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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많은 7번국도
속초의 해수피아에서 발이 묶였다.
밤내 내린 비가 아침에도 그쳐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요일 아침의 찜질방은 늘 늦잠꾸러기들의 낙원이다.
2013년 5월 19일 해수피아도 그랬다.
비의 부추김으로 찜질방이 더욱 어수선한데도 떠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 갇혀 있는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작년 서남동길 때, 통일전망대~거진은 반일 거리에 불과했으므로 만만디 해도 되건만.
10시가 넘은 시각에 빗속으로 뛰어들어 얼마쯤 걷다가 거진방향 버스에 올랐다.
합축교 지근에서 하차해 '대한민국근대문화유산' 합축교를 다시 걸어 넘음으로서 남은
마지막 휴전선길이 시작되었다.
묵직한 짐이 어깨를 눌러줌으로 어제와 달리 몸에 균형이 잡혀서 걸음이 제대로 되었다.
어깨와 허리를 위해서는 짐을 벗어야 하고 걸음을 위해서는 어깨를 혹사해야 하고.
오, 불쌍한 어깨여!
정오쯤 거진읍의 전통시장 대로변 식당에서 첫 식사를 한 후 서남동길의 해안로와 달리
휴전선에서 조금이라도 가까운 내륙길을 택했다.
화천 평화의 댐 이후의 민통선에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7번국도를 따라 멀리 돌아가려 했으나 많은 공사구간 도로가 비에 젖어 몹시 불편하기
때문에 화진포 까지는 중간 길(화진포길)을 택했다.
그러나 빗속을 걷는 해변의 길손에게는 센티멘털(sentimental)한 분위기라도 있겠지만
공사로 인해 질퍽한 빗길을 걷는 후줄근한 나그네의 모습은 청승맞거나 처량하다 할까.
내가 바로 후자였을 것이다.
게다가 비오는 우중충한 날씨 탓인지 말썽 많은 다리가 또 사보타주(sabotage)를 하려
하여 주저앉을 데도 없는 길에서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식사 타임을 조금만 미뤘더라면 이름난 메밀막국수를 먹으며 달랠 수도 있었겠는데.
비오는 날에도 성업중인 '화진포메밀막국수'집의 대기의자에 앉아(예의에 벗어나지만)
다리를 다독거리면서 아쉬움도 달랬다.
막 피어나는 빨간 해당화가 예쁜 것 외에는 작년 10월 7일과 다른 것 또는 다른 느낌이
없는 화진포 호반.(김일성, 이기붕, 이승만 등의 별장과 주변 이야기는 머지않아 이어질
서남동 길에 맡기기로 한다)
비가 그쳐 걸을만 했으므로 호반에서 7번국도를 타기 위해 이승만 별장 앞으로 갔다.
별장 숲길을 벗어나면 바로 비포장인데다 경고판이 겁주는 군사지역이다.
멀리 우회하는 차로와 지름길 농로 중 후자를 택했다.
비에 젖은 비닐하우스농로와 파헤친 도로는 미끄럽고 수렁처럼 빠져들어 돌아가느니만
못하다고 후회하며 7번국도에 올라섰을 때는 신발과 바지가 엉망이 되었다.
여기도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으면 못산다는 지역인가.
부산과 함경북도 온성(穩城)을 잇는 동해안 7번국도는 우여곡절이 많은 도로다.
구간을 나누어서 '동해대로'와 '금강산로'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도로의 일부 구간은
AH6(아시아고속도로6호선)에 들어 있다.
자동차전용도로가 되어 자전거도 사람도 얼씬 못하게 하는 구간도 있다.
여기는 반짝 햇볕이 드는 듯 했다가 방치상태인 금강산로 구간이다.
거진과 현내의 남쪽 마지막 구간은 금강산관광 바람을 타고 일약 스타덤(stardom)에
오르는 듯 했으나 남북관계의 악화로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길지 않은 구간인데도 도로의 확포장공사가 10년을 끌고 있으며 아직도 기약이 없단다.
'금강산자연사박물관'도, 금강산관광객으로 매일 수천명씩 북적댔다던 거대한 '화진포
아산휴게소'도 적막강산이다.
철 지난 해수욕장 보다 더 을씨년스럽다.
넓게 차지한 '삼대전통막국수전문점'도 '박포수팬션'도 사람 구경하기 어렵고 왕래하는
차가 없으니 주유소가 문을 닫고 도로 주변의 개발도 첫 삽질과 동시에 작파한 격이다.
중단된 공사현장만 곳곳에 흉물스럽게 널려 있고 애드벌룬은 뜨기도 전에 바람이 빠져
버렸는가 아예 터지고 말았는가.
대안도 기약도 없는 중단, 출구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늙은 나그네의 걸음도 맥이 빠졌다.
공든 탑도 무너지게 하는 잡인의 시대
아산휴게소 지근인 화진포만남의 광장의 운동장처럼 너른 주차장에 냉동차 1대뿐이다.
한 때는 주차공간이 부족해서 도로로 밀려났다건만 도로도 주차장도 주유소도 모두 다
차량의 매연에 굶주려 아사지경이다.
화진포 호수를 굽어보고 있는 좋은 위치의 초도리(縣內面 草島) '콘도식 민박 수지인'도
무척 궁한지 월세 광고판을 걸었다.
잃어버렸다는 10년동안에 어렵사리 조성한 일들을 일조에 뒤죽박죽 만들어버린 잡인들.
자기네의 추잡한 사련(邪戀)은 로맨스라고 우겨대고 남의 로맨스를 시기해 파투(破鬪)
놓으려고 호시탐탐 노리다가 어이없는 사고 한 번에 얼시구나 쾌재를 부른 자들.
아무짝에도 쓰일 데가 없는, 타다 만 동강만도 못한 자들이 하는 짓거리에 온 나라가 또
다시 피로 물들어야 하는가.
모골이 송연해지려 한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옛말이다.
옛날 정도(正道)의 시대에는 그랬으나 잡인의 시대에는 아니다.
공든 탑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진다.
공든 탑도 여지 없이 무너지게 하는 잡인들의 시대.
허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마음이 서글퍼지기 때문인가 몸도 한기가 드는 듯 해서 만남의 광장 옆 수지인민박집을
점찍고 대진리(大津) 현내면사무소 앞까지 걷기를 계속했다.
규모가 제법 큰 마트들이 있고 콘도형 민박집이 수두룩하다.
면소재지라 하나 작은 어촌인데 한철에 불과한 피서객(해수욕)과 강태공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이렇게 크게 벌여놓았을까.
"금강산육로관광의 출발지이면서 남북교류타운이 건설되는 평화지대"
"남북화해협력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물류기지 조성, 호텔 신축, 관광레저시설 확충 등
최상의 투자지대" 등의 표현 속에 그들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충격과 좌절감이 하도 커서 자포자기 했는가.
철도 아니고 일요일 석양인데 민박집마다 만원이라는 이유로 손님을 거절하니.
한데, 나그네인 내가 왜 허탈하고 무력감에 빠져야 하나?
동정이 지나쳤는가.
걸을 기운도 빠져버린 듯 하여 버스편으로 수지인에 돌아왔다.
맥 빠져 있기는 수지인도 다를 것 없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화진포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2층,
바로 앞이 7번국도지만 왕래 차량이 없으니 산속 절간처럼 교교했다.
잠시였겠지만 한 때는 부르는 게 값이었을 방값.
2만원을 받으면서 장탄식한 초로남은 남쪽 어느 지방산(産)이란다.
공기 좋은 곳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투자했는데 앞길이 막막하단다.
내가 유일한 고객이라니 그럴 수 밖에.
휴전선길에서 최초와 최후의 민박이다.
또한, 내 평생의 산길 들길을 통틀어 오지(五指) 안에 드는 민박이다.
'콘도형'이라는 말대로 주방기구가 구비되어 있다.
휴전선길의 나홀로 식사도, 라면 메뉴도 모두 마지막인데 주인의 김치협찬 덕에 최후의
만찬을 성찬으로 마감했다.
우리의 한은 이들로 인해 더욱 깊어만 간다
그 뿐 아니라 내 휴전선 길도 사실상 끝났다.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 까지 5km 정도 되는 길은 7개월 반쯤 전(작년 10월 6일)에 이미
걸었다.(남하와 북상, 진로가 다를 뿐)
출입신고소에서 통일전망대는 이따금 오른 것이 이미 여러 번이다.
한치라도 더 휴전선에 접근하고, 조금이라도 더 남방한계선 가까이, 민통선에 밀착하여
걸으며 분단의 한을 달래고 통일의 당위를 온 뼈에 각인하려고 걸었다.
내가 걸어온 11박 12일 동안의 이 길은 계절 따라 다른 느낌을 주는 관광 코스가 아니고
통한의 휴전선 길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산과 길, 지구를 돌고 돌았을 거리를 걸어왔지만 이번처럼 많이 생각하고 많이
가슴아파하고 많이 기도하며 걸은 적이 있었던가.
장광(長廣)의 비무장지대가 옥토와 친환경 공단지로 바뀌고 현대식 군막사들이 농장과
공장으로 사용되는 날이 오면,
수십만의 건장한 청년이 군복을 벗고 각자 원하는 일터에서 맘껏 능력을 발휘하며 뜻을
펴게 되고(부족한 노동력의 문제까지 절로 해결될 것이고)
그러면, 일부라도 탱크가 트랙터로 변하고, 대포와 총칼로 농기구를 만들며, 항공기가
공중 살수와 방역에 투입되는 날의 도래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동족끼리 죽기살기로 겨루지 않고 합심하여 국경을 지키게 될 테니까.
이런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열망하며 걸었고 꿈꾸며 잠들었고 자나깨나 빌었다.
이 나라의 진정한 백성이라면 아무도 원하지 않으며 저주할 뿐인 한(恨) 많은 휴전선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휴전선,
이 악귀를 누가 만들었는가.
미국은 제멋대로 삼팔선을 그었고, 제멋대로 6. 25민족동란을 불러들였고(빌미를 제공),
제멋대로 휴전선을 만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 나라를 위한 정치놀음에 이용하고 또 이용했을 뿐이다.
소련과 함께 동구권은 사라졌어도, 그래서 EU의 깃발이 펄럭거려도 극동에서 행세하기
위해 남반도를 여전히 좌지우지할 뿐 아니라 북반도도 실컷 활용하고 있다.
만일 미국이 중국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어찌 될까.
일본이 미국의 극동지주가 되고 우리는 다시 일본에 종속될 것이다.
끔찍한 일이지만 우물 안의 권력에만 탐닉된 골빈 잡인들의 안중에는 보일 리가 없다.
30여년 전으로의 회귀에 박차를 가하며 쾌재를 부르는 무리처럼 친일 잔재나 후예들은
국운이야 어찌 되든 발호의 채비를 하겠지.
옛날에도 그랬다.
광활한 대륙을 평정하려는 고구려의 기상을 신라는 외세(당나라)를 빌어 꺾었다.
점촌(경북)에는 당교사적비(唐橋史蹟碑)가 있다.
<민족통일의 성업은 국조(國祖)단군의 개국이래 우리민족의 최대 염원이었으니 이러한
숙원을 풀어준 나라가 신라>로 시작한다.
외세를 빌어 동족을 치고도 이렇게 말한다.
<막강한 고구려와 날쌘 백제를 아우르기 위하여 일시 당의 세력을 빌렸다>고
막강한 고구려였다고 하나 수(隋), 당(唐)과의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던 고구려였다.
이 때 백제와 합심해서 고구려를 도와 당을 굴복시켰다면?
그런 후에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면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저 광대한 대륙을 지배하는
하늘을 찌를 듯한 우리나라의 위세에 일본 따위가 감히 침략의 엄두나 냈을까.
그랬으면, 동북아의 지정학적 판도가 전혀 달라졌을 것이며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東北
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시비도 당연히 없을 것이고.
단군의 한자손이라면서도 반목국이라는 이유로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서 외세와 결탁
하지 않았더라면...
<통일을 이룩하고는......당군의 말발굽을 우리 땅에서 말끔히 지워 버렸다>며 자랑하고
있으나 당의 행패가 오죽했으며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국력은 얼마나 낭비했는가.
신라계(系) 한민족은 대개 강골이지만 독선적이다.
그래서 이조 당쟁의 중심에도 그들이 있었고 남북 분단도 비통한 일인데 동서갈등까지
조장했으며 유별나게 권력욕이 강하다.
5. 16쿠데타도, 유신도, 5. 17쿠데타도 그들에게서 나왔으며 지금 다시 그때로의 회귀에
시동이 걸려있다.
우리의 한은 이들로 인해 더욱 깊어만 간다.
마지막 날의 마지막 스케치
마지막 날을 앞둔 마지막 밤, 아무리 털어버리려 해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어나서 배낭 정리를 다시 했다.
휴전선 길에서는 풀어 헤칠 일이 없기 때문에 다루기 편하게 꾸린 것.
오후 1시쯤 도착 예정이라는 풍기팀과 원만하게 도킹(docking)하려면 11시에 나서도
되건만 9시까지 방안에 있는 것도 지겹게 느껴진 것은 나그네의 버릇 탓일 것이다.
수지인(민박집)을 나선 시각은 아침 9시 20분.
나그네에게는 실컷 보고 느끼며 걷는 것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 행복이다.
이미 걸었던 길이라 해도.
작년에 지나치며 특이하다고 느껴졌던 영산불교(靈山) 현지사(顯智寺)를 다시 보았다.
2000년에 춘천(강원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신흥불교(?)의 고성분원이다.
분원(또는 포교원)들이 전통적 사찰의 이미지와 다른 빌딩이다.
특히 고성분원(2012년개원)은 "약사유리광여래부처를 점안하여 봉안한 치유의 도량",
"사바세계의 지중한 병자들에게 희망을 내려주는 성지"란다.
전통불교와 다른 이미지를 건물로 풍겨주나 싶었는데 고리타분하지 않은가.
현내면은 물론 고성의 병의원들이 고전하고 장의업 종사자들이 타격을 입게 되겠다.
J국무총리(직전 정부)가 식사하고 간 것을 영광으로 치부하는 허름하나 넉넉한 인심인
부두식당(대진항)도 일꾼들 단골집으로 여전한 듯이 보였다.
내가 즐겨 다니는 식당도 집을 수리하면서 O시장이 남긴 흔적만은 없애지 않는다.
승부는 음식맛과 인심으로 하면서도 특정인의 방문이 식당의 위상을 높인다고 믿는지.
많이 남은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서는 해변의 소요逍遙)가 불가피했다.
초도해안로를 역으로 걸어 초도삼거리에서 7번국도로 옮겨 타고 북상을 시작했다.
대진시외버스터미널, 미수복고성군민 망배단 앞, 마차진해수욕장을 지나서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에는 정오에 도착했기 때문에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1시간여.
이 늙은이를 위해 원로도 마다 않고 달려오는 분들에게 말할 수 없이 고맙기는 하지만
부담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빚으로 자리하게 될 것은 차치하고 당장에 1시간을 버려야 했으니까.
실은, 어제 마치고 귀가 했을 길이다.
출입신고소 경내에도 일붕 서경보(一鵬徐京保)의 시비(詩碑)가 있다.
저서가 418권이고 박사학위가 62개라고 자랑하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시작해 죽는 날까지 글을 썼다 해도 매년 5권 이상의 책을 써야 가능하다.
박사학위도150개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노터데임 대학교(University of Notre Dame/
미국)의 전 총장 헤스버그(Theodore M. Hesburgh/1917~ )에 비하면 턱없이 적지만
일붕의 처세와 업적으로 보아서는 불가사의한 일임은 틀림 없다.
그보다 헤스버그는 가톨릭교의 신부로, 덕망 높은 교육자(35년간 전설적인 총장)로, 킹
(Martin Luther King) 목사와 함께 세계적 인권운동가로 유명하다.
하지만, 서경보는 한국불교의 최고위 승려로서 중생의 고통을 측은히 여기기는 커녕 두
군사쿠데타정권에 아부하며 영화를 누렸다.
1988년에는 원로의원을 지냈던 조계종을 버리고 일붕선교종을 설립해 종정에 올랐다.
세계불교법왕청을 설립, 초대 법왕이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삶의 질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가 있다.
1993년에 저서 733권, 박사학위 73개, 통일기원비 751개 건립, 선필 50만장이라 했는데
입적 직전 3년동안에 저서가 1천권 이상으로, 박사학위도 120개 넘게 증가했다.
그리고 이 4분야가 기네스북에 올라있다고?
참 어처구니없는 소리다.
하도 자주 접하게 되는 일붕의 통일기원비와 선필에 나는 아주 많이 식상해 있다.
거리의 판에 박은, 전혀 감동 주지 못하는 비를 보거나 한국 책임자로 외국에서 근무한
이들의 집에서 보게 되는 일붕선필의 입수경로를 들을 때마다 역겨웠는데 여기에서 또.
이런 황당한 숫자로는 추앙을 끌어낼 수 없음은 물론 되레 비하(卑下)를 유도할 뿐임을
그의 문도(門徒)들은 깨달아야 하는데.
용대리의 백골병단 전적비에 못지 않은 호림유격전적비 앞에서 다시 숙연해졌다.
무장게릴라들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군번도, 무기다운 무기도 없이 머리카락만을 유물로
남기고 뛰어들어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호림(虎林)용사들을 기리는 비다.
삼남대로 정읍지역에도 임란 때 팔인회맹유적 선돌(八人會盟遺跡)이 있다.
동심서사(同心誓死)로 회맹하고 결의를 다지는 증표로 세운 비문 없는 빗돌이다.
호림용사들의 전적비 옆에 어줍잖게 서있는 일붕의 시비가 역겨울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최악의 통일이라도 최선의 분단보다 낫다'
반갑고 고맙기 그지없는 상정(소백산민들레)님을 비롯한 풍기팀.
1시쯤 도착한 그들의 차로 통일전망대에 올랐다.
1995년 중추, 환갑기념으로 동해안을 자전거 일주한 후 올랐을 때는 적개심을 억제하지
못하겠다는 듯 증오의 대남방송이 요란했다.
남쪽 해설사들도 북에 질세라 내 민족이 아닌 섬멸해야 하는 적으로 성토했다.
2000년대 초에 백두대간 두번째 북상 후에 왔을 때는 대남방송이 사라졌음은 물론 명사
십리 해금강으로 달려가는 날의 도래가 곧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11시 방향으로 아른거리는 1만 2천봉도 머지않아 오르게 되며 생전에 북쪽 백두대간도
완주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정도로 공기가 부드럽고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작년10월과 지금은 확성기를 통한 외침이 없을 뿐 1995년으로 회귀된 느낌이다.
즐비한 통일전망대들에는 통일의 염원 대신 분단 고착의 의지만 있는 것 같다.
신바람 나게 가고 왔을 차들이 끊긴 북쪽의 신설된 긴 다리와 해안로가 쓸쓸할 뿐이다.
2008년 7월 11일, 금강산관광객 박왕자의 피살.
한 여인의 죽음이 어찌 남의 일인가 마는 잘잘못은 차치하고 참으로 애석하고도 화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통한 마음 금할 길 없으나 그녀는 왜 홀로 담 큰 행동을 했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위태롭지만 그런대로 진행되고 있는 일에 재를 뿌린 결과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변해 갔을까.
새롭게 진전되어 가기 보다는 아마도 어떤 구실로 더 악화되었을 지도 모른다.
1년반도 못가서, 2010년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 사건이 그 실증이다.
남과 북의 교류 진전과 통일보다는 고착과 영구적 분단이 기득권층인 자기네에게 유리
하다 판단하고 있기 때문일까.
직전 정부가 그랬고 현 정부도 통일의지는 마지 못해 흉내만 낼 뿐 없어 보인다.
개성공단에서 잘 나타났으니까.
나는 통일지상주의자가 아니며 통일에는 산적한 난제가 따르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풀어가야 할, 우리만이 풀 수 있는, 우리의 이 문제는 늦을 수록 풀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풀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흥망성쇠는 통일 여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수출입국(輸出立國) 운운하며 수출지상주의를 부르짖고 있으나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수출이란 상대적이기 때문이며 한 순간에 알거지가 되고 말 수도 있다.
자원이 풍부한 북과 입지가 바뀌기 전에 통일을 이뤄야 남북이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신라식(新羅式)은 안된다.
대의와 명분을 저버림은 물론 실리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몰지각하고 비열한 반민족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명예롭기는 커녕 민족적 수치의 표본인 당교사적비는 점촌의 하나로도 넘친다.
거두절미,
12박 13일을 마친 후에 밝힌 감상(메뉴'통한의 휴전선 1번글 참조),
<최악의 통일이라도 최선의 분단보다 낫다>가 결론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통일 이상의 선(善)이 없으며, 백보를 양보해서 선이 아니라면 최선의
분단이 최악의 통일보다 더 악이다.
모두 악이라면 최악의 통일이라도 통일만이 우리 민족에게 가장 작은 악이라는 뜻이다.
<통한의 휴전선 끝>
낙수(落穗)
차로만 가고 와야 하는 길.
늘 꼽사리 신세라 둘러보지 못했던 명파해변을 마침내 밟았다.
이 평화로운 해변을 민통선이라는 딱지를 붙여 긴장의 도가니로 만들려 하다니,
고약한 사디스트들(sadist).
북쪽땅 화진포의 성.
성의 주인 김일성도, 6세 꼬마였던 아들 정일도 갔고,
떵도 남쪽이고.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다.
야은 길재(冶隱吉再)도, 노산 이은상(鷺山李殷相)도 맞는 말 했다.
상정님은 이승만 별장에서 7번국도를 타고 남하하다가 금강산 건봉사 길로 틀었다.
전전일에 고심하다가 아쉽게 포기한 우리나라 4대사찰 중 하나에 기어코 가게 되다니.
한국 불교에서 통도사(佛寶), 해인사(法寶), 송광사(僧寶)를 3보사찰(三寶)이라 한다.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불보(佛寶),말씀(法)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법보(法
寶), 보조국사(知訥) 이래 열여섯분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승보(僧寶) 등.
불 법 승 삼보는 불교의 요체로 각 사찰의 한 부분을 특별히 강조하여 삼보라 한 것이다.
3보, 4대사찰은 예외 없이 신라시대에 창건된 고찰,대찰들임에는 틀림 없지만 강점기의
일제는 왜 건봉사(乾鳳寺)를 3보에 더하여 4대사찰이라 했을까.
아무튼 이조7대 세조가 원당(願堂)으로 삼았으며 소실되기 전에는 3.183칸의 거대사찰
이었고, 9개말사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였다.
6.25동란 전만 해도 본찰 642칸과 124칸의 18개 부속암을 거느렸던 절이다.
건봉사가 위치한 산은 해발 907.9m(911m?) 건봉산이다.
그런데도 왜 '금강산 건봉사'라 했을까.
금강산 줄기에 있다는 뜻인가.
양구의 가칠봉처럼 1만 2천봉중 하나라도 걸려 있는가.
부석사(경북 영주)의 뒷산은 봉황산이다.
가까이는 소백산이 있으나 멀리 있는 산, '태백산 부석사'다.
건봉사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되는가.
건봉사의 치아사리는 임란 때 통도사에서 왜군이 강탈했다가 사명대사에 의해서 환국,
봉안하게 되었다는데 왜 본래의 자리(통도사)로 가지 않았을까.
휴정 서산대사(休靜西山大師/1520~1604)의 제자 유정 사명대사(惟政泗溟大師/1544~
1610)는 의승병(義僧兵)을 모집해 스승(서산대사)의 휘하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노쇠한 스승을 이어서 승군을 통솔해 큰 공을 세운 승장이다.
그가 이 사찰에서 의승병을 기병한 인연으로 회수한 사리를 이 절에 모시게 한 것일까.
불보사찰 통도사 또한 다다익선일 텐데 건봉사에 그대로 두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스페인의 레콘키스타(Reconquista/국토회복운동)는 7c반(718~1492)이 넘는 기독교
군대와 이슬람과의 전쟁을 말한다.
1096년에 시작된 십자군(croisade) 전쟁은 명분이야 어떠하던 13c말까지 이어졌다.
불교는 기독교와 이슬람에 비해 배타적 독선을 지양하고 엄격하고 철저한 살생금지의
계율로 인함인지 교리와 신앙 문제로 이렇다 할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질 때 호국불교는 힘을 발휘했다.
국가주의, 군국주의를 위해 동원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서산대사가 그랬고 그의 제자 유정(사명대사)과 처영(處英)도 그랬다.
나라의 위기가 진정됨에 그들은 홀연히 속세를 떠났다.
제의하는 온갖 영화를 뿌리치고.
그들은 전쟁윤리, 종교인의 윤리적 갈등 등에 어떤 답을 주고 있지 않은가.
어느 과학자의 감동적인 말"과학은 국경이 없으나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의 과학과
과학자를 종교와 종교인으로 대치해 보면 어떨까.
"종교는 국경이 없으나 종교인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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