서는 정조 임금의 저작 이다. 홍재전서의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을 열거 하고 있다. 즉 정조 임금 그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한(漢),오(吳),남송(南宋),북제(北齊)원위(元魏),수(隨) 대의 서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씨들을 열거해야 한다. 그래야 이치적으로 타당 하다.
20. 명조(明朝) 황실의 계보는 조선이 관리 하였다.
근거문헌: 세종 10년 무신(1428,선덕 3) 10월24일 (임인)
필자주석: 세종실록의 기록에서 옛날 진(秦),한(漢)의 종정(宗正),종백(宗伯)이란 관직의 직책은 황족의 명적과 황족에 대한 규찰에 대한 일을 한 직책 이었다. 고 한다.
지금까지 배워왔던 역사에서 조선은 제후국 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조선의 종부시(宗簿寺)라는 직책은 곧 옛날의 (황제국에 있었던) 종정 벼슬과 같다고 한다. 그것도 송나라의 종정시와 수옥첩관·대종정사를 합하여 하나로 만든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조선은 일개의 제후국인데 천자국에서 만이 하는 일들을 조선이 하고 있다. 세종실록의 기록에서 소종백(小宗伯)=종백(宗伯)=종정(宗正)=종정시(宗正寺)가 하는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이 하는 역할은 황제국=천자국에 관한 역할 이다. 제후의 나라에서 관심을 둘 영역은 아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소종백(小宗伯)=종백(宗伯)=종정(宗正)=종정시(宗正寺)가 하는 역할을 설명하면서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이러한 설명과 더불어 "【황제의 옥첩은 10년에 한 번씩 바치고, 종친선원적경도(宗親仙源積慶圖)와 종번경서록(宗藩慶緖錄)은 매년 써서 용도(龍圖)·천장(天章)·보문각(寶文閣)으로 보냈다.】"라는 부연 설명을 달고 있다.
조선과 명은 별개의 나라이고 명은 황제국인데 어찌하여 명나라 황제의 옥첩(황실의 계보)을 조선이 바친단 말인가? 명나라 황제의 옥첩(황실의 계보)을 만드는 일은 명나라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위의 기록처럼 황제의 옥첩을 관리하는 사람은 소종백(小宗伯)=종백(宗伯)=종정(宗正)=종정시(宗正寺) 이다. 이들은 위의 설명처럼
황제와 친족관계에 있는 황족들 입니다. 명나라 황제의 친족관계인 소종백(小宗伯)=종백(宗伯)=종정(宗正)=종정시(宗正寺)의 일을 조선이 하고 있다. 즉 조선과 명은 별개의 나라가 아니라는 증거 이다.
21. 조선의 제주도는 현재의 제주도가 아니다.
근거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8권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미수기언 제48권 속집 사방(四方) 2 탐라지(耽羅誌)
필자주석: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제주도에서 영릉향(零陵香)이 산출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하면 영릉향(零陵香)이 바질(basil)이라고 한다.
네이버 백과를 보면 바질의 원산지는 열대 아시아 이다. 또 위의 미수기언의 기록에서 제주도에서 산출되는 과실중에 등자(橙子)와 감자(柑子)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등자(橙子)란 오렌지(orange)를 의미 한다.
네이버 백과를 보면 오렌지의 원산지가 인도라고 되어 있고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을 보면, 원산지 아시아 열대지역에서 인도,아프리카,지중해 연안 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또 위의 기록에서 감자(柑子)는 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포테이토 가 아니다.
감자(柑子)는 귤종류와 유사한 과일 이다. 감자(柑子)를 중공측의 인터넷을 통해서 보니 감자(柑子)는 만다린 오렌지를 의미한다고 한다. 감자(柑子)를 네이버 백과를 통해서 보면, 한국산 만다린은 1911년 일본에서 미온장주 15그루를 들여오면서 시작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미수기언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1911년보다 훨씬 이전인 1600년대 약 300년 전에 제주도에 이미 만다린 오렌지가 있었다. 즉 현재의 제주도는 역사에서 말하는 제주도가 아니라는 증거 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된 등자(橙子)=오렌지(orange)와 영릉향(零陵香)=바질(basil)은 현재의 제주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산물 이다. 이뿐 이겠는가? 위의 기록에서 제주도에서 두충(杜冲)이 산출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경희 한의대 교수 안덕균씨는 "두충(杜沖)이라는 것은 원산지가 중국이고 우리나라에 심기 시작한 것은 100년정도 되고 본격적으로 재배된것은 한 삼십년 정도 된다."라고 말 합니다. (주)계림조경자재 라는 사이트에서 조경관련 뉴스에서 "환경조경신문"의 기사를 싣고 있는데
이 기사에서 국내에 식재된 모든 두충(杜沖)나무의 모수 2본이 1920년대 중국에서 도입된 이래로 홍릉수목원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현재 한국의 두충(杜冲)의 재배 역사를 살펴보면 역시 현재의 제주도는 역사에서 말하는 제주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지역 임을 알수 있다.
또한 이뿐 이겠는가? 탐라지역의 산물 중에 지네와 향서(香鼠)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지네는 산출 된다. 그러나 향서(香鼠) 즉 사향뒤쥐는 산출 되지 않는다. 위의 기록에서 지네에 관한 기록은 황당한 기록 이다. 물론 사향뒤쥐에 관한 기록 또한 황당한 기록 이다.
위의 기록에서 지네가 1자 넘는 것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땅지네류(땅지네목[Geophilida/Geophilomorpha])는 땅을 파고들어가 살며, 몸을 지렁이와 같은 방식으로 늘이고 줄이곤 한다. 열대지방의 왕지네목(Scolopendrida/Scolopendromorpha)은 가장 큰 순각류를 포함하는데, 동인도제도의 대왕지네(Scolopendra gigantea)는 길이가 280㎜에 달한다. 왕지네류는 심하게 물 수가 있고, 땅지네류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느린 파동운동을 한다. 작은 돌지네류(돌지네목[Lithobiida/Lithobiomorpha])는 몸이 짧은데, 집그리마류와 함께 가장 빨리 움직이는 순각류이며 몸을 곧게 유지하면서 달린다.한국에는 왕지네목·땅지네목·돌지네목·그리마목에 속하는 9과(科) 40여 종(種)의 순각류가 알려져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주목해야 할 지식은 동인도 제도의 대왕지네 이다. 열대지방의 대왕지네가 지네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특히 동인도 제도의 대왕지네의 길이가 280㎜에 달한다고 한다. 약 30cm에 육박하는 길이 이다.
그런데 위의 미수기언에서는 제주 즉 탐라 지역의 지네가 1자(약 30cm) 넘는것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탐라의 지네는 열대지방의 지네류와 거의 같은 지네류 였던 것이다.
송대(宋代) 주거비(周去非)의 저작인 "영외대답"은 대륙의 광서지역과 더불어 안남,점성,삼불제,조와국,파사,여인국등에 관한 역사,지리,풍속,물산,인문에 관한 기록 이다. 이 기록의 권9 금수문(禽獸門)에 향서(香鼠) 즉 사향뒤쥐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사향 뒤쥐는 넓게 보면 광서지역과 더불어 안남,점성,삼불제,조와국,파사,여인국등에 서식하고 있는 금수임을 알수 있다. 또 파란 백과 사전을 보면,
"식충목 뒤쥐과의 작은 포유동물. 몸길이 11∼15㎝, 꼬리길이 6.5∼8㎝, 몸무게 약 80g. 몸의 형태는 땃쥐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크고 실팍하게 생겼다. 몸의 색깔은 연한 갈색이다. 주둥이는 뾰족하며, 귀는 크고 거의 털이 나지 않는다. 꼬리에는 긴 털이 드문드문 나 있다. 야생형과 인가나 그 주변에 사는 가주형(家住型)이 있다. 한국에 사는 것은 중국·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배에 실려 들어온 귀화동물이며, 가주형이다. 바퀴를 비롯한 곤충, 지렁이 등의 무척추동물을 주로 먹지만, 잡식성의 경향이 있어 밥찌꺼기와 가축의 먹이를 먹기도 하고, 병아리를 습격하여 잡아먹기도 한다. 수컷의 옆구리에는 측선(側毛)이 있어 사향과 비슷한 강한 냄새를 풍기는데, 아마도 암컷을 유인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야행성이며 낮에는 돌담이나 덤불 속에 숨어서 지낸다. 임신기간은 30일이고, 한배에 2∼8마리의 새끼를 1년에 여러 번 낳는다. 어미와 새끼가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는 차례로 꼬리의 밑동을 물고, 일렬로 줄지어 걷는 특이한 습성이 있다. 실험동물로 이용되며, 사육할 때의 수명은 1.5∼2.5년이다. 중국·인도·동남아시아 등에 분포한다."
또 다른 백과사전등을 보면 대체적으로 사향뒤쥐의 원산지는 인도라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 탐라의 1척이나 되는 거대 지네와 사향뒤쥐를 참조해 보면 적어도 탐라의 위치는 동남아시아나 인도 지역 이다.
22. 조선의 북쪽에 달단(韃靼)이 있었으며 동유럽의 경계에 있었다.
23. 조선의 역사에 나오는 옥저는 동유럽 경계에 있었다.
근거문헌: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6권 물산지(物産志) 1 초류(草類), 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여국(女國), 해국도지(海國圖志) 券 31, 연경제전집 외집 58 필기류 난실담총 차한일기
태조 1권 총서 69번째기사, 세조 26권, 7년(1461 신사 / 명 천순(天順) 5년) 11월 9일(을사), 성종 12년 신축(1481, 성화 17) 10월 17일(무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61권 본조(本朝)의 비어고(備禦考) 1 왜적(倭賊)을 막은 데 대한 시말(始末) 1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五‧東夷列傳第七十五
필자주석: 달단이란? 어떤 종족을 말하는 것일까? 현재의 역사에서 "달단은 북원국(北元國)을 세워 달단(韃靼)이라 불린 데에서 나온 말인데, 후에 몽고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으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달단(韃靼)이란 종족명은 북원국(北元國) 성립 이전에 사용된 용어 였다. 고려의 학자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전집 제34권의 기록을 보면 그 당대에 이미 달단(韃靼)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달단(韃靼)은 몽고이며 북원국 이었던 것이다.
이 달단(韃靼)이란 민족은 과연 어디에서 살았던 종족일까? 성호사설에서 직방외기(職方外紀)를 인용하면서 역사에서 말하는 여인국을 설명하는데 이 여인국은 달단의 서쪽으로서 아세아(亞細亞)와 구라파(歐羅巴) 중앙에 끼여 있을 것 이라 했다.
또 해국도지의 기록을 보면 중국의 서북쪽이 동유럽과 달단에 접해 있다고 했다. 또 연경제전집의 기록을 보면, 흑룡강의 북쪽이 서쪽으로 유럽지역에 접해 있다고 했다.
즉 달단은 동유럽 경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 달단이 몽고이며 북원국 이었다. 또 후한서에서 여인국 관련 기록이 있는데 이 여인국 인근에 옥저(沃沮)가 있었다고 했다.
역사의 기록에서 달단의 인근 지역에 여인국이 있다고 했다. 달단이나 여인국이나 동유럽 경계에 있었다. 그러므로 여인국과 관련된 옥저(沃沮) 역시 동유럽 경계에 있었던 것이다.
고대 희랍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흑해 근처에 궁시(弓矢)와 기마(騎馬)에 뛰어난 용맹무쌍의 여인군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성호사설에서는 여국이 구라파와 아세아의 경계 지역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고,
헤로도토스는 흑해 근처에 여국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여인국이 흑해 인근에 있었고, 당연히 옥저(沃沮) 역시 이 인근에 있었을 것이다.
참고적으로 현재 동유럽 우크라이나 근처에 있는 나라로서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나라중에 그루지아(Georgia)라는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플로스치케" 라는 바위 동굴도시가 있다. 그 동굴도시의 역사는 기원전 1세기라 한다.
최대 5만명이 거주할수 있는 동굴도시라 한다. 이 나라도 흑해 인근에 있는 국가 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루지아(Georgia)라는 나라의 국가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위키백과를 보면,
유럽어 명칭 '조지아'는 페르시아어-아랍어로 조지아인(gurğ, ğurğ)을 이르는 말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말이 서유럽 십자군과 성지 순례자들에게 전해져서 '조지아'(또는 Jorgania, Giorginia)가 되었으며, 이름의 기원이 조지아인들이 숭상하는 성 게오르기오스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게 된다. 자크 드 비트리와 프란츠 페르디난트 폰 트로일로 같은 이들도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3] 장 카르댕같은 사람들이 퍼뜨린 다른 설명으로 '조지아'를 의미상 그리스어나 라틴어 낱말인 '게오르고스'(γεωργός, '농부'), '게오르기쿠스'(Georgicus, '농업의')와 연결짓는 설도 있다. 이 설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 플리니우스나 폼포니우스 멜라와 같은 고대 저자들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들 저자들은 '게오르기'(Georgi)를 언급하는데(플리니우스 - IV.26, VI.14; 멜라 - De Sita Orb. i.2, &50; ii.1, & 44, 102.) 이는 그저 농경 부족을 일컫는 말로, 이들이 정착하지 않은 판티카페아 강 건너편(타우리카)의 전원적인 이웃 부족과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었다.[4]
19세기에 학자들은 이러한 유럽어 기원설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마리-펠리시테 브로세는 조지아란 이름이 Kuros-Cyrus-Kura-Djurzan를 통해 므트크바리 강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5] 사실 '조지아'는 신페르시아어 gurğ/gurğān에서 비롯된 시리아어 gurz-ān/gurz-iyān과 아랍어 ĵurĵan/ĵurzan을 11세기나 12세기에 차용한 말로 보이며, 신페르시아어 낱말 자체는 고대 이란어와 중세 페르시아어로 기원을 알 수 없는 vrkān/waručān에서 나온 듯 한데 이 말은 동부 트란스카스피의 지명 고르간(Gorgan, 중세 페르시아어로 '늑대들의 땅'을 뜻하는 varkâna에서 나온 말)과 비슷하다. 이 말은 옛 아르메니아어 Virk' (Վիրք)와 어원이 같은 듯 하며, 그리스-로마식 표기인 이베리(Ἴβηρες, 이베리아 반도의 이베리아인을 이르는 말로 이미 알려진 이름이다)의 기원일 수도 있다.[6][7]
러시아어 타칭 지명인 '그루지야'(Грузия)도 페르시아어-아랍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1389년 이그나티 스몰냐닌의 여행 기록에서는 구르지(гурзи)로, 1466~1472년의 아파나시 니키틴의 기록에서는 '구르진스카야 젬랴'(Гурзыньская земля, '구르진 땅')이라고 나온다.[8]
이 러시아어 표기는 현대 히브리어 '그루지아'(גרוזיה)로 전해졌다. 이 낱말은 '게오르기아'(גאורגיה)와 '구르지아'(גורג'יה)와 같이 쓰였으나, 1970년대에 '그루지아'가 대세가 되는데, 아마도 당시 2개 언어를 구사하는 조지아-러시아 유대인들이 대량 이주한 것 때문인듯 하다. 2005년 8월에 주이스라엘 조지아 대사 라샤 즈바니아는 히브리어 구사자들에게 '구르지야' 대신 '게오르기아'로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9] 또 2009년 12월, 조지아 정부는 리투아니아에 '그루지야'(Gruzija) 대신 '게오르기야'((lang|lt|Georgija}})로 불러줄 것을 공식 요청하였고, 이 요청은 리투아니아어 위원회에 전달되었다.[10]
위의 위키백과에서 말하는 그루지아(Georgia)라는 나라의 국호(國號)의 기원설이 아주 복잡함을 알수 있다. 본인 역시 이와 관련된 하나의 가설을 생각해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인데 남옥저와의 거리가 팔백여 리나 된다. 그들의 풍속은 모두 남쪽 지방과 같다.
국경은 남쪽으로 읍루와 접해 있다. 읍루 사람은 배 타고 도둑질하기를 좋아하니 북옥저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바위 틈에 숨어 있다가 겨울이 되어 배가 통하지 않게 되어서야 비로소 부락으로 나온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의 옥저인들은 읍루인들의 노략질을 피해 여름에 바위에 집을 짓고 있다가 겨울이면 나온다고 했다. 또한 이 옥저를 일컬어 "치구루"라 했다.
자치통감의 기록에서 "溝婁者高麗城名也"(구루라는것은 고구려의 성곽을 말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관련 현재 그루지아(Georgia)라는 나라에 "우플로스치케" 라는 바위 동굴도시가 있다.
고대에 그루지아(Georgia)인들이 살던 유적지 이다. 현재 그루지아(Georgia)라는 나라에 "우플로스치케" 라는 바위 동굴도시 역시 외세침략에 대한 그루지아인들의 피난처,대피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달단이나 여인국이나 동유럽 경계에 있었고,흑해 인근의 여인국과 관련된 옥저(沃沮) 역시 동유럽 경계에 있었으므로 구루(溝婁)라는 별칭의 옥저(沃沮)가 그루지아(Georgia) 나라의 국가명의 기원으로 본다.
또한 구루(溝婁)가 자치통감에서 고구려의 성곽을 말한다고 했다. 본인은 이 구루(溝婁)가 오늘날 한국어의 "동굴"에서의 "굴"에서 온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구루(溝婁)는 동굴로 이루어진 성곽 혹은 동굴로 이루어진 도시로
생각이 되며 이것이 오늘날 그루지아(Georgia) 나라의 국가명의 기원의 어원이자 기원으로 판단된다.
24. 흑룡강은 감숙성에 있었으며 흑룡강의 발원지는 백두산 이다.
25. 감숙성에 있는 흑룡강은 백야현상이 일어나는 지역이다.
26. 흑룡강 인근에 황하의 발원지가 있다.
근거문헌: 심전고(心田稿)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거등만록(車燈漫錄)》, 만기요람 군정편 5(軍政編五) 백두산 정계(白頭山定界) 홍세태 백두산기(洪世泰白頭山記),
해봉집(海峯集) 권지(券之)2 칠언사운(七言四韻) 안변가학루운(安邊駕鶴樓韻),사가시집 제21권 시류(詩類) 또 길성 김 태수의 시에 답하다 2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외집권58 필기류,난실담총(筆記類,蘭室譚叢),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권지56 초사담헌삼(草榭談獻三),임하필기(林下筆記) 제39권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아라사국(俄羅斯國), 계산기정 제5권 부록(附錄) 호번(胡藩), 심전고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제국(諸國),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 권지12 잡저(雜著) 자집고이의(子集考異議), 다산시문집 제11권 논(論) 온성론(穩城論),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16권 경사강의(經史講義) 53 ○ 강목(綱目) 7 [당 태종(唐太宗)],
청장관전서 제58권 앙엽기 5(盎葉記五) 황하(黃河)의 진원(眞源), 흑룡강여도설(黑龍江輿圖說), 연경제전집 외집 58 필기류 난실담총 차한일기, 네르친스크 조약 尼布楚條約 (漢文界碑)
필자주석: 역사에서 말하는 흑수(黑水)는 흑룡강(黑龍江)을 말한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기록에 의하면 흑룡강(黑龍江)의 옛이름은
흑수(黑水)라 기록하고 있으며,청(淸)나라의 학자인 효람(曉嵐) 기윤(紀昀)은 흑수(黑水=흑룡강(黑龍江)가 감숙성 지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네이버 백과에 의하면 현재의 역사에서 흑룡강은 "최상류부의 오논강은 몽골고원 북부에서
발원하여 야블로노이 산맥에서 발원하는 실카강과 합류하며 이어서 우안에서 아르군강을 합쳐 블라고베셴스크 부근에서 좌완으로 부터 재야강이 합류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역사에서의 흑룡강은 감숙성 지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역사에서 감숙성에는 흑룡강이 없다. 또한 현재의 역사에서 흑룡강이 있는 지역은 감숙성 지역이 아닌 전혀 엉뚱한 지역인 극동지역에 있다.
만기요람의 기록을 보면 흑룡강의 수원지가 백두산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만기요람의 기록에서 백두산은 조선의 북쪽 국경에서 불과 300여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계절이 여름인데도 "얼음과 눈이 쌓여서 바라보면 아득한 하나의 은바다를 이루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과연 현재의 백두산이 이러한지 묻고 싶다. 또한 흑룡강의 수원지가 백두산이므로 조선의 강역이
감숙성에 접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이는 위의 사가시집의 기록과 위의 해봉집(海峯集)의 기록으로 증명할수 있다. 조선의 철령이 감숙성 지역의 흑룡강에 접해 있었으며 또한 그 지역에 감숙성에 있었던 옥문관이 있었으며,
총령 지역에 있었던 천산(天山)은 조선의 철령과 이웃해 있으며,조선의 강역이 서역의 서융과 접해 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조선의 서북방계는 감숙성 지역임을 알수 있으며 이는 오늘날의 감숙성이 아니라 지금의 코카사스=카프카스
산맥일대가 진정한 감숙성 지역이자 조선의 서북경계였음을 알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일어났던 라선정벌은 오늘날의 흑룡강이 아닌 코카사스 산맥과 관련된 흑룡강 일대에서 벌어진
사건들 이었던 것이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은 조선의 학자인 성해응의 저작 이며,위의 임하필기는 조선의 학자인 이유원의 저작 이다. 위의 연경제전집,임하필기,계산기정,심전고의 기록을 보면 감숙성 흑룡강의 북쪽에 한(漢)나라 때의 견곤(堅昆) 부족과 정령(丁令) 부족이었고, 당(唐)나라 때의 힐알사(黠戛斯) 부족 또는 골리간(骨利幹) 부족이었으며, 원(元)나라 때의 아라사(阿羅思) 및 길리길사(吉利吉斯) 등의 부족이었던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연경제전집에서는 구체적으로 러시아민족이 북극지역에 살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북극지역이 흑룡강의 아극살 지역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차한 또는 라선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계산기정에서도 악라사 즉 러시아 라는 나라는 흑룡강 북쪽에 위치해 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심전고에서도 러시아=악라사가 흑룡강의 북쪽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고,
황당하게도 중국에서 2만여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황당한 기록일까? 위의 기록을 현재의 상황에 대입하여 보면,현재의 역사판도에서 청나라의 수도 였다는 현재의 북경에서 감숙성까지의 거리가 2만여리가 된다는 기록인데,
이는 말도 안되는 기록 입니다. 현재의 북경에서 감숙성까지의 거리는 1만리도 되지도 않는 수천리의 거리에 불과 하다. 위의 기록들을 보면 분명히 흑룡강=흑수는 감숙성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감숙성 흑룡강의 북쪽에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러시아 민족이 사는 지역은 북극지역으로서 흑룡강 북쪽 아극살성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러시아 민족의 터전은 위의 기록처럼 북극지역 이다. 또한 현재의 러시아 민족의 터전을 기준으로
보면 흑룡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곤륜산과 총령이 현재의 코카사스=카프카스 산맥일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위의 기록들 처럼 러시아 민족은
감숙성 흑룡강 일대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역사상의 기록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살던 지역에 특이한 자연적인 환경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숙종때의 학자인 이형상의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사는 곳은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其地晝長夜短。夜不甚暗)"의 기록처럼 "백야(白夜)"현상이 나타나는 곳이다.
백야현상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문헌은 "신당서(新唐書)" 이다.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처럼 당나라때 당 태종이 골리간 지역에 이르러 견곤도독부를 설치했다고 했다. 고문헌에서 이 지역의 백야현상에 대해 비유하여
시문(詩文)등에서 주로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것을 표현하는 기록이 참으로 많다. 위의 기록을 보면 "해가 넘어가서 양고기를 삶기 시작하여 다 익을 때쯤이면 해가 다시 뜬다."는 기록을 생각해 보면, 고기를 삶아 익힐때 까지 불과
몇 시간 정도에 불과 한데 벌써 해가 뜬다는 기록으로 그 만큼 밤이 짧다는 기록 이다. 그리고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처럼 골리간 지역은 그 밤도 어둡지 않다고 한다. 또한 다산시문집의 기록에서도 골리간 지역에서 해가
제일 긴 시기가 되면 순전히 낮만 계속되는 시기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다산시문집의 기록에서는 북쪽의 골리간(骨利幹)지역이 완연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대왕의 저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도 백야현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홍재전서에서도 백야현상 관련 기록인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일부 인용했고,당나라에 온 골리간(骨利幹)의 사신이 "당 나라에는 밤이 40각(刻)이라는 말을 듣고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하며 비웃었으니,"라는 기록은 골리간 지역에 백야현상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비웃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문헌적으로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통해 흑룡강 골리간(骨利幹)지역의 백야현상을 알게 되었겠지만, 구체적으로 알수 있었던 계기는 조선과 청(淸)에 의한 "라선정벌" 이다. "성호사설"에서 나선정벌에 대한 기록인 "차한일기"를 기록했는데,그 기록의 일부를 보면,"효종(孝宗) 9년에 중국(中國 청(淸) 나라)이 우리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을 도와 차한(車漢)을 치라 하였으니, 차한은 나선(羅禪)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혜산첨사(惠山僉使) 신류(申瀏)를 북우후(北虞候)에 이배(移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터로 가게 하였다.그리고 조선 군대의 이동경로를
보면, "무술년 봄 3월 1일에는 두만강(豆滿江)을.......19일에 영고탑(靈古塔)에 당도하였다......... 6월 5일에 배를 출발하여 10일에 흑룡강에 도착하였다.........12월 15일에 두만강에 도착하였다." 이 기록의 달과 날짜를 기점으로 러시아에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6∼7월 이므로 고문헌의 기록들이 음력에 의한 기록일지라도 12월 15일에 두만강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그 지역의 백야현상을 생생히 목격했고,"신당서(新唐書)"라는 고문헌등과 목격한 기록등을
통해서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등에서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라는 백야현상에 관련된 기록들을 남긴 것이다. 역사상의 기록에서는 감숙성 흑룡강 지역은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곳 이다. 네이버 지식을 보면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스웨덴 지역등등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에서는 러시아 민족은 감숙성 흑룡강 일대에 살았고 그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에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보면 현재의 감숙성 지역은 백야현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역 이다. 즉 백야현상이 그것도 "다산시문집"의 기록처럼 완연히 나타나는 지역이 진실의 총령과 곤륜산이 관련된 감숙성 흑룡강 일대이므로 가장 부합한 지역은 오늘날의 러시아와 가까운 코카사스 산맥 밖에 없다. 역사상의 진정한 총령은 코카사스 산맥이었던 것이다.
위의 연경제전집의 기록을 보면 네르친스크 조약의 결과 대흥안산=흥안령이 청조와 러시아의 경계가 되었으며 이 일대에 흐르는 강은 격이필제하(格爾必齊河)이며 이 지역은 흑룡강의 북쪽 경계로 서쪽으로 서양(西洋)에 접해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청조(淸朝)의 학자 도기(屠寄)의 기록인 흑룡강여도설의 기록을 보면,흑룡강의 그 주변에 흥안령(興安嶺)이 있으며 그 흥안령의 한 산맥이 아륵탄산(阿勒坦山)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아륵탄은 몽고어로 금(金)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위의 청장관전서에서도 아륵탄은 몽고어로 금(金)이라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역사에서 황하의 그 근원지는 대륙의 청해성(靑海省)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흑룡강의 그 인근지역에 황하의 발원지가 있으며 또 흑룡강은 지역적으로 서양(西洋)에 접한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대륙 청해성 지대가 서양에 접한 지역이며 그 인근에 흑룡강이 있는가? 현재의 흑룡강은 극동에 있어
황하와 흑룡강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흑룡강 그 인근 산맥에 황하의 두개의 발원지 중 하나인 아륵탄산(阿勒坦山)이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위의 흑룡강여도설의 기록에 나오는 아고차극성(雅庫次克省)이 현재의 역사에서 아고차극성(雅庫次克省)을 현재의
야쿠트 공화국이라 한다. 현재의 흑룡강을 극동으로 옮겨 놓았으니 당연히 아고차극성(雅庫次克省) 또한 극동으로 옮겨졌을 뿐 입니다. 현재의 학설이 사실이라면 야쿠트 공화국에 아륵탄산이 있으며 곧 아륵탄산은 황하의 발원지 이므로 야쿠트 공화국에 황하의 발원지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야쿠트 공화국에 황하의 발원지가 있는가? 또 흑룡강이 서양에 접해 있다고 하자 어느 혹자는 러시아가 서구의 세력이므로 러시아에 접해 있으므로 서양에 접해 있다고 기록한 것이라 한다. 과연 그런가?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영환지략(瀛寰志略) /亞細亞
"........北距北冰海,東距大洋海(即東海),南距印度海(即南海及小西洋海),西距紅海、地中海、黑海,是為亞細亞之全土。"
(아시아의) 북쪽은 북빙해에 이르며 동쪽으로 대양해 즉 동해에 이르며 남쪽으로 인도해 즉 남해 및 소서양해에 이르며 서쪽으로 홍해,지중해,흑해에 이르며 이는 아시아의 전토가 된다.)
위의 연경제전집의 기록을 보면 흑룡강의 그 북쪽이 서쪽으로 서양에 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위의 영환지략의 기록을 보면,아시아의 서쪽 경계는 홍해,지중해,흑해 이다. 즉 홍해,지중해,흑해의 서쪽이 서양=구라파=대서양=유럽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즉 흑룡강의 발원지는 서양=구라파=대서양=유럽과 가장 인접한 가장 큰 산맥인 코카사스 산맥인 것이며 그 흑룡강 인근의 산맥에 당연히 황하의 발원지 아륵탄산(阿勒坦山)이 있었던 것이며 성호사설의 기록에서 여국(女國)은 " 북호(北胡)의 서쪽으로서 아세아(亞細亞)와 구라파(歐羅巴) 중앙에 끼여 있다......"고 했으므로 역사상의 여국은 옥저와 관련된 역사 이므로 옥저와 관련된 고구려 일대가 코카사스 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역사 였던 것이다. 위의 심전고의 기록에서 효람 기윤의 기록을 보면, 감숙성에 흑수=흑룡강이 있다고 했다.
즉 감숙성 자체가 서양에 접해있었다는 것이다. 영환지략의 기록처럼 감숙성 인근 지역에 흑해 또는 지중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가설이지만,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원류가 되는 산은 아라라트산 이라 한다.
기독교 성경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곳인 코카사스 산맥의 아라랏트산(山)! 현재 대륙에서 쓰여지는 아라랏트 산의 한자명은 아륵산(阿勒山) 이다. 즉 아라랏트의 한자표기가 아륵(阿勒)이라 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유프라테스 강은 지형학상 3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① 유프라테스 강 상류:북쪽 지류인 카라('혼탁하다') 강과 동쪽 지류인 무라트('맑다') 강으로 시작한다. 두 지류는 아르메니아 고원의 좁고 깊은 협곡들이 이어진 다소 넓은 계곡을 흐르다가 엘라 남서쪽 50km 지점에서 합류한다. 이곳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이 되어 터키 남부의 타우루스 산맥의 주요지맥 사이로 험준한 굴곡부를 계속 흘러 터키의 시리아 고원에 있는 삼사트 마을에 다다르면 그 낙차가 300m에 이른다.
이와 관련하여 청장관전서의 기록을 보면 황하의 발원지가 2군데 인데 하나는 성숙해라는 맑은 물줄기이고 또 하나는 아륵탄산(阿勒坦山)에서 발원하는 혼탁한 물줄기 라 한다. 더 많은 고증을 해야 겠지만 잠정적으로 유프라테스강이 황하로 생각 된다.
27. 조선시대 일본은 현재의 일본이 아니다.
근거문헌: 일동기유(日東記游) 제 3권 정법(政法) 22칙, 속동문선 제6권 오언배율(五言排律) 증 일본국승 봉 교제(贈日本國僧奉敎製),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 7월 큼 27일(무오),
간양록 적중 봉소(賊中封疏) 록(錄) 적중 문견록(賊中聞見錄),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 곤(坤) 문견총록(聞見總錄) 총론(總論), 청장관전서 제65권 청령국지 2(蜻蛉國志二) 물산 物産
필자주석: 일동기유(日東記游)란 문헌을 "네이버 백과"를 통해서 보면, 1876년(고종 13)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金綺秀:1832∼?)의 견문기록으로 수필로 된 원본 4권으로 되어있으며,규장각 도서이며,
끝에 후서(後敍)가 붙어있는데,후서에 의하면 김기수가 일본에 갔다온 다음해인 1877년에 황해도 곡산군수로 있을때 정리한 것이라 한다.
제1권에는 일본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수록했고,2,3권에서는 일본의 여러 인물들과의 교유하고 문물을 견문한 내용,4권은 귀국하여 별단을 올리기 까지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저자는 어느 혹자의 말을 빌어서 “일본은 주(周) 나라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의 후손[後裔]이다.” 또한 글의 말미에 있는 글처럼 "옛말에도 화인(和人 일본인)을 태백ㆍ중옹의 후손이라 한 것이 있다."
라는 글의 논거로서 문헌적으로 사기(史記)의 기록을 말했으며 ,강절지방은 오나라,월나라의 옛땅이고 그리고 일본땅은 대륙의 강절지방(강소성,절강성)과 홍수(泓水) 사이에 있으므로 일본인은 태백과 중옹의 자손이 맞다는 기록 이다.
저자가 만약 지금의 일본 열도에 갔다면 이런 글을 남길 이유가 없다고 본다. 역대의 어느 문헌을 보아도 막연하게 일본은 어느 나라 남쪽,동쪽에 있다.라는 기록만이 존재하였지, 이처럼 구체적으로 일본이 어디에 있었다고,
지명을 언급한 문헌은 없었다. 대륙에 일본이 있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문헌은 "일동기유"가 최초로 본다. 일동기유의 저자 또한 그 당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문신이었다. 사실에 대한 무지에 의한 결과로 쓰여진게 아니라 그 당대의 상황에 대해
있는 그대로 기술했던 것이다. "일동기유"에서는 일본이 대륙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속동문선의 기록에서 "오랑캐 재물은 민절(중국 동남 해안 지방)에 통하고 / 蠻貨通閩浙"라고 기록하고 있고 일동기유의 기록에서 일본의 강역은 강절(江浙) 일대라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들은 각기 다른 기록인데도 지역 편제상 절강지역이라는 일치점이 드러나는 기록 이다.
즉 위의 기록들로 알수 있는 사실은 일본은 대륙에 있었으며 그 일본이 있었던 지역은 아열대 혹은 열대 지역으로 코뿔소와 코끼리가 많이 나는 지역이고 또 그 지역은 역사적으로 월(越)의 할거지 이므로
월(越)의 그 실체는 왜(倭) 였던 것으로 본다. 현재의 일본 열도 일본은 허구상의 조작된 것이며 앞으로 일본을 찾는 키워드는 "아열대 혹은 열대 지역으로 코뿔소와 코끼리가 많이 나는 지역"일 것이다. 관련하여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을 보면,후한(後漢) 때 선비(鮮卑)의 단석괴(檀石槐)가 오후(烏侯)의 진수(秦水)에서 물고기가 있는 것을 보고 잡지 못했는데 왜인(倭人)들이 그물로 잘 잡는다는 말을 듣고 왜국을 공격하여 천여 세대를 진수 옆으로 옮겨서 고기를 잡아서 군량에
보충하였다. 여기서 선비의 단석괴는 두산백과에 따르면 오늘날의 카스피해,아랄해를 할거지로 하는 철륵민족을
몰아냈다. 그러므로 선비의 단석괴의 활동 강역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임을 알수 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서는 선비의
단석괴가 "왜인(倭人)들이 그물로 잘 잡는다는 말을 듣고 왜국을 공격하여 천여 세대를 진수 옆으로 옮겨서 고기를 잡아서 군량에 보충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면,여기서 단석괴가 일본 열도에 와서 왜인들을 잡아 갔다면 이는 역사가 아닌 환타지
소설이 되고 만다. 즉 일본 열도는 허구이다.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의 기록을 보면,현재의 일본 열도는 지진 다발지역인데 기록에서의 왜장들의 집은 그 무거운 구리를 주조하여 기와를 만든다고 한다. 현재의 일본 열도 가옥들과 극명한 차이를 이룬다.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서는 일본의 월후주(越後州)에는 "못 하나가 있어 기름이 항시 물 위에 뜨는데, 움켜 오면 등불로 사용하기에 좋으나, 나쁜 냄새가 나므로 취수유(臭水油)라 이름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또한 청장관전서 제65권에서는 석유(石油)가 월후주(越後州)에서 나며 등유(燈油)로 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다 같은 지역 에서의 석유(石油)에 관한 기록 이다. 또한 축전주(筑前州)에는 화정(火井)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또한 유정(油井),석유(石油)관한 기록 이다. 또 일본의 담로주가 어디인지 잘 모르지만 열도 일본의 그 어디를 기점으로 해서도 그 남쪽에 남만국(南蠻國)은 없다. 그런데 담로주(淡路州) 남쪽에 남만국(南蠻國)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온천등에 관한 기록을 미루어 열도 일본으로 착각할수도 있으나 기록을 세밀히 고찰해 보면 현재의 일본열도와 기름이 솟아나는 연못의 유전과 화정(火井)과 남만국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기록 하나만으로 보아도
열도 일본론은 허구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어떤 혹자는 "일본 열도에서 석유가 나온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화정은 천연가스가 나오는 곳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하여 일본 열도론의
허구를 주장하면 않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근런데 중요한 것은 일본의 유전관련 개발은 근대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며 이것은 자연적 발생이 아닌 인위적이란 것이다. 그 근대 이전에 자연적으로 연못에서 나오는 석유는 일본 열도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처럼 조선시대 일본은 현재의 일본이 아니었다.
28. 진단국(震旦國)은 중국(中國)을 이르는 말이자 고려(高麗)를 이르는 말이다.
근거문헌: 동문선 제110권 소(疏) 정지상(鄭知常), 동문선 제27권 제고(制誥) 관고(官誥) 최응청(崔應淸), 동문선 제112권 소(疏) 법수재 소(法壽齋疏) 석복암(釋宓菴),
필자주석: 동문선에서 고려의 정지상의 글은 고려에서 행한 불교 법회에 관한 글인데, 불교의 가르침이 온 진단에 향응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에서 행한 불교관련 법회에 진단 즉 중국(中國)을 언급한다는 것은 고려가 중국임을 알수 있다.
또 위의 동문선에서 고려의 최응청의 글을 보면,"신령스런 법사가 진단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신령스런 법사를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삼았다고 한다. 이 선각국사는 역사에서 말하는 아주 유명한 분으로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으로 널리 알려진 신라말의 승려 도선(道詵) 이다. 이 도선대사가 진단에서 나왔다고 나왔다고 한다. 이를 통해 알수 있는 사실은 역사의 중심으로 중국이라는 그 중심을 가진 나라가 신라,고려임을 알수
있다. 또 위의 동문선에서 고려의 석복암의 글을 보면 조계종의 노스님인 고려의 원오국사는 진단의 큰 사문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동문선의 기록을 통해서 월인석보에서 말하는 중국을 생각해 보면 중국은
신라의 고려의 더 나아가 조선의 중국을 말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29. 고려에서 석유가 산출되었다.
근거문헌: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6권 물산지(物産志)1, 오주연문장전산고
필자주석: 해동역사의 기록을 보면 석유의 특징들을 아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해동역사가 인용한 이시진의 본초강목에서는 석암으로 부터 즉 땅의 지표로부터 나온다고
말했고, 이것은 고려에서 산출되며 원유상태의 석유특징인 검은색을 띤다고 말했고 불이 붙는다며 석유 고유의 특징을 아주 사실적으로 말하고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가 인용한 작몽록의 다른 기록을 보면,
"서북 방성고(防城庫)에 못[池]을 파서 맹화유를 저축했는데 한 달이 되지 못해서 그 못의 흙이 모두 적황색(赤黃色)으로 변하였으므로 또다시 못을 파서 옮겼다." 하였다.
이는 자연상태로 지표에 분출되어있는 원유의 특징을 아주 시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려는 석유가 산출되는 국가라는 기록으로 볼적에 한반도 고려론은 허구이다.
오늘날 대륙에서 근대로 부터 지금까지 개발된 유전을 제외하면 자연분출적으로 석유가 산출되는 지역으로 볼적에 고려는 분명히 대륙에 존재한 국가였다.
30. 조선에 자연 발생적인 염정(鹽井)이 있다.
근거문헌: 경세유표 제11권 지관 수제(地官修制) 부공제(賦貢制) 5
필자주석: 한반도에 자연발생적인 염정(鹽井)이 있기나 한가? 조선후기의 대학자인 정약용 선생의 경세유표 제11권의 기록을 보면 경세유표에서 말하는 염정(鹽井)은 염전(鹽田)을 하기위해 인위적으로 바닷물을 끌어다가 못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황해도 지방에 땅이 갑자기 꺼져서 못이 된곳이 있다. 그 깊이는 측량할수 없다. 그맛은 쓰고 고약하다. 이것은 모두 염정(鹽井) 지역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기록을 상세히 보면 자연적으로 형성된 염택(鹽澤),염정(鹽井)임을 알수
있다. 경세유표에 황해도 지역에 있는 염정(鹽井) 지역과 관련하여 서책을 인용하여 다른 지역의 소금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그 부연설명을 읽어보면 "북방은 전적으로 해지(解池)에서 생산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해지(解池)는 염정(鹽井),염택(鹽澤)임을 알수 있다. 그리고 이 북방소금과 관련된 나라는 거란(契丹)과 서하(西夏)임을 알수 있다. 이것으로 황해도가 어디에 존재하였는지 어느 정도 알수 있는 자료가 되는 기록이라 생각 된다.
31. 조선에는 한반도에서 산출되지 않는 광물자원이 있다.
근거문헌: 만기요람(萬機要覽)의 군정편 4의 해방(海防) 공충도(公忠道),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황해도 서흥도호부(瑞興都護府),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해주목
필자주석: "천연염색연구원"의 ,광물성 염료편을 보면,"우리나라에서는 백토,흑토,적토,황토,자토만이 산출되며 공작석,청금석,남동광,노란색의 석웅황,붉은 색의 주사는 중국,페르시아,
인도,티베트에서만 생산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 할것은 노란색의 석웅황(石雄黃) 이다. 이 석웅황에 대해 "사이버 한의학 체험관"의 글을 보면,
산출지로는 "중국의 호남의 영릉,감숙의 무도산곡,돈황산과 광서, 운남, 사천 등의 지방에서 산출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만기요람(萬機要覽)의 군정편 4의 해방(海防) 공충도(公忠道)편을 보면,
"해미(海美), 서산(瑞山)의 평신진(平薪鎭)ㆍ안민곶(安眠串) 작은 봉우리가 둘러섰고 계곡이 매우 많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엔 경치[境]가 매우 아름답고 금모래가 있으며, 석웅황(石雄黃)ㆍ청등(靑藤)이 생산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석웅황은 천연염색연구원에서도 사이버 한의학 체험관에서도 한반도에서 산출되지 않는 자원이라고 하는데 만기요람에서 충청도의 다른 이명인 공청도편에서 석웅황이 충청도에서 산출된다는
기록으로도 조선은 한반도와 관련이 없다. 이뿐 만이 아니다. "사이버 한의학 체험관"에서 "노감석(爐甘石)"의 산출지로는 "중국의 호남, 광서, 운남, 사천 등의 지방에서 산출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황해도 서흥도호부(瑞興都護府)편을 보면 그곳의 토산으로 "노감석(爐甘石)ㆍ연철(鉛鐵)ㆍ철 모두 식점(食岾)에서 생산된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봉산군(鳳山郡)편을 보면, 그곳의 토산으로 "사(絲)ㆍ삼[麻]ㆍ노감석(爐甘石), 황옥(黃玉) 일흥창(逸興倉)에서 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이버 한의학 체험관에서는 각 광물의 산출지에 대해 한국에서 산출되는 광물이 있을 경우는 한국도 산출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중국에서만 산출된다고 하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염료로 쓰이는 재료인 하엽록(荷葉綠)이라는 색채 염료가 있는데,여기에 관련 아주 아주 모호한 기록이 있다.
문종실록 문종 1년 신의 기록을 보면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숭지(李崇之)가 계문하기를,“황금(黃金)과 하엽록(荷葉綠)은 불상을 그리고 진관사(津寬寺)를 단청하는 데에 모두 소비하고 남은 것이 얼마 없습니다. 이 물건들은 본국에서 나는 것
이 아니니, 만약 쓸 곳이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하엽록에 대해 다른 기록인, 세종실록 지리지 황해도 해주목을 보면," 하엽록(荷葉綠)이 주의 동쪽 20리 청태암(靑苔巖)에서 난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해주목을 보면,"하엽록(荷葉綠) 청태암(靑苔巖)에서 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문종실록에서 하엽록 관련 한국고전 번역원의 주석글을 보니 아주 가관 이다.
"단청(丹靑)의 원료인 오채(五采)의 하나. 녹색의 염료로서 연 잎에서 채취하였음."라고 주석하였다. 주석한 사람이 연잎빛의 색깔인 하엽록 그 자체를 연잎에서 채취하였다고 단정하고 있는데,상식적으로 한반도에서
연꽃이 자라지 못하는 환경이 아니다. 시장에 가도 연근이 넘쳐 난다. 고건축분야의 단청관련의 글을 보면 단청에 쓰이는 푸른빛 계열의 염료는 거의다가 광물질 즉 돌가루 염료라고 한다.
아무튼 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서로 상반된 기록인데, 어느 기록이 올바른 기록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즉 조선왕조실록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혼재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고대 벽화관련 논문중에서 염료에 관한 글이 있었는데,하엽록은 지나대륙에서 수입해서 사용된 염료라는 글을 보았다.
그러나 조선에서 산출된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뭔가?하는 생각이 든다.
32. 조선의 전주(全州)의 옛 지명(地名)이 계림(桂林) 이었다.
33. 조선의 강릉(江陵)의 옛 지명(地名)이 형남(荊南) 이었다.
근거문헌: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5권 벽려신지(薜荔新志)
필자주석: 임하필기에서 기록한 전라도 지역의 계림부(桂林府)는 확증적으로 조선이 대륙에 있었음을
밝히는 기록 이다. 물론 임하필기의 전라도 계림부(桂林府) 그 외의 기록도 훌륭한 기록 이지만,현재의 지나 대륙의 계림부(桂林府) 관련 자료를 보면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한반도에 있는 금산사 라는 사찰이 지나 대륙에도 있는데
현재 지나 대륙의 금산사는 계림시(桂林市) 전주현(全州縣)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유원의 "임하필기"의 기록에서는 전라도 지역의 계림부(桂林府)는 전주(全州)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인 기록이 아닐수 없다.
형남부(荊南府)는 강릉(江陵)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고증하여 보면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 난다. "원사(元史) 지리지"를 보면,"唐荊州,復為江陵府。宋為荊南府(당나라의 형주가 다시 강릉부가 되었다. 송나라때 형남부가 되었다.) "
임하필기에서는 형남부(荊南府)는 강릉(江陵)이라 기록되어 있다. 조선 역대의 어느 기록을 보더라도 조선의 강릉(江陵)이 형남부(荊南府)였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 그런데 임하필기에서는 강릉(江陵)의 옛날 명칭이 형남부(荊南府)였다
고 밝히고 있다. 임하필기와 원사 지리지를 통해서 알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당(唐)의 존재가 신라(新羅)였으며,송(宋)의 존재가 고려(高麗) 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34. 조선의 금릉(金陵)은 양자강(揚子江)에 연해 있었다.
근거문헌: 홍재전서 제7권 시(詩) 3 금릉관(金陵館)에 제하다, 고종 16년 기묘(1879, 광서5) 8월 10일(신해) 맑음, 고종 34년 정유(1897, 광무1) 9월 8일(갑오, 양력 10월 3일) 맑음
필자주석: 고종 16년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서남쪽이 강한(江漢)지역과 가깝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강(江)은 양자강을 말하며 한(漢)은 한수(漢水)를 말하는 것이다. 고문헌을 보면 양자강과 한수는 거의 함께 등장 한다.
지역적으로 양자강과 한수가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이며 이러한 지역적 특색이 조선의 서남쪽에 있다는것 이다. 즉 조선이 대륙에 있지 않고는 있을수 없는 기록 이다.
홍재전서의 저자인 정조임금이 금릉 지역의 금릉관에 와서 시(詩)를 읆었는데 이 시에서 나타난 정경을 보면, 조선의 금릉지역이 양자강과 연한 지역 이라 기록하고 있다. 다산시문집 경세유표 제3권의 기록을 보면,
대륙의 금릉(金陵)이 양자강(揚子江)에 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고종 16년의 기록과 같은 의미의 기록인 것이다. 고종 임금때만 해도 대륙의 주인은 소위 청(淸)이 아니라 조선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종실록에서 북쪽으로는 야인(野人)과 여진(女眞) 등의 지역까지 모두 통일 국가가 되어 온전한 형국이라 말한것이며 이러한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청조(淸朝)의 그 실체는 제후였다는 것이며
대륙의 실제적인 황제국은 조선이었던 것이다.
35. 조선 후기 북인(北人)의 정체는 청나라 였으며 이들은 조선의 제후국 이다.
근거문헌: 숙종 1년 을묘(1675,강희 14) 3월18일 (병자) , 숙종 24년 무인(1698,강희 37) 5월5일 (무인)
필자주석: 숙종실록에서 "북인(北人)이 화포(火砲)를 요구하는 데에 대하여, 신은 두어 자루도 많다고 생각하는데, 주는 것이 장차 50자루나 될 것이라 들었습니다. 나라의 이기(利器)를 쉽사리 남에게 주어 중국에 해독을 끼치고
천하에 죄를 얻는 것이 어찌 매우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고전 번역원의 주석에서는 이 북인(北人)이 청나라 사람 이라고 한다.
이 당대 현재의 지식으로 보면 조선은 청조(淸朝)에 사대를 하는 나라이며 청조(淸朝)가 중국(中國) 입니다. 그런데 청조=북인에게 화포를 주는것이 중국(원문:중화(中華))에 해독을 끼친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니 북인이 청나라이며 중국인데 화포를 주는게 중국에 해를 끼친다니? 참으로 이해 불가 이다. 즉 여기서 이 북인(北人)의 실체는 중국이 아니다. 여기서 북인은 조선의 북번(北藩)이라 판단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퇴위 당하고 광해군을 따르던 북인(北人)들은 실각하게 된다. 권력을 잃은 북인들의 상당수가 만주족과 결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된다.
정묘호란,병자호란은 엄격히 말해서 호인(胡人)들의 반란 이다. 만주족에게 북인들이 결탁하면서 만주족은 무력을 제공하고 북인들은 조선의 세련된 행정적인 시스템을 제공하여 만주족이 조선의 신흥 북인 세력이자,
북번(北藩)이자 북후(北侯)가 되었다고 판단 된다. 그래서 북인에게 화포를 주는것이 중국(중화(中華=조선))에게 해독이 된다고 하였다고 판단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조선의 수치라고 말하는 병자호란의 삼전도 굴욕은 조선의 임금이 당한 수치가 아니라 판단 된다. 본인이 볼때 병자호란의 수치는 신흥 북인 세력으로 성장한 만주족이 조선의 제후로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전쟁으로 북인세력 외 동,서,남번중의 한 세력과의 전쟁이며 그 한 세력의 제후왕에게 항복을 받아낸 전쟁으로 판단 된다.
이러한 가정은 전혀 황당한 가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은 삼전도 굴욕의 병자호란 이후에도 여전히 황제국 시스템이 존재한 나라 였기 때문 입니다.(윗글 11~16번까지의 글 참조)
또한 위의 숙종실록1년의 기록으로도 조선이 중국이라는 증거의 기록임을 알수 있기 때문 이다. 위의 숙종 24년의 기록은 아주 황당하면서 중요한 기록 이다.
위의 숙종 24년의 기록을 보면,"아! 북미(北米)의 일이 있고부터 국가가 저들에게 곤욕을 당한 것이 많습니다. 진실로 조정에 군주를 높이고 백성을 감싸는 방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오늘날 북미의 일이 우리 나라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북인(北人)을 위한 것입니까? 만약 ‘우리 나라 사람을 구제하려고 쌀 실은 배를 발송했다.’면 서로 호시(互市)하는 동안 오직 우리 나라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요..........."
이 기록을 번역자는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위의 기록은 호시(互市) 즉 국가와 국가 간의 상인 거래에 관한 기록인데 상인간의 거래를 서로 형평성 있게 해 달라는 기록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 북미의 일이 우리 나라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북인(北人)을 위한 것입니까? "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을 보고 다시 해석하면," 오늘날 북미의 일이 동인(東人)을 위한 것입니까? 북인(北人)을 위한 것입니까? " 가 되는데,
여기서 호시(互市)란? 국가와 국가 간의 상인 거래 교역을 말 한다. 여기서 북인과 동인과의 교역을 국가와 국가 간의 교역을 말하는 호시(互市)라고 했다. 이 거래가 형평에 맞지 않다고 조선의 신하가 숙종임금에게 간언 하고있다.
그럼 동인과 북인은 국가 대 국가인 것이다.즉 이들은 조선의 제후국이라는 것이다. 이 국가간의 질서를 보고 받는 숙종임금은 누구란 말 인가?
즉 숙종임금이 이 당대의 천자라는 것이다. 즉 조선의 동,서,남,북번의 그 실체는 하나의 제후 번국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는 기록 이다.
이러한 사실로 추론할수 있는 사실은 역사에서 조선의 수치라고 말하는 병자호란의 삼전도 굴욕은 조선의 임금=천자가 당한 수치가 아니라 북인세력 외 동,서,남번중의 한 세력과의 전쟁이며 그 한 세력의 제후왕에게 항복을 받아낸 전쟁이라는
판단이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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